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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직기자의 유쾌한 명상체험기 ‘쉐우민 이야기’ 일곱 번째 이야기 수행자들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7년08월05일 16시50분

작성자

  • 김용관
  • 동양대학교 교수(철학박사), 전 KBS 해설위원장

메타정보

  • 37

본문

 

센터의 멋쟁이들 

  인간의 심연에는 동류의식 못지않게 인간혐오의 감정이 자리 잡고 있다. “타인은 나의 지옥이다”라는 사르트르의 말을 나는 그렇게 이해한다. 자비라는 미덕의 대척점에는 타인에 대한 원인 모를 혐오와 분노가 있다. 인간은 한데 섞여 살아야 하지만 가끔은 서로를 떠날 필요가 있다. 혐오와 분노를 더 키우지 않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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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떠나온 사람들 - 스스로 자신에게만 골몰하는 센터 생활에서 각각 더 잘 드러나 보인다는 사실은 참 역설이다. 센터생활이 일주일 쯤 지나다보면 사람 하나하나가 두드러져 보인다. 서로가 서로에게 투명한 수족관처럼. 그들 가운데 특별히 두드러져 보이던 몇 사람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푸른 눈의 몽크들. 대체로 잘 생긴 용모에 갈색 가사를 걸치고 하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다. (블랙맨 몽크는 한 사람도 없었다는 사실은 아직도 수수께끼다.) 금강경 첫 머리를 연상케 하는. 수보리... 편단우견 우슬착지 이백불언..... (수보리 존자가...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 쪽 무릎을 꿇고 부처님께 말하기를...)  그들 중 젊은 시절의 찰톤 헤스톤처럼 생긴 몽크가 있었다. 경행 시간, 길 한 편에서 동료 몽크와 담소하며 웃는 모습이 일품이었다. 

  동남아 어딘가에서 온 듯한 스님. 70은 족히 넘었을 법한 나이, 수행의 기품을 몸에 지니고 있는 노장이었다. 깡마른 체구에 큰 키, 형형한 눈 빛. 그는 좀처럼 선방을 비우지 않았다. 선방 안을 경행할 때 멋스러움은 더 드러난다. 흐느적 흐느적 천천히. 지금 나는 그 걸음걸이를 이미지는 기억하지만 흉내 낼 수는 없다. 중국의 경극 평론가들은 경극배우 가운데 서있는 자세가 가장 멋진 배우도 꼽는다지? 경행의 그 멋진 걸음도 한 평생의 수행에서 나올 수 있었겠지? 수 십 년 법랍을 거쳐 치른 자신과의 전쟁의 역사가 그에게서 엿보였다. 이 노장은 한 열흘 수행하다 홀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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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방 맨 앞에 앉아 꿈쩍도 않고 좌선하던 젊은 미얀마 몽크. 4시 선방 청소시간이면 물걸레를 도맡았다. 그는 선방에 입장할 땐 보무당당한 걸음걸이가 눈에 띠었다. 탁발 시에는 맨 앞에서 탁발행렬을 이끌었다. 맨발의 그가 형형한 안광을 쏟으며 탁발을 도는 모습을 보면 신심이 절로 났다. 

  머리를 깎지 않고 수행하는 서양의 요기 가운데는 머리를 길러 뒤에 쪽을 지고 청색 머리끈으로 멋들어지게 묶어 멋을 부린 이도 있었다. 잘 생긴 용모에 큰 키의 그는 미얀마 치마, 론지가 묶은 머리와 잘 어울려 한 소식 한 도사처럼 보였다.

  내 바로 앞에서 정진하던 미국인 요기. 가부좌가 어려운 듯 그는 무릎을 꿇고 엉덩이와 종아리 사이에 작은 받침대를 받쳐 넣고 좌선했다. 내게는 신기하게만 여겨졌던 그 자세가 그의 몸에 착 붙은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그는 그 자세로 자신의 세계를 스스로 만들어 가고 있는 듯했다.

  빨간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좌선하던 50대. 동양계이면서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던 그를 나는 미국 이민 3세쯤으로 여겼다. 밤 시간 모기장 속 의자에 앉은 그는 마치 로뎅의 조각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어느 날 새벽 그가 혼자 숙소 청소를 다 한다. 숙소 지역별로 당번이 정해져있는데도, 혼자 복도, 화장실, 계단을 쓸고 닦고, 슬리퍼들을 모아 비누칠해 씻고. 그리고 그날 그는 떠나갔다. 나중에 룸메는 그가 페낭 사는 말레이시아 화교라고 알려주었다. 

  이들에 대한 기억이 내게 아직 여운처럼 남아 있다. 그리고 이 기억은 내 마음 깊숙이 자리 잡고 있을 인간에 대한 혐오의 감정을 앞으로도 얼마간 씻어줄 거다.   

 

 

  생생정보통

  그는 10년째 대학을 다니고 있는 서른 살 청년이다. 그 10년 세월 중 상당 기간을 미얀마에서 보냈다고 한다. 미얀마에서 수행하고 동남아 각지를 여행하며 삶을 배워가고 있다. 쉐우민에는 처음 왔다는데, 마하시, 찬메 등 다른 수행처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미얀마에 대해 모르는 게 있으면 그에게 가서 물으면 정답이 나온다. 수행을 마친 뒤 여행계획을 짜는 데도 그의 경험을 적잖이 빌렸다. 조언대로 나는 양곤과 바간과 인레를 여행했다. 여행지의 개요, 숙박과 교통 사정, 택시요금 흥정하는 법, 물건 깎는 법, 꼭 사야할 특산물 등을 꼼꼼하게 가르쳐 주었다. 양곤의 쉐다곤은 무조건 가장 먼저 가야할 곳, 차욱탓지 와불과 깐도지 호수는 시간 있으면 들를 곳, 인야 호수는 너무 커서 구경 포인트 잡기 어려운 곳, 양곤 대학은 외국인의 출입을 통제하는 곳... 등등의 정보를 쏟아냈고 하나하나 내게 도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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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 지리, 통신사정 뿐 아니라 다른 수행처의 규율과 수행법에 대해서도 그는 많은 것을 경험을 통해 안다. 특히 미얀마에 처음 온 수행자들에게 많은 것을 가이드 한다. 그런 그를 나는 ‘생생정보통’으로 명명한다.

  수행자들 중에는 수행처를 살며시 빠져나와 양곤 시내를 구경하는 경우가 있다. 무단이탈의 가이드가 ‘생생정보통’이 된다면 최상이다. 누구나 보고 싶어하는 쉐다곤, 북한식당의 냉면, 그리고 발맛사지까지 세트로 체험하고 해 지기 전 슬그머니 복귀할 수 있는 코스가 되리라. 

  나도 그의 신세를 진 적 있다. 바간 여행을 위한 항공권을 사기 위해 시내를 나가면서 도움을 받았다. 센터에 들어온 지 20일만의 외출, 아마 혼자였다면 정문을 나서자마자 무척 헤매지 않을 수 없었을 거다. 문밖을 나서자 그는 오토바이 기사부터 찾았다. 오토바이 택시를 타고 큰 길까지 나가야 택시를 탈 수 있단다. 그가 값을 흥정했다. 500짯, 우리 돈 500원. 오토바이 꽁무니에 매달려 5분 남짓 달렸다. 택시비를 흥정해 택시를 타고 양곤 시내로 향했다. 비행기표를 사고, 냉면을 먹고, 발맛사지를 받았다. 수행기간 중 유일한 일탈인 셈이다. 

  하루를 함께 돌아다니면서 많은 얘기를 주고받았는데, 그와 나는 대학 동문이었다. 32년 후배, 아들 같은 후배였다. 귀국 한 다음 학기에도 그는 등록하지 않았다. 지리산 모처에서 수행을 계속하겠다고 했다. 아마도 그는 그해 남도의 봄을 좌선과 경행으로 보냈을 것이다.   

 

  늙은 요기들

   “타 하오샹 스 컨더지 예예.” 공양을 위해 늘어선 줄에서 샤오 류가 속삭인다. 샤오 류, 곧 미스터 류는 중국 난징에서 온 30대 수행자다. 나와는 매우 잘 지낸다. 센터에는 중국인 수행자가 딱 두 사람인데, 다른 한 사람은 베이징에서 왔다. 

  옛날부터 북경과 남경은 영~ 기질이 맞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중국어로 의사소통이 되는 내게 그는 퍽 곰살맞게 대한다. 그가 내게 한 말은 “그 사람 꼭 켄터키 치킨 할아버지처럼 생겼어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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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캔터키 치킨 할아버지’는 미국에서 온 할아버지 요기다. 70은 된 듯하다. 커다란 몸집을 하고 카이젤 수염을 하얗게 길렀다. 푸른 눈의 이 할아버지 요기는 큰 몸집을 빨간 플라스틱 레저 의자에 맡기고 앉아 명상을 한다. 새벽 타임부터 밤 타임까지 선방의 좌선을 빼먹는 법이 거의 없다. 탁발에도 거의 매일 따라 나선다. 그가 누군가와 얘기하는 장면을 본 적이 없다. 

묵묵히 자신의 내면을 주시하는 수행자의 전형이다.

  아기의 미소를 지닌 미얀마 사나이. 내 나이쯤 되는 그는 나와 마주칠 때마다 내게 천진하게 웃어준다. 복도에서, 경행대에서, 세면장에서. 세속에선 누군가의 할아버지일 그를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찌들지 않고 나이 먹을 수 있는, 나이 듦 속에 간직한 천진함의 노하우를 배우고 싶어진다. 어느 날 저녁 그가 느닷없이 내게 말했다. 미소 아닌 목소리로. 

  “투멀로우 모닝 아일 고 홈” 느닷없는 작별인사인 셈이다. 

  “하우 롱 타임 유 해브 빈 히어?” 내가 묻고 그가 답했다. “원 먼스”. 

  “훼어 이즈 유어 홈?”, “니어 양곤”. 

  그렇게 헤어졌지만, 그가 짓던 아기 같은 미소는 내 기억 속에 남았다.

  나이 든 수행자 가운데는 몸이 불편한 사람이 적잖았다. 거구의 한 미얀마 수행자는 세파에 찌든 표정을 하고 있었는데, 몸 한쪽에 마비를 겪는 듯했다. 선방 내 자리 바로 뒤에 앉아 좌선했다. 그가 가부좌를 하면 오른쪽 다리가 바닥에서 한참 떨어져서 다리를 세우고 있는 것처럼 보였고 오른쪽 어깨가 덩달아 위로 치솟은 형상이었다. 좌선할 때 조는 일이 많았고, 경행 시에도 발을 절었다. 그러면서도 좌선시간을 빼먹지 않았다.

  오랜 기간 수행한 영어권 노인 한 분은 운신이 잘 되지 않아서 샤워장에 들어갈 때 플라스틱 의자를 들고 들어갔다. 이런 몸을 끌고 열 시간 비행기를 타고 미얀마까지 와서 어려운 스케쥴을 석 달씩이나 소화하고 어느 날 그는 떠나갔다.

  쉐우민 센터의 수행자들 가운데 가장 눈에 띠는 사람들은 이런 노인들이다. 그때마다 나이는 들었지만 아직 내 몸이 성하다는 사실에 고맙고 행복하다. 그들은 한결같이 무언으로 외치고 있었다. “젊은이들이여! 삶은 길지 않다”라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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