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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망하는 확실한 법칙 혼군 #19: 우문태‧우문옹의 업적을 탕진한 북주(北周)의 우문빈 <U>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3년02월03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23년01월21일 15시02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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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서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

 

<136> 고연종의 황제등극(AD576)​

 

고위가 업으로 가고 나서 진양을 지키던 안덕왕 고연종은 주변으로부터 황제의 자리에 오르라는 독촉을 많이 받았다. 

 

  “ 대왕께서 천자가 되지 않으시면

    여러 사람들이 대왕을 위해 목숨을 버리려 하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었다. 무능하고 무책임한 황제 고위는 업으로 내뺐지만 업도 안전하다는 보장이 없었다. 또 북주에 항거할 군사를 모으기 위해서는 천자라는 권위가 꼭 필요했다. 고연종은 어쩔 수 없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고 선언했다.

 

  “ 무평(고위의 연호)이 연약하여 

    정치가 환관에서 비롯되고

    빗장을 부수고 달아난 곳을 모르는 형편이 되었다.

    왕공과 경사에 외람되게 추대 받아 보좌를 계승하고자 하노라.”

 

고연종은 창고를 열고 궁궐에 있는 후궁과 미녀들도 마찬가지로 여러 장수와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북제의 주군은 그 소식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 차라리 병주를 북주에게 주는 것이 더 낫겠다.

    안덕왕이 갖게 하고 싶지는 않다.”(AD576년 11월 14일)

 

11월 15일 우문옹이 진양에 도착했다. 고위는 11월 16일 업에 들어갔다. 주의군사는 구름처럼 진양성을 에워쌓았다. 고연종에게 충성을 바치려는 부하들의 필사적인 항전의 기세에 눌려 북주의 대군이 진양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우문옹은 거의 죽을 뻔하기도 했다. 고연종은 우문옹이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체 중에서 긴 수염(우문옹)DF 찾으라고 했으나 찾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번 전투에서 승리한 것으로 판단한 군사들은 술에 한껏 취하고 도취되어 정돈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우문옹은 전쟁을 계속할 생각이 없었는데 우문헌, 우문흔, 왕의 등이 재촉하는 것을 이길 수가 없어서  다음날 전투를 다시 개시했다.(AD576년 11월 17일) 진양성 동문을 함락시킨 북주군은 달아나는 고연종을 사로잡았다. 우문옹이 말에서 내려 고연종의 손을 잡자 뿌리치며 말했다.

 

  “ 죽을 사람의 손인데 어찌 지존을 가까이 하겠습니까.”

 

우문옹이 말했다.

 

 

  “ 두 나라 천자는 원망이나 미움을 가진 것이 아니라

    단지 백성을 위하여 온 것일 뿐이오.

    끝내 해치지 않을 것이니 두려워하지 마시오.” 

 

고연종의 옷과 모자를 돌려주고 그를 극진하게 예우하였다. 당옹 등 진양의 대신들도 모두 북주에 투항하였다.

 

고연종이 황제를 칭하면서영주(하북성 하간)자사인 고개에게 사신을 보내 사태가 수습되면 황위를 숙부인 고개에게 넘길 것이라고 약속했다. 고개는 신하로써 참람한 말을 했다고 하여 사신을 잡아 업으로 압송했다. 고개는 고담의 동생이므로 황제 고위와 고연종에게는 숙부였다.(AD576년) 

 


<137> 북주의 염탐꾼 이루겸과 고준(AD576년)

 

북주의 이루겸이 북제를 염탐하러 사신으로 왔을 때 이루겸의 참군 고준이 그 사실을 북제에 몰래 고해바쳤었다. 북제는 북주와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고준을 잡아 가두어 버렸다. 우문옹이 진양을 함락시키고 이루겸의 공을 치하하면서 업에 갇혀있던 고준을 불러왔다. 이루겸이 머리를 조아리며 그의 사면을 요청하였다. 우문옹이 이루겸에게 말했다.

  

  “ 경은 무리를 모아놓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아 부끄러움을 알게 할 수도 있지 않소?” 

 

이루겸이 말했다.

 

  “ 고준의 죄는 얼굴에 침을 뱉어서 질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문옹은 납득이 되지 않았지만 이루겸에게 처분을 맡겼다. 이루겸은 그 후에도 예전과 똑같이 고준을 대우했다. 

 

사마광은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비판했다. 즉, 큰 계획을 누설한 것으로 보면 고준의 죄는 역적에 해당되는데 이를 직접 처단하지 않고 이루겸에게 맡긴 것은 정치와 형벌의 요체를 잃은 것이라고 했다. 덕으로 원수를 보답하는 사람은 무엇으로 덕을 베푼 사람에게 보답할 것인가 라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루겸을 위해서라면 먼저 법과 형벌에 따라 고준의 죄를 먼저 바로 잡았어야 한다고 했다. 결국 사면해 주어 사사로운 명성으로 아름답기는 하나 공의는 아니라고 했다.    

 

 

<138> 모자라는 태자 우문빈, 대안없는 우문옹(AD576)

 

우문옹의 아들 우문빈은 한참 모자라는 인물이었다. AD576년 2월 우문옹은 열일곱 살 아들 우문빈에게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나아가 토욕혼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대장군 왕궤와 우문효백을 함께 보냈다. 물론 어린 나이이기도 하지만 워낙 게으르고 아둔한 우문빈은 모든 결정을 두 사람에게 맡기고 오로지 이기기만을 빌 뿐이었다. 여섯 달 뒤인 8월 우문빈의 토욕혼 정벌부대가 돌아왔는데 그 사이 우문빈은 군대 안에서의 난잡하고 무분별한 행동으로 군사들의 신망을 크게 잃었다. 우문옹은 그 소식을 듣고 태자 우문빈과 그의 측근 정역 등을 매질하고 모든 측근의 관직 명부를 삭제하도록 명령했다.

 

정영 무리들은 비록 아무런 관직을 갖지 못하게 되었지만 태자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면서 태자와 어울려 전과 똑같은 짓들을 자행했다. 정역이 물었다.

 

   ”전하께서는 곧 천하를 점거하시겠지요?“

정역이라는 인물은 북위의 호태후의 정부로 호태후와 함께 북위 숙종을 독살했던 정엄의 손자뻘 되는 사람이다. 태자는 정역의 그 말에 은근히 즐거운 생각에 잠겼다.

 

우문옹은 태자를 매우 엄격하게 가르치고자 했다. 조회에서는 항상 신하로써의 예를 깍듯이 지키도록 했으며 과음하는 버릇을 항상 엄중히 꾸짖었다. 잘못을 저지르면 가차 없이 종아리를 내려치곤 했다.

 

   ” 옛날부터 태자 중에서 폐위된 사람이 몇이나 되는 줄 아느냐?

     너 말고 다른 아들들도 왜 세우지 못한단 말이야?“

 

우문옹은 동궁관속에게 명을 내려 태자의 모든 행동을 기록하여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태자는 엄한 아버지의 명을 따르는 척 하면서 술을 자제하고 거친 행동을 숨겼다. 왕궤는 하약필에게 이렇게 말했다.

 

   ” 태자는 반드시 무거운 짐(황제)을 질 재목이 아닙니다.“      

 

하약필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은 하고 황제에게 그것을 진언하기를 권고했다. 왕궤가 나중에 조용히 황제에게 말했다.

 

  ” 황태자가 어질고 효성스럽다는 말을 듣지 못하니

    걱정스러운 것은 폐하의 집안일을 완성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짧고 어리석으니

    폐하께서 항상 문무가 출중하다고 칭찬하시던 하약필에게도 자문을 하시지요.“

 

황제가 하약필을 불러 그 문제를 물었다. 하약필은 이렇게 대답했다.

 

  ” 황태자가 춘궁(=동궁)에 머물면서 덕망을 기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허물이 있다는 말은 금시초문입니다.“

 

왕궤가 그 말을 듣고 하약필을 나무랐다.

 

  ” 평생 말하는 것이 앞뒤가 다르지 않았는데

    어찌 오늘은 내게 한 말과 다른 말을 하신거요?“

 

하약필이 왕궤에게 이렇게 대꾸하며 말했다.

 

  ” 이것은 공의 허물이요.

    태자라는 자리는 나라의 다음을 계승할 자리 아니요.

    어찌 쉽게 폐하에게 그 말을 꺼내겠소.

    만에 하나 차질이 생기면 나만이 문제가 아니라 가문 전체가 멸족되는 일 아니요. 

    나는 공이 은밀하게 그 문제를 해결하리라 여겼는데 

    어찌 황제에게 공공연하게 그 문제를 드러내고 말았소.“

     

왕궤가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입을 열었다.

 

   ” 나는 오로지 국가의 미래를 생각할 뿐이었지

     개인의 운명은 전혀 고려에 두지 않았던 것이요.

     지난번 경과 그 문제를 예기한 것은 실로 잘못된 것이요.“

 

얼마지 나지 않아 궁궐에서 연회가 열렸을 때 왕궤는 황제의 수염을 뽑으면서 대담하게 이렇게 말했다.

 

   ” 사랑스럽고 훌륭한 노인(황제라는 말)이시지만

     다만 후사가 약한 것이 원망스럽습니다. “

 

왕궤가 술에 취해서 하는 주사라고만 여길 뿐 개의치 않았다. 황제는 며칠 전 태자의 행동에 큰 잘못이 없다고 보고했던 우문효백을 불러 따졌다. 

 

   ” 공이 항상 말하기를 태자에게 큰 잘못이 없다고 했는데

     왕궤가 저런 말을 하는 것을 보면

     공이 거짓말을 한 것 아니요?“

 

우문효백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 부자 사이의 관계는 다른 사람들이 말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합니다. 

     신은 폐하께서 태자에게 쏟는 정이 깊어

     정녕 끊지 못하실 것을 알기에

     그렇게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문옹은 우문효백과 왕궤가 태자에 대해 부적격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마음 깊이 이해했다. 한참을 묵묵히 있다가 말했다.

 

   ” 공은 그 일(태자 교육문제)을 공에게 맡겼으니 

     그것에 힘쓰도록 하라.“

 

왕궤가 갑자기 나서서 외쳤다.

 

   ” 황태자는 사직의 주군이 아직 아닙니다.

     보륙여견(양견의 이름)의 얼굴 모습을 보면

     배반할 인상을 가졌습니다. “  

 

왕궤는 양견이 반란을 일으킬 것과 태자 우문빈이 그 문제를 해결할 역량이 없다는 것을 이미 꿰뚫고 있었다. 황제는 이렇게 말했다.

 

  ” 천명을 가져갈 사람이라면 

    누가 그것을 막을 수 있다는 말인가?“

 

황제는 왕궤와 우문효백의 걱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문빈의바로 아래 동생 한왕 우문찬은 우문빈보다 더 용렬하고 부족했더 다른 아들들은 아직 어렸으므로 바꿀 수가 없었다. 양견은 왕궤의 발언을 전해 듣고 소름이 돋았다. 앞으로 철저하게 속마음을 숨기고 행동을 조심하기로 다짐했다. 

 

 

<139> 북제 황위를 고항에게 선양(AD577)

 

북제 주군 고위는 업에서 군사를 모았지만 욕심이 많아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물을 내놓지는 않았다. 곡률효경은 주군이 직접 나서서 군사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격려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고위는 피식 웃기만 할 뿐 그럴 줄도 몰랐고 또 그럴 의향도 없었다. 주군이 절박함이 없으니 군사들도 전쟁의사가 있을 까닭이 없었다. 북삭주로 도망가던 태후와 태자도 업으로 돌아왔다.  

 

진양을 접수한 우문옹은 창고의 물자들을 전부 풀어서 장수와 병사에게 나누어 주었다. 고연종에게 업을 공략할 방법이 무엇이냐고 묻자 고연종이 대답했다.

 

  ” 그것은 나라를 잃어버린 신하가 답할 것이 못 됩니다.“

 

그래도 재촉하자 고연종이 말했다.

 

  ” 만약 임성왕 고개가 업을 점거하고 있다면 신은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만약 주군이 지키고 있다면 폐하의 병사는 

    칼에 피를 묻히지 않아도될 것입니다.“

 

우문옹은 동생 우문헌을 앞세워 업으로 진격했다.(AD576년 12월 29일) 

 

 

<140> 업 함락과 이덕림을 얻음(AD577)

 

북주의 대군이 업을 향해 내려오는데 북제 주군 고위는 막을 방법을 몰랐다 주변에 물어보면 사람마다 의견이 다 달랐을 뿐 아니라 대부분 고관들은 틈을 타서 빠져나가 북주로 투항하고 있었다. 상서령 고원해가 주청하여 태자 항에게 황위를 선양하였다. 8세짜리 황제였다.

 

AD577년 1월 18일 북주의 대군이 업성 밑까지 밀려와 포위했다. 북제의 상황 고위는 100여기를 거느리고 빠져나와 동쪽으로 도망갔다. 업성은 모용삼장에게 맡겼는데 힘이 달려 우문옹에게 잡히고 말았다. 우문옹은 모용소종을 크게 예우하였다. 업성의 모든 장수들이 투항하여 우문옹은 1월 20일 업성으로 들어갔다. 업으로 들어간 우문옹은 북제 중서시랑 이덕림의 집으로 사람을 보내 초빙하는 뜻을 밝히고 위로하며 타이르면서 말했다.

 

  ” 내가 북제를 평정하여 얻은 이익이란 오직 경을 얻은 데 있다.“

 

이덕림을 궁으로 데리고 온 뒤 내사 우문앙을 시켜 북제의 풍속, 실정 그리고 인물에 대해 세세하게 물어서 파악했다. 그런 다음 이덕림을 돌려보냈다. 이덕림은 양견의 수나라 조정에서 중책을 맡게 된다. 

 

낙주(낙양)자사 독고영업이 북주에 항복하면서 북제의 영토는 절반 이상이 북주에게 흡수되었다. 고위는 1월 21일 제주(산동 제남)으로 들어갔는데 이 날 고항은 황위를 고개에게 넘겼다. 그 다음날 고위는 호태후를 제주에 남겨두고 고아나굉에게 제주관을 지키도록 하고는 목황후, 풍숙비, 고항, 한 장란, 등장웅 등을 이끌고 동쪽 청주로 도망갔다.   

 

청주에 도착한 고위는 남쪽 진나라로 도망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고아나굉이 은밀히 북주 군대를 부르고 북제의 주군을 잡아 산 채로 압송하기로 약속한 터였다. 고아나굉은 거짓으로 고위를 속이며 말했다.

 

  ” 북주의 군대는 아직 멀리 있습니다.

    이미 다리와 길을 불 질러 다 차단해 두었습니다.“

 

고위는 이 말을 믿고 느긋하였다. 북주의 군대가 제주고개에 당도하자 고아나굉이 즉시 항복했다. 북주 군대가 쏜살같이 청주로 달려가 고위를 생포했다.(AD577년 1월 25일) 잡힌 장소는 정확히 남등촌(산동성 임구현 서남)이었다. 고위는 후, 비 및 어린 아들 등 10명을 데리고 금 주머니를 말안장에 달고 가다가 잡혔다. 호태후와 나란히 업으로 압송되었다.   

        

북주의 주군 운문옹이 조서를 내렸다.

 

  ” 고 곡률광과 최계서 등에게 시호를 내리도록 하고 장사를 다시 고쳐서 지낼 것이다.

    그 자손들에게는 마땅한 관직과 전지와주택을 내리도록 하라.“

 

우문옹이 말했다.

 

  ” 곡률광이 있었더라면 내가 어떻게 업에 도착할 수 있었겠는가!“

 

AD577년 2월 3일 우문옹은 북제 태극전에 올라 모든 북제 관리와 장수를 불러 잔치를 베풀었으며 차이를 두어 상과 작위를 내렸다. 북제 상황 고위가 업에 도착하자 계단을 내려가 영접하였으며 예와 격식을 갖추어 빈객으로 대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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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3년02월03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23년01월21일 15시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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