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이냐 분열이냐,국가흥망의 교훈 #21 : 북조를 통일한 우문태의 북주(北周) <U>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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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137> 북주의 염탐꾼 이루겸과 고준(AD576년)
북주의 이루겸이 북제를 염탐하러 사신으로 왔을 때 이루겸의 참군 고준이 그 사실을 북제에 몰래 고해바쳤었다. 북제는 북주와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고준을 잡아 가두어 버렸다. 우문옹이 진양을 함락시키고 이루겸의 공을 치하하면서 업에 갇혀있던 고준을 불러왔다. 이루겸이 머리를 조아리며 그의 사면을 요청하였다. 우문옹이 이루겸에게 말했다.
“ 경은 무리를 모아놓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아 부끄러움을 알게 할 수도 있지 않소?”
이루겸이 말했다.
“ 고준의 죄는 얼굴에 침을 뱉어서 질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문옹은 납득이 되지 않았지만 이루겸에게 처분을 맡겼다. 이루겸은 그 후에도 예전과 똑같이 고준을 대우했다.
사마광은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비판했다. 즉, 큰 계획을 누설한 것으로 보면 고준의 죄는 역적에 해당되는데 이를 직접 처단하지 않고 이루겸에게 맡긴 것은 정치와 형벌의 요체를 잃은 것이라고 했다. 덕으로 원수를 보답하는 사람은 무엇으로 덕을 베푼 사람에게 보답할 것인가 라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루겸을 위해서라면 먼저 법과 형벌에 따라 고준의 죄를 먼저 바로 잡았어야 한다고 했다. 결국 사면해 주어 사사로운 명성으로 아름답기는 하나 공의는 아니라고 했다.
<138> 모자라는 태자 우문빈, 대안없는 우문옹(AD576)
우문옹의 아들 우문빈은 한참 모자라는 인물이었다. AD576년 2월 우문옹은 열일곱 살 아들 우문빈에게 군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나아가 토욕혼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대장군 왕궤와 우문효백을 함께 보냈다. 물론 어린 나이이기도 하지만 워낙 게으르고 아둔한 우문빈은 모든 결정을 두 사람에게 맡기고 오로지 이기기만을 빌 뿐이었다. 여섯 달 뒤인 8월 우문빈의 토욕혼 정벌부대가 돌아왔는데 그 사이 우문빈은 군대 안에서의 난잡하고 무분별한 행동으로 군사들의 신망을 크게 잃었다. 우문옹은 그 소식을 듣고 태자 우문빈과 그의 측근 정역 등을 매질하고 모든 측근의 관직 명부를 삭제하도록 명령했다.
정영 무리들은 비록 아무런 관직을 갖지 못하게 되었지만 태자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면서 태자와 어울려 전과 똑같은 짓들을 자행했다. 정역이 물었다.
”전하께서는 곧 천하를 점거하시겠지요?“
정역이라는 인물은 북위의 호태후의 정부로 호태후와 함께 북위 숙종을 독살했던 정엄의 손자뻘 되는 사람이다. 태자는 정역의 그 말에 은근히 즐거운 생각에 잠겼다.
우문옹은 태자를 매우 엄격하게 가르치고자 했다. 조회에서는 항상 신하로써의 예를 깍듯이 지키도록 했으며 과음하는 버릇을 항상 엄중히 꾸짖었다. 잘못을 저지르면 가차 없이 종아리를 내려치곤 했다.
” 옛날부터 태자 중에서 폐위된 사람이 몇이나 되는 줄 아느냐?
너 말고 다른 아들들도 왜 세우지 못한단 말이야?“
우문옹은 동궁관속에게 명을 내려 태자의 모든 행동을 기록하여 보고하도록 지시했다. 태자는 엄한 아버지의 명을 따르는 척 하면서 술을 자제하고 거친 행동을 숨겼다. 왕궤는 하약필에게 이렇게 말했다.
” 태자는 반드시 무거운 짐(황제)을 질 재목이 아닙니다.“
하약필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은 하고 황제에게 그것을 진언하기를 권고했다. 왕궤가 나중에 조용히 황제에게 말했다.
” 황태자가 어질고 효성스럽다는 말을 듣지 못하니
걱정스러운 것은 폐하의 집안일을 완성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은 짧고 어리석으니
폐하께서 항상 문무가 출중하다고 칭찬하시던 하약필에게도 자문을 하시지요.“
황제가 하약필을 불러 그 문제를 물었다. 하약필은 이렇게 대답했다.
” 황태자가 춘궁(=동궁)에 머물면서 덕망을 기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허물이 있다는 말은 금시초문입니다.“
왕궤가 그 말을 듣고 하약필을 나무랐다.
” 평생 말하는 것이 앞뒤가 다르지 않았는데
어찌 오늘은 내게 한 말과 다른 말을 하신거요?“
하약필이 왕궤에게 이렇게 대꾸하며 말했다.
” 이것은 공의 허물이요.
태자라는 자리는 나라의 다음을 계승할 자리 아니요.
어찌 쉽게 폐하에게 그 말을 꺼내겠소.
만에 하나 차질이 생기면 나만이 문제가 아니라 가문 전체가 멸족되는 일 아니요.
나는 공이 은밀하게 그 문제를 해결하리라 여겼는데
어찌 황제에게 공공연하게 그 문제를 드러내고 말았소.“
왕궤가 한참을 말없이 있다가 입을 열었다.
” 나는 오로지 국가의 미래를 생각할 뿐이었지
개인의 운명은 전혀 고려에 두지 않았던 것이요.
지난번 경과 그 문제를 예기한 것은 실로 잘못된 것이요.“
얼마지 나지 않아 궁궐에서 연회가 열렸을 때 왕궤는 황제의 수염을 뽑으면서 대담하게 이렇게 말했다.
” 사랑스럽고 훌륭한 노인(황제라는 말)이시지만
다만 후사가 약한 것이 원망스럽습니다. “
왕궤가 술에 취해서 하는 주사라고만 여길 뿐 개의치 않았다. 황제는 며칠 전 태자의 행동에 큰 잘못이 없다고 보고했던 우문효백을 불러 따졌다.
” 공이 항상 말하기를 태자에게 큰 잘못이 없다고 했는데
왕궤가 저런 말을 하는 것을 보면
공이 거짓말을 한 것 아니요?“
우문효백이 깜짝 놀라며 말했다.
” 부자 사이의 관계는 다른 사람들이 말하기 어려운 것이라고 합니다.
신은 폐하께서 태자에게 쏟는 정이 깊어
정녕 끊지 못하실 것을 알기에
그렇게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문옹은 우문효백과 왕궤가 태자에 대해 부적격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마음 깊이 이해했다. 한참을 묵묵히 있다가 말했다.
” 공은 그 일(태자 교육문제)을 공에게 맡겼으니
그것에 힘쓰도록 하라.“
왕궤가 갑자기 나서서 외쳤다.
” 황태자는 사직의 주군이 아직 아닙니다.
보륙여견(양견의 이름)의 얼굴 모습을 보면
배반할 인상을 가졌습니다. “
왕궤는 양견이 반란을 일으킬 것과 태자 우문빈이 그 문제를 해결할 역량이 없다는 것을 이미 꿰뚫고 있었다. 황제는 이렇게 말했다.
” 천명을 가져갈 사람이라면
누가 그것을 막을 수 있다는 말인가?“
황제는 왕궤와 우문효백의 걱정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문빈의바로 아래 동생 한왕 우문찬은 우문빈보다 더 용렬하고 부족했더 다른 아들들은 아직 어렸으므로 바꿀 수가 없었다. 양견은 왕궤의 발언을 전해 듣고 소름이 돋았다. 앞으로 철저하게 속마음을 숨기고 행동을 조심하기로 다짐했다.
<139> 북제 황위를 고항에게 선양(AD577)
북제 주군 고위는 업에서 군사를 모았지만 욕심이 많아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물을 내놓지는 않았다. 곡률효경은 주군이 직접 나서서 군사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격려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고위는 피식 웃기만 할 뿐 그럴 줄도 몰랐고 또 그럴 의향도 없었다. 주군이 절박함이 없으니 군사들도 전쟁의사가 있을 까닭이 없었다. 북삭주로 도망가던 태후와 태자도 업으로 돌아왔다.
진양을 접수한 우문옹은 창고의 물자들을 전부 풀어서 장수와 병사에게 나누어 주었다. 고연종에게 업을 공략할 방법이 무엇이냐고 묻자 고연종이 대답했다.
” 그것은 나라를 잃어버린 신하가 답할 것이 못 됩니다.“
그래도 재촉하자 고연종이 말했다.
” 만약 임성왕 고개가 업을 점거하고 있다면 신은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만약 주군이 지키고 있다면 폐하의 병사는
칼에 피를 묻히지 않아도될 것입니다.“
우문옹은 동생 우문헌을 앞세워 업으로 진격했다.(AD576년 12월 29일)
<140> 업 함락과 이덕림을 얻음(AD577)
북주의 대군이 업을 향해 내려오는데 북제 주군 고위는 막을 방법을 몰랐다 주변에 물어보면 사람마다 의견이 다 달랐을 뿐 아니라 대부분 고관들은 틈을 타서 빠져나가 북주로 투항하고 있었다. 상서령 고원해가 주청하여 태자 항에게 황위를 선양하였다. 8세짜리 황제였다.
AD577년 1월 18일 북주의 대군이 업성 밑까지 밀려와 포위했다. 북제의 상황 고위는 100여기를 거느리고 빠져나와 동쪽으로 도망갔다. 업성은 모용삼장에게 맡겼는데 힘이 달려 우문옹에게 잡히고 말았다. 우문옹은 모용소종을 크게 예우하였다. 업성의 모든 장수들이 투항하여 우문옹은 1월 20일 업성으로 들어갔다. 업으로 들어간 우문옹은 북제 중서시랑 이덕림의 집으로 사람을 보내 초빙하는 뜻을 밝히고 위로하며 타이르면서 말했다.
” 내가 북제를 평정하여 얻은 이익이란 오직 경을 얻은 데 있다.“
이덕림을 궁으로 데리고 온 뒤 내사 우문앙을 시켜 북제의 풍속, 실정 그리고 인물에 대해 세세하게 물어서 파악했다. 그런 다음 이덕림을 돌려보냈다. 이덕림은 양견의 수나라 조정에서 중책을 맡게 된다.
낙주(낙양)자사 독고영업이 북주에 항복하면서 북제의 영토는 절반 이상이 북주에게 흡수되었다. 고위는 1월 21일 제주(산동 제남)으로 들어갔는데 이 날 고항은 황위를 고개에게 넘겼다. 그 다음날 고위는 호태후를 제주에 남겨두고 고아나굉에게 제주관을 지키도록 하고는 목황후, 풍숙비, 고항, 한 장란, 등장웅 등을 이끌고 동쪽 청주로 도망갔다.
청주에 도착한 고위는 남쪽 진나라로 도망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고아나굉이 은밀히 북주 군대를 부르고 북제의 주군을 잡아 산 채로 압송하기로 약속한 터였다. 고아나굉은 거짓으로 고위를 속이며 말했다.
” 북주의 군대는 아직 멀리 있습니다.
이미 다리와 길을 불 질러 다 차단해 두었습니다.“
고위는 이 말을 믿고 느긋하였다. 북주의 군대가 제주고개에 당도하자 고아나굉이 즉시 항복했다. 북주 군대가 쏜살같이 청주로 달려가 고위를 생포했다.(AD577년 1월 25일) 잡힌 장소는 정확히 남등촌(산동성 임구현 서남)이었다. 고위는 후, 비 및 어린 아들 등 10명을 데리고 금 주머니를 말안장에 달고 가다가 잡혔다. 호태후와 나란히 업으로 압송되었다.
북주의 주군 운문옹이 조서를 내렸다.
” 고 곡률광과 최계서 등에게 시호를 내리도록 하고 장사를 다시 고쳐서 지낼 것이다.
그 자손들에게는 마땅한 관직과 전지와주택을 내리도록 하라.“
우문옹이 말했다.
” 곡률광이 있었더라면 내가 어떻게 업에 도착할 수 있었겠는가!“
AD577년 2월 3일 우문옹은 북제 태극전에 올라 모든 북제 관리와 장수를 불러 잔치를 베풀었으며 차이를 두어 상과 작위를 내렸다. 북제 상황 고위가 업에 도착하자 계단을 내려가 영접하였으며 예와 격식을 갖추어 빈객으로 대접했다.
<141> 북제의 마지막 항거와 북제 멸망(AD577년)
북제 광녕왕 고효형은 창주(하북성 염산)에 도착하여 5천의 병사를 모았다. 임성왕 고개를 신도(하북성 기현)에서 만나 도합 4만 군사를 다시 규합할 수 있었다.북주에서는 양견과 우문헌을 보내 공격하게 하는 한편 고위에게 편지를 써서 소환했으나 올 리가 없었다. 우문헌은 고개의 첩자 두 명을 생포했는데 그들을 다시 돌려보내면서 말했다.
” 내가 다투는 것은 너희들이 아니다.
지금 풀어 줄 터이니 내 사자가 되어라“
고개에게 보내는 편지를 두 첩자에게 쥐어 보냈다. 상황을 깨닫고 진작에 항복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고개가 버티는 동안 고개의 장수 울상원은 북주와 대항하는 척 하다가 북주에 투항하고 말았다. 그 다음날 벌어진 전투에서 고개의 군사는 우문헌에게 크게 패했다. 전사자와 포로의 숫자만 3만 명이었다. 고개와 광녕왕 고효형도 사로잡혔다. 우문헌이 고개에게 말했다
” 어쩌다 이런 고생을 하게 되었소.“
고개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나는 신무황제(고환)의 아들이고 형제가 열다섯 명이지만
용케 혼자 살아남았소.
종묘와 사직이 전복될 지경이지만 부끄러운 점이 하나도 없소.“
우문헌은 그 듯을 높이 사서 처자를 돌려보내주었다. 또 고효형의 상처를 직접 약을 발라주었고 후하게 예우해 주었다. 고효형이 탄식하며 말했다.
” 신무황제를 제외하고 숙부 형제들 중에서 나이 40에 이른 사람이 없다.
이것은 운명이 아니고 무엇인가.
주군은 총명함이 없고
재상은 기둥과 주춧돌이 될 재목이 아니었으니
병부를 쥐고 부월을 받아 힘을 발휘할 수 없었던 것이 통한스러울 뿐이오.,“
북삭주에서 옛 장사였던 조목이 고소의(고양의 3자)를 추대하여 반항을 계속했다. 그러나 역부족을 느끼고 돌궐로 도망가고 말았다. 동옹주의 부복과 영주(요녕성 조양)의 고보녕도 북주에 굴복하지 않았지만 나머지 50주 162군 380현이 북주에 귀속되면서 북제는 완전히 멸망하였다. 북제의 뺏긴 가호는 303만 2500호라고 기록되었다. 북제의 도읍 업에 잇던 동산, 남원, 삼대는 다 부수었고 달린 땅은 모두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우문옹은 이덕림을 내사로 삼고 북제의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는 작업을 모두 맡겼다.
<142> 우문옹의 북주 인사와 내정 개혁(AD577)
AD550년 고양이 세웠던 북제를 27년 만에 완전히 멸망시켜 북중국을 다시 통일한 북주는 대대적인 인사를 단행했다. 우문검이 대총재가 되었고 우문량은 대사도, 달해진은 대종백으로 임명되었다. 후막진예는 대사마, 독고영업은 대사구, 위효관은 대사공 자리에 앉았다. 쿠테타 주역이었던 동생 우문직은 아무 자리도 얻지 못했다.
황제 우문옹은 나아가 이전 실권자 우문호가 세운 여러 전각들을 모두 부수라고 명령했다.
” 여러 전각들은 우문호가 정치를 멋대로 하면서 만든 것들이다.
너무 화려하고 사치스러움으로 본보기가 되지 못한다.
모두 철거한 다음 그 부속물들은 모두 서민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하라.
앞으로 건물을 세울 때에는 반드시 소박하고 저렴한 것을 쓰도록 하라.“
이런 조치를 사마광은 매우 크게 평가했다.
” 북주 고조 우문옹은 승리를 현명하게 처리했다(善處勝)고 할 만하다.
다른 사람들은 승리로 더 더욱 사치했지만
우문옹은 승리할수록 더욱 검소하게 처신했다.“
북쪽을 통일한 북주는 권형도량權衡度量을 통일하고 죄는 대를 넘기내리지 않는다는 원칙을 도입하여 포로로 편입된 노예들을 모두 해방시켜 주었다.
<143> 북주 우문옹에 대한 평가(AD577)
자치통감에는 우문옹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성격은 절약 검소하여 항상 평범한 옷을 입고 다녔으며
잠자리 이불 또한 매우 소박했다.
후궁은 불과 10여명에 그쳤고
군대를 부릴 때마다 항상 스스로 진열에 들어가 같이 행군했고
산과 골짜기를 직접 걸어서 함께 건넜으니
군사들이 스스로 용기를 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군사들에게 고마운 마음을 표하여 다독거렸고
명철하고 과단성 있게 결정을 내렸으며
법을 적용함에도 엄격했기 때문에
모든 장수와 병사들이 두렵고 경외하는 마음을 가져서
그를 위하여 죽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144> 남조 진나라의 북벌 실패(AD577)
북주가 북제를 멸망시키자 남쪽의 진나라에서는 옛 땅이었던 서주지역(지금의 강소성 북부)과 연주지역(산동성 남동)을 빼앗을 생각을 했다. 북조 조정으로서 그 지역은 너무 동쪽으로 치우쳐있었으므로 힘들여 반발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진나라 명장 오명철을 앞세워 쳐들어온 진나라 군사는 일단 양사언이 지키고 있던 서주를 포위했다. 진나라 선종 진욱은 서주연주 침략은 마치 손가락 가르치기처럼 쉽다고 가볍게 여겼다.(指麾可定)
채경력이 북주 공략을 너무 경솔하게 생각하는 황제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 지휘장군이 그렇게 교만하시니
지나치게 멀리 침략하시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황제가 국민들의 사기를 저하시킨다고 분노하며 채경력을 예장내사로 내쳤다가 실행에 옮기기도 전에 뇌물죄로 연계하여 파면하고 말았다.
진나라 장수 오명철은 팽성(강소성 서주)를 포위하면서 쉽게 함락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북주의 장수 왕궤가 사수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와 사구를 점령했다. 진의 장수 사마가는 오명철에게 먼저 왕궤를 격파하자고 제안했지만 오명철은 거만하게 거부하며 말했다.
” 적의 깃발을 뽑고 진지를 함락시키는 일은 장군이 할 일이요 搴旗陷陈,将军事也
깊이 생각하고 먼 계략을 세우는 것은 늙은 노인네 일입니다.长算远略,老夫事也“
경악한 사마가가 물러났는데 순식간에 북주나라에서 수로를 차단하는 바람에 진나라 병사들은 물을 구할 수가 없게 되었다. 방둑을 터서 물을 대고는 배를 타고 퇴각하자고 의견이 나왔다. 마주 배열은 그렇게 되면 배들이 전부 쓰러져서 사용할 수가 없으니 차라리 말을 타고 빠져나가는 것 만 못할 것이라고 반대했다. 당시 오명철은 등에 난 종창이 악화되어 크게 힘들었는데 소마가가 다시 이렇게 청했다.
” 지금 전쟁을 하고 싶어도 못하며 진퇴가 모두 어렵습니다.
만약 군대를 은밀하게 보내 갑자기 적군을 포위하면
치욕은 면할 수가 있습니다.
원하건대 공께서 보졸을 데리고 말을 타고 서서히 나가시는 동안
저 소마가가 철기 수천을 대동하고 앞뒤로 치고 같이 나가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공계서는 안전하게 경읍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명철이 이렇게 답했다.
” 동생의 계책은 좋다.
그러나 보졸군사가 너무 많고 또 총독이 된 몸으로
필히 후미에 있어야 여러 장수들이 같이 나아갈 수가 있다.
동생의 기병은 반드시 앞에 있어야 하니 지체할 수가 없지 않은가“
초주자사 소마가는 즉시 기병을 이끌고 야밤에 나섰다. 오명철은 방둑을 허물고 물을 따라 철수했다. 기주지방을 지나 회하지방으로 들어가 청구에 도달하자 물길이 얕아지며 배가 더 이상 나아기질 못했다. 이 때 북주의 왕궤 군사가 들이닥쳐 오명철이 사로잡히고 군사 3만 여명이 북주군사에게 죽었다. 67세의 고령인 오명철은 패배의 치욕에서 벋어나지 못하고 화병으로 죽었다. 소마가는 정예기병 80명이 전면을 돌파하고 그 뒤를 따라 기병이 이어주는 바람에 새벽녘에 회남에 도달하여 장수 임충과 주라와 함께 돌아올 수 있었다.
<145> 북주 선제 우문옹의 갑작스런 죽음과 우문빈의 등극(AD578)
남쪽의 진나라가 북정에서 실패하여 더 이상 침략할 우려가 없어지자 우문옹은 북주의 북방에 있는 돌궐을 정벌하러 나섰다. 쉬지 않고 유주지역을 침범하는 돌궐을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군사를 다섯 갈래로 나누어 북진했는데 중군을 거느리고 경양에 도달할 즈음 갑자기 우문옹이 크게 아팠다. 사신을 급히 장안으로 보내 우문효백을 불러서 말했다.
” 내 병이 필히 낫지 않을 것 같으니
후사를 경에게 부탁하오.“
우문효백은 우문호를 제거하는데 최고공신이었고 그 위에 과묵하고 침착하며 정직하고 충성심이 많은 종실이었다. 우문효백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병든 군대를 서둘러 돌려 장안으로 돌아왔지만 우문옹은 장안에서 곧 죽었다. 31살의 나이였다. 태자인 우문빈을 황제로 옹립하고 황후 아사나씨를 황태후로 올려 책봉했다. 새로 황제가 된 20살의 선제 우문빈은 용렬한 사람이었다. 아버지 무제가 출병 중에 죽었지만 전혀 슬픈 기색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왜 이렇게 늦게 죽었느냐고 한탄할 정도였으며 예전처럼 향락과 사치에만 몰두했다. 아버지의 궁녀들을 탐내어 범했으며 상례가 끝나기도 전에 상복을 벗겠다고 졸랐다. 정역이라는 사람을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조정의 전권을 맡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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