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이냐 분열이냐,국가흥망의 교훈 #21 : 북조를 통일한 우문태의 북주(北周) <H>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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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51> 동위 황제 원선견의 고징 암살모의(AD547)
동위 황제 원선견이 고징에게 모멸과 수치를 당했다는 것과 황제가 그에 대해 울분을 토한 것을 알게 된 상시 순제라는 사람이 낭중 원근, 장추경, 유사일 및 화산왕 원대기, 회남왕 원선홍, 제북왕 원휘와 더불어 고징을 암살하기로 계획했다. 황제가 순제에게 물었다.
“언제 강연(암살실행)을 열 계획인가?”
황제의 뜻을 확인한 순제는 궁궐 내에 토산을 만든다는 명분으로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그러나 땅굴이 천추문 밑을 통과할 즈음 문지기 경비병이 땅 밑의 이상한 소리를 듣고 수사한 끝에 고징 암살계획이 발각되었다. 고징은 병사를 이끌고 황궁으로 가서 황제에게 따져 물었다.
“ 폐하께서는 어찌 뒤집어 엎을 생각하십니까?
신의 부자는 사직을 세운 공로가 있는 사람 아닙니까
무슨 죄를 졌단 말입니까.
반드시 주변의 비빈 무리들이 주모한 것일 것입니다.”
고징이 호부인과 이빈을 죽이려고 하자 황제가 정색을 하면 말했다.
“ 신하가 역모를 한다는 소리는 들었어도
황제가 반란을 일으키려 했다는 것은 못 들어봤소.
왕이 사직을 뒤엎을 생각이면서 어찌 내게 책임을 지우는 것이오.
또 내가 왕을 죽이면 사직이 안정되는 것이고
못 죽이면 망하는 것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일이오.
나도 슬픔으로 내 한 몸 가누기 힘든데 비빈들이야 어떻겠소.
필시 역모를 꾸민다면 완급은 오로지 왕에게 달려있는 일이오.”
고징이 칼을 내리고 계단 앞에서 울면서 사죄했다. 그리고 술을 취하도록 마시고 밤이 늦어서야 궁에서 나갔다. 사흘 뒤 황제를 합장당에 가두고 순제 등 주동자를 저자에서 팽하였다.
<52> 고징 암살 주모자 순제
순제는 원래 강동(강소성)에서 살았고 양나라 소연과 매우 친했다. 똑똑하면서 학문이 깊었으며 글을 잘 지었지만 기개가 높아서 항상 남에게 복종하는 것을 싫어했다. 소연이 황제가 되고서 누군가가 순제를 추천했지만 소연은 그 사람의 인품을 이렇게 평가하며 말했다.
“ 그 사람은 재주는 있지만 풍속을 어지럽히고 뒤집기를 좋아해서 쓰기가 어렵다.”
순제는 소연이 불교를 숭상하여 탑을 세우고 절이 사치하는 것을 조장하자 이를 크게 비판했는데 소연이 화를 내고 순제를 죽이려하자 소연의 총신 주이가 알려주어 북쪽 동위로 망명간 사람이다. 고징이 중서감으로 임명되고 순제를 시독으로 차출하여 가까이 두려하자 고환이 죽기 전에 고징에게 말했다.
“나도 순제를 아끼기 때문에 그를 쓰지 않은 것이다.
그가 궁에 들어오면 실패하여 반드시 죽게 될 것이다.”
그래도 고징이 고집하므로 순제를 채용한 것이다. 시중 양준이 순제에게 이렇게 물었다.
“ 쇠약해질 나이가 된 황혼녘에 무슨 고생을 하고자 이런 일을 꾸몄는가?”
순제가 말했다.
“ 아직도 씩씩한 기력이 남아있네.
내 나이가 들어 꺾이고 부러져도
공로와 이름을 세우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왔기 때문에
천자를 돕고자 권신을 주살하고자 한 것이네.”
고징이 살려주고자 하는 마음으로 순제에게 물었다.
“ 무슨 이유로 역모를 꾸몄는가?”
순제가 이렇게 대답했다.
“ 황제의 조서를 받고 일을 일으킨 것인데 어떻게 역모라고 하시오.”
유사는 순제가 늙었으므로 사슴이 끄는 수레를 태워 동쪽 저자에 가서 그와 함께한 무리를 태워 죽였다. 앞에서는 ‘팽(烹)’이라하였고 여기서는 “태웠다(焚)‘이라고 했는데 어느 것이 정확한지는 확실하지 않다.
<53> 후경의 전투력과 패배(AD547)
이때 후경은 장갈(하남성 허창 북쪽 20KM)에 있었는데 양나라와 손을 잡고 동위의 영토인 서주의 도읍 팽성을 공격할 생각이었다. 양나라에서는 소연명을 팽성으로 보내 후경을 기다리게 했다. 동위 대장군 고징은 공격을 받고 있는 팽성을 지원하기 위해 대도독 고악과 반락을 파견할 생각이었다. 진원강이 모용소종을 시키는 것이 반락보다는 훨씬 나은 선택이라고 제안하므로 모용소종을 동남도대행으로 고쳐 삼고서 고악과 반락을 같이 따라 보냈다.
후경은 처음에 동위의 한궤가 자신을 토벌하러 온다고 하자 돼지 창자나 먹는 아이라고 비하했었는데 서위의 고악이 온다고 할 때에는 병사는 뛰어나도 지휘관이 평범할 뿐이라고 폄훼했다. 그러나 모용소종을 보냈다는 소식을 듣고는 놀라서 이렇게 말했다.
” 누가 선비족 아이(고징)에게 모용소종을 추천하여 오게 가르쳤는가?
고환이 죽지 않은 것 아닌가?“
고징이 정위경 두필에게 다스리는 일의 요체와 경계해야 할 중심을 물었다. 두필의 대답이 이렇다.
” 천하의 가장 큰 일은 상을 내리고 벌을 주는 일입니다.
한 사람에게 주는 상이 천하를 기쁘게 하며
한 사람에게 내리는 벌로 천하가 두려워합니다.
진실로 두 가지의 일에 실수하지 않으면 저절로 모두 아름답게 됩니다.
(天下大务,莫过赏罚 赏一人使天下之人喜,罚一人使天下之人惧,苟二事不失,自然尽美)“
고징이 그 말을 크게 기뻐했다.
동위 모용소종이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탁타현(팽성 부근)에 도착했다. 양나라의 양간이 소연명에게 기습작전을 제안했지만 소연명은 묵살했다. 모용소종의 군대가 탁타현 성을 맹공했지만 소연명은 술에 취해 잠자고 있었고 양나라 군대는 탁타현을 지원하러 나가지도 않다가 군대를 물려 후퇴하고 말았다. 소연명은 모용소종에게 포로가 되었고 양간은 도망갔다.
후경은 양나라 소연에게 원씨 성을 가진 사람을 후계자로 뽑아서 군사와 함께 북쪽 동위로 보내 고징을 몰아내자고 제안했다. 그렇게 되면 동위 사람들도 좋아할 것이고 소연 또한 남북을 통일하는 셈이니 공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소연은 원정이라는 사람을 세워 함양왕으로 삼고 군대를 주는 한편 동위의 주군으로 임명했다.
후경은 모용소종과의 이번 전쟁에서 크게 이겼다. 작전의 핵심은 짧은 칼을 써서 적군 사이를 헤집고 들어간 다음 무릎 아래를 공격하는 전법이었다. 여러 장군이 부상을 당하거나 사로잡혔고 모용소종의 말이 무릎이 잘리는 바람에 모용소종은 낙마해 초성(안휘성 박주)으로 도망갔다. 모용소종이 말했다.
” 내가 여러 전투를 싸워봤지만 후경처럼 이기기 어려운 사람은 본 적이 없다.“
모용소종의 패배를 꾸짖던 다른 장수 곡률광과 장시현이 나가서 후경과 싸웠지만 역시 패배하고 돌아왔다. 모용소종이 말했다.
”지금 해보니 어떻던가? 나를 꾸짖을 만하던가?“
후경과 동위군대는 장기대치전으로 들어갔다.
해가 바뀌어 AD548년 정월이 되었다. 후경의 군대는 보급이 거의 끊기어 영주(장갈)자사 부하 사마세운은 동위에 투항까지 했다. 모용소종은 철기병 5천으로 후겨을 공격했다. 후경은 군대를 분발시키기 위해 군사들에게 가족들을 모두 고징이 죽였다고 헛소문을 퍼뜨렸다. 모용소종은 머리를 풀어헤치면서 그것은 거짓말이며 온 가족이 안녕한 것을 자신이 보장한다고 외쳤다. 여러모로 밀리면서 후경의 부하 장수들 중에 모용소종에게 투항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크게 패한 후경은 급히 남쪽으로 도망갔다.
<54> 동위와 양의 화해(AD548)
후경은 전쟁에서 패배하고 남예주의 마두성(안휘성 회원 남부)으로 들어가 웅거했다. 동위 고징은 후경이 차지했던 13개 주를 거의 다 회복하고 나서 양나라와 화해하기를 원했다. 포로로 있는 소연명을 설득하여 양나라에 사람을 보내 자신의 진심을 말하게 하여 우호관계를 돈독히 하는 데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소연명은 하후승변을 보내 자신이 어떻게 후대를 받고 있는지, 고징의 사람 됨됨이가 얼마나 좋은지를 말하여 양국의 화해를 추천했다.
그러나 양나라에서는 화해의 진의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후경이 불안하니까 일단 양과 화해 한 다음에 후경을 장악하면 다시 양나라로 쳐들어올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황제의 총신 주이가 화해를 강력하게 주장했으므로 소연은 화해요청을 수락했다. 소연명에게 보내는 친서를 하후승변에게 주어 화해요청에 화답하게 했다.
후경은 마두성에서 다시 옮겨서 수양(안휘성 수현)을 점거하고 있었는데 동위로 올라가는 소연명의 사자 하후승변 일행이 수양을 들르자 이들을 체포한 뒤 소연이 고징에게 보내는 황제의 편지를 빼앗고 대신 가짜 편지를 지어 보냈다. 그리고는 황제 소연에게 표문을 올려서 고징의 잘못을 낱낱이 지적하면서 화해의 부당성을 역설했다. 그리고는 금 300냥과 편지를 주이에게 주었으나 주이는 후경의 계문을 황제에게 전달하지 않았다.
양나라 조정에서는 한 동안 후경의 생사를 몰랐는데 양나라 황제가 사신을 보내 고환의 죽음을 조문하게 하자 후경은 표문을 여러 번 올려 양나라와 전쟁을 벌이기를 주장했지만 소연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황제는 더 이상 표문을 올리지 말라고 후경에게 명령까지 했다.
후경은 양나라를 설득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다른 계략을 고안해냈다. 즉, 고징이 소연명을 보내는 대신 후경을 달라는 편지를 거짓으로 써서 소연에게 보낸 것이다. 소연은 그렇게 할 참이었는데 부기가 나서서 반대했다.
” 후경이 궁핍하게 되어서 귀의하지 않았습니까.
그를 버리는 것은 의롭지 않습니다.
게다가 그는 백전을 겪은 사람이니
쉽게 붙잡히려 하겠습니까?“
사거와 주이는 그렇지 않다고 했다.
” 그저 한 마리의 사자와 같을 뿐입니다.”
황제가 편지를 써서 내려 보냈다.
“ 정양후(소연명)가 아침에 도착하면 저녁에 후경을 보내라.”
후경이 좌우에게 말했다.
“ 내가 저 오나라 늙은이가 심장이 얇은 줄 알았지.
주변에서는 안자어도 죽고 서서도 죽을 뿐이니 반란을 일으킴만 못하다고 부추겼다. 마침내 후경은 성안의 모든 주민을 긁어모아 군사를 만들고 반란을 준비했다.
후경은 황제에게 편지를 써서 양나라 최고의 가문인 사씨와 왕씨 여자를 아내로 취하겠다고 요청했으나 황제는 그보다 낮은 주이나 장관의 가문에서 여자를 택하라고 권고했다. 후경은 화를 내면서 왕씨나 사씨(오날 지역의 명문) 딸을 노복에게 줄 것이라고 호통쳤다. 후경은 이외에도 과도한 물자나 병기를 요청하거나 과도한 징세를 하므로써 양나라에 반감을 표시했다. 그리고 평소에 학정으로 백성들의 반감을 샀다가 징계를 받아서 조정과 사이가 멀어진 임하왕 소정덕과 연계작전을 펼쳤다.
예리한 여러 장수들이 후경의 반란기미를 알고 경고했지만 황제의 총신 주이는 후경의 요구를 마치 어린아이가 젖을 달라고 보채는 것 이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양나라에서는 후경에 대해 전혀 방비하지도 않았다.
<55> 동위의 서위 왕사정 공격 : 제6차 동서위 전쟁(AD549),
AD548년 동위가 양나라와 화평을 체결한 이후 동위 고징은 태위 고악과 행대 모용소종을 10만 대군과 함께 보내 서위의 왕사정이 지키는 영천(하남성 장갈)을 공격했다. 왕사정은 군사들을 매복시켜놓고서 기다리다가 습격하여 동위를 대파하였다.(AD548년 4월) 동위의 고악과 서위의 왕사정은 서로 토산을 쌓고 뺏기고 하기를 수차례 하면서 장기전에 들어갔다. 고징은 고악이 영주를 쉽게 뽑지 못하자 구원병을 보냈지만 여전히 함락시키지 못했다.
유풍생의 제안으로 강물을 막아 성쪽으로 돌리자 성 대부분이 무너졌고 고악은 병사를 교대로 투입하여 공격을 감행했다. 왕사정은 몸으로 화살을 막고 돌을 맞으면서도 병사와 함께 분연히 방어를 이어갔다 우문태는 왕사정이 위급하다고 느끼고 대장군 조귀와 군사를 급히 보내 지원하게 했지만 그 지역에 연못과 저수지가 많아서 신속하게 군대를 파견하기 어려웠다. 그 사이 동위에서는 전문 궁수를 동원하여 활로 성안을 공격하여 거의 성이 함락될 즈음 강력한 태풍이 들이닥쳐 동위의 배가 부서지고 동위 군사가 혼란에 빠졌다. 모용소종이 물에 빠져 익사하고 유풍생은 헤엄쳐 올라오다가 화살을 맞고 죽었다. 고징은 모용소종을 잃고 나서 뜻이 많이 꺾였다. 진원강이 고징에게 말했다
” 왕께서는 정사를 보필하신 이래 특별한 무공이 없으십니다.
후경에게 이긴 적은 있지만 외적은 아니고 내적이었습니다.
지금 영천(하남 장갈)이 거의 함락될 지경이니 서둘러 공적으로 삼으십시오.“
고징이 그 말을 듣고 다시 전의를 살려 10만 대군을 이끌고 직접 장사로 갔다. 오랫동안 포위공격을 받았던 장사는 소금과 식량이 부족하여 열에 여덟아홉이 굶거나 병들어 죽었다. 큰 바람이 또 불어서 물이 성을 무너뜨리자 고징이 소리쳤다.
” 왕대장군(왕사정)을 살려서 데리고 오는 사람에게 후작을 줄 것이며
만약 대장군의 몸에 손상이 있다면 좌우 모든 사람의 목을 벨 것이다.“
왕사정은 성 안의 토산에 올라 말했다.
”내 힘은 꺾였고 계책이 막혔으니 오직 죽음으로 마땅히 사죄할 것이다.“
서쪽을 향하여 절을 두 번하고 하늘을 우러러 크게 곡한 뒤 스스로 목을 베려 할 때 도독 낙훈이 말했다.
” 공은 항상 우리에게
‘네가 내 머리를 가지고가서 항복하면 부귀를 누릴 수 있다.’ 고 하셨습니다.
지금 고상이 저런 명령을 내렸는데
대장군께서 몸을 해치시면 우리 모두가 연루되어 죽게 되는데
공은 홀로 우리의 죽음을 슬퍼하지 않으실 수 있습니까?“
주변에서 왕사정의 몸을 제어하여 자결하지 못하도록 했다. 고징은 사로잡은 왕사정을 크게 예우했다. 처음 왕사정이 영천에 들어갈 때 군사가 8천이었으나 함락되었을 때에는 3천뿐이었지만 한 명도 배반한 사람이 없었다. 노잠이란 사람이 스스로 자결하지 않은 왕사정을 예우하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지적하자 고징이 좌위에 말하였다.
” 나는 노잠이 있었기에 다른 한 명의 왕사정을 얻을 수 있었다.“
우문태는 영천을 뺏기자 군대를 모두 빼서 돌아오게 하였다.
<56> 고징 피살과 고양의 등장(AD549)
고징의 주방 노복 중에 난경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아버지가 서주자사 난흠이었다. 그는 양나라 사람으로 고징이 서주를 장악하면서 서주를 맡게 되었다. 난흠은 고징에게 속죄할 테니 아들 난경을 돌려달라고 애원했지만 한 번만 더 하소연하면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난경은 그런 난폭하고 몰상식한 고징을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고징은 낭야공주를 총애했다. 그는 서위 고양왕 원빈의 서얼 누이동생이었지만 집안에서는 가족이라고 여기지 않아서 손등의 기생이 되었다가 버림을 받았는데 AD545년 길에서 고징의 눈에 들어서 낭야공주가 된 원옥의라는 사람이다. 고징은 낭야공주와 있을 때에는 항상 시종이나 시위를 다 물리치고 둘만 같이 있었다.
8월 8일 고징이 진원강과 최계서와 양음 등 최측근과 함께 동위의 선양문제를 가지고 회의를 하고 있었다. 난경이 음식을 올리자 고징이 그것을 물리치고 말했다.
” 내 어제 꿈에 이 노복이 나를 찍는 꿈을 꾸었소.
급히 죽여야 하겠소.“
난경이 그 소리를 듣고 칼을 쟁반 아래에 숨기고 올라가 음식을 바치자 고징이 소리질렀다.
” 내가 아직 먹을 것을 찾지 않았는데
어찌 급하게 올라오는 것이냐?“
난경이 칼을 붙들고 휘두르며 소리쳤다.
” 내가 오늘 너를 죽일 것이다.“
고징은 칼을 피하다가 다리를 다쳐 넘어져 평상 아래로 숨었다. 난경의 무리가 달려들어 평상을 치우고 고징을 죽였다. 양음은 도망가다가 신발 하나를 놓고 달아났으며 최계서는 측간 속에 숨었고 진원강은 칼을 막다가 찔려서 창자가 튀어나오는 부상을 입었다. 태원공 고양(고징의 바로 아래 동생)이 그 소식을 듣고 표정하나 변하지 않고 부서를 지휘하여 들어 가 도적들을 토벌하고 목을 베고 살을 저미었다.
” 노복이 반란을 일으켜 대장군이 다쳤으나 큰 어려움은 없다.“
고양은 고징의 죽음을 발표하지 않았다. 진원강은 상처가 깊어 어머니에게 하직하는 편지를 쓰고 그날 밤에 세상을 떠났다. 주변의 사람들의 권고를 받고 고양은 태원으로 옮겨갔다. 동위의 주군은 황실로 권력을 옮길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지만 고양은 태위 고악, 태보 고륭지, 개부의동삼사 사마자여, 그리고 시중 양음을 업에 남겨두고 모든 사람을 이끌고 진양(태원)으로 갔다.
고양은 형님 고징이 세웠던 모든 불편한 제도와 법을 다시 고쳐 원상을 복귀시켰다. 평소 고양을 가볍게 보았던 많은 사람들이 고양의 능력과 수완과 근엄한 태도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고륭지와 사마자여 등이 고징이 총애했던 최섬과 최계서가 그동안 악랄한 비행을 저질렀다고 지적하자 장 200대를 친 다음 변방으로 유배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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