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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흥망의 교훈 #19 : 거대한 기마제국 북위(H)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08월14일 17시05분
  • 최종수정 2020년08월15일 17시2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6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37> 황하이남 땅에 대한 유송과의 갈등과 최호전략(제2차 위송전쟁 AD430) 

 

지금 북위의 탁발도가 점령하고 있는 황하 이남 회수 이북(지금의 하남성 남부)의 땅은 원래 동진과 이를 이어받은 유송의 땅이었다. 이 땅을 북위가 차지한 것은 7년 전인 AD423이었다. 새로 황제가 된 유송의 유의륭은 북위에 사신을 보내 돌려달라고 점잖게 요구했다. 

 

“ 황하 이남은 송의 땅이니 돌려 주셔서 옛 국경을 회복하여 주십시오.”

 

탁발도가 이 말을 듣고 격분했다. 사신에게 이렇게 호령했다.

 

“ 내 태어나 머리가 마르기도 전부터 그 땅은 우리 땅이었다.

  무슨 망칙한 소리를 지껄이는 것인가?“  

 

이제 북위와 유송의 전쟁은 불가피해졌다. 황하 이남을 방어하는 북위의 장군들은 선제공격을 제안했다. 조정의 대신들도 찬동하는 분위기였다. 최호가 나서서 반대했다.

 

“ 첫째, 그 지역은 덥고 습하여 초목이 매우 무성한 지역입니다. 

       우리 주력부대 기병의 진군에 매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둘째, 이미 엄중한 방어체계가 되어있으니 쳐들어온들 완벽하게 방어가 됩니다.

  셋째, 선공으로 깊이 들어가면 전쟁이 오래 계속되면 군량 조달이 어렵게 됩니다.

       결국, 선제공격으로는 승리하기가 어렵습니다. 

  저들이 먼저 쳐들어오면

  첫째, 피로하기를 기다린 다음에

  둘째, 가을에 말이 살찌고 초목이 시든 다음에 기병을 습격하는 것이 최상책입니다.

       남방지역 장수들은 북방 장수들의 지난 연연토벌의 공을 부러워하여 

       서두르자는 것일 뿐입니다 “

 

탁발도는 최호의 말을 믿고 선제공격 대신 수비에 치중하기로 하였다. AD430년 유송황제 유의륭이 도언지에게 군사 5만을 주어 황하로 나아가게 함과 동시에 왕중덕은 동쪽, 단굉은 서쪽으로 나누어 북진하게 하였다. 유송의 대군이 북침에 나서자 북위의 수비장군들은 한편으로는 북위로 망명 온 과거 동진의 황족 사마초지와 그의 휘하 장군들을 전선에 보내 유송군대의 내부반란을 유혹시키고 다른 한 편으로 유주지방의 강력한 기병지원대를 요청했다. 

 

최호는 그 계략에 반대했다. 동진의 망명인사를 앞세워 내부분란을 유도하면 유씨 군사들은 사마씨를 다시 세우려는 것으로 알고 더욱 분전할 것이니 좋은 계책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탁발도는 최호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자 최호는 여러 가지 음양설을 인용하며 남쪽에 대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반대했다.

 

“ 무릇 나라를 일으키는 군주는

  먼저 인사를 정비하고

  다음으로 지형의 이로움에 유의한 뒤

  천시를 잘 살피는 법이니 

  이렇게 하면 만 가지를 일으켜도 다 승리하게 됩니다. 

  지금 유의륭의 군대는 인사도 정비되지 않았고

  물도 말라 지형에 이롭지도 않으며(유송은 수군이 강했으나 물이 말라 불리)

  각종 재난이 이어 나타나니 천시도 이롭지 않습니다. 

  거병한다면 필패의 운세이니 우리가 군사를 일으킬 이유가 없습니다.“

 

탁발도는 끈질기게 전쟁을 요구하는 제장들을 묵살할 수가 없어서 유주의 기병과 사마초지를 황하로 출병시켰다. 도언지의 유송군대는 운하를 타고 산동성 동평까지 올라와 황하를 타고 거슬러 북상했다. 개봉과 정주를 지나 낙양까지 올라오자 미처 방어하지 못했던 북위는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 때 북위의 속국이던 하나라 혁련정이 동생을 보내 북위의 부성(섬서성 낙천현)을 공격함과 동시에 유송에 사신을 보내 협공한 뒤 북위 나라를 나누어 가지자고 제안했다. 유송이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이제 북위는 남쪽에서 유송이 서쪽에서 하나라가 침공하는 어려운 형국에 빠지게 된 것이다. 탁발도는 군사를 모아 혁련정을 먼저 칠 생각을 했다. 제장들은 남쪽의 유송군대를 두고 서쪽을 공격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반대했다. 최호가 나서서 말했다.

 

“ 지금 유의륭과 혁련정은 서로 공격을 미루고 있는 형편입니다.

  마치 달기 두 마리를 묶어두면 전혀 날 수가 없는 꼴이라 하겠습니다.   

  혁련정을 우선 공격하더라도 해가 될 것이 없습니다.

  먼저 혁련정을 쳐부순 다음에

  동관으로 내려가서 자리를 말 듯 기병을 진격시키면

  장강과 회수 이북에는 풀포기조차 설 수 없을 정도로 초토화 되는 것입니다.“

탁발도가 손수 대군을 이끌고 혁련정의 도읍 통만을 습격하고 평량을 포위 공략하자 혁련정은 멀리 서쪽으로 도망갔다. 서쪽으로 밀려간 혁련정은 서진을 멸망시켰으나 토욕혼의 기습공격을 받고 사로잡혔다.(AD431) 토욕혼의 군주 모용모귀는 혁련정을 북위로 압송했는데 탁발도는 혁련정을 죽였다. 모용모귀는 자신의 공로를 빌미로 영토를 탁발도에게 요구했지만 들어주지 않자 점차 북위에 대한 조공을 소홀히 하였다.    

 

4년 뒤 (AD434) 하나라 주군 혁련정은 결국 북위 탁발도에게 사로 잡혀 멸망하고 말았다. 탁발도는 왕근에게 포판(섬서성 영제)을 지키도록 했다. 북위의 장군 안힐은 낙양과 호뢰관을 탈환하고 두초는 산동지역을 수복했으며 숙손건과 장손도생은 황하를 건너 도언지의 유송군을 압박했다. 유송의 도언지는 패주하여 건강으로 돌아왔지만 하옥되었고 돌아 온 많은 장수들 또한 하옥되거나 파면되었다. 이제 북위는 관중지역을 확실히 장악하게 된 것이다.(AD430) 이 때 사로잡힌 유송의 포로 한 사람이 안힐에게 이런 말을 했다.

 

“ 예전에 황제 유의륭이 도언지를 보낼 때 이렇게 명령했습니다.

  북위군이 내려오면 그들이 오는 것보다 먼저 지름길로 가서 황하를 차지하되

  북위군이 내려오지 않으면 나아가지 말로 머물러 있으라.“  

 

이 말은 최호의 생각이 정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호 말대로 내려오지 않았으면 유송 군대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혁련정도 배후를 공격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상 북위와 유송의 전쟁은 북위가 먼저 일으킨 것이나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북위로서는 잃은 땅을 되찾은 것일 뿐이고 유송으로써는 패전함으로써 재정고갈이 극심하게 악화되었다. 이제 북위의 영토는 남쪽으로는 회하지역, 서쪽으로는 장안을 지나 천수까지, 북쪽으로는 내몽고 전역, 그리고 동쪽으로는 산동 반도 끝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탁발도는 대제국의 통치를 위해 장손숭에게 태위 및 주국대장군으로 임명하고 최호에게는 사도, 장손도생은 사공으로 임명했다. 탁발도는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다.

 

  ” 지혜는 최호이고

    청렴은 장손도생이다.“

 

탁발도는 대대적으로 인재를 발굴하고자 추천을 받아 조정에 등용했으며 민원을 어려움없이 듣기 위해 등문고(登聞鼓)를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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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유송의 반간 계략과 탁발도의 왕혜룡 신임 (AD431)

 

동진에서 망명하여 북위로 간 동진황족 사마초지는 이번 승전을 계기로 남침을 단행하여 유송을 멸망시키자고 요청했다. 탁발도는 전쟁 피로를 들어 반대했다. 그리고 왕혜룡을 형양태수로 삼아 전쟁피해를 신속하게 복구시키도록 했다. 왕혜룡 또한 훌륭한 정치로 재빨리 군사와 농업을 크게 일으켰다. 장차 남침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들었던 유의륭은 반간계략을 썼다. 즉 사람을 풀어서 왕혜룡이 자기 업적에 비해 상훈이 적고 낮아서 불만해 하며 곧 반란을 계획한다는 소문을 퍼뜨리게 한 것이다. 탁발도가 이 소문을 접해 듣고서 왕혜룡에게 새서, 즉 황제의 도장을 찍은 친서를 보내 말했다.

 

“ 유의륭이 장군을 보기를 호랑이 같이 하므로 

  이런 황당한 모략을 퍼뜨리고 있음을 내가 잘 알고 있소.

  개의치 마시고 마음에 두지 마시오.“

 

유의륭은 다시 자객 여현백을 보내 왕혜룡의 머리에 200호 봉읍에 남작 칭호에 비단 천 필을 걸었다. 여현백은 거짓으로 항복하여 칼을 품고 왕혜룡에게 다가갔다가 들키게 되었다. 여현백이 잘못을 사과하며 죽기를 청하자 왕혜룡이 발했다.

 

“ 너의 주군을 위해 한 일이니 잘못이 없다. 즉시 풀어주라.“   

 

왕혜룡의 측근들은 여현백을 죽이지 않으면 송나라 음모가 그치지 않을 것이라며 말렸지만 왕혜룡은 이렇게 말했다.

 

“ 생사는 하늘에 달려 있으니 저들이 어찌 나를 해칠 수가 있겠느냐.

  내가 인의를 가지고 백성을 막고 감싸고 있는데

  또한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

 

결국 여현백을 풀어 주었다. 9년 뒤(AD440) 왕혜령이 죽자 여현백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왕혜령의 무덤을 떠나지 않고 지켰다.

 

 

<39> 북연의 멸망과 고구려 정벌계획 포기(AD436)

 

이제 하북에 남은 나라는 북연밖에는 없었다. 탁발도가 AD432년 6월 출정하여 북연을 공격하며 8월에 수도 화룡(요녕성 조양)을 포위하였다. 북연의 상서 곽연이 북연왕 풍홍에게 북위에게 속국을 자청하자고 했지만 북연왕은 죽음으로 지키는 것만 못하다고 거부하였다. 북연의 장군 주수지는 유송과 연대하여 기습병을 보내 탁발도를 암살하려했으나 유송이 참여하지 않아 실패했다. 풍홍은 주수지를 다시 유송에 보내 구원병을 요청했다. 풍홍의 총애를 받지 못한 풍숭 등 여러 아들들이 불만을 품고 북위에 항복하고 말았다. 북위는 북연왕 풍홍을 요서왕으로 책봉하며 회유하였으나 듣지 않았고 북위와 북연의 대치 상태는 한 동안 계속되었다. AD434년 마침내 풍홍이 사신을 보내 막내 딸을 주고 태자를 보내 알현하겠다는 약속을 했으므로 탁발도가 허락하였다. 그러나 북연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리고 바다를 통해 또 유송에 사람을 보내 북연을 도와 줄 것을 끈질기게 요청하였다.

 

AD436년 초 북연의 왕 풍홍이 다시 태자를 보내겠다고 요청했으나 탁발도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어 일거에 거절했다. 그리고 북연 토벌 계획을 세움과 동시에 주변국에 10여 명의 사자를 보내 개입하지 말 것을 엄중히 경고하였다. 그리고 4월 북위의 장군 아청과 고필 군사들이 진격해 들어갔다. 고구려의 장군 갈로맹광이 수만 명의 군사로 북연을 도우려 들어왔다. 북연의 상서령인 곽생이 문을 열고 항복하려고 했으나 북위 군사들은 매복을 염려하여 입성하지 않았다. 북연의 상서령 곽생이 내부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고구려 지원군이 들어와 북연왕 풍홍은 함께 용성을 불태워버리고 동쪽 고구려 영토로 도망하였다. 북연은 이렇게 멸망했다. 북연왕을 사로잡지 못한 책임을 물어 탁발도는 아청과 고필을 사졸로 강등시켰다. 탁발도는 고구려에 사람을 보내 풍홍을 돌려 달라고 했지만 고구려 장수왕은 약을 올리듯이 이렇게 말했다.

 

“ 풍홍과 함께 덕정을 베풀어 

  탁발도 왕의 덕화를 펼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화가 치밀어 오른 탁발도는 진농(관중과 감숙성)의 기병들을 이용하여 고구려를 정벌할 계획을 세웠지만 먼저 진농의 병사들에게 세금과 요역을 면제시켜 마음을 산 뒤에라야 정복이 가능하다는 유혈의 말에 고구려 정복 생각을 접었다. 탁발도는 점령한 땅에 탁발흔을 파견하여 다스리게 했다. 그리고 관리가 포학하거나 탐욕스러우면 백성들이 쉽게 고발하라고 명령했다. 관리들이 고발이 두려워 마음을 낮추어 백성을 어렵게 대하였으나 백성들이 오히려 탐욕스럽게 관리의 잘못을 비판하고 협박하는 풍조가 만연하였다.(AD437)

  

 

<40> 북량 정벌문제와 최호-이순의 대질토론(AD439)

 

하나라가 AD434년에 망하고 북연이 AD436년 망함으로써 이제 천하에는 북위와 유송 외에는 감숙성 고장에 도읍한 저거몽손이 세운 북량(AD401-AD439) 정도만 남아 있었다. 유송에서는 훌륭한 군주 유의륭에 의한 선정, 즉 원가의 치세(원가치세, AD424-AD453)이 베풀어지고 있어 학문과 국력이 크게 신장되었으므로 틈이 없었다.

그러나 고장의 북량 조정 내부에서는 심각한 분란이 싹트고 있었다. 북량의 왕 저거목건이 형수 이씨를 간통했고 그 형제 세 사람이 돌려가며 이씨를 사랑한 것이다. 이씨는 총애를 믿고 저거몽손의 누나와 함께 저거목건의 처인 탁발도의 동생(무위공주)을 독살하려 했으나저거목건이 급히 해독제를 주어 살려내었다. 그 소식을 들은 탁발도가 분노하여 이씨를 보내라고 했지만 저거목건은 거부하고 이씨를 멀리 주천으로 보내버렸다. 탁발도는 이런 북량의 조치에 대해 이를 갈고 있었다.  

 

당시 북위 사신이 서역지역으로 갈 때에는 반드시 북량이 지원군을 보내어 길을 인도하며 보호했는데 저거몽손을 이어받은 아들 저거목건의 호위병이 북위 사신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 요즘 이곳에는 북위가 연연 토벌에 실패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서역 곳곳에서 두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합니다.“

 

북위 사신은 돌아 와서 그 말을 탁발도에게 전달했고 탁발도는 과연 그런지 하다라를 몰래 북량에 보내 탐문하도록 했고 그것이 사실인 것이 드러났다. 탁발도는 최호를 불러 북량 토벌의 방책을 물었다. 최호는 이렇게 대답했다.

 

“ 그들이 전혀 생각지 못한 상태에서

  대군이 갑자기 들이닥치면 그를 사로잡는 것은 일도 아닙니다.“

 

탁발도도 그렇게 생각했다. 해근 등 여러 장수들은 사막 지형 및 유목민의 특수성을 감안하면 공격이 어려울 것이라고 반대했다. 이순이라는 사람은 북량에 14번이나 사신을 갔으므로 그 지역 지형을 잘 아는 사람이었지만 저거몽손이 오랫동안 뇌물로 회유한 사람이어서 북량 편에 서서 물도 없고 황량한 땅이라 전쟁이 어렵다고 반대했다. 최호는 그런 유착관계를 여러 번 지적했지만 탁발도의 신임이 워낙 강해 먹히지가 않았다. 

 

탁발도는 결국 최호와 이순에게 대질토론을 시켰다. 최호는 한서지리지에 그 지역이 물이 풍부하다고 기록됐다고 지적했다. 이순은 스스로 눈으로 본 것을 말함이지 책으로 보고 말하는 것이라고 항변했다. 최호가 드디어 들추어내었다.

 

“ 남의 돈을 받고서 그를 위해 유세하는 처지에

  내가 보지 않았다는 사실 만으로 우기면서 모두를 속이려고 하는데 

  과연 속일 수 있겠는가?“

 

두 사람이 격론을 벌이자 아무도 끼어들지 못하고 회의는 끝이 났다. 모두가 나가자 비서 이발이 탁발도에게 가까이 가서 이렇게 말했다.

 

“ 물이 없고 살기가 어렵다면 

  어떻게 그곳에 대대로 나라를 만들었겠습니까?“ 

 

탁발도가 무릎을 치며 탄성을 올렸다. 

 

“ 바로 그것이다.”

 

AD 439년 6월 11일 탁발도가 손수 대군을 이끌고 평성(산서성 대동)을 떠나 북쪽으로 출정했다. 그리고 저거목건에게 이렇게 경고했다.

 

“ 친히 군사를 이끌고 먼저 나와 우리를 맞으면 상책이다.

  우리 6군이 도착하고 나서 면박여친하면 중책이다.

  다복하게 살 방법을 잘 생각해 보아라.“

 

북량을 공격하는 도중 그 지역에 물이 많음과 끝없이 늘어진 목초지를 보고서 탁발도는 최호의 예견이 정확했음에 또다시 놀랐다. 저거목건은 황급히 몽골지역에 있는 유연에게 도움을 구했지만 유연 또한 끼어 들 형편이 되지 못했다. 저거목건의 큰 조카 저거만년이 북위에 항복하고 군대가 흩어지자 저거목손이 모든 신하를 이끌고 면박여친 항복을 요청하였다.(AD439.9.25) 북량은 이렇게 북위에게 멸망당하였다. 탁발도는 항복한 모든 북량의 신하를 용납하고 중용 우대하였다. 전국이 거의 평정되자 탁발도는 문치에 매우 힘을 썼다. 그동안은 오로지 무예만 강조함으로써 귀족 자제들이 문학이나 경학에 뜻을 두지 않고 소홀했으나 이제부터는 국가의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해 예절과 학문을 숭상하는 기풍을 진작시킬 필요가 있었다. 이 일은 최호와 중서시랑 고윤과 산기시랑 장위가 책임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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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0년08월14일 17시05분
  • 최종수정 2020년08월15일 17시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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