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려있는 정책플랫폼 |
국가미래연구원은 폭 넓은 주제를 깊은 통찰력으로 다룹니다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통합이냐 분열이냐,국가흥망의 교훈#4C : 유욱의 잔학한 폭정과 유휴범의 반란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17년05월04일 17시39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37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1> 유송(劉宋) 7대 황제 명종 유욱(劉彧)의 사람됨  

 

AD465년 반란을 일으켜 황제 유자업을 제거하고 황제에 오른 유송 7대 황제 태종 명제 유욱(劉彧,AD439-AD472)은 중종 문제 유의륭의 넷째 아들로써 폐위된 황제 유자업과 구강에서 반란을 일으킨 유자훈의 친삼촌이다. 상동왕으로 있을 때부터 관용과 온화함으로 널리 칭찬이 자자하여 형 세조 유준(유자업, 유자훈의 아버지)이 평소 가까이서 아끼던 사람이었다. 유욱은 유자훈의 반란을 수습한 뒤 의가의 난에 참여했던 장수들을 거의 모두 용서하고 능력에 따라 등용시켰으므로 천하는 다시 평온을 찾아 가는 듯 했다.

 

그러나 유욱의 선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황제가 된 지 5년이 지나자 유욱은 폭군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시기에 사로잡히고 잔학해 졌으며 귀신을 의식하면서 꺼리고 피하는 일이 수천가지가 되었는데 조금이라도 이를 어기면 가차 없이 처형했다. 자신이 낳은 아들이 없었으므로 아이를 밴 황실 종친 왕의 희첩을 궁으로 납치하여 아들을 낳으면 아끼는 첩의 아들로 삼고서 낳은 어미를 죽였다.   

 

 

<2> 유욱의 형제 살륙 : 유휴우와 유휴인과 유휴약 (AD471)

 

이런 유욱(劉彧, AD439년생)이 서른 두 살이던 AD471년 병이 들었다. 태자 유욱(한자가 다른 유욱,劉昱)이 9살 이었으므로 유욱은 황위계승에 위협이 되는 장성한 여러 황실 이복동생들을 매우 꺼려했다. 이들 중에서도 건안왕 유휴인(AD443년생), 서주자사 진평왕 유휴우(AD445년생), 형주자사 파릉왕 유휴약(AD448년생)이 매우 거슬렸다. 서주는 유송의 북쪽 국경을 담당하는 지역으로 요충지였는데 서주자사 유휴우는 황제 유욱의 뜻을 여러 번 거스른 적이 있었으므로 그가 거칠고 포악하다는 평판을 빌미로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연 초 제사 때가 되어 수도에 온 기회에 유휴우를 건강에 머물게 한 뒤 사냥을 같이 나가서는 폐신(嬖臣, 즉 지극히 총애하는 신하) 수적지를 시켜서 말에서 떨어뜨려 목을 꺾어 죽였다.(AD471) 유욱보다 아홉 살 아래인 형주자사 파릉왕 유휴약은 매우 존귀한 인상을 지녔다는 소문이 건강에 파다했다. 그 소문을 들은 황제 유욱은 그를 남서주자사로 옮겨 임명하면서 건강으로 불러들이기로 했다. 유휴약의 측근 왕경선이 유휴약에게 이렇게 권고했다.

 

“ 이번에 주군께서 입조하면 반드시 죽을 것입니다.

  형주에는 갑옷 입은 군사가 10만이 넘습니다.

  땅도 사방 수 천리이니       

  위로 천자를 바로잡고 아래로 간신을 일거에 제거할 수 있는 땅입니다.

  칼을 내려 받아 억울하게 죽고

  가신과 처첩들이 눈물을 삼키면서

  제대로 장사도 치르지 못하는 것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황명을 따르지 말고 반란을 일으키라는 말이었다. 어리석은 유휴약은 왕경선의 충고를 듣고 거짓으로 그리하겠다고 하고는 곧바로 형님인 황제 유욱에게 고해바치고 말았다. 왕경선은 바로 처단되었다. 이 때 유휴약은 제거되지 않는다.

 

이복형 서주자사 유휴우가 피살되자 건안왕 유휴인은 불안했다. 황제의 측근들이 자신을 배척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관료들이 유휴인을 속으로 지지하고 있었지만 황제 측근들은 만일의 경우 황제가 사망하기라도 한다면 황위는 태자가 아니라 유휴인에게 갈 것이 분명했으므로 유휴인을 꺼린 것이다. 병든 황제 유욱이 측근 양운장을 불러 계승문제를 상의했다. 양운장은 유휴인 제거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황제 유욱에게는 옛적부터 가까운 절친 저연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휴인 살해 음모에 저연의 역할이 컸으므로 그 공으로 이부상서에서 좌복야로 승진했다. 병이 깊어지자 황제는 오군(강소성 소주) 태수로 있던 저연을 급히 불렀다. 유휴인을 죽이기 위해서였다. 저연은 반대했다. 황제가 그를 꾸짖었다.

 

“경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요.

 큰일을 같이 하기에 턱없이 부족하군요.“

    

황제의 윽박지름에 깜짝 놀란 저연이 암살모의에 동참하기로 했다. 황제는 유휴인을 황궁으로 불렀다.(AD471년5월1일) 그리고 궁에서 유숙하게 한 다음 저녁 식사에 약을 타서 유휴인을 독살했다. 유휴인이 욕설을 퍼부으며 황제에게 반항했다.

 

“ 황상이 천하를 얻는 것이 누구 때문이었습니까?

  효무황제 유준은 형제를 죽인 까닭에 결국 자손이 멸절되었습니다.

  지금 이런 짓을 하고도 송나라가 오래가겠습니까?“

 

황제 유욱은 재빨리 빠져 나왔고 독살은 집행되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발표했다.

 

“ 반역을 도모했다는 정보가 있어서 

  소환하여 질책을 했는데

  스스로 부끄러워 자결하였다.“

 

그러고도 쑥스러웠던지 황제 본인은 유휴인과 정이 도타웠고 가까웠으며 몹시 불행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조치였음을 여러 번 강조하였다. 이 때 유휴인 나이가 28세였다..(AD471년 5월1일)

 

AD471년 6월10일 지난 번 왕경선을 밀고하고 살아남은 유휴약은 형주자사에서 강주(지금의 강서성)자사로 임지가 바뀌었고 강주자사였던 유휴범은 죽은 유휴우의 자리인 남서주자사로 이동시켰다. 그리고는 황제 손수 편지를 보내 7월 7일 축하연을 베푼다고 하면서 유휴약을 불렀다. 유휴약이 건강에 도착하자 집에서 독살시켰다.(7월9일) 남서주자사 유휴범은 워낙 재주가 아둔하고 졸렬하며 모자라는 인간이어서 황제의 질투를 받지 않고 살아남았다. 물론 유휴범은 나중에 반란을 일으킨다. 

 

 

<3> 의가의 난 토벌의 수훈장 충신 오희에게 내린 사약(AD471)

 

의가의 난을 토벌하며 하동에서 동진할 때(AD466) 오희는 이렇게 선언했었다.

 

“ 반란괴수 심양왕 유자방과 모든 도적을 잡는 즉시 

  그 자리에서 죽이겠습니다.“

 

그랬던 그는 유자방을 생포한 뒤 건강으로 후송했고 오군태수 고침 또한 체포한 뒤 석방해 주었다. 유욱은 그런 오희를 속으로 의심했으나 워낙 큰 공을 세웠으므로 겉으로 드러내지 는 않았다. 오희가 곳곳에서 승리를 거듭하면서 많은 재물을 습득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유욱의 오른팔 수적지가 죽자 그 대신 독예주제군사가 되어 예주지역 군사책임자가 되었는데 지위가 높아질수록 오희는 불안했다. 언제 어디서 무고와 참소가 들어올지 몰랐다. 그래서 그는 황제에게 지방의 사령관 보다는 중앙 조정으로 와서 중산대부가 되겠다고 요청했다. 황제 유욱은 그런 그를 더욱 의심했다.

 

어떤 사람이 소도성이 유송과 북위 두 곳에 마음을 두고 있다는 참소를 올렸다. 황제는 소도성의 속 내를 알아보기 위해서 오희에게 술을 주어 소도성에게 보냈다. 소도성은 보낸 술을 독주로 알고 도망가려하자 오희가 달려가서 소도성을 설득하면서 그 술을 자신이 스스로 마셔 보였다. 조정에 돌아 온 오희는 황제에게 소도성의 순수한 마음을 보증한다고 했다. 

 

그러나 황제는 오희를 믿지 못했다. 대단한 무공이 있고 또 재주와 지략이 뛰어난 오희는 자신의 아들 태자를 절대로 옹립하고 보호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 주변에서도 오희가 황제를 배반할 사람이 분명하다고 참소했다. 결국 황제는 주변의 측근의 꾀를 좇아 게략을 세웠다. 먼저 오희를 황궁 내전으로 불러 즐겁게 논 다음 집으로 음식과 선물을 내린 뒤 얼마 있지 않아서 사약을 내린 것이다. 그리고는 이렇게 발표했다.

 

“ 오희의 마음과 행동의 궤적을 살펴보았더니

  그가 어찌 법대로 주군을 받들 것이며

  어찌 나라를 탈취할 기회를 활용하지 않겠는가 라는 의문이 생겼다.       

  그의 공로는 절대로 잊을 수가 없지만

  형세로 보아 처단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유자훈의 반란을 평정한 수훈 장군 오희가 주군에 의해 사약을 받았다. 

 

 

<4> 소도성이 징소에 응하다.(AD471)

 

의가의 난에 오희와 함께 특출한 전공을 세운 사람이 소도성이다. 당연히 황제 유욱은 소도성을 의심했고 그의 뜻을 떠보기 위해 수도 건강으로 소환했다. 불러서 오면 일단 반란생각은 없는 것이고 오지 않으면 확실하게 반란의사가 있다고 볼 것이었다. 북연주(산동성 남서부)자사이던 소도성 주변에서는 모두 말렸다. 소도성이 이렇게 말했다.  

 

“ 주상은 오로지 어린 태자가 걱정되어 형제를 자르는 것이니

  다른 사람에게는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오히려 지체하다가 의심받고 화란이 일어날 수가 있으니

  서둘러 갈 것이오.

  우리 모두 힘을 합해서 국난을 헤쳐 나가야 할 때라고 생각하오.“

 

황제 유욱은 소환명령에 지체하지 않고 도착한 소도성을 굳게 믿고 산기상시와 함께 태자를 가르치는 지위(태자궁 좌위솔)를 부여했다. 

 

 

<5> 충신 국상시 우원(虞愿)의 상소

 

황제가 자기가 살던 옛 집을 상궁사라는 절로 바꾸어 지으면서 매우 웅장하고 하려하게 꾸며 어마어마한 돈을 투입했다. 그리고는 주변의 신하들에게 웅장함과 화려함을 자랑하고 다녔다. 통직산기시랑 우원이 곁에 있다가 말했다.

 

“ 이 모든 것은 백성들이 아이를 팔고 

  부인을 저당 잡혀 모은 돈으로 지은 것입니다.  

  부처가 만약 있다면 

  반드시 자비로운 마음에 탄식과 가여운 마음을 가지실 것입니다.

  폐하께서 세우 신 10층 부도를 덕이라고 자랑하시나

  제가 보기에는 폐하의 죄가 부도보다 더 높을 것 같습니다.“

 

우언은 황제 유욱이 상동왕으로 있을 때부터 국상시(최고위 내관)였으므로 매번 간언을 올릴 때마다 그의 말에 화를 내지 않고 용납하였다. 

 

<6> 척신(戚臣) 왕경문의 횡포와 사약 내림

 

황후 왕씨(王貞風,AD436–AD479)에게는 왕경문이라는 오빠가 있었는데 양주자사로써 권세가 대단했다. 오희가 죽은 뒤에는 장영이 소도성과 함께 군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황제 유욱은 왕경문과 장영을 제거해야만 황권이 확립된다고 보고 요언을 만들어 퍼뜨렸다.

 

“ 한 선비(一+士=王, 즉 왕경문)는 가까이 할 수 없는 사람이고

  활과 긴 것(弓+長=張, 즉 장영)은 활로 사람을 죽이네.“  

 

왕경문과 장영이 정권을 찬탈 할 것이라는 뜻을 내포한 유언비어였다. 왕경문이 이 요언을 듣고 경악했다. 황제의 병세가 점점 심해지자 황제가 결단을 내리고 왕경문에게 사약을 내리며 편지를 썼다.

 

“ 경의 가문을 온전히 보호하기 위해 불가피한 조치요.”

 

자신의 사후 황후 왕정풍과 왕경문이 정권을 농단할 것을 사전에 막기 위한 조치라는 것이다. 황제가 사약과 함께 보낸 편지를 주변에 보여 주자 왕경문의 빈객들이 웅성거렸다.

 

“ 한 백 명의 무사만 있으면

  황궁을 일거에 쓰러드릴 수가 있습니다.“

 

왕경문은 그들을 말리면서 말했다.

 

“ 나의 가족과 온 가문을 나대신 지켜주시오.”  

  

왕경문은 사약을 마시고 죽었다.(AD471)

 

 

<7> 유욱사망과 완전부-왕도륭-양운장의 정권장악(AD472)

 

왕경문에게 사약을 내린 직후 황제의 병은 크게 악화되었다. 황제는 황급히 고명대신을 황궁으로 불렀다. 계양왕 강주자사 유휴범, 상서우복야 저연, 우복야 우면, 상서령 유찬, 형주자사 채흥종, 영주자사 심유지, 그리고 저연이 추천한 우위장군 소도성 등 일곱 명이 고명대신이었다. 그날 저녁 황제가 사망하고 아홉 살 태자 유욱(劉昱)이 황위에 올랐다.(AD472)

 

형식적으로는 상서우복야 저연과 상서령 유찬이 정권 최고위직에 있었으나 실제 권한은 죽은 황제의 심복, 즉 근습(近習)이었던 원찬, 왕도륭, 완전부가 가지고 있었다. 비록 저연과 유찬이 검소한 정책을 쓰려고 해도 완전부와 왕도륭은 뇌물을 주고받으며 인사와 행정을 독점했으므로 정치가 문란함과 함께 조정대신들의 걱정이 싸여만 갔다.

 

나라 걱정을 거듭하는 조정대신들의 불만과 우려를 완전부와 왕도륭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들에게는 강직한 채흥종이 눈의 가시였다. 왕도륭은 형주자사 채흥종에게 내직인 중서감을 주려하자 채흥종은 사양하고 물러났으며 얼마 있지 않아서 죽었다. 새로 도독팔주제군사가 된 심유지는 거느리던 병마를 가지고 새로운 임지 형주로 돌아갔다.(AD472)

      

 

<8> 유휴범의 불만과 반란(AD473-AD474)

 

재능이 덜떨어진 강주자사 유휴범은 현 황제의 유일한 숙부로써 이번 기회에 재상이 되기를 속으로 기대했으나 어그러지자 불만이 생기면서 조정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측근 전첨이 하라는 대로 군사와 부하의 급여를 크게 올려주고 스스로 몸을 낮추면서 민심을 끌어 모았고 용감한 무사를 초빙하고 무기를 비축했다. 반란을 준비한 셈이다. 조정이 모를 리가 없었으므로 네 살짜리 황제 동생 유섭을 영주(호북성 무한지역)자사로 삼고 그를 보필하는 장사로 왕경문의 조카 왕환을 임명하여 유휴범의 군사행동에 대비시켰다. 영주는 강주의 상류에 있었으므로 유휴범을 억제하는 요충지였다.(AD473)   

 

수년에 걸치 준비 끝에 AD474년 5월 12일 유휴범이 구강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나흘 뒤 2만 보병과 5백 기병으로 심양(구강)을 출발하여 건강으로 향했다. 출사표는 이렇다.

 

“ 양운장과 왕도륭 같은 적신들이

  선황을 미혹하여

  건안왕(유휴인)과 파릉왕(유휴약)을 죄 없이 억울하게 죽였으니

  체포, 조사하여 원혼을 풀고 사죄하게 해 주십시오.“

 

수도 건강에서는 중신들의 대책회의가 열렸으나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소도성이 나서서 말했다.

 

“ 도적이 도착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분명히 먼 길을 오면서 피로할 것입니다.

  내가 선봉을 맡겠으니

  정북장군 장영은 건강의 북쪽을 지키시고

  영군장군 유면은 황궁의 문을 지키십시오. 

  그리고 여러 존하께서는 가만히 계시기만 하십시오.

  나 스스로 충분히 격파할 수 있습니다. “

 

모든 대신들이 찬성하며 서명하려 할 때 유휴범과 내통하던 중서사 손천령이 나섰다.

 

“ 옛 관례에 따라 군사를 발동하고  

  장강의 양산(안휘성 화현)지역을 먼저 점거해야 합니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사실상 손천령의 속뜻은 군사를 일으키는 혼란을  틈타 건강 내부에서 반란군에게 호응하려는 심산이었다.

소도성이 말했다.

 

“ 이미 양산은 적군에 점령되었소.

  수도를 지키는 것이 더 급하오.   

  어찌 도적이 이미 점령한 땅을 도적처럼

  빼앗는데 힘을 쓸 수가 있겠소.

  평상시라면 경의 말을 존중할 것이나 

  지금은 전시이므로 따를 수가 없겠소.“

 

 

<9> 소도성의 반란진압(AD474)과 4귀(四貴)

 

소도성의 참모 황회와 장경아는 소도성에게 거짓 항복계략을 제안했다. 자신들이 거짓으로 항복하여 양산으로 들어 간 다음 유휴범의 환심을 사고 그 틈을 봐서 유휴범을 납치한다는 대담한 계략이었다. 소도성은 극도의 위험을 무릅쓰고 적진으로 들어가겠다는 황회와 장경아의 용기를 높이 샀다. 

 

 “ 이 번 일이 성공하면 

   그대에게 옹주(지금의 섬서성 남부)를 주겠다.“

 

양산으로 잠입한 황회와 장경아는 유휴범에게 소도성의 진심은 유휴범에게 있으며 내심 반란에 동참할 생각이라고 거짓 유혹했다. 유휴범은 황회와 장경아의 말을 쉽게 믿고 의심하지 않았다. 유휴범은 황회와 장경아를 좌우에 두고 예전 측근들은 배척했다. 유휴범이 즐거운 마음으로 술을 마시는 동안 황회와 장경아가 유휴범의 목을 베어가지고 유유히 본대로 돌아왔다.(AD472)    

 

소도성은 진영보를 보내 유휴범의 목을 건강으로 보냈는데 가다가 들키는 바람에 목을 강물에 던져 버렸다. 건강에서는 아무도 유휴범이 이미 전사했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유휴범의군사와 소도성의 공방전은 계속되었다. 유휴범의 사망소식을 모르는 유휴범 군사들은 맹렬하게 건강을 공격했다. 정부군의 영군장군 유면이 전사했고 왕도륭 또한 전사했다. 특히 무군장군부 장사 저징이 황궁의 동쪽 문을 여러 반란군을 받아들이자 전황은 대체로 정부군에게 불리한 형세로 굳어갔다.  

 

이즈음에 유휴범이 죽었다는 소문이 반란군 사이에 번져나갔다. 소문에 따라 반란군의 사기가 떨어질 것을 우려한 허공여는 거짓으로 계양왕 유휴범이 이미 황군으로 들어왔다고 소리쳤다. 모든 사람들이 유휴범에게 충성하겠다는 신표, 즉 명함을 던졌다. 소도성이 그것을 다 모은 뒤 소리쳤다.

 

“ 계양왕은 어제 이미 죽었소.

  그의 머리는 남강 아래에 있소.

  두려워하거나 겁먹지 마시오.

  여러분이 던진 신표는 이미 다 소각해 버렸소.“

 

유휴범 반란군의 총사령관 두흑나와 정문호가 체포되어 참수됨으로써 유휴범의 반란은 가까스로 진압되었다.(AD474년5월24일) 이번 반란의 진압으로 정권의 실세는 네 명의 귀인(四貴)에게로 돌아갔다. 원찬, 저연, 유병 및 소도성이다. 진압에 수훈을 세운 소도성에게는 중령군 및 남연주자사라는 직위가 주어졌고 건강수비의 책임을 떠맡게 되었다. 사실상의 군사적 실권자가 된 셈이다.                                                (다음호에 계속)

     

 

37
  • 기사입력 2017년05월04일 17시39분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