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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흥망의 교훈 #19 : 거대한 기마제국 북위(Y)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12월11일 17시05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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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133> 삼인방 유등-후강의 해강생 축출(AD521)

 

원차와 유등이 호태후를 유폐할 때 우위장군 해강생이라는 사람이 참여를 했으므로 그 공으로 무군대장군이 되었었다. 해강생의 아들 해난당은 후강의 딸을 아내로 삼았으므로 서로 사돈이 되었다. 후강의 딸은 원차의 여동생의 남편이었으므로 원차와 후강과 해강생은 서로 혼인으로 엮인 사이였다.    

 

해강생은 무인 출신으로써 말씨가 거칠고 성격이 급변했으므로 원차가 조금씩 그를 꺼렸는데 그것을 알게 된 해강생도 원차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위 황제 원후가 갇혀있는 모후 호태후를 뵙고 연회를 열었는데 해강생이 황제의 곁에서 눈짓으로 호태후에게 위협을 가하면서 곧 죽일 것 같은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날이 저물어 호태후가 황제에게 오늘은 자신의거처인 선광전에서 묵을 것을 요청했으나 후강이 못하도록 말렸다.

해강생이 나서서 황제는 호태후의 아들이니 아들이 어머니를 따라 어디로 가든 무슨 상관이냐고 외쳤다. 결국 황제는 호태후를 따라 선광전으로 들어갔다. 해강생이 그 기회를 타고 호태후를 살해하려했으나 원차에게 붙잡혀서 쇠사슬에 묶였다. 원차와 그 측근 가찬이 호태후를 설득하여 안심시키고 황제를 모시고 황궁으로 돌아왔다. 해강생과 그 아들 해난생을 즉시 사형에 처했는데 원차와 후강이 조서를 고쳐서 해강생만 죽이고 후강의 사위 해난당은 감형하여 유배시켰다. 그러나 해난당 또한 원차가 보낸 사람에게 죽임을 당했다.(AD521)

 

이 사건으로 해강성 세력이 몰락하고 정권은 원차와 유등과 후강이 장악했다. 유등은 사공이 되었으며 모든 고관들이 아침에 유등의 집에 가서 얼굴을 살핀 뒤에 조정에 나아갔다. 후강은 시중과 거기대장군에 의동삼사가 내려졌다.(AD522)

 


<134> 유등의 죽음과 원차의 축출(AD523)

 

AD523년 3월 61세 유등이 노환으로 죽었다. 양자가 40여 명이었는데 상복을 입고 참여한 자는 100명이 넘었다. 조정의 대신들이 모두 장송에 참여하여 길을 메웠다. 유등은 AD508년부터 AD511년까지 3년에 걸쳐 황제 원후의 아버지 원굉을 위하여 용문에 석굴을 파서 조성하려 했으나 완공하지는 못했다.    

 

호태후를 유폐시키고 나서 영군장군 원차는 항상 황제의 곁에서 시중을 들었는데 아첨과 교언영색으로 황제의 비위를 잘 맞추었으므로 황제가 그를 깊이 믿게 되었다. 정권을 잡자 그동안의 신중함과 겸손함을 던져 버리고 술과 호색을 즐기면서 탐욕했고 또 뇌물을 받고 인사를 전횡하면서 국가의 기강이 크게 무너졌다. 원차의 아버지 경조왕 원계 또한 아들의 권세를 업고 청탁을 하고 뇌물을 받아 재산을 불렸다. 

 

원계와 원차 부자의 원성이 하늘을 찌르자 우충의 동생 무위장군 우경이 원차를 몰아낼 모의를 주도하였다. 원차는 바깥 외직으로 쫓겨나 회황(하북성 장북현) 진장으로 밀려났다. 유연이 쳐들어 와서 반란을 요구하는 통에 우경도 피살되고 여러 진장도 그 지역 이민족 파륙한발릉이라는 사람이 주도한 반란군의 칼을 맞고 죽었다.     

 

 

<135> 최광 사망(AD523)

 

최광이 병으로 죽었다. 그는 온화하고 낙관적이고 종일토록 밝은 표정을 잃지 않았으며 일찍이 화를 낸 적이 없었다. 우충이나 원차가 권력을 휘두를 때에도 중심을 잡고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았으므로 모두 존경하는 마음을 가졌으며 배식과 곽조와 원역이 권력다툼에서 밀려 죽음을 당했을 때에도 휩싸이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잘 지켰다. 그래서 사람들은 최광을 한나라 때 재상으로 있으면서 외척이 정권을 농단할 때에도 직언을 하지 않고 살아남은 장우나 비위를 잘 맞추며 여섯 황제를 모신 호광에 비유하기도 했다.    

 

<136> 위의 북토 정벌과 이주영의 등장(AD524)

 

AD524년 3월 위나라 조정에서는 북쪽에서 이민족을 규합하고 반란을 일으킨 파륙한발릉을 토벌하기 위해 임회왕 원욱을 도독북토제군사로 삼고 군사를 일으켰다. 4월에는 그 지역 사람 혁련은이 파륙한발릉에게 호응하였다. 여러 이민족들이 힘을 합하여 위나라 진영을 공격하므로 원욱의 군대가 여러 곳에서 패배했고 안북장군 이숙인도 패배했다. 위나라 조정에서는 원욱을 파직하고 그 대신 70 고령의 이숭을 보냈다. 이숭은 북토대도독으로 임명되고 최섬은 무군장군, 원심은 진군장군이 되어 북정에 나섰다. 

 

이숭이 대군을 이끌고 북쪽으로 출정하는 동안 위의 서쪽 진주(천수 지역)에서는 막절대제라는 사람이 자사 이언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또 남진주자사 최유 또한 성안의 반란 무리들에게 죽었고 그들은 막절대제에게 가담했다. 조정에서는 옹주자사원지를 보내 토벌하게 했고 이어서 이부상서 원수의를 서도행대로 삼아 서쪽토벌의 총책임을 맡겼다.   

그러는 한편 북쪽 이민족들이 반란을 일으킨 주요 원인이 변경사람들에 대한 대접이 박하다는 이숭의 판단을 들어 변경주민들을 모두 평민으로 인정해 줌과 동시에 그 지역을 여러 진을 주로 승격시켜주었다. 그러나 이미 이 지역주민들이 모두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조정에서 파견하는 관리들이 현지에 가는 도중에 모두 길이 막혔다. 이곳으로 쫓겨 와있던 원차는 유랑민들을 규합하여 환대하고 조정에서 온 조서를 보여주며 지극히 우대하였다. 

 

이 당시 수용(산서성 삭주지역)에는 이주영이라는 사람이 지역 토호로써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는 신묘하고 지혜가 깊었으며 결단력이 뛰어나고 또 사리판다니 분명하여 큰 무리가 그를 따랐다. 그의 조상 때부터 위나라 조정이 북쪽으로 군대를 보낼 때마다 성심성의 물자와 병력을 지원해 보냈으므로 북위조정이 매우 고마워했다.(AD524)

 

 

<137> 원법승의 반란(AD525)

 

북위 서주자사 원법승은 원창에게 충성하면서 붙어서 승승장구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원차가 실권을 잡고서 교만하고 포학해지자 장차 그 화가 자기에게 미칠까 두려워 반란을 일으킬 생각을 품고 있었다. 마침 조정에서 중서사 장문백이 서주 치소 팽성(강소성 서주시)으로 오자 그를 붙들고 반란에 동참할 의사가 있는지 물었다. 장문백이 송백처럼 절개를 지키겠다고 하자 그를 그 자리에서 죽였다. 그리고 행대 고량을 암살시킨 다음 스스로 황제를 칭하면서 조정에 반란을 일으켰다. 원현화가 같은 황족으로 원법승과 대항하여 싸우다가 붙잡혔다. 원법승은 그를 설득하여 반란에 동참시키려 했으나 거절하자 마침내 그 또한 죽엿다. 북위 조정이 즉각 군대를 파견하자 원법승은 양나라에 투항했다. (AD525년 1월)

 

   

<138> 양의 위나라 영토 잠식(AD525)


위나라는 북쪽 뿐 만 아니라 남쪽으로부터도 위협을 받았다. 양나라에서는 AD524년 6월에 예주자사 배수를 독정토제군사로 임명하여 위나라 정벌에 착수하였다. 9월 성경준이 수릉(강소성 휴령)을 위로 부터 뺏고 조경열은 형산(안휘성 회원)을 포위하였다. 배수는 기병 3천으로 수현을 습격하였다. 위 조정에서는 하간왕 원침을 보내 수양을 구원했는데 양나라 군사와 일진일퇴를 거듭하였다. 서쪽으로 출정했던 원수의가 풍병에 걸려 제왕 소보인으로 대체했다. 그 사이 북쪽 영주(요녕성 조양)자사 이중준이 주민 유안정과 취덕흥에게 피살되었고 위나라는 급히 노동을 유쥬자사로 보내 수습을 하려 했으나 번번이 취덕흥에게 패하고 돌아왔다. 

 

 

<139> 호태후의 부활과 원차 제거(AD525)

 

AD523년 막강한 실세 유등이 사망하면서 호태후 및 황제 주변에 대한 경계는 매우 느슨해졌다. 원차 또한 AD519년 정권을 잡은 이후 몇 년이 지나면서 상황을 느긋하게 생각했다. 원차의 측근들이 경계를 늦추면 안 된다고 건의했지만 원차는 듣지 않았다. 호태후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호태후는 비구니가 되어서 절로 들어간다는 핑계로 삭발을 하겠다고 했다. 황제는 호태후 곁에서 절로 들어가지 말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그 틈에 타고 호태후는 황제를 붙들고 원차를 제거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황제는 내색을 전혀 하지 않고 원차에게 호태후가 갇힌 것을 매우 분해하고 있으며 장차 절로 들어가 비구니가 되고 싶어 한다고 말했다. 원차는 황제의 말이 진솔하다고 느끼고 전혀 의심을 하지 않으면서 그렇게 하는 것을 허락했다. 원차는 원법승을 추천하여 서주자사로 삼았는데 원법승이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황제나 호태후에게 면목이 없기도 했다.    

   

당시 승상 원옹은 비록 지위는 원차보다 높았으나 실권이 거의 없는 허수아비였으므로 불만이 가득차 있었다. 호태후와 황제가 함께 낙수를 거닐자 그들을 자기 집으로 초치하여 원차를 제거할 모의를 완성했다. 호태후는 원차에게 물었다. 

 

  ” 그대가 반란의 뜻이 없다면 

    연군장군 직을 내놓고 정치를 보필하는 것이 더 낫지 않겠소?“

 

원차가 황급히 두려워하며 관을 벗고 영군장군직을 해임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황제는 원차를 상서령, 시중으로 임명하여 병권을 벗게 하였다. 원차는 비록 병권을 벗었지만 정권을 장악하고 있으므로 별 문제는 없을 것으로 생각하고 느긋해 있었다. 호태후는 결단의 시기를 저울질하고 있었는데 시중 목소는 거사를 서둘러야 한다고 호태후를 재촉했다. 이 대 황제의 애첩 중에 반빈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반빈은 울면서 원차가 자신 뿐 아니라 황제까지도 해치려한다고 호소했다. 황제가 그 말을 믿고 원차가 자려고 나간 사이에 원차의시중직을 해임하고 입궁을 금지시켰다. 호태후가 다시 섭정을 시작하면서 원차를 서민으로 강등시키고 죽은 유등은 관작을 모두 없애버렸다. 유등의 관을 파서 뼈를 다 부수어버리고 가산을 적몰시켰으며 그의 양자들을 모두 죽였다.

 

원차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이 많았으나 그의 무리들이 세력이 만만치 않았으므로 원차를 안심시키는 뜻으로 후강을 영군장군으로 임명하였다. 그 후 곧바로 후강을 기주자사로 내쫓은 다음 그가 부임지 기주에 도착할 때 쯤 사람을 보내 죽였다. 원차의 측근 가찬도 마찬가지 방법으로 제주자사로 내보낸 다음 임지에서 죽였다. 원차는 호태후의 여동생의 남편이었으므로 죽이지는 않고 평민으로 그냥 두었다.(AD525)

 

죽은 임성왕 원징의 아들 원순이 원차에게 핍박을 받아 외지로나가 있었는데 호태후가 그를 불러들여 시중으로 삼았다. 원순은 원차의 처가 호태후 곁에 앉아잇는 것을 보고 물었다.

 

  ” 폐하(호태후)께서는 어찌 여동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천하 사람들의 원통함을 풀어주지 못하고 계십니까?“

 

호태후는 말없이 잠자코 있었다. 다른 날 호태후는 시종들에게 유등과 원차가 철권을 요구했지만 주지 않았음을 자랑스럽게 말했는데 중서사인 한자희라는 사람이 말했다.

           

  ” 일은 죽일 것이냐 말 것이냐에 달려있는 것이지  

    철권을 줄 것이냐 아니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옛날에 주지 않았어도 지금은 죽여야 할 때인데

    왜 오늘날 풀어주고 죽이지 않습니까?“

 

태후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 무렵 원차가 지방 6진의 이민족을 규합하여 정주에서 반란을 획책한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원차의 친필 서신도 있었다. 호태후가 미적거리는 동안 대신들과 황제마저 독촉하자 호태후는 드디어 결단하여 원차와 그의 동생 원과에게 죽음을 내렸다. 

 

<140> 강단있는 원순의 직언(AD525)

 

정권을 새로 잡고 부활한 호태후는 화려한 화장을 하고 자주 바깥으로 행차를 나갔다. 원순이 여러 신하들이 듣는 가운데 호태후에게 말했다.   

 

  ” 부인은 지아비가 죽으면 스스로 미망인이라 하면서

    치장을 줄이고 색깔 없는 화장을 하여 신중함을 보여야 한다고 햇습니다.

    어찌하여 폐하의 어머니로써 천하의 어머니로 군림하시면서 

    불혹의 나이가 넘으셨는데 치장함이 지나치시니

    어찌 후세에 모범이 되겠습니까?“

 

 태후가 부끄러워하며 궁을 돌아온 즉시 원순을 불러 질책했다.

 

  ” 천리 만 곳에 있는 그대를 징소했는데

    어찌 나를 만인이 보는 가운데 모욕을 준 것이요?“

 

원순이 당당하게 말했다.

 

  ” 신하들이 비웃는 것은 수치스럽게 생각하시면서

    어찌 천하 사람들이 비웃는 것은 생각하지 못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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