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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근대의 시작, 1898년 여성인권선언 ‘여권통문’ 발표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5년03월06일 21시19분
  • 최종수정 2016년02월29일 13시24분

작성자

  • 정현주
  • (사) 역사ㆍ여성ㆍ미래 상임대표

메타정보

  • 37

본문

여성근대의 시작, 1898년 여성인권선언 ‘여권통문’ 발표

 

  876년 운양호사건으로 조선은 반강제적으로 개항하였다. 이후 조선은 반봉건 · 반외세가 시대적 과제인 가운데 근대로 진입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개화사상과 개화운동이 등장하였다. 개화론 속에서 인구의 절반인 여성이 개화되어야 한국인이 개화될 수 있다는 전제 아래 여성도 교육받아야 한다는 여성교육론이 등장했다. 

 

민중운동 역시 천주교와 동학사상 등의 영향으로 봉건사회 여성들의 삶을 되돌아보며 여성문제해결에 노력하였다. 개화운동 과정에서 독립협회와 독립신문은 한층 더 여성의 권리 찾기를 강조하였고, 남녀평등의 실현을 위한 여성교육을 중요성을 주장하였다. 한편 기독교는 여성의 인간으로서 존엄을 강조하면서 조선여성을 포교의 대상으로 삼아 근대적 여학교를 설립하기 시작했다. 1886년에는 최초의 여학교인 이화학당이 설립되었고, 1895년 정신여학교와 부산의 일신여학교 등이 세워졌다.

 

한국역사상 최초의 여성인권선언문, 여권통문 발표

  바로 이러한 시기인 1898년 9월 1일 ‘여권통문’(女權通文)이 발표되었다. 서울의 북촌양반여성들이 이소사, 김소사의 이름으로 ‘여학교 설시통문’ 즉 ‘여권통문’을 발표하였다. 여기서 소사(召史)는 양민의 아내를 이르는 말이다. 이것은 여성권리를 최초로 선언한 문서로 여권운동의 발단이 되었다.

 

  내용을 보면 첫째, 문명개화정치를 수행함에 여성들도 참여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주장했다. 둘째는 여성들도 남성과 평등하게 직업을 가질 권리가 있음을 말했다. “신체와 수족과 이목이 남녀가 다름이 있는가, 어찌하여 병신 모양으로 사나이의 벌어주는 것만 먹고 평생을 심규에 처하여 그 절제만 받으리오” 셋째, 여성도 남성과 평등하게 교육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이왕에 먼저 문명개화한 나라를 보면 남녀가 일반 사람이라 어려서부터 각각 학교에 다니며…….” 문명개화한 나라들의 여성들이 동등하게 같이 살아가는 것은 여성들이 남성과 같이 재주와 권리와 신의를 갖고 있기 때문인데, 이는 여성들도 남성들과 같이 어려서부터 학교에 다니며 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즉, 남녀평등의 근저에 교육이 있음을 인식하고 여성교육을 강조했다. 모든 것의 출발이 교육에 있음을 주장했다.

이처럼 ‘여권통문’은 여성의 개화에 참여,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를 강조하고 이 모든 것이 교육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대전제 아래 교육권 등을 통해 다수 대중 여성들의 공적 영역 진출을 주장했다. 단순히 주장에 그치지 않고 여자교육기관을 설립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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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교육기관 설치 운동 위해 찬양회 설립

  1898년 9월 1일 여권통문 발표에 찬성한 사람들은 약 300명이었는데, 발표한 후에는 400~ 500명으로 늘었다. 서울에 거주하는 양반 부인들이 중심세력이었으나, 일반서민층 부인들과 기생들도 참여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여권통문의 발표는 자연히 여권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들 여권운동의 지도자들은 이러한 운동에 찬성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찬양회(贊襄會)라는 최초의 근대적 여성단체를 조직하였다. 1898년 9월 12일 북촌 부인대표들은 뜻을 같이 하는 남성들까지도 함께 하여 여학교 설립문제를 논의했다. 그 결과 한국인 여성들이 세운 최초의 여학교로 순성여학교 설립을 결정하고, 이를 여성의 힘으로 운영하기 위해 후원단체인 찬양회를 조직하기로 했다.

 

  찬양회는 여학교 설립운동과 여성계몽사업을 펼쳤다. 매주 일요일 정기집회를 열고 연설회와 토론회를 가졌다. 가장 중요한 것은 관립여학교 설립운동이었다. 여자도 국민의 일원이기에 당연히 국가가 관립여학교를 설립하여 여성교육을 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여성도 국가가 운영하는 교육기관에서 교육을 받고 남성과 동등하게 애국할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관립여학교 설립은 자꾸 늦춰졌다. 이에 찬양회는 1899년 2월 26일 서울에 30명 정원의 순성여학교(順成女學校)를 개교했다. 이 학교는 한국여성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여학교로서 7, 8세에서 12, 13세 연령의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초등과정의 학교였다. 이 학교를 관립여학교로 만들려고 했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김양현당의 노력으로 학교가 유지되었으나 1903년 2월 그가 죽자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비록 순성여학교가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으나, 기독교에 의해 설립된 여학교와 달리 여성들에 의해 설립된 민간 교육기관이라는데 역사적 의미가 있다. 교육내용에서도 민족의 일원으로서 개화에 참여해야 한다는 등 당시 사회의 현안을 강조하고 이에 합당한 여성인물을 키워내려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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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여성사전시관이 전시관을 서울시 대방동에서 경기도 고양시로 옮기면서 실시한 이전 개관 특별전의 포스터 

 

(이글은 사단법인역사·여성·미래가 여성가족부의 예산을 지원하고  실시한 ‘한국여성사강사양성과정’의 제17강:1898년 여성인권선언 ‘여권통문’과 여성의식의 확대 (이송희, 신라대학교)의 강의 내용을 발췌 정리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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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 2016년02월29일 13시2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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