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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관 퇴직기자의 유쾌한 명상 체험기 쉐우민 이야기, 마흔일곱 번째 이야기 “너희 자신의 섬이 되어라.”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8년05월19일 20시31분
  • 최종수정 2018년05월19일 21시08분

작성자

  • 김용관
  • 동양대학교 교수(철학박사), 전 KBS 해설위원장

메타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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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사마디만으론 부족하다

  팔정도의 마지막 여덟 번째 항목은 바른 사마디이다. 사마디가 마지막에 위치해 자칫 사마디만 잘 닦으면 해탈의 길에 이를 수 있다고 오해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사마디를 얻으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안정되며, 여러 심리적 현상들(마음부수들)을 컨트롤할 수 있고, 행복해지고 평온해지며, 활기찬 삶을 살 수 있다. 괴로움의 굴레에서 벗어나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는 팔정도를 ‘있는 그대로의 법’을 보는 도구로 사용해야 한다. 있는 그대로의 법을 보는 능력이 바로 통찰력이다.

 

  그래서 수행자는 팔정도의 여덟 요소 각각이 통찰력(또는 통찰지)을 얻는데 기여하도록 수행해야 한다. 팔정도를 ‘여덟 겹의 길’이라고 부르는 까닭이 바로 이 때문이다. 또한 바른 견해와 바른 사유의 두 요소는 새로운 차원에서 재가동돼야 한다. 

  바른 견해와 바른 사유는 지혜, 즉 통찰지와 직접 연관돼 있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부연하자면 이 두 요소는 비슈디마가(淸淨道論)를 저술한 붓다고샤(佛音)가 불교의 전 교리체계를 戒, 定, 慧의 三學으로 분류한 가운데 혜에 속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앞서 바른 견해와 바른 사유를 해탈과 해탈로 가는 길을 그려놓은 지도에 비유한 적이 있는데, 여행자가 실제로 가는 길을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지도의 의미가 달라지듯, 수행자의 견해와 사유는 실제로 수행의 길을 가면서 점점 차원이 높아질 것이다. 같은 현상을 바라보더라도 개념적이고 추상적으로 파악하는 차원과 현상을 꿰뚫어 보고 그 성질을 파악해내는 차원은 사뭇 다를 것이다. 

  다른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붓다는 시종일관 ‘나’는 없다고 가르쳤다. 교리 상으로는 ‘無我’로 개념화한다. 불교에 갓 입문한 사람이라도 ‘무아’ 개념을 추상적으로 이해하는 데는 별 무리가 없다. 하지만 ‘무아’에 대한 앎은 추상적 이해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뭇 수행자들이 ‘무아’를 체득하기 위해 몸을 던지는 노력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를테면 공동묘지에서 먹고 자며 수행하는 두타행(頭陀行)이 그런 수행의 하나이다. 수행자들은 ‘나’의 개념이 ‘지긋지긋한 빤얏띠(개념)’라며 몸서리친다. ‘나’만 버려도 성자의 첫 부류, 수다원의 흐름에 들어간다. 사마디만 얻어서는 결코 이 몸서리쳐지는 개념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그것은 오로지 통찰지, 지혜를 증장시켜야만 가능하다.

  한 차원 높은 견해와 사유는 곧 개발된 통찰지이며, 증장된 지혜이다. 지혜는 그래서 사띠와 함께 붓다의 가르침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

 

 

  번뇌의 세 계층

  ‘지혜’는 ‘사띠’와 더불어 붓다의 가르침 중 가장 중요한 키워드이다. 이 점은 대승불교나 중국불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대승불교에서 지혜를 뜻하는 산스크릿어 ‘prajna’는 중국에 와서 ‘般若(반야)’로 번역된다. 대승불교의 반야부는 지혜의 증장을 수행의 구체적 지침으로 삼는다. 대품반야경, 소품반야경, 금강반야경, 반야심경 등 반야부 경전들은 ‘지혜의 완성’으로 번역된다. 

  왜 지혜를 개발해야 하는가? 마음의 집중과 사마디의 성취만으로 해탈의 길을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사마디가 번뇌를 없앨 수는 있지만 번뇌의 토대를 허물지는 못한다. 붓다는 번뇌가 세 계층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간파했다. 즉 잠재적 성향의 단계, 드러나는 단계, 범함의 단계가 그것이다.

  가장 깊이 자리 잡은 번뇌는 잠재적 성향의 단계의 것이다. 이 단계에서 번뇌는 아무런 활동도 하지 않고 잠복하고 있을 뿐이다. 두 번째 ‘드러나는 단계’의 번뇌는 특정 자극에 영향을 받고 강화된다. 이 단계에서 번뇌는 생각, 감정, 의욕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런 번뇌는 마치 폭포에서 물이 쏟아지듯, 해변에 파도가 밀려오듯 해서, 거슬리기에는 불가항력이다. 세 번째 수준인 ‘범함’의 단계에서는 번뇌가 마음에 드러나는데 그치지 않고 몸이나 말로 업을 짓게 한다. 이런 세 계층의 번뇌를 다루는 데는 각각 다른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 

  세 번째 ‘범함’ 단계의 번뇌는 계율을 지켜서 몸과 말을 제어하면 다룰 수 있다. 의식의 표면에 떠오른 두 번째 번뇌는 사마디를 닦아서 제어한다. 마음을 한 대상에 집중을 통해 얻는 사마디는 의식의 표면에 떠올랐거나 떠오르려 하는 번뇌로부터 마음을 지켜낼 수 있다. 하지만 사마디는 잠복해있는 잠재적 성향의 번뇌에 대해서는 속수무책이다. 번뇌의 뿌리를 뽑아내기 위한 사마디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 마음을 한 곳으로 모아 얻어지는 고요함을 넘어서는 지혜가 필요하다. 지혜의 증장은 번뇌의 뿌리를 뽑기 위한 유일한 노하우이다.

  

  지혜의 칼을 갈아라

  세상에 도 닦는 사람은 많다. 그들은 왜 도를 닦는가? 본인이 명상을 한다고 하면 많은 이들이 이렇게 묻는다. ‘혹시, 공중부양이 되느냐’고... 그들의 탓이 아니다. 도 닦는 많은 사람들이 그러기 위해 도를 닦는다. 구름과 비를 부를 수 있을 만큼 도가 높아지고 싶어 한다. 돌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는 소식, 본인은 그것이 뭔 소식인지 모르겠다.  

 

  “누군가 설법으로 구름과 비를 부르고 돌사람이 고개를 끄덕여도 생사를 끊지 못하는 그 지혜가 허망하고 허망하다.” (부설거사)   

 

  부설거사는 신라시대 마음을 닦던 수행자이다. 본래 비구였는데, 인연의 무거움을 물리치지 못하고 여염의 처자와 혼인하여 아들딸을 낳고 세속에서 살았다. 하지만 수행이 출가 여부에 있지는 않은가 보다. 본인은 물론 아내와 아들, 딸까지 모두 깨달음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전라도 부안 땅 내변산에 있는 월명암이라는 암자가 바로 부설거사의 수행터였다고 전한다. 부설거사의 사무치는 이 게송은 생사를 끊어내는 지혜의 수승함을 웅변으로 말하고 있다. 번뇌를 뿌리까지 끊어내는 지혜는 칼에 비유된다. 

  

  임제선사가 어떤 중에게 물었다. “어떤 때 할은 금강왕의 보검과 같고, 어떤 때 할은 대지에 웅크려 앉은 황금빛 털의 사자와 같으며, 어떤 때 할은 탐간영초와 같으며, 어떤 때 할은 할의 작용을 하지 못하나니 그대는 이걸 아는가?” 그 중이 뭔가 말하려 하자, 임제선사는 바로 할 하셨다.(임제록, 감변 33)

 

  할은 말로 할 수 없을 때 상대방을 깨우쳐주는 ‘크게 소리 지름’이다. 탐간영초는 시냇물에 그늘을 만들어 물고기를 꾀어 잡는 장치이다. 임제록의 위 구절은 매우 유명한데 깨우치지 못한 자를 깨우쳐주는 할의 품질을 네 가지로 분류하고 있는 대목이다. 

 

  지혜는 ‘金剛王의 寶劍’과 같다. 견고한 금강석으로 만든 보검은 아무리 견고한 것이라도 깨부술 수 있다. 번뇌를 뿌리까지 파내기란 마음의 집중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지혜를 닦아 지혜의 힘을 키워야 한다. 그래서 지혜는 빛에 비유된다.

  번뇌의 뿌리는 모하(어리석음)라고 한다. 모하를 새까만 옻, 모하의 덩어리인 자아를 옻통에 비유한다. 옻통 같은 시커먼 어둠 속에서 나고 죽고 고통 받는 것이 중생의 삶이다. 모하는 어둠이다. 한 줄기 빛이 어둠을 몰아내듯 지혜는 모하의 어둠을 몰아낸다. 그래서 지혜는 곧 ‘어리석음 없음’으로 정의될 수 있다.

 

  사마타와 위빠사나 

  번뇌가 세 계층으로 돼있다는 붓다의 통찰과 계, 정, 혜 三學으로 팔정도를 해석한 붓다고사의 주석은 엄밀한 대응관계를 이루고 있다. 즉 다시 말하면 행동으로 나타나는 번뇌는 계율로 단속하고, 마음에 떠오르는 번뇌는 사마디를 닦아 제어할 수 있다.

 

  하지만 번뇌의 뿌리, 잠재적인 번뇌는 통찰지를 통해서만 제거가 가능하다. 마음을 한 대상에 집중해 사마디를 얻는 수행을 사마타라고 한다. 수행은 그래서 사마타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통찰지를 얻기 위한 수행, 즉 위빠사나를 닦아야 한다.

  청정도론에서 붓다고사는 사마타 수행이 위빠사나 수행을 위한 예비단계의 수행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번뇌를 완전히 멸하기 위해서는 아비담마에 근거해서 마음을 안으로 들여다보고 번뇌를 꿰뚫어야 한다. 그러나 마음의 집중 없이 위빠사나도 불가능하다고 붓다고사는 주장한다. 마음의 집중 없이 어떻게 미세한 번뇌를 관찰하고 찾아내어 꿰뚫을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사마타를 먼저 닦은 다음 위빠사나를 닦아야 하는가? 사마타를 수행하는 수행처(미얀마 파옥이 대표적이다)에서는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가르친다. 위빠사나 수행처들은 사마타 수행이 위빠사나 수행에 도움이 되겠지만 꼭 그래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사마타 수행으로 어느 정도의 사마디를 얻으려면 수많은 세월을 닦아야하기 때문에 사마타를 거쳐 위빠사나로 오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사마타 수행을 마치고 위빠사나를 수행하는 수행자를 여지껏 본 적이 없다고까지 말한다.)

  사마타 수행자들은 사마디 없는 위빠사나를 ‘마른 위빠사나’라고 폄훼한다. (이는 청정도론의 용어이기도 하다.) 위빠사나 수행자들은 사마타 수행을 거치지 않는다는 뜻에서 ‘순수 위빠사나’라고 부른다. 그리고 위빠사나 수행에 사마디가 결코 없지 않다고 가르친다. 관련된 여러 주석서들이 위빠사나 수행에서도 사마디가 얻어진다고 설명하며 이를 ‘찰라 사마디’라고 명명한다. 

 

  사마타 수행처에서도 사마타 수행을 통해 얻어지는 네 개의 사마디에 늘 사띠가 있기 때문에 사실은 사마타에서 위빠사나를 닦고 있는 것이고, 두 수행이 사실상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고까지 주장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어디까지나 대립 관계가 아니며 상보적인 관계라는 점이다.

 

  수행의 역사에서 이런 논란들은 자리를 옮겨 중국에서도 전개된 적이 있다. 천태종에서 사마타를 ‘止’로 위빠사나를 ‘觀’으로 번역하고 정착되었다. 이후 육조혜능의 법보단경에서 독창적 사상이 출현하는데, ‘定慧雙修’의 사상이 그것이다. 정혜쌍수는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는다’는 뜻이다. 조계선종의 수행론은 이 사상의 계승이다. 이런 배경에서 마조, 백장, 임제, 조주 등 기라성 같은 선종의 인물들이 출현하게 되는 것이다.

 

  “너희 자신의 섬이 되어라.”

 

“너희가 너희 자신의 섬이 되어라.

너희가 너희 자신의 의지처가 되어라.”

(대반열반경)

 

  붓다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부모가 길을 떠나며 사랑하는 자식들에게 남기는 당부 같은 파토스가 짙게 묻어있다. 짧지 않았던 연재의 마무리 단계에서 떠오른 경구가 바로 이것이다. 본인의 경우 주어진 한 토막의 삶을 사실상 거의 살아버린 처지이지만 이 경구는 여전히 남은 에너지를 결집시키는 힘이 있다. 게으르지 말고 스스로 노력하고 스스로 비추어 길을 가라는 붓다의 격려가 따뜻하다. 붓다는 ‘게으름’이라는 말에 다음과 같이 코노테이션을 부여한다. 

 

“애써 노력하지 않는 게으른 자, 젊고 힘은 있지만 게으름에 빠져있는 자, 결단력과 생각이 모자란 자, 그런 나태하고 게으른 자는 지혜의 길을, 깨달음의 길을 찾을 수 없으리라.”(법구경)

 

  붓다의 격려에 그의 많은 제자들이 가진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그가 간 발자국을 따라 밟았다. 무려 2천5백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의 제자들이 제자들에게, 그 제자들이 자신들의 제자들에게. 그렇게 가르침은 끊이지 않고 전해졌다. 세계가 좁아질수록 가르침의 영역은 오히려 넓어졌다. 달마가 서쪽으로부터 중국에 와서 한국과 일본에도 그 법이 전해졌듯이, 이제 많은 달마들이 세계 곳곳을 누비고 다닌다. 지혜의 길, 고통과 번뇌에서 벗어나는 길에 자신들이 전해 받은 가르침의 빛을 비춰준다. 붓다의 발자취를 따라가면서 제자는 생각한다.

 

“가죽과 힘줄과 뼈만 남을지라도, 피와 살이 말라붙을지라도 결단코 나는 이 추구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청정과 깨달음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맛지마 니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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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18년05월19일 20시31분
  • 최종수정 2018년05월19일 21시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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