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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혼군 #11:3대(代)만에 최강국 전연을 무너뜨린 모용위(F)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09월18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20년08월17일 14시12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26) 모용황의 고구려 공략(AD342)

 

AD342년 겨울 모용황은 동진 조정으로부터 정식으로 연왕의 직책을 내려 받자 수도를 극성(금주)에서 약 100KM 서북쪽에 있는 용성(조양)으로 옮겼다. 그리고 전국에 사면령을 내렸다. 서형 모용한이 이렇게 건의했다.

 

“ 지금 우문씨 들의 세력이 매우 강성해졌습니다.

  자리를 찬탈한 우문일두귀가 난폭하고 실정하므로 

  백성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위에 용렬하기 짝이 벗고 아둔하며 

  장수들 또한 형편없는 무리들입니다.

  방위시설이 엉망이고 군사들의 대오나 기강도 해이하기 짝이 없습니다.

  소신이 그 나라에 있으면서 지리를 제대로 새겨 두었습니다.

  비록 갈족(후조)에 의지하고 있지만 난이 일어날 때

  실제로 구원해 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지금 거사 하시면 백번거사에 백번 승리일 것입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고 

  그들 또한 우리를 훔쳐보려는 생각을 한 시도 버린 적이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우문씨를 친다면 다음이 자신들일 것이라고 알고 

  곧바로 우리 후미를 공격해 올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가슴 속과 뱃속의 걱정이오니 

  의당 이들부터 먼저 쳐야 할 것입니다.

  그들의 세력을 보건대 한 번 거병이면 반드시 이길 수 있습니다.

  우문씨들은 오직 지키기만 하는 오랑캐들이니 

   이 번 공격을 틈타고 후미를 공격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먼저 고구려를 빼앗은 다음에 우문씨를 치고 나서

   군대가 강성하고 백성이 부요해 지고 나면

   중원 사해를 도모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모용황이 모용한의 대범한 계략에 찬사를 보냈다.

 

“ 훌륭한 말이요.”

 

장차 고구려를 치려고 했는데 가는 길은 두 길이었다. 하나는 북쪽으로 평원을 가로지르는 길이었고 다른 한 길은 남쪽 길로써 험하고 가파르면서 위험했다. 모두 들 북쪽 길로 가자고 했다. 모용한은 북쪽 길은 방비가 삼엄할 것이므로 남쪽 길로 가자고 했다. 다만 일부 군사를 나누어 북쪽으로 보내어 고구려군의 방어를 분산시키는 것은 좋은 계략이라고 말했다. 모용황도 모용한의 생각을 수용했다. 11월 모용황이 직접 강병 4만을 이끌고 남쪽 길로 나섰고 모용한과 모용패를 선봉으로 세웠다. 별도로 장사 왕우와 군사 1만 5천을 북쪽으로 보내 고구려로 향하게 했다.

 

고구려에서는 고구원왕이 고소가 5만 군사와 동생 고무를 파견하여 북쪽의 왕우 군사를 대적했다. 고소는 직접 노약한 병사를 이끌고 남쪽 길에서 막았다. 모용한이 먼저 도착하여 고소와 싸웠고 곧바로 모용황의 대군이 들이닥쳐 뒤를 받쳐 주었다. 과거 후조의 장수였던 좌상시 선우량이 자신을 살려 준(AD338년) 모용황에게 은혜를 갚겠다면서 몇 명의 기병을 이끌고 고구려 진영으로 쳐들어갔다. 선우량 무리가 고구려 진영을 크게 휘젓는 동안에 고구려군은 혼란에 빠졌고 사기도 많이 떨어졌다. 모용황의 군대가 고구려군을 무너뜨리고 진격하여 수도 환도성에 들어갔다.   

 

고구려 고국원왕 고소는 단기로 달아났고 모여니는 고소의 처와 어머니를 사로잡았다. 모용황이 군사를 되돌리려고 하자 장수 한수가 말렸다.

 

“ 고구려 땅은 반드시 수비부대를 세워 두셔야 합니다. 

  지금 주군이 도망쳤고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졌지만 

  우리가 군대를 물리고 나면 저들은 다시 비둘기처럼 모여들어

  다시 세력을 키울 것이니 장차 걱정거리가 아닐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고소 아버지(미천왕)의 시체를 파헤쳐서 싣고 

  그 어미를 인질삼아 고소가 자신의 몸을 묶고서 항복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런 다음에 모두 풀어주는 정책이 가장 좋은 정책입니다.“ 

 

모용황은 한수의 말대로 미천왕의 묘를 발굴하여 시체를 싣고 모든 고구려 왕실 보물을 거두고 남녀 5만 호를 포로로 잡고서 환도성 궁실을 모두 불 태우고 파괴한 뒤 돌아갔다.  

 

(27) 고구려 고국원왕의 전연 복속(AD343)

 

다음 해 고구려 고국원왕 고소는 동생을 전연 수도 용성에  보내 신하를 자칭하면서 조현하고 수 천 개 보물을 바쳤다. 모용황은 고소의 아버지 시신을 돌려 보내주었지만 어머니는 인질로 계속 붙들어 두었다. 

 

우문일두귀는 재상 막천혼을 파견하여 전연의 변경을 침략했다. 제장들이 곧바로 반격하자고 했지만 모용황은 그냥 두라고 지시했다. 전연의 반응이 없자 막천혼은 겁을 먹은 것이라고 판단하고 술을 마시면서 사냥에 빠졌고 방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 그 틈을 타고 모용황은 모용한을 보내 공격하도록 했다 막천혼은 대패하고 겨우 목숨만 살아서 돌아갔다.(AD343)

 

대나라 탁발십익건의 처 모용씨(모용황의 누이)가 죽자 그는 또 다시 모용황에게 혼례를 요청하였다. 모용황은 말 천 필을 받고 딸을 주어 빙례를 치르게 했는데 탁발십익건의 태도가 매우 건방지고 장인어른에 대한 태도가 불손했다. 8월 모용황이 세자 모용준을 파견하여 탁발무리를 공격했다. 탁발십익건은 신부 얼굴도 보지 못하고 혼비백산 본국으로 도망갔다.    

 

 

(28) 모용황의 우문일두귀 정벌(AD344) 

 

모용황의 세력이 강성해지자 초조한 우문일두귀는 석호의 후조에 의지할 생각을 굳히고 명마 1만 필과 함께 망명와 있던 단료의 동생 단난을 잡아서 후조로 압송했다. 후조왕 석호는 단난을 죽이지 않고 오히려 그를 좇고 따르는 선비족 5천을 붙여 주어서 옛 단씨의 근거지였던 영지(하북성 천안)에 주둔하라고 명령했다.(AD343)   

 

모용황은 후조와 연대하려는 우문씨를 이 치마에 제거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좌사마 고후가 말했다.

 

“ 우문씨는 점차 강성해지고 있으니 지금 빼앗지 않으면 

  나라의 걱정거리가 될 것은 분명합니다.

  그를 정벌하시면 반드시 이기실 것이나

  충성스런 신하는 많이 다칠 것입니다.“

 

고후가 나가면서 다른 사람에게 말했다.

 

“ 내가 이번에 나가면 반드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충신은 자신의 안위를 피하지 않는다.“

 

모용한을 선봉으로 삼고 유패가 부관이 되었으며 모용군, 모용각, 모용패, 모여근 등이 군사를 나누어 세 길로 나아갔다. 고후가 집을 나서면서 그의 처 보기를 외면하면서 집사에게 집안일을 잘 처리해 주기를 부탁했다.

우문일두귀는 최정예장군 섭야간을 파견하여 모용황 군대를 맞아 싸웠다. 모용황이 사람을 보내 모용한에게 용맹스런 섭야간의 예봉을 피하라고 지시했다.  모용한이 이렇게 말했다.

 

“ 지금 제가 그 나라의 기둥과 같은 섭야간을 이기면 

  저들은 저절로 무너지게 되어있습니다.

  제가 알기로 섭야간의 명성은 다소 과장된 헛것입니다.

  맞붙어 싸우기 쉬운 존재입니다.

  괜스레 우리가 피하는 것같이 보여 저들의 사기를 높여 줄 이유는 없습니다.“

 

모용한이 직접 출정하여 적진에 부딪치자 섭야간이 몸소 나와 대적했는데 이 때 모용패가 측면에서 요격하여 섭야간 목을 베었다. 섭야간의 무리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우문일두귀는 북쪽 사막으로 달아나다가 길에서 죽었고 우문씨 세력들은 바람의 모래처럼 역사에서 사라졌다. 석호는 우문일두귀가 전연의 공격을 받자 후원군을 보냈지만 이미 우문일두귀가 격파도니 뒤였으며 석호의 지원군 또한 전연의 모용표에게 크게 격파 당했다. 모용황은 우문씨들의 축산물과 재물을 모두 몰수했으며 5천여 무리를 전국의 다른 지역으로 옮겨 정착시켰다. 고후와 유패는 이번 전투에서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29) 맹장 모용한의 죽음(AD344)

 

모용황의 서형 모용한은 대단히 명석하고 강단있는 사람이었다. 섭야간의 예봉을 피하라는 모용황의 지시에도 불구하고 선봉에 서서 섭야간의 목을 자르기도 했지만 모용황의 불필요한 요구도 따끔하게 거부한 사람이었다. 이 번 전투에서 모용한이 화살에 맞아 크게 부상당했다. 병석에 누워 오랫동안 나오지 못하였는데 점차 차도가 있자 재활 훈련 삼아 말을 타보고 활도 쏘아 보았다. 어떤 사람이 모용황의 승마 및 무예 수련행위를 보고서 모용황에게 고해 바쳤다.  

 

“ 병석에 있다고 조정에 나오지 않는 사람이 

  사사로이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것은 무엇인가

  변란을 일으키려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모용황이 한 참을 고민하다가 서형 모용한에게 사약을 내렸다. 재주도 많고 용맹스럽기도 하고 또 나이도 위인 서형이 부담이 많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약을 받아 든 모용한이 웃으며 말했다.

 

“ 내가 죄를 짓고 달아났다가(AD333) 다시 돌아왔는데(AD340)

  오늘 죽는 것도 이미 한 참이나 늦은 것이다.

  그러나 갈족 도적(석호)이 중원지역을 점령하고 있으니

  내가 국가를 위하여 천하를 통일하는 꿈을 이루지 못해 아쉽지만

  그 또한 남아의 운명 아니겠나! “  모용한이 사약을 받고 죽었다.   

   

(30) 전연의 충신 봉유(封裕)의 명간(AD345)

 

전연의 모용황은 가난한 농부들에게 왕실용 농지에 농사용 소를 빌려 주고는 10분의 8을 세로 거두었고 만약 자신의 소를 가지고 있는 경우에는 10분의7일 세로 거두었다. 기실참군 봉유가 편지를 올려서 간했다. 

 

“ 옛날에는 열에 하나를 세금으로 내는 것이 천하에 공정한 것이었습니다.

  위, 진의 혼탁한 시대 때에도 세는 10분의 6 이었고 

  소 있는 자들의 세 부담은 10분의 3 이었습니다.

  영가의 난(서진 팔 왕자 난 기간의 대혼란시대, AD307-AD312) 이후로

  해내가 다 부서진 것을 무선왕(모용외)이 덕으로 어루만지셔서 

  화족과 이족이 모두 우리나라로 몰려들어서

  호구가 열배가 되었으나 농사지을 땅이 없는 가호가 열에 서, 넛 이었습니다. 

  전하께서 왕업을 이으신 이후로 남쪽으로 후조를 꺾으시고 

  동쪽으로 고구려를 아우르시며 북쪽으로 우문씨의 영지를 다 차지하셨으니  

  국토는 3 천리가 넘고 백성들의 가호는 10 만호나 늘어났습니다.  

  이제는 왕실 소유의 땅을 다 없애시어 새로 편입된 백성들에게 나누어야 합시다.

  소를 갖지 못한 백성들에게는 당연히 관에서 무상으로 소를 빌려주실 것이지

  더 높은 세금을 매기는 것은 마땅치가 않습니다.

  전하의 소를 전하의 백성들이 사용하는 데 왜 세금을 더 물려야 하는 것입니까?

  이렇게만 한다면 우리 깃발이 남으로 향하는 날

  누가 단사호장(簞食壺漿, 군사를 위한 밥그릇과 국그릇)을 들고서 

  왕의 군대를 영접하지 않겠습니까?

  백성들이 밭을 갈지 않으면 식구들이 다 굶을 터인데

  놀고먹는 사람의 숫자가 수 만 명인데 

  이들에게 들어가는 누가 공급할 것입니까? 

  지금 관청에는 쓸데없는 용관들이 너무 많습니다.

  재주가 없는 사람들이면 응당 도태시켜야 합니다.

  이익을 보고 장사하는 상인들도 일정한 숫자로 묶어 두어야 합니다. 

  공부하는 사람들도 3년 동안 성과가 없으면 

  모두 농사짓는 곳으로 보내야 합니다.

  전하께서는 성덕과 영명하심으로 추요(芻蕘, 꼴 베는 사람, 즉 백성)를 살피시지만

  어긋나는 말을 했다고 대벽으로 판결된 참군 왕헌과 대부 유명을  

  비록 전하께서 용서해 주셨다지만 아직도 면직 금고에 처해져 있습니다.

  무릇 간쟁하는 말을 찾으신다고 하면서도 

  곧은 말을 한 사람에게 죄를 주고 있으니 

  이는 남쪽 월로 보낸다고 하면서 북쪽으로 가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우장사 송해라는 사람이 아미구용(阿媚苟容,아첨)하여

  가벼운 사람들만 채용하면서 임금의 귀와 눈을 가리고 있습니다.

  대단히 충성스럽지 못한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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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0년09월18일 17시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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