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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국가흥망의 교훈#4D : 유송의 멸망과 소도성의 제(齊) 건국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7년05월11일 17시07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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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1> 소도성의 정권장악(AD474)

 

유휴범 반란군의 총사령관 두흑나와 정문호가 체포되어 참수됨으로써 유휴범의 반란은 가까스로 진압되었다.(AD474년5월24일) 이번 반란의 진압으로 정권의 실세는 네 명의 귀인(四貴)에게로 돌아갔다. 원찬, 저연, 유병 및 소도성이다. 진압의 수훈을 세운 소도성에게는 중령군 및 남연주자사라는 직위가 주어졌고 건강수비의 책임을 떠맡게 되었다. 사실상의 군사적 실권자가 된 셈이다.                                            

     

<2> 형주를 장악하고 있는 심유지의 징소

 

수도 건강을 소도성이 장악하게 되자 유송 정부의 또 다른 군권실세인 심유지의 행동에 촉각을 세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시 형주자사 심유지는 장강의 상류지역을 장악하고서 장강 하류에 있는 건강의 유욱 정부를 무너뜨릴 수도 있는 힘을 가진 실세였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를 조정으로 불러 내직을 주어 군권을 빼앗는 것이었다. 조정에서 심유지를 소환하기로 했다. 그러나 아무도 심유지 징소에 동의하려하지 않자 결국 왕태후의 명령을 빌어서 편지를 보냈다. 심유지가 순순히 응할 리가 없었다.

 

“ 신은 낭묘(廊廟, 조정과 같은 뜻)의 자질은 없는 듯합니다.

  중앙에 있어 본 경험으로 볼 때

  조정 직에 걸맞은 재주가 없음을 확실히 깨달았습니다.

  만족이나 탄족과 같은 야만족을 때려잡아

  장강과 한수를 깨끗이 하는 일은 자신 있게 할 수 있습니다.“  

 

심유지는 끝내 소도성과 유송 조정의 징소에 응하지 않았다.  

 

<3> 장경아와 심유지

 

소도성에게는 장경아라는 경박한 부하장수가 있었는데 끈질기게 양양 땅을 관리하겠다고 요구하면서 말했다.  

 

  “ 심유지가 형주에 있을 때

    공께서는 이미 그가 무엇(반란을 의미)을 하려고 했는지 알았을 것입니다.

    제가 그곳에 가서 미리 제압하지 않으면

    공께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함을 왜 모르십니까? “

 

양양은 심유지가 다스리고 있는 형주의 북쪽 지역으로써 유송에게는 매우 중요한 요충지였다. 소도성은 웃기만 할 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서 몇 달을 보냈다. 한 참 후 소도성은 장경아를 양양이 소재한 옹주자사로 내보냈다. 심유지는 장경아가 옹주로 부임한다고 하자 곧바로 침입에 대비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장경아는 옹주에 도착하자마자 심유지에게 공손하게 행동하며 모든 것을 물어 자문을 구하였고 때에 맞추어 선물을 보내며 심유지의 환심을 샀다. 장경아에 대한 경계심을 완전히 떨어버린 심유지가 장경아에게 사냥을 같이 가자고 제안하자 장경아는 이렇게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 마음속으로는 그러고 싶으나

  눈이 안팎으로 많으므로

  행동을 극히 조심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심유지는 그런 장경아를 더욱 믿게 되었다. 마침 소도성이 장경아를 옹주에서 다른 주로 옮기려 하면서 심유지에게 추천을 부탁하자 심유지는 곧바로 소도성의 편지를 장경아에게 보여 주었다. 소도성의 속내를 장경아에게 드러내 보이려 한 것이다. 말하자면 소도성의 장경아에 대한 신뢰감이 깊지 않다는 것을 보여 줌으로써 자기 쪽으로 끌어 드리려는 이간질인 셈이다.

     

 

<4> 유경소의 반란 무고

 

남서주자사 건평왕 유경소는 태조 유의륭의 손자로써 효성이 지극하고 우애가 깊었으며 청렴하고 소박 검소했다. 평판이 매우 좋았으므로 태종 유욱(劉彧) 또한 가까이하며 예우와 녹질을 크게 높였다. 새로 황제가 된 흉악한 황제 유욱(劉昱)은 그런 건평왕 유경소를 매우 질투했다. 게다가 전 황제 명제 유욱이 살아있을 때 측근으로써 권세를 부리던 완전부, 양운장 등도 민심의 지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유경소를 탐탁지 않게 생각해서 은근히 제거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유경소나 그의 측근 또한 그런 움직임을 모를 리가 없었다. 유경소의 제장들 중에서 선제공격을 감행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유경소는 그런 제장들의 반란 종용이 전혀 기쁘지가 않았다.

 

때마침 부하 장수중에 왕계부란 자가 죄를 짓고는 건강으로 도망쳤다. 그리고는 유경소가 조정에 대해 반란을 계획하고 있다고 무고했다. 양운장은 이 때야 말로 유경소를 제거할 적시라고 생각하고 군사를 일으키자고 종용했다.

 

소도성과 원찬은 반대했다. 반란 여부가 확실하지도 않고 또 조정이 안정을 찾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므로 또다시 국가가 변란에 휩싸이면 안 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유경소는 아들 유연령을 보내 사실대로 진술했고 유경소는 정북장군 직만 박탈당하고 남서주자사직은 계속 유지했다. 참소한 왕계부는 유배되었다. 이곳저곳에서 죄를 지은 왕계부를 죽이지 않은 것은 건강 정부 또한 유경소의 반란의지를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5> 유경소의 반란(AD476)과 진압

 

양운장과 완전부의 유경소에 대한 시기는 가라앉지 않았다. 당시 황제 유욱은 13세 어린아이에 불과했으므로 조정 내부의 전권은 이들이 쥐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유경소는 측근 은미, 원경연, 심옹, 좌훤 등과 함께 대책회의를 열었다. 소도성의 반란 진압 후 제대로 포상 받지 못했다고 소외감을 느낀 수많은 장수들이 유경소의 진영에 들어와 있었고 이들은 하나같이 한 판 쿠테타로 싹쓸이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 제 장수들은 황제가 야외 행차 할 때를 기하여 독자적으로 황제와 소도성 제거 계획을 세웠다. 유경소는 번번이 이들을 막아서며 막았다. 그러기를 반복하는 사이에 완전부와 양운장이 유경소 부장들의 거사계획을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 양운장과 완전부는 거꾸로 밀사 주천석을 유경소의 밑으로 들여보내 적극적으로 군사행동을 부추기도록 하였다. 그래야 유경소를 소탕하는 명분이 생기기 때문이었다. 유경소는 주천석의 계획을 미리 알게 되어 그를 체포하고 처형했다.

 

AD476년 7월 우림(황실호위)장군 원지조가 500의 군사와 함께 급히 건강을 빠져 나와 유경소에게 보고했다. 수도 건강이 위태로우니 즉각 들어가 진압을 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유경소는 서둘러 군사를 일으키고 조정을 타도한다는 군사반란을 일으켰다.(7월 1일)

 

양운장과 완전부는 토벌의 총책임자로 단불영을 임명하고서 임농부, 황회, 이안민, 장보를 보내 유경소 반란 진압에 나섰다. 황회는 평소에 두 마음을 지니고 있었음으로 소도성은 단불영에게 특별히 직접 황회를 감독하게 하였다. 정부군은 약하기도 하고 또 싸울 생각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유경소와 내통하던 황회가 유경소의 진강성문으로 무혈입성한 뒤 유경소를 붙잡아 관군 장예노에게 양도함으로써 반란은 싱겁게 끝이 나고 말았다. 유경소를 절대 죽이지 않기로 약속하고 양도받은 장예노는 즉시 유경소와 그 세 아들을 모두 참수해 버렸다. 소도성은 두 마음을 품었던 황회를 용서했다. 그러나 유경소의 다른 부장 고도경은 죽음을 내렸다.(9월2일)  

     

 

<6> 혼군 유욱과 완전부의 모반시도(AD477)

 

황제 유욱은 어릴 때부터 미행을 즐겨 나갔다. 평복을 하고 거리를 다니면서 백성들 물건을 뺏기도 하고 맘에 안 드는 사람을 거리에서 잔혹하게 죽이기도 하고 또 마음에 드는 사람을 납치하기도 했다. 이런 일이 잦아지자 거리에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시장이 문을 닫고 열리지 않아 민심이 매우 흉흉해 졌다.

 

아무리 황제 곁에서 권세를 부리는 완전부라 할지라도 이런 황제가 오래 계속된다면 자신에게 유리할 것이 전혀 없다는 것쯤은 모를 리가 없었다. 완전부는 신백종과 함께 황제가 꿩 사냥을 나가는 틈을 타서 왕태후의 명을 가장하여 황제 유욱을 체포하고 폐위시킬 것을 모의했다. 계획이 탄로가 나 완전부와 신백종은 처참하게 살해되었다.(AD477년4월21일) 아마 완전부에게 원한을 갖고 있었던 내부의 밀고였을 가능성이 크다. 완전부와 공모했다고 의심이 가는 사람들은 모두 죽였다.

 

 

<7> 왕태후 독살시도

 

유욱 황제는 이참에 잔소리가 많은 왕태후도 독살할 계획을 세웠다. 난감해진 시중이 묘한 꾀를 생각해 내고서 유욱에게 이렇게 말했다.

 

“ 만약 이 일이 성공하면

  효자이신 폐하께서 오랜 기간 상을 치러야 하실텐데

  그리되면 꿩 사냥이나 미행은 어떻게 할 수가 있겠습니까?“

       

유욱이 생각해보니 참으로 그럴듯했다. 유욱은 왕태후 독살계획을 포기했다.

 

 

<8> 유욱의 소도성 살해음모

 

황제 유욱의 나이가 장성해 짐에 따라 자신은 꼭두각시에 불과하며 조정의 전권은 소도성이 쥐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열네 살 유욱은 불쑥 영군장군 소도성의 사령부에 들어가서 소도성의 배에다 과녁을 그려 놓고는 활을 쏘는 시늉을 했다. 깜짝 놀란 소도성이 이렇게 외쳤다.

 

“ 노신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전에도 유욱은 소도성에게 활을 겨눈 적이 있었는데 생모 진씨가 말려서 그만 둔 적이 있었다. 좌우에 있던 왕천이 황제에게 말했다.

 

“ 영군장군의 배는 넓고 펑퍼짐하여 살받이로 딱 좋긴 합니다만

  지금 그를 죽여 버린다면 다시는 살받이로 쓸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니 쏘아도 죽지 않는 활을 가지고 쏘셔서

  두고두고 화살받이로 사용하시는 것이 더욱 현명한 일 아니겠습니까?“

 

유욱 황제가 화살 끝이 없는 화살을 쏘아 소도성의 배꼽을 맞추고는 이렇게 말했다.

 

“ 내 솜씨가 어떠냐? ”  

 

이 일 이후로 근심에 쌓이게 된 소도성은 원찬과 저연과 함께 진심으로 황제 유욱을 몰아내어야한다고 생각했다. 원찬은 이렇게 말했다.

 

 “ 나이가 어려서 하는 경솔한 행동은 고칠 수가 있는 법입니다.

   이윤과 곽광이 새 황제를 갈아치운 것은 세상이 말세여서 그런 것이지

   지금과는 다릅니다.

   또 설혹 갈아치운다 하여도 지금보다 나아진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저연은 아무 말이 없었다. 공조 기승진은 이렇게 말했다.

 

“ 어떻게 앉아서 당하시기만 하려하십니까? ”

 

소도성은 청주 및 기주자사 유선명에게 도움을 청했다. 유선명은 건강을 떠나지 말고 때를 기다리라고 권했다. 친척 동생 소순지와 소역은 황제가 혼자 다니기를 좋아하니 그 때를 틈타 제거하는 것이 적격이라고 제안했다. 지방에서 반란군을 일으키는 것은 매우 불안하고 번거롭기만 하다는 것이다. 소도성은 지방군을 일으켜 모반을 일으킬 생각을 버렸다. 그리고는 측근 왕경칙에게 황제의 동태를 면밀히 살피도록 지시했다.

 

 

<9> 황제 유욱의 피살(AD477년)

 

황제 또한 측근 양옥부, 양만년 및 진봉백 등과 함께 소도성을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황제는 미행한다고 하면서 야밤에 무리를 이끌고 소도성의 영군장군부 담벼락에 모였다.(AD477년 7월6일) 주변의 측근들이 왜 담을 넘지 않느냐고 독촉하자 황제 유욱은 내일 저녁까지 기다리자고 했다. 이들의 대화를 원외랑 환강이 몰래 듣고 바로 소도성에게 보고했다. 담 밑에 숨어있던 황제 무리들은 지나가는 개를 잡아먹고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 황제가 평소 아양으로 비위를 지나치게 잘 맞추는 양옥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 내가 내일은 저 간사한 양옥부 놈을 죽여 폐와 간을 꺼낼 것이다.”

 

날이 어두워지자 황제가 양옥부에게 이렇게 물었다.

 

“ 가서 직녀성이 은하수를 건넜는지 안 건넜는지 보고와라.

  직녀성을 보는 즉시 내게 보고해라.

  만일 보이지 않거든 그 때엔 너는 죽을 것이다.“  

 

아무리 황제의 시중이라지만 양옥부로써는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고 두려움이었다. 양옥부는 양만년을 설득시켜 잠든 틈을 타서 방신도(防身刀) 칼로 황제 유욱을 죽였다.(AD477년 7월7일) 진봉백이 잘린 유욱의 머리를 왕경칙에게 전달했고 왕경칙은 곧바로 소도성에게로 달려갔다. 소도성이 왕경칙의 말을 믿지 못하자 유욱의 목을 담장 너머로 던져 보여 주었다. 소도성과 왕경칙이 날이 밝자 즉시 궁으로 들어가 황제가 피살되었음을 공식 발표했다.    

 

 

<10> 소도성의 황제폐위와 유준옹립(AD477)

 

다음날(7월8일) 조정에서는 대책회의가 열렸다. 원찬, 저연, 유병, 왕경칙 등이 참석했다. 다들 눈치를 보느라 아무도 입을 열지 못했다. 왕경칙이 외쳤다.

 

“ 천하의 일은 응당 소공(소도성)에게로 귀결하는 것입니다.

  만약 반대하는 자가 있다면

  결단코 이 칼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오! “

 

소도성이 그를 꾸짖으며 말렸다. 저연이 말했다.

 

 “ 소공(蘇公, 즉 소도성)이 아니면 아무도 이 일을 마무리하지 못할 것이요.”

 

저연이 소공에게 황제 결정권을 건네주자 소도성이 말했다.

 

“ 모두 내게 위임하시니 내가 어찌 사양할 수가 있겠소.

  안성왕 유준(劉準)을 모셔서 황제로 옹립하도록 합시다.“

 

당시 열 살 안성왕 유준은 유휴범의 아들이고 죽은 유욱의 사촌 동생이었다. 역사상 유송의 마지막 황제로 순제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황족이었던 유병이 회의를 끝내고 궁 밖으로 나오자 그의 가족들이 왜 계승받지 않았냐고 항의했지만 그도 별수가 없었다. 죽은 유욱은 황제에서 깎여 창오왕으로 강등되었다.

 

 

<11> 심유지의 반란(AD477년)

 

유욱의 피살 이후 소도성은 최고위직인 사공에 부임했고 원찬은 중서감, 유병은 상서령, 그리고 저연은 개부의동삼사가 되었다. 원찬은 소도성에게 다른 마음이 있음을 꿰뚫고 있었으므로 소도성을 제거할 생각을 품고서 동지를 몰래 규합하고 있었다.

 

또 한편으로 형주자사 심유지도 매우 불편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소도성의 딸이 자신의 며느리였으므로 소도성과 심유지는 혼인으로 엮인 관계였지만 심유지의 측근은 계속해서 소도성을 제거해야 한다고 독촉했다. 사실 죽은 명제 유욱은 심유지에게 비밀약속을 이렇게 한 적이 있었다.

 

“ 이 나라 사직을 오로지 당신에게 위임하오.(社稷之事一以委公)”

그런 부탁을 받은 심유지로써는 소도성이 사실상 정권을 탈취한 것을 가만히 둘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심유지는 사신을 보내 전국의 자사들에게 격문을 띄워 보냈다. 심유지의반란에 반대하는 옹주자사 장경아와 예주자사 유회진은 심유지의 사신을 즉시 목을 베고 조정에 보고했다. 그러나 나머지 자사들은 심유지와 소도성 사이에서 양다리 작전으로 우물쭈물 거리기만 했다. 심유지가 소도성에 이런 편지를 보냈다.

 

“ 내가 어떻게 신포서(申包胥)의 절개를 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신포서는 초나라 장수로써 진(秦)의 군사를 빌려 초나라를 구한 영웅이다. 말하자면 소도성의 정권 찬탈을 묵과할 수 없으니 타도의 전쟁을 벌이겠다는 뜻이었다. 소도성의 측근 또한 심유지를 제거해야 한다고 졸라댔다. 심유지의 건강 공격은 결국 패하고 심유지와 아들 심문화는 나무에 목을 매고 자결했다.(AD478)  다음 해에 소도성은 유준에게 선양을 받아 유송을 멸망시키고 제(齊)나라를 건국하고 황제에 등극하였다.(AD478년 4월20일) 이로써 AD422년 유유에 의해 건국한 유송은 건국 56년 만에 망하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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