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이냐 분열이냐,국가흥망의 교훈 #21 : 북조를 통일한 우문태의 북주(北周) <T>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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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133> 북주의 북제 공격과 위효관의 3책(AD575-AD576)
북주 고조 우문옹은 혼란을 거듭하는 북제를 침략하기 위해 여러 진에 지시를 내려 군사를 충원하고 군사장비를 준비하도록 했다. 북제 또한 북주의 침략에 대비하여 방어태세를 강화했다. 북주 주국 우익이 간언을 올렸다.
“ 국경을 맞대고 싸워봐야 이기고 지고 할 뿐 양측이 모두 피폐해집니다.
계속 우호를 유지하다가 저쪽의 경계가 느슨해 질 때
생각지 못한 곳으로 나아가면 일거에 뺏을 수 있습니다.“
우문옹이 옳다고 생각했다. 위효관이 세 가지 책략을 내세웠다.
첫째, 때와 기회를 활용하지 않으면 이기기 어렵다.(不因際會難以成功)
둘째, 마땅히 군사를 나누어 기다리고 있으면
일, 이년 있으면 반드시 스스로 이반이 일어날 것이다.
(宜與陳人分其兵勢 一二年中必自離叛)
셋째, 마땅히 이웃을 존중하며 서로간의 맹약을 환기시켜야 합니다.
백성을 편안 화합하게 하고 통상으로 서로 유익하게 해야합니다.
그런 가운데 예리함을 축적하고 무력을 쌓는 동안에
저쪽에서 싸움의 움직임이 보이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이것이 장책에 이르는 길이며 멀리 말을 부려 저절로 겸병하는 방책입니다.
(宜還崇隣好申其盟約 安民和衆通商惠工
蓄銳養威觀釁而動 斯及長策 遠馭座自兼幷)
우문옹은 그래도 전투를 일으키고 싶어서 이루겸을 따로 불러 믈었다.
” 짐은 군대를 동원하고 싶은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이루겸이 말했다.
” 북제는 광대에게 현혹되어 있고 술과 놀음에 빠져있습니다.
곧은 말을 하는 오직 한 사람 곡률명월은 이미 참소로 죽었습니다.
위아래는 마음이 벌어져 도로에서는 서로 눈 짓만 합니다.
뺏기 참으로 쉽습니다.“
군대를 당장 도원해도 좋다는 뜻이었다. 우문옹은 웃기만 했다. AD575년 3월 우문옹은 이루겸을 사신으로 북제에 보내 정탐하도록 했다.
가을 7월 우문옹은 드디어 대군을 일으켜 북제를 공략했다.
군사는 여섯 개 군으로 나누어 전삼군과 후삼군에 각각 삼군을 배치시켰다.
◾ 전삼군 총관 : 진왕 우문순, 사마소난, 달해진
◾ 후삼군 총관 : 월왕 우문성, 후막진숭, 조왕 우문초
우문헌은 2만 군사로 여양(하남 준현) 방면으로 나아갔고 양견은 3만 수군을 가지고 위수를 타고 내려가 황하를 따라 낙양으로 갔으며 후막진예는 2만 군사를 가지고 태행도(하남 박애)를 지켰고 이목은 3만 군사로 맹진을 지켰다. 우익은 3만 군사를 가지고 남쪽 방면으로 나아가 여주(하남 양성)와 진군(하남 회양)을 공격했다.
우문옹이 군대를 거느리고 하양(맹진,낙양 서쪽)으로 가려하자 우문필이 그쪽 방어가 단단하므로 분곡으로 나아가시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조경은 오히려 진양(태원)을 곧바로 습격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라고 말했다. 포굉도 진양급습을 주장했다. 우문옹은 조심스러워서 6만 군사를 거느리고 맹진으로 나갔다.(AD575년 7월 30일)
북주 대군이 북제의 영토에 들어서자 우문옹이 당부했다. 나무를 베는 것과 곡식을 밟는 것과 주민을 범하는 경우 머리를 베겠다고 했다. 북주군은 곳곳에서 북제의 성을 함락시키고 낙양을 압박해 들어갔으나 독고영업이 지키는 금용성(낙양 서북쪽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9월에 북제의 고아나굉이 군사를 거느리고 낙양을 구원하기 위해 내려왔다. 이 때 우문옹이 병이 나서 모든 군사를 되돌렸다. 북제 장수들은 퇴각하는 북주군사를 뒤쫓아가자고 했으나 행대 걸복귀하는 허락하지 않았다. 우문헌, 우익, 이목도 곳곳에서 승리했으나 성을 지키지 않고 퇴각했다.(AD575년 8월)
일 년이 지난 AD576년 9월 우문옹이 신하들에게 말했다.
” 지난해 내가 열병이 들어 도적을 평정하지 못했다.
들어가 보니 북제 군사들은 마치 어린아이 같았다.
게다가 조정은 썩고 문드러져서 소인배들이 정치를 농단하면서
저녁에 할 일을 아침에도 계획하지 않고 있었다.
백성은 살림이 어려워 난리들이다.
하늘이 준 기회를 받지 않으면 이 또한 후회로 남을까 걱정이다.
진주(산서성 임분)은 고환이 일어난 곳이다.
내가 그곳을 공격하면 저들은 반드시 구원하로 올 것이다.
매복하고 있다가 급시에 공격하면 반드시 이길 것이다.
그런 다음 파죽지세로 동쪽으로 들어가
도적들의 소굴(업을 말함)을 소탕한다면
글자와 수레바퀴를 통일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제장들은 군사발동에 부정적이었다. 우문옹이 소리쳤다.
”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나의 군대를 막는 놈들은 모조리 군법으로 처리할 것이다.“
10월 4일 우문성, 우문량, 양견을 우삼군으로 삼고 우문검, 두태, 구숭을 좌삼군으로 하며 우문헌과 우문순을 선봉으로 출격했다. 우문옹은 진주에 도착하자 진을 치고 주면 여러 곳에 군사를 보내 북제영토를 침범하도록 했다. 이 때 진주를 지키는 북제의 진주행대 좌승 장연준이 매우 성실하고 총명하여 전쟁준비를 매우 꼼꼼히 하고 있었는데 그런 장연준을 질시하던 조정 대신들은 무능한 사람으로 교체해 버렸다.
10월 19일 북제에서는 태원시 남쪽에 대군을 모았다. 25일 북제의 주군 고위는 대군을 이끌고 진주로 향했다. 그 와중에 진주를 방어하던 진주자사 최경숭이 북주에 항복하여 진주가 적의 손에 떨어졌다.
진주로 향하던 고위는 곳곳에서 쉬면서 풍비와 함께 사냥을 즐기고 있었다. 진주가 함락될 위험에 있다는 전갈이 오전에만 세 번이나 도착했지만 우승상 고아나굉은 오히려 핀잔을 주었다.
” 대가께서 지금 중요한 사냥을 하시고 계신데
어찌 변방의 작은 일상적인 일을 가지고 긴급히 상주하겠느냐?“
고아나굉은 보고하지 않고 묵살했다. 저녁에 이르러 진주가 함락되었다는 전갈이 오자 그제서야 고아나굉은 황제에게 그 사실을 황제에게 보고했다. 황제는 급히 군영으로 돌아오고 싶었으나 풍비가 재미에 빠져 한 바퀴 더 사냥하자고 조르는 바람에 돌아가는 것을 멈추었다. 10월 28일 북제의 고위는 군사를 나누어 내려왔고 북주에서는 진주를 지키는 양사언을 빼고는 모두 뒤로 물러섰다. 매복 작전인 셈이었다.
북제의 주군 고위가 진주(임분)에 도착했다. 북주 장군들은 이참에 고위를 공격하자고 했지만 침착한 우문옹은 군사를 물리고 예봉을 피했다. 북제군은 진주를 포위하고 밤낮으로 공격했다. 양사언이 소리쳤다.
” 죽고 사는 것은 오늘 정해진다. 내가 너희들의 선봉에 설 것이다.
(死在今日 吾以爾先)“
북주의 군사들이 분전하여 일당백이 아닌 사람이 없었다. 우문옹은 6만 군사를 우문헌에게 주어 급히 진주로 보내 구원하게 했다. 주군 우문옹은 잠깐 장안으로 갔다가 열흘 뒤 다시 평양으로 돌아와 대군과 합류했다.
<134> 고위의 도망(AD576)
총력 공격에도 불구하고 진주를 수복하지 못한 고위는 고아나굉에게 계속 공격을 할 것인지를 물었다. 고아나굉이 말했다.
” 우리 군사가 많으나 전투를 감당할 군사는 10만을 넘지 못합니다.
다들 병들고 다쳤으며 나무하거나 불 때는 사람들 뿐 입니다.
물러나서 분수 동북쪽 다리를 지키는 것만 못하겠습니다.”
북주군의 위세가 대단하니 일단 후퇴하자는 말이었다. 안토근이 발끈하며 반박했다.
“ 무슨 말씀입니까.
한 줌 정도밖에 되지 않는 도적들을
말 위에서 베고 분수 속에 내던져 버릴 뿐입니다.”
고위는 한참 망서렸다. 그 때 누군가가 북주군이 더 먼 곳에서 와서 상황이 더 나쁠 것이므로 공격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고위는 그렇다고 판단하고 다시 공격을 감행했다. 기다리고 있던 우문옹도 고위의 군대를 맞아 격전을 벌였다. 시간이 갈수록 북제의 패색이 짙어졌다. 녹상서사 목제파가 황제에게 도망가야 한다고 두 번이나 소리 질렀다. 고위는 풍숙비를 데리고 달아났다. 개부의동삼사 해장이 말리고 나섰다.
“ 반진반퇴는 전쟁에서 늘 있는 일입니다.
지금 병사들이 가지런히 정돈되어있고 다치지도 않았습니다.
폐하께서 버리고 어디로 가신단 말입니까.
말굽이 한 번 움직임에 따라서
사람의 마음이 어지러워지면 다시 안정시킬 수가 없습니다.
원컨대 속히 돌아오셔서 안심시켜 주십시오.”
무위장군 장상산도 황제 뒤에서 간하였다.
“ 군대가 다시 집결했고 포위상태도 좋습니다.
지존께서는 마땅히 돌아가셔야 합니다.
거짓말 같으시면 시종들과 같이 가셔서 직접 보십시오.”
황제가 그럴 생각으로 바뀌자 목제파가 팔꿈치로 치면서 만류했다.
“ 저런 말들은 믿기가 어렵습니다.”
마침내 고위는 풍숙비를 데리고 북쪽으로 달아났다. 주군이 도망갔다는 소식이 퍼지자 북제의 군사는 안개처럼 무너졌다. 죽은 사람이 만 명이 넘었고 가지고 온 전쟁물자는 고스란히 버리고 돌아갔다. 고연종만이 자신의 군대를 가지런히 하여 후퇴했다.
우문옹이 평양(임분)에 입성하고 나서 피곤한 군사를 되돌리려고 하자 양사언이 극구 반대했다.
“ 지금 북제 군주가 혼비백산 도망갔습니다.
백성들의 마음이 크게 동요하고 있습니다.
다시 공격할까 매우 두려워하고 있으니
그것을 이용하여 공격하시면 반드시 적을 꺾을 수 있습니다.”
우문옹이 양사언의 손을 붙잡고 말했다.
“ 진주를 얻은 것은 장차 북제를 평정하는 기초이다.
나는 후방의 변고를 염려하여 근심하고 있으니
너는 나를 위하여 이곳을 잘 지키고 있으라.”
우문옹은 군사를 가다듬고 북쪽으로 진격을 계속했다. 돌아가자는 장수들이 많았으나 따라오지 않으면 혼자라도 가겠다고 생각을 꺾지 않았다.
북제 주군은 진양을 고연종과 고효형에게 맡기고 더 안전하다고 생각한 북삭주(산서 삭주)로 도망갔다. 신하들이 북삭주로 가면 진양을 포기하는 것이며 돌궐에게 귀속되는 것이므로 안 된다고 애원했으나 고위는 듣지 않았다. 고위는 진양을 지키는 고연종과 고효형에게 조서를 내려 군사를 모으라고 지시했다. 고위가 장차 북삭주로 가겠다고 하자 울면서 말렸지만 먼저 황태후(호태후)와 태자를 먼저 북삭주로 피신시켰다. 고위는 안덕왕 고연종에게 상국 및 병주자사로 임명하면서 말했다.
“ 병주는 형님(사촌 형)이 가지십시오.
이 아이는 지금 떠나겠습니다.”
고연종이 말했다.
“ 폐하께서는 사직을 위해 움직이지 마십시오.
신이 폐하와 사직을 위해
나가서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반드시 적을 깨뜨릴 수 있습니다.”
목제파가 곁에서 비웃으며 말했다.
“ 지존께서 이미 계획을 확고히 하셨으니
왕께서 막을 수가 없으십니다.”
고위가 밤에 오룡문(진양궁 동문)을 부수고 나서 돌궐로 달아나려 하자 시종하던 신하들이 다 도망가고 사라졌다.
북제의 장수들은 속속 북주에 항복했다. 하발복은이 북주로 망명해오자 우문옹은 그에게 높은 벼슬을 내렸다. 고아나굉은 1만 명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북준군이 온다는 풍문만 듣고 도망치고 말았다. 한건업이 투항하자 북주에서는 상주국으로 우대했다.
<135> 북주에게 함락되는 북제 진양(태원(AD576)
돌궐 땅인 북삭주로 향하던 고위는 영군장군 매승랑이 말 앞에서 막고 조아리자 생각을 바꾸어 업으로 가기로 했다. 도망온 고아나굉이 수행했고 무리의 숫자는 광녕왕 고효형과 양성왕 고언도 등 십여 명이었다.
목제파는 서쪽으로 달아나 북주에 투항했다. 육령훤은 자살하고 그의 친족들은 모두 주살되었다. 우문옹은 목제파에게 주국 및 의주(산서성 동천)자사를 주었다. 그리고는 조서를 내렸다.
“ 만약 사람이 꾀를 묘하게 쓴다면 천명에 깊이 통달하여
관직을 높이고 상작을 더 높이 내릴 것이다.
저쪽으로 투항한 옛 나의 장수들도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사면해 줄 것이다.”
우문옹의 사면 조서가 알려지자 북제의 신하들은 다투어 북주로 투항했다.
<136> 고연종의 황제등극(AD576)
고위가 업으로 가고 나서 진양을 지키던 안덕왕 고연종은 주변으로부터 황제의 자리에 오르라는 독촉을 많이 받았다.
“ 대왕께서 천자가 되지 않으시면
여러 사람들이 대왕을 위해 목숨을 버리려 하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었다. 무능하고 무책임한 황제 고위는 업으로 내뺐지만 업도 안전하다는 보장이 없었다. 또 북주에 항거할 군사를 모으기 위해서는 천자라는 권위가 꼭 필요했다. 고연종은 어쩔 수 없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고 선언했다.
“ 무평(고위의 연호)이 연약하여
정치가 환관에서 비롯되고
빗장을 부수고 달아난 곳을 모르는 형편이 되었다.
왕공과 경사에 외람되게 추대 받아 보좌를 계승하고자 하노라.”
고연종은 창고를 열고 궁궐에 있는 후궁과 미녀들도 마찬가지로 여러 장수와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북제의 주군은 그 소식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 차라리 병주를 북주에게 주는 것이 더 낫겠다.
안덕왕이 갖게 하고 싶지는 않다.”(AD576년 11월 14일)
11월 15일 우문옹이 진양에 도착했다. 고위는 11월 16일 업에 들어갔다. 주의군사는 구름처럼 진양성을 에워쌓았다. 고연종에게 충성을 바치려는 부하들의 필사적인 항전의 기세에 눌려 북주의 대군이 진양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우문옹은 거의 죽을 뻔하기도 했다. 고연종은 우문옹이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체 중에서 긴 수염(우문옹)DF 찾으라고 했으나 찾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번 전투에서 승리한 것으로 판단한 군사들은 술에 한껏 취하고 도취되어 정돈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우문옹은 전쟁을 계속할 생각이 없었는데 우문헌, 우문흔, 왕의 등이 재촉하는 것을 이길 수가 없어서 다음날 전투를 다시 개시했다.(AD576년 11월 17일) 진양성 동문을 함락시킨 북주군은 달아나는 고연종을 사로잡았다. 우문옹이 말에서 내려 고연종의 손을 잡자 뿌리치며 말했다.
“ 죽을 사람의 손인데 어찌 지존을 가까이 하겠습니까.”
우문옹이 말했다.
“ 두 나라 천자는 원망이나 미움을 가진 것이 아니라
단지 백성을 위하여 온 것일 뿐이오.
끝내 해치지 않을 것이니 두려워하지 마시오.”
고연종의 옷과 모자를 돌려주고 그를 극진하게 예우하였다. 당옹 등 진양의 대신들도 모두 북주에 투항하였다.
고연종이 황제를 칭하면서영주(하북성 하간)자사인 고개에게 사신을 보내 사태가 수습되면 황위를 숙부인 고개에게 넘길 것이라고 약속했다. 고개는 신하로써 참람한 말을 했다고 하여 사신을 잡아 업으로 압송했다. 고개는 고담의 동생이므로 황제 고위와 고연종에게는 숙부였다.(AD57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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