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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17-후연(後燕) <12>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01월09일 17시00분
  • 최종수정 2020년01월08일 10시19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68) 내부 분열하는 하란의 토벌(AD391)

 

후연의 모용수가 중산(하북성 정주)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동서남북으로 세력을 확장해 가는 AD390년 경 후연과 국경을 접하고 있는 북위 탁발규나 그 너머 후진 요장은 후연과 우호관계를 유지했다. AD394년 멸망하기 직전인 전진의 부등 또한 감히 후연에게 대적할 세력은 되지 못했다. 그러니 내몽고 오르도스 이금곽락기에 웅거하던 유위진에게 북위와 후진과 전진은 후연의 예봉을 막아주는 방패와 같은 역할을 했던 셈이다. 교활한 유위진은 그 틈을 타고 아들 유직력제를 보내 내몽고 너머 북쪽에 자리 잡은 동쪽 하란부 하눌을 공격했다. 다급해진 하눌은 조카 탁발규의 북위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탁발규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하눌지원에 나섰다. 그리고 하눌의 요청에 따라 하란 부족을 모두 흡수하여 북위의 근거지인 지금의 산서성 대동지역으로 이주시켰다.(AD390)

 

하눌의 동생 하염간은 형이 나라를 통째로 탁발규에게 넘겨준 것이 못 마땅했다. 과거에도 여러 번 탁발규를 시해하려다가 실패한 것도 형님 하눌 때문이지만 나라를 그런 조카에게 그냥 넘겨주는 것이 못마땅했다. 하염간은 형 하눌을 암살할 계획을 세웠다. (AD391) 그러나 평소 신망이 두터운 하눌이었으므로 하염간의 밀모를 전해준 사람이 있었다. 하염간과 하눌 사이에 무력다툼이 일어났다. 북위 탁발규는 종주국 후연에게 하염간 토벌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했다. AD390년 2월 모용수는 양쪽을 다 공격하기로 했다. 모용린을 보내 하눌을 공격하게 하고 난한은 하염간을 공격하게 했다. 그리고 6월에는 모용린이 하눌과 하염간을 모두 포로로 잡았다. 모용수는 하눌과 그의 부족들은 모두 고향으로 돌려보냈으나 하염간은 중산(하북성 정주)으로 강제 이주시켜 자신의 관할구역 안에 잡아 두었다.

 

모용수의 넷째 아들이자 영리한 모용린은 탁발규의 잠재력을 간파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기회에 탁발규마저 잡아들여 후환을 끊어버리자고 아버지 모용수에게 요청했다. 그러나 모용수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영특한 탁발규 또한 후연 조정 내부에서의 자신을 해하려는 움직임을 모를 리가 없었다. 마침 사신으로 보낸 탁발규 동생 탁발고를 후연이 인질로 잡고 더 많은 조공을 무리하게 요구하자 후연과의 우호관계를 끊고 서연 모용영과 선린관계를 맺었다. 이로써 후연의 북쪽 국경은 대와 머리를 맞대며 대치상태에 들어갔다.


(69) 모용수의 적소 소탕 : (AD392)

 

모용수는 궁극적으로 남쪽 지역으로 국경을 넓힐 생각이었다. 과거 전연 시대에 장악했었던 회하지역을 장악해야 사실상 중국을 지배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모용수는 노구(하북성 요양)을 출발하여 하간(하북성 헌현), 발해(하북성 남피)를 따라 내려와 평원(산동성 평원)으로 들어갔다. 이 지역은 적위가 지배하는 땅이다. 적위의 주군 적료가 지난 해(AD391) 사망하고 그의 아들 적소가 자리를 이었다. 적소는 장군 적도를 보내 후연군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적도는 후연 모용수의 대군에게 상대가 되지 못했다. 적도는 활대(하남성 활현)로 도망갔다. 다급해진 적소는 서연의 모용영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모용영은 여러 신하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포준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 두 도적들로 하여금 서로 싸우게 한 다음
   피폐한 틈을 타서 공략하는 것은
   변장자(춘추시대 노나라 대부)의 계략입니다.“

 

중서시랑 장등은 이렇게 반박했다.

 

  “ 모용수는 강적이고 적소는 허약한데
    어찌 그들이 피폐해진다는 말입니까?
    서둘러 적소를 구원하여 세 발의 정족 형국을 만들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먼저 군사를 이끌고 중산으로 들어가서
    낮에는 가짜 군대 허수아비를 펴 보이고
    밤에는 횃불을 많이 켜두면 모용수가 놀라서
    군대를 물리치고 되돌아갈 것입니다.“

 

모용영은 장등의 말을 따르지 않았다. 적소는 모용영의 구원군이 오지 않자 황하가에 있는 모용수의 군대를 습격하려다가 준비하고 있던 모용농과 모용진의 군대에 의해 역공을 받고 크게 실패하였다. 적소는 활대로 돌아간 다음 가족을 이끌고 백록산(하남성 휘현) 깊숙이 들어가 숨었다. 모용농은 산 주변을 포위한 다음 식량을 위해 내려올 때를 기다리다가 적소 무리들을 나포했다. 적소는 단기로 장자(산서성 장자, 서연 수도)로 도망갔다. 모용영은 그에게 연주목 거기대장군의 직위를 내려 우대했으나 다음해 역모를 꾸미다가 잡혀 처형되었다.
 

(70) 모용수의 최음 등용(AD392)

 

전진의 세력이 북중국 전체를 장악할 때 학구, 최령, 최굉, 장탁, 기등 및 노찬은 모두 전진의 관리로 있었는데 전진이 패망하고 나서 이들은 모두 동진으로 망명을 와서 기주(하북성 중부와 남부)의 여러 지역관으로 임명되었었다. 적료가 적위라는 나라를 세우자 이들은 모두 적위의 신하가 되었다가 적위가 후연에게 멸망당하였다. 후연의 모용수는 이들의 재능을 아낀 나머지 모두를 다시 중요 직책에 등용시켰으므로 그 지역 행정은 혼란 없이 예전과 같이 안정되었다.   

 

모용수는 장무왕 모용주에게 연예이주자사직을 주어 활대에 주둔하도록 했으며 팽성왕 모용탈(모용수 아우의 아들)을 서주자사로 여양(하남성 능현)에 주둔하도록 했다. 그리고 최음이라는 사람을 등용하여 모용주의 사마로 삼게 했다. 최음이라는 사람은 과거에 모용수가 진류왕 모용소와 태원왕 모용해와 낙랑왕 모용온의 보좌관으로 삼도록 할 정도로 재능이 뛰어나고 민첩하며 정직하고 강직한 말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다. 형벌을 간단하면서도 공정하였고 세금 또한 가벼우면서도 치우치지 않았다. 이 네 명의 왕들이 모두 최음을 조심하고 두려워했지만 유민들이 들어와 귀부했기 때문에 나라는 부강하고 민호는 나날이 늘어갔다. 적위가 있던 기주지역이 훌륭한 관리자 최음의 행정력으로 부강해진 것은 앞으로 후연이 사방팔방으로 영역을 확대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71) 모용수의 인사와 서연 멸망(AD393-AD394)


AD393년 정월 모용수는 대대적인 이사를 단행했다. 태자 모용보를 대선우로 책봉하고 동생 범양왕 모용덕은 사도로 삼았다. 조카 태원왕 모용해(모용각의 아들)는 사공, 진류왕 모용소(모용각의 아들)는 좌복야, 그리고 어린 아들 모용회는 하간왕, 모용랑은 발해왕, 모용감은 박릉왕으로 책봉했다.

황실 인사를 마친 모용수는 곧바로 서연을 공략할 방법에 대해 의논했다. 제장들이 한결같이 말했다.

 

 “ 모용영은 틈이 없고
   우리가 해마다 출정하는 바람에 군사들이 모두 지치고 흐트러져 있습니다.
   아직은 때가 아닌 듯합니다.“

 

그러나 범양왕 모용덕은 생각이 달랐다.

 

 “ 모용영은 국가의 곁가지에 불과합니다.
   참람하게 국호와 지위를 들먹이는 것을 어찌 보고만 있겠습니까.
   백성들의 혼란이 없도록 마음을 통일하려면 서둘러 제거해야 합니다.
   어찌 사졸들의 피곤을 핑계로 국가대사를 미루시렵니까?“

 

[그림] 여성과 장치 포위와 서연 멸망(AD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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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수가 대답했다.

 

 “ 사도의 마음이 나와 꼭 같소.
   내가 비록 늙기는 했지만 주머니 밑바닥의 지혜만 짜내도
   충분히 그들을 빼앗을 수 있소.
   어떻게 도적을 자손들에게 남겨두겠소.“

 

11월 모용수가 보, 기병 7만을 이끌고 출정에 나섰다. 모용찬과 장숭은 서쪽 정형(하북성 정형)으로 보내 태원에 있는 서연의 모용우(모용영의 동생)를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평규를 보내 남쪽의 사정(하북성 무안)에서 서연의 단평을 공격하게 했다. 모용영은 조운과 모용종에게 5만 군사를 주어 노천(산서성 여성현)을 방어하도록 시켰다.(AD393년 12월)    

 

해가 바뀌어 AD394년 2월 대군을 모아서 업에 있던 모용수는 청하왕 모용회에게 업을 수비하도록 맡기고 사주(하북성 업 부근), 연주(산동성 견성지역), 청주(산동성 제남부근) 및 기주(하북성 시현 지역)의 군사를 몰아 서연의 수도 장자를 향해 서남진했다. 모용해는 무구(하북성 무안)으로 가게하고 모용농은 호관으로, 자신은 장자를 향해 진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그 소식을 들은 서연 주군 모용영은 군사규율을 엄하게 다루면서 급하게 식량과 인력을 대벽(하남성 여성)으로 모으고 1만여 병사와 함께 모용소일두귀와 왕차다와 늑마구 등을 보내 여성을 지키게 했다. 그러나 모용수가 한 달 이상이나 출병을 머뭇거리자 모용영은 이상하게 여겼다. 모용수가 남진하지 곧바로 않고 대신 태행(하남성 심양, 낙양 북쪽)을 빼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군대를 모아 지관(하남성 제원시 부근)을 막았다. 그러나 모용수는 제원방면이 아니라 곧바로 서연 수도 장자의 북쪽 여성과 중간 지점인 노성으로 치고 들어왔다.

 

5월 후연의 군사가 대벽에 도달하고 서연 장군 모용대일두귀가 나가서 싸웠으나 후연의평규에게 대파 당하였다. 서연의 장수 모용소일두귀가 또 나섰지만 모용농에게 패하였고 늑마구는 목이 잘리고 앙차다는 포로로 잡혔으며 대벽은 포위당했다. 모용영은 있는 군사를 다 모아서 방어에 나섰지만 부하 조운과 모용종이 후연에게 투항하고 말았다. 모용수는 대벽성의 남쪽 성벽에 포진하고 있었다. 모용수 부장 모용국을 매복시켜 놓고는 모용수가 패전하여 물러나는 척하자 모용영이 곧바로 군사를 몰고 뒤쫓아오다가 모용국의 매복에 걸려 모용영이 대패하였다. 목이 잘린 모용영 군사만 8천여 급이라 했다. 모용영은 장자로 도망갔다.
  
모용수는 장자를 포위했다. 모용영은 후진 요장에게로 도망가려 했으나 시중 난영이 버티고 지키는 것이 현명하다고 깨우치자 생각을 바꾸어 수비하기로 했다. 모용영은 곤궁하고 급하게 되자 아들 모용홍을 보내 옥새 하나를 넘겨주면서 동진 옹주자사 치회에게 도와줄 것을 부탁했다. 치회는 곧바로 조정에 서한을 보내 이렇게 말했다.

 

 “ 모용수가 모용영 마저 아우른다면
   동진조정으로써는 큰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양쪽이 다 남아있도록 하다가 적절한 시기에
   다 쓰러뜨리는 것이 좋은 계책일 것입니다.“
    
동진황제 효무제가 그렇게 생각하고 청연이주자사 왕공과 예주자사 유해를 보내 모용영을 구원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모용영은 동진의 구원군사가 오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아들 모용량마저 인질로 보내려했는데 평규가 쫓아와서 모용량을 고도(산서성 진성 부근)에서 나포해 붙잡았다. 모용영은 다급한 나머지 북위 탁발규에게도 구원을 요청했는데 탁발규 또한 진류공 탁발건과 장군 유악을 보내 서연을 지원하도록 했다. 북위 지원군은 수용(산서성 삭주 수용천)까지 내려왔다. 이렇게 되면 서연의 방어근거지 여성을 중심으로 서연은 북위와 동진의 연합하여 후연과 전쟁을 하게 되는 셈이고 전세는 어떻게 될지 예측하기 어려웠다. 이때 여성을 지키고 있던 모용대일두귀의 부장 벌근이라는 사람이 후연의 군사가 들어오도록 성문을 몰래 열어주었다. 후연의 군사가 들어가 모용영을 붙잡아 죽였고 조운, 모용대일두귀 등 30여 명의 서연 공경들이 죽음을 당했다. 이로써 AD384년 전연 모용준의 아들 모용홍에 의해 세워진 서연은 10년 만에 멸망했다. 모용수는 단양왕 모용찬에게 병주자사로 진양(태원)에 주둔하게 하고 의도왕 모용봉은 옹주자사로 장자에 주둔하게 하였다. 서연의 신하들 중에 상서복야 굴준, 상서 왕덕, 비서감 이선, 태자첨사 봉칙, 호모량, 장등 등과 같이 재능있는 사람들을 모두 재등용했다. 그 해 9월이 되어 모용수는 업을 돌아갔다.
 

(72) 모용수의 산동 점령(AD394)

 

서연이 멸망함으로써 하북지방을 장악한 후연은 중국북방의 최대 강국이 된 셈이었고 오직 나머지 패업은 산동지역을 소탕하는 일이었다. 그 지역은 과저 전진의 세력 안에 있었으나 전진이 거의 패망할 지경(AD394년 멸망)이었으므로 잔당들이 남아있거나 아니면 아직도 동진의 영향력이 강한 지역이었다. 모용수는 업에서 동쪽으로 나가 양평(하북성 관도)과 평원(산동성 평원)을 순시한 다음 요서왕 모용농과 함께 황하를 건넜다. 안남장군 윤국에게 청주, 연주를 공략하고 양성을 뽑으라하고 모용농에게는 늠구(산동성 운성)를 뽑게 했다. 그곳을 지키고 있던 동진의 동평태수 위간이 전사하자 고평, 태산, 낭야 등 여러 군들은 모두 성을 버리고 달아났고 후연의 군사가 마침내 그 영토를 확장할 수 있었다.


[그림] 모용수의 동방경력(AD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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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D394년 겨울 모용농은 동진의 유주(치소는 산동성 광고)자사 벽여혼을 깨고 임치로 들어갔다. 모용수는 혁혁한 공을 세운 모용농을 업을 불러들였다. 이로써 후연의 영토는 산동성 일대들 장악하는 강력한 나라가 된 셈이다.  

 

[그림] 후연 및 서연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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