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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13 : 여광 일인국가 후량(B)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8년11월29일 17시50분
  • 최종수정 2018년11월29일 16시19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18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6) 부씨 반란군의 진압과 여광의 공훈(AD368) 

 

다음해 정월 부견은 양성세와 모숭을 보내 진주(秦州) 방향 반란군 부무를 토벌하게 하고 왕맹과 등강은 옹주 포판(산서성 영제)의 부류를 공격하였으며 양안과 장자를 보내 섬성(삼문협)의 부수를 토멸시켰다. 섬성을 지키던 부수는 두려운 나머지 전연에게 사신을 보내 구원을 요청했다. 당시 전연 황제는 용렬한 모용위였고 훌륭하게 정치를 이끌어가던 모용위의 삼촌 모용각은 지난해(AD367) 사망한 직후였다. 모용각은 죽기 직전 조카 황제 모용위에게 친동생인 오왕 모용수를 등용하여 모든 정사를 자문할 것을 신신당부했었지만 모용위는 듣지 않았다. 모용위는 모용수 대신 시기심이 많고 편벽한 작은 할아버지 모용평을 태부 및 대사마로 등용시켰다. 사실 전연 조정에서는 부견의 전진이 부씨 형제간 내전으로 혼란한 지금이야말로 전진을 토벌할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태부 모용평은 옹졸하고 그릇이 형편없이 작았다.   

 

“ 전진은 대국이라 쉽게 도모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다.

  닫아걸고 국경을 보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전진을 평정하는 것이 어찌 나의 소관이란 말이냐!“

 

이런 전연 조정의 내막 형편을 알게 된 부수는 오왕 모용수에게 서신을 보내 상의했다.

 

“ 지금 이 기회를 타서 빼앗지 않으면 

  과거 오의 부차가 월왕 구천을 죽이지 않음에 따라

  나중에 월왕 구천의 공격을 받아 용동에서 방축되어 자살하게 만든 

  용동의 한(甬東之恨)이 될까 걱정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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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수가 측근 황보진에게 이렇게 걱정했다.

 

“ 주군(모용위)이 어리고

  태부 모용평은 용렬하기만 하니

  어떻게 부견과 왕맹을 당해 내겠소?“ 

 

황보진이 이렇게 대꾸했다.

 

“ 우리가 그것(이 기회에 부견을 공격하자는 것)을 말한 들

  듣지 않을 것이니

  말할 필요가 무엇이겠습니까?“

 

전연의 모용위와 모용평가 장악한 전연조정은 소중한 기회를 이렇게 놓치고 말았다. 이로부터 2년 뒤인 AD370년 전연은 부견의 공격을 받고 허무하게 멸망했다.    

양성세와 모숭이 이끄는 부견의 진주토벌군은 전쟁 초기 부무에게 패배하여 쫓겨 왔다. 부견은 다시 왕감과 여광과 적녹에게 3만 대군을 붙여 진주를 재차 공격했다. 이 때 흥분한 왕감이 전투를 서두르려 했다. 여광이 왕감을 조용히 타이르며 말했다. 

 

 “ 저들 반란군 선봉 구흥의 공세가 몹시 날카롭습니다.

   지금은 예봉을 진중한 태도로 피한 뒤

   식량이 떨어질 때 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식량이 떨어져 돌아가려 할 때 뒤를 공격하면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

왕감도 여광의 생각에 동의했다. 왕감과 여광이 기다린지 20일 만에 마침내 구흥이 물러났다. 여광이 서둘러 말했다.

 

 “ 지금 공격하면 반드시 이깁니다.”

 

왕감과 여광이 이끄는 3만의 토벌군이 일시에 달려들어 퇴각하는 구흥과 반란군의 후미를 습격했다. 대파였다. 참수된 사람만 1만 5천 급이라고 했다. 부무는 안정을 버리고 부쌍과 더불어 상규(감숙성 천수)로 도망갔다. 거기에는 부쌍이 웅거하고 있는 곳이다.

 

 

(7) 부견의 관대함

 

부견이 서쪽 진주(감숙성 경천부근)방면 반란군을 토벌하는 사이 부류가 이끄는 동쪽 옹주(산서성 영제부근)방면 반란군 2만이 장안을 공격했다. 등강은 7천의 군사로 이들을 격파했다. 장안습격이 실패로 돌아가자 부류는 잔당을 이끌고 퇴각했는데 왕맹이 추격하여 그들의 근거지 포판(산서성 영제현)마저 함락시키고 말았다. 부류도 이 때 목이 날아갔다(AD368년9월). 이제 마지막 남은 것은 섬성이다. 부견은 왕맹 휘하 전군을 보내 섬성을 함락시켰다. 왕맹은 부수를 생포하여 장안으로 돌아왔다. 부견이 물었다.

 

“ 왜 반란을 일으켰는가?”

 

부수가 대답했다.

 

“ 신은 본래 반란의 의사가 없었습니다만

  형과 동생들이 여러 번 모의하고 종용하니

  죽을 것이 두려워 참여했을 뿐입니다.

 

부견이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했다.

 

“ 너는 평소에 어른다운 사람이었으니

  진실로 너의 마음이 그러했으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 번 사안은 사적으로 처리할 문제가 아님을 네가 잘 알 것이다.

  다만 고조(부건. 부견의 큰 아버지이고 부수의 아버지)의

  후사가 끊어져서야 되겠느냐.“

 

부견은 마침내 부수에게 죽음을 내렸지만 그의 일곱 아들은 모두 살려 주었다. 그리고 그 장자에게는 부수의 후사를 잇게 하였고 나머지 아들들은 후사가 없이 이번에 죽은 부씨들의 대통을 잇도록 배려해주었다. 이로써 부견은 관중과 하서 일대를 장악하고 남은 두 세력, 즉 북동쪽의 전연과 남동쪽의 동진을 점령하러 나아가게 된다. 첫째 목표는 내부가 혼란한 전연이었다. 그 선봉에는 왕맹이 나섰다. 왕맹은 AD370년 전연을 멸망시켰다. 

 

(8) 부중의 반란과 여광의 진압(AD378)

 

AD378년 예주(안휘성 당도지역)자사 부중이 낙양에 주둔하면서 전진 조정에 반란을 일으켰다. 부견은 당시 동진을 공략하기 위해 전력을 동원하여 양양(호북성 양번)을 공격하고 있던 중이었다. 여광은 북해공 부중의 장사, 즉 북해공의 최측근 신하였다. 부견이 말했다.

 

  “ 북해공 장사 여광은 충성스럽고 정직하므로 

    반드시 그와 같이 하지 않을 것이다.”

 

곧바로 여광에게 명하여 북해공을 잡아들이라고 지시했다. 여광은 즉시 부중을 잡아들여 장안으로 호송했다. 부견은 부중을 가둔 뒤 곧바로 사면해 주었고 2년 뒤에는 진북대장군으로 임명하여 계(지금의 북경)에 주둔시켰다.

 

 

(9) 여광의 성도 수복(AD378)

 

AD378년 8월 전진의 양주(섬서성 한중시 지역)자사 위종이 동진의 땅 위흥(섬서성 안강)을 포위하였다. 5개월 버티던 끝에 AD379년 3월 동진은 모호생과 3만 구원군을 위흥에 보냈다. 그러다 동진의 전봉독호 조복이 파서(섬서 낭중)에서 전진 장수에게 패배하면서 7천명이 전사했다. 모호생은 물러나 파동(사천성 봉절)에 진을 치고 주둔했다. 그 사이 촉 사람 이오가 2만 명 모아 전진군사가 점령한 성도를 포위하고 동진의 지원을 기다렸다. 부견은 서둘러 여광을 보내 성도의 이오군을 멸망시켰다. 그리고 전진의 위종은 위흥을 함락시켰다. 한중지역이 동진으로부터 전진의 땅으로 바뀌었다.   

 

 

(10) 부락의 반란과 여광의 공훈(AD380)

 

정북장군 유주(북경지역)자사 부락은 부견의 사촌 형으로써 3년 전 대(代)나라를 멸망시킬 때 공이 작지 않았다. 은근히 개부의동삼사를 기대했으나 부견에게 거부당해 앙심을 품고 있었다. 부견은 남쪽 양양 정벌을 위하여 부락을 도독익영서남이제군사 및 익주목으로 삼고 양양을 거쳐 한수 상류로 가도록 발령 내렸다. 현재 자신의 본거지 유주와는 정반대의 지역인데다가 전쟁터였다. 화가 난 부락은 이렇게 내 뱉었다.

 

“ 내가 황제의 가까운 친인척이라고 해서

  일부러 재상은 주지 못한다고 변방만 돌아 다녔는데

  또 다시 서쪽 천한 것들이 있는 곳으로 던져 졌으니

  반드시 나를 배척하는 무슨 계략이 있을 것이다.     

  분명히 양양에 진수하고 있는 형주자사 양성이 

  나를 한수에 빠뜨리려는 계책임에 틀림없다.“

 

그런 마음을 읽은 유주의 막료 평규가 유주군사를 동원해서 반란을 일으킬 것을 종용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부락은 스스로 진왕 대장군 대도독이라 일컬으며 반란을 일으켰다. 평규를 유주자사로 승진시키고 사신을 선비, 오환, 고구려, 백제, 신라, 휴인(흑룡강 유역 나라) 등지로 보내어 지원군을 요청했고 자신은 스스로 3만 군사로 계성(북경)을 방어했다. 그러나 호응해 오는 나라는 한 곳도 없었다. 겁에 질린 부락은 되돌릴 생각도 했으나 자신이 새로 임명한 장군들이 마음을 돌려 부견에게 밀고하려하자 모두 죽여 버렸다. 길정과 조찬은 관대한 부견에게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사죄를 빌면 용서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득했으나 평규는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강청했다.

 

부락은 계획대로 거사하기로 했다. 군사 7만으로 4월 화룡(요녕성 조양)을 출발했다. 

부견의 대책회의에서 보병교위 여광은 이렇게 말했다.

 

   “ 행당공 부락이 반란을 일으켰으니

     이는 천하가 미워하는 것입니다.

     신에게 보, 기병 5만을 주시면

     물건 줍듯이 충분히 쉽게 진압하겠습니다.“

 

부견이 말했다.

 

   “ 부중과 부락 형제는 동북쪽 한 모퉁이를 점거하고 있는데

     군대가 모든 것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쉽게 이길 수가 없을 것이다.“

 

여광이 말했다.

 

   “ 저 무리들은 흉악한 위세에 눌려 일시적으로 개미처럼 모인 것에 불과합니다.

     만약 대군으로 그곳에 이르게 되면 형세는 반드시 무너질 것입니다.“

 

부견은 일단 사자를 보내 부락을 꾸짖고 화룡(요녕성 조양)으로 군사를 되돌리면 영원히 봉지로 허락하겠다고 약속했다. 부락은 사신에게 이렇게 말하며 돌려보냈다.

 

 “ 이렇게 동해왕(부견)에게 전하라.

   유주는 동북으로 길게 치우쳐 있어서

   만승(부견)이 한 바구니에 담기가 부족하다.

   나는 반드시 진중(秦中)의 왕이 되어 고조(부건)의 유업을 완수할 것이다.  

   만약 동관으로 내 수레를 마중 나온다면

   지위는 상공으로 하고 작위를 주어 

   본거지였던 동해군으로 보내 줄 것을 약속하겠다.“

 

건방지기 짝이 없는 황당한 부락의 대꾸에 화가 치민 부견은 두충과 여광에게 4만 군사를 딸려 부락 토벌에 보냈고 업의 기주병사 3만을 도귀 휘하에 두고 토벌군 선봉에 서게 하였다. 부융이 정토대도독이 되어 전군을 총괄하였다. 5월 부견의 군사와 부락-부중의 10만 반란군은 하북성 정주에서 결전을 치렀다. 결과는 부락의 참패. 부락은 생포되어 장안으로 압송되었다. 부중은 계(북경)로 도망갔다가 여광에게 목이 날아갔다. 부견은 부락을 죽이지는 않고 사면한 뒤 내몽고 깊은 곳으로 귀양 보냈다. 역사가들은 부견이 부락을 죽이지 않을 것을 두고 맹렬히 비난했다. 너무 관대한 조치가 그 이후에 발생하는 여러 반란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원래 부견은 관대한 사람이었다. 비단 부락 뿐 만 아니라 수없는 친족들의 반란을 진압하면서도 그들의 목에 칼을 대지 않았다. 그것은 중국 역사에서 볼 수 없는 관대함이다. 만약 비수의 전투에서 패하지 않고 중국을 통일했다면 그의 관용과 자비로움은 중국 역사에 찬란하게 빛났을 것이 확실하다. 적어도 역사가들이 비판하는 것처럼 그의 관용 때문에 반란이 빈번하게 발생했고 그 때문에 전진이 멸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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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8년11월29일 17시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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