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이냐 분열이냐,국가흥망의 교훈 #21 : 북조를 통일한 우문태의 북주(北周) <S>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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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125> 육령훤의 반격과 조정의 실권 장악(AD573)
화사개가 AD563년부터 참수된 AD571년까지 북제의 정치는 매우 문란했다. 화사개는 육령훤과 목제파와 왕자중과 결탁하여 정권을 농단했는데 화사개가 낙마한 뒤로는 장님 조정이 정권을 잡고 새로운 인물을 등용하고 환관과 소인배를 몰아내어 자못 정치쇄신을 꾀했다. 그러나 육령훤 일당들은 조정의 그런 행동이 눈에 거슬렸다. 조정이 결국은 육령훤 세력을 몰아내려고 할 것이 분명했다.
조정도 육령훤 일당을 제거해야만 자신의 권력이 공고해 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조정은 일단 어사중승 여백률을 시켜 육령훤 세력의 하나인 왕자충을 뇌물수수로 탄핵하도록 했다. 왕자충이 걸려들면 그것은 곧바로 목제파와 육령훤으로 연결되는 것이었다. 거기에 더하여 폐서인 된 호황후지지 세력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호황후의 오빠 호군유를 시중, 호군벽을 어사중승으로 심으려 했다.
조정의 의도를 확실히 읽은 육령훤은 반격을 해 왔다. 호군유와 호군벽의 인사조치를 취소하게 하고 체포된 왕자충을 즉각 방면하도록 조치했다. 이 번 권력 다툼에서 육령훤이 이긴 것이 확실했다. 조정에게 배척받았던 환관들도 들고 일어나서 조정에게 반기를 들었다. 조정이 조회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조정이 오랫동안 보이지 않자 육령훤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육령훤이 울면서 대답했다.
“ 이 늙은 비첩은 죽어야 마땅합니다.
처음에 조정이 재주가 많고 박학하다는 소문을 듣고
황상께 좋은 사람이라고 추천드렸는데
알고 보니 흉악한 간신에 불과합니다.
사람은 진실로 속을 알 수 없으니 늙은 비첩은 죽어야 합니다.“
황제는 조정에 대한 수사를 한장란에게 지시했다. 한 장란은 평소 조정을 미워한 사람이었다. 거짓 칙령으로 수수한 물건 10 가지 사건을 엮어 만들어 조정을 탄핵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죽이지는 않기로 황제와 약속한 적이 있었으므로 조정은 사형을 면하고 시중 및 복야 직책만 벗기고 북서주자사로 내보냈다. 조정이 끝까지 버티고 황제를 뵙겠다고 요청했지만 한장란이 허락하지 않고 질질 끌어내 밖으로 내쫓았다. 목제파가 상서좌복야가 되고 단소의 동생 단효언이 우복야가 되었다.
단소는 뛰어난 충신이었지만 그 동생 단효언은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조정의 천거로 이부상서에 발탁되었지만 뇌물을 받고 인사를 처리했으며 친구들을 모두 요직에 앉혔다. 사람들은 단씨만 등용하는 것에 대해 비판했지만 단효언은 대꾸하지 않고 얼굴 표정만 찌푸릴 뿐 이었다. 조정이 무너지게 되자 재빨리 한장란과 결탁하여 조정을 몰아내는 역할을 도맡아 하고 그 공로로 그 자리를 꿰찼다.
<126> 명장 고장공의 죽음(AD573)
고장공은 고징의 아들이다. 용모가 빼어났을 뿐 아니라 용맹하여 AD564년 망산 전투에서 500의 돌격기병으로 우문호의 침략군을 격파한 전공을 사람이었다. 그 위세를 기리며 사람들이 난릉왕입진곡을 만들어 부를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황제와 그 측근들은 고장공을 매우 시기하고 견제하였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고장공은 극도로 행동을 자제했다. 공무로 나서는 것을 기피하고 오로지 재산축적에만 뜻을 두었다. 주변 사라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몸을 더럽히는 것이고 사직을 버리는 일이라고 한탄했지만 자신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어쩔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 때 진나라가 회하지역을 침략해 들어왔는데 고장공은 병을 핑계로 나서지 않았다. 북제 황제는 짐독을 보내 난릉왕 고장공을 독살시켰다.(AD573년 5월)
<127> 충신 장조제거(AD573년)
국자좨주 장조는 황제에게 고전을 가르치고 시독하는 사람으로 황제의 신임이 매우 두터운 사람이었다. 장조가 황제의 아끼는 호족 신하 하홍진이 장조를 추천하여 시중으로 임명하고 개부의동삼사까지 덧붙여 내리면서 황제의 믿음이 더욱 커지자 목제파와 한장란이 그들을 미워하였다.
장조는 신분이 미천하였으나 대신으로써 할 말을 곧게 하고 비판을 제대로 하는 것(징청澄淸)이 자신의 진정한 책무라고 생각했다. 궁궐의 사치와 낭비를 맹렬히 비난하고 교만하고 무능하며 방종한 신하들을 철저히 단속하였으며 특히 황제의 총애를 받는 자들에 대해서는 더 준엄하게 처리했으므로 황제의 사랑은 깊어지기만 했다.
한장란은 어떻게 해서라도 장조를 제거해야한다고 생각했다. 이 때 황제가 업에서 진양으로 가는 문제로 조정이 시끄러웠다. 장조는 최계서에게 가면 안 된다고 말했다.
“ 지금 진나라와 전쟁 중인데
대가(황제)께서 병주(진양)으로 가는 것은
마치 도망가는 것으로 여겨질 수가 있어서 걱정입니다.
표문을 올려서라도 막아야 합니다.“
시중 최계서는 여러 문관들과 연명으로 진양으로 가지 말라는 간언을 올렸다. 그러나 대신이었던 조언심, 당옹, 단효언은 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장란은 황제에게 이렇게 말했다.
“ 연명으로 서명한 사람들은 모두 한족입니다.
겉으로는 병주행차를 반대한다고 하지만
실은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마땅히 주살시켜야 합니다.“
황제 고위는 반대 서명한 관리들을 다 함장전으로 불렀다. 장조를 비롯하여 시중 최계서, 상서좌승 봉효염, 산기상시 유적, 황문시랑 배택, 곽준 등이었다. 황제는 이들을 궁중 뜰에서 목 베었다.
<128> 북제 왕림이 진에게 잡혀 죽음(AD573)
진의 오명철이 북제의 수현을 포위했다. 비수의 물을 막았다가 성안으로 공격하는 수공을 펼쳤다. 수현 성 안에서는 역질이 돌고 열에 여섯, 일곱이 죽어서 나갔다. 북제 조정은 피경화에게 구원병을 붙여 보냈지만 지난 번 패한 경험이 있던 울파호는 진격하지 못하고 머뭇거리고만 있었다. 그 틈을 타고 오명철이 수현성을 급습하여 왕림, 가주혼도유, 이도영 등을 사로잡아 건강으로 압송했다. 피경화는 군장비를 그대로 두고 북쪽으로 도망가고 말았다.
오명철이 왕림을 사로잡았지만 오명철의 휘하군대는 대부분 옛날 왕림의 부하들이었다. 왕림이 지략이 있고 관대했으며 통솔력이 많았기 때문에 붙잡힌 왕림을 애석하고 불쌍히 여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명철은 장차 부하들이 변고를 만들까 두려워급히 사람을 보내 건강으로 압송 중인 왕림의 목을 베도록 지시했다.
수양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목제파와 한 장란은 악삭이라는 놀음을 그치지 않았다.
“ 수양 땅이야 원래 그들 것이 아니었드냐.
도로 가져간 것일 뿐이다. “
황제 고위가 수양을 잃은 것을 걱정하자 목제파가 말했다.
“ 설사 국가가 남쪽 땅을 다 잃어도 구자국 하나 만들면 되는 것입니다.
가련한 인생이 원래 짧은 것인데
오직 즐거운 일만 하기에도 부족한 것 아닙니까?
어찌 근심 따위를 하시려합니까?“
좌우 총신들이 모두 그렇다고 화답하자 황제도 즐거워하며 술을 마시고 춤을 추며 놀았다.(AD573년 10월)
건강에서는 북제로 망명간 왕림의 머리를 저자에 매달아 놓았다. 옛날 양나라 관리였던 주창이 서림에게 편지를 써서 왕림의 머리를 수습하겠다고 말하였다. 왕림의 머리를 얻은 주창은 수현 팔공산에 묻었는데 모인 사람이 수 천 명이었다.
<129> 북제 삭주 행대 고사호의 반란(AD574)
북제 삭주(내몽고 화림각이)행대 고사호는 원래 고환에게 양자로 들어온 사람이다. 날쌔고 용감하여 변방에서는 명성이 높았다. 북제 황제는 작골광변이하는 흉노족 신하를 삭주자사로 보냈는데 이 사람이 고사호를 가볍게 여기면서 예로써 대하지 않았다. 고사호가 화를 내며 말했다.
“ 들어가서 주군 곁에 있는 사악한 무리들을 제거하고자 한다.”
군대를 이끌고 내려와 양곡(진양 부근)까지 이르렀다. 당시 진양을 지키던 조해는 조서를 올려 허락을 받기에는 시간이 너무 촉박하여 가짜 조서를 만들어 토벌에 나섰다. 변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북위 조정에서는 급히 당옹을 보내고 황제도 이어서 군사를 챙겨 업에서 진양으로 달려갔다. 조정의 군사가 도착하기도 전에 고사호의 군대는 조해에게 패하였다.고사호는 강물에 몸을 던져 익사했다. 고사호의 아들은 한장란의 딸과 결혼했는데 어떤 사람이 고사호의 반란 음모를 알려오자 한 장란은 그 사람을 대신 모함죄로 걸어서 죽였다.
고사호가 과연 반란을 일으키자 죽은 사람의 가족들이 대궐로 달려와 억울함을 말하고 추증을 요구했는데 한장란이 전달되지 못하도록 막았다.(AD574년 2월)
<130> 고위 고작의 잔학함과 한장란의 죽음(AD574)
정주자사 고작은 황제 고위의 바로 위 배다른 형으로 고담의 장자였다. 고작은 매우 광포하기로 소문났었다.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의아이르 뺏어 개에게 먹였으며 경악하여 울고 있는 아이의 어미에게 피를 묻히고는 맹견에게 던지기도 했다. 항상 이렇게 중얼거렸다.
“나는 문선백부(고양)의 사람됨을 배울 것이다.”
형 고위가 쇠사슬로 묶어 행재소로 소환한 다음 사슬을 풀어주며 물었다.
“ 형님은 정주에 게실 때 무엇이 제일 재미있었습니까?”
고작은 대답했다.
“ 큰 그릇에 전갈을 잔뜩 넣은 다음 원숭이를 던져 넣는 일이었습니다.”
황제는 즉시 전갈을 한 말 찾아오도록 하고는 사람을 옷을 벗겨 목욕조에 눕힌 다음 전갈을 그 위에 풀어주었다. 벌거벗은 사람이 전갈에 물려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며 고위와 고작은 깔깔대며 즐거워하였다.
고위는 고작에게 나무라며 말했다.
“이런 재미있는 일을 왜 진작 내게 알려주지 않았습니까?”
고위는 고작을 대장군으로 삼고 조석으로 같이 놀이에 빠졌다. 황제 고위가 형 고작과 가까워지자 그것을 시기한 한장란이 고작을 비판하고 나섰다. 고작 또한 한 장란에게 밀릴 수가 없었다. 동생 고위에게 한장란을 내쳐야 한다고 충고했다. 고위는 한 장란을 제주(산동성 제남)자사로 내보냈다. 한 장란이 임지로 떠나려 준비하는 사이에 반란을 일으켰다고 무고하여 가두었다. 그동안의 정을 생각하여 차마 직접죽이지는 못하고 사람을 시켜 손으로 치는 놀이를 하는 척하다가 목을 졸라 죽였다.
<131> 북제 주군 고위의 사람 됨됨이(AD574)
원래는 똑똑했으나 어릴 적에 큰 꾸지람을 듣고부터 말이 어눌해진 황제 고위는 내성적인 성격이어서 사람들을 접견하는 것을 극도로 피했다. 신하들과 눈이 마주치는 것을 싫어하여 절대로 눈을 들지 못하도록 했다. 아버지가 그랬듯이 후궁들이 화려할수록 황제의 권위가 선다고 배워서 후궁들의 치장에 비단 일만 필의 비용을 들였다.
궁전을 매우 화려하게 지었으며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짓던 공사를 허물기도 했다. 산을 깎아서 조형물을 만들기도 했고 그 공사를 위해 하루 밤 불 밝히는 비용으로 기름 일만 분을 쓰기가 일쑤였다. 재앙과 도적이 일어나면 겸허히 비용을 줄이지 않고 돈을 들여 제사를 올리기에만 급급했다.
음악적인 재능이 있어서 스스로 비파를 잘 탔고 곡을 직접 만들기도 했다. 하도 낙천적이고 걱정이 없이 놀기만 좋아했으므로 그를 ‘걱정 없는 천자(무수천자無愁天子)’라고 놀려댔다. 황궁 정원 화림원에다 빈아촌을 세워서 스스로 남루한 옷을 입고 다니면서 구걸하는 것을 재미로 여겼다. 또 궁내에 성을 그려서 쌓은 다음에 편을 짜고 환관들을 인솔하여 전쟁놀이를 하기도 했다.
육령훤과 목제파와 고아나굉과 한장란 등이 조정정치를 농단하고 환관 등장옹, 진덕신, 호인 하홍진 등이 기밀을 다루면서 인사와 형벌과 조세를 통해 부정축재를 일삼았다. 왕으로 책봉된 사람이 100 명을 넘었으며 개부의동삼사로 관부를 연 사라은 천을 헤아렸다. 시중과중상시가 수십 명이었고 개나 말이나 매 중에서도 의동 혹은 군의 칭호를 갖는 경우가 많았다. 국가재정이 고갈되자 군이나 현을 쪼개 그 관직을 팔아서 충당했으므로 태수나 현령은 모두 부유한 상인들이었다. 이들은 자신의 투자를 회수하기 위해 각박하게 거두었으므로 백성들의 살림은 더욱 피폐해 질 수밖에 없었다.
<132> 우문직의 반란(AD574)
우문태에게는 열 명이 넘는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위왕 우문직은 여섯째로 현재 황제 우문옹과 어머니가 같았다. 같은 배에서 난 동생이었으므로 우문옹은 우문직을 끔찍하게 아꼈지만 실수를 할 때마다 꾸지람을 마다하지 않았다. 우문옹은 우문직의 집을 동궁으로 쓰면서 우문직에게는 거할 곳을 마음대로 정하라고 했는데 여러 관서를 둘러보다가 마음에 들지 않자 버린 절을 집으로 사용하고자 했다. 제왕 우문헌이 직에게 말했다.
“ 동생은 자녀가 많은데 그 절은 너무 좁지 않겠소?”
우문직이 대답했다.
“ 내 한 몸도 내 마음대로 못하는데 무슨 자손까지 걱정합니까?”
우문직이 우문옹과 함께 사냥을 하다가 난폭한 행동을 하자 만인이 보는 가운데 채찍질을 하였다. 형과 같이 우문호를 제거하고도 원하는 직을 얻지 못해 원한이 쌓여있었던 우문직이었다. AD574년 7월 황제가 운양으로 가면서 장안을 잠깐 비운 틈을 타고 우문직이 반란을 일으켰다. 장손람은 우문옹이 있는 곳으로 도망갔는데 울지운은 문을 닫아걸고 막았다. 울지운은 손가락까지 다쳤지만 끝까지 문을 방어했다. 우문직은 문에 불을 질렀는데 불이 꺼지면 쳐들어 올 것이 걱정되어 나무와 책상들을 가져와 불이 꺼지지 않도록 했다. 한참 뒤에도 불이 꺼지지 않자 우문직 일당들은 물러갔다. 울지운은 물러나는 우문직 군사들의 뒤를 습격하여 대패시켰다. 황제가 돌아와 우문직을 체포하고 폐서인 시킨 뒤 별궁에 가두었다가 얼마 있지 않아 죽였다. 울지운은 그 공로로 최고 병권을 가진 대장군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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