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탈하는 표현의 자유, 언어의 비만 현상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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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위터나 카톡 그리고 틱톡 등의 매체를 통한 문자나 이모티콘과 이미지들이 유희적으로 또는 은유와 수사적 변칙을 수반하여 이상하고 예측불허의 방식으로 치환되어 소통되고 있다. 영국의 앵커 존 험프리스는 과도한 말줄임과 혼태로 인해 “결국 인간은 돼지처럼 꿀꿀거리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지르며 소통”을 하게 될 것이라고 비유하고 있다.
온라인을 통한 소통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확산되면서 언어의 비만의 결과, 개별 언어의 생태계를 언어 쓰레기가 가히 폭력적으로 휩쓸고 있다. 언어 표준화를 신봉하던 국가의 언어정책 기관이 두 손을 다 들고 언어 교화의 세례를 포기하는 나라들이 점점 늘어난다.
그런데 한국어로는 왜 철학적 글쓰기가 불편한가? 필자는 이 나라에서 태어나 많은 생의 경험을 배우고 익혀 왔다. 그동안 필자의 지적 의문 가운데 깊이 자리를 잡고 있는 숨겨진 역사, 자아도취에 젖은 자만감을 들추어내고 싶지만, 민족주의와 국수주의로 얽맨 이데올로기 압박으로 제대로 말할 수 있는 환경이 못되어 두렵기도 하다.
최근 K컬쳐라는 신비한 섬광이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다. 이 한국 문화의 독특한 속도감, 뒤섞임, 민족과 언어라는 지난 세기의 경계망을 종횡무진으로 건너뛰는 낯선 한국어를 가지고 우리가 번역할 수 없는 세계의 변방까지 뒤섞는 힘의 원천이 무엇일까?
우리의 모국어인 한국어가 기능접사가 많고 또 복잡하며 반복과 지연, 강조가 튀어들면서 학교에서 배운 표준문법에서 완전 이탈하는 구어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문어일치라고는 하지만 과연 그럴까?
주어라는 아주 엄격한 핵심어는 두둥실 뜬 흰 구름처럼 쉬 사라져 버린다. 서구 언어와 명징한 차이점으로 한국어는 현장에서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간에 묵언의 약속이나 한 듯이 주어나 목적어는 텅 빈 상황으로 숨겨 버린다. 그러나 한국어는 여타의 언어와 마찬가지로 생물과 무생물을 대단히 엄격하게 갈라서 서술어가 그 결정권을 갖는다. 주어나 목적어가 안개처럼 사라진 말에서도 타동사는 인식 주체도 그 대상도 없는 상황을 모두 알아낸다. “먹다, 먹이다, 먹히다”가 문장의 선행 요소가 모두 누락되더라도 한국인 화자들은 “뭐를 누구에게 먹이는지”, “뭐가 누구에게 먹히는지” 귀신처럼 알아차린다. 영어를 배울 때 능동태와 수동태는 엄청나게 규제적인 문법 규칙으로 능동을 수동으로 수동을 능동문으로 바꾸는 문제가 수능시험에 종종 출제되기도 하였다.
한국 사람들은 상상력이나 말하는 상황을 중시하여 탈선적인 구어문법을 즐기는 까닭에 글쓰기가 논리적이지 않다거나 말하듯 술술 풀리지 않는다고 한다.
그럼에도 한국어라는 이데올로기 때문에 한국어로 쓴 미학이나 철학 그리고 위대한 세계 문학이 탄생되지 않는 이유를 굳이 고민하지 않는다.
표준어 교육이 얼마나 강력한 이데올로기였는지 몇 마디 말만 들어도 어느 지역 출신인지, 문화 수준이나 지적 눈높이를 금방 알아보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다. 어휘, 음운, 문법의 표준 단일화를 너무나 높은 수준의 가치로 만든 결과, 언어가 방언과 개인 창조적 생산의 가능성을 차단해 버렸다. 언어의 발전이나 발달이라는 게 무엇일까? 표준말의 과잉 상황 때문에 지역 방언은 기호로의 교환 자체가 매우 불투명해지고 있음에도 매혹적일 정도로 풍요롭고 유동적인 발전의 토대가 아닌가? 그러나 표준어라는 암호는 역행적이고 유치한 특징들은 모두 삭제되어 버린다. 결국 방언 화자들은 자신의 온전한 텍스트를 다 보여줄 수 없이 살아온 것이다.
이미 텍스트가 점점 소멸되고 있다. 단 한 줄로 된 문장이라도 주어와 목적어 그리고 서술어와 수식 한정어들의 낱낱의 의미 정보를 꿰어내어야 의미를 읽어낼 수 있다. "I Love New York"보다 "I ❤NY"이 훨씬 더 빨리 읽힌다. 최근 약어문자가 급속하게 늘어나는 추세가 바로 텍스트에서 이미지로 전환하는 시대적 유행 때문이다.
우리 말과 글이라는 사용 환경을 국가가 표준어라는 언어 생태 환경을 임의로 조성한 후 개인적 말과 글의 생태적 발전을 완전히 차단했다. 이로써 모든 사람이 서로를 밀어붙이는 표준어라는 생태계가 한국인이 정서와 인식체계를 완전히 지배하도록 해 왔다. 조선어학회 시절 일제를 통한 언어 탄압의 후유증의 반대급부로 탄생한 현대 서울 지역의 교양인들의 말씨가 황금 깃발을 꽂은 후, 모국어의 발전이나 텍스트의 논리나 창의적 문법 개발은 완전 뒤편으로 내동댕이쳐 버렸다. 한국어로 최고의 미학을 최고의 철학을, 그리고 인류의 구원을 노래하는 위대한 K문학의 탄생을 위한 다양성을 허용하는 언어정책으로 전환할 시기가 아닐까?
<ifs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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