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이냐 분열이냐,국가흥망의 교훈 #21 : 북조를 통일한 우문태의 북주(北周)<G>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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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42> 다시 동위에게 넘어 간 호뢰(AD543)
동위를 배반하고 서위로 투항한 북예주자사 고중밀은 호뢰(하남성 형양, 낙양 동쪽 100KM)를 지키고 있었다. 우문태가 간첩을 호리로 들여보내 계속 지키라고 편지를 보냈는데 동위의 후경이 도중에 첩자를 잡고는 빨리 도망가라고 편지를 고쳐썼다. 호뢰를 지키던 위광이 밤중에 성을 버리고 도망가니 호뢰는 다시 동위로 떨어졌다. 후경은 고중밀의 첩 이씨를 업으로 압송하고 고중밀을 제외한 모든 죄인을 사면했다. 고중밀과 인척관계에 있는 고건, 고계식, 고앙 등은 이전의 서훈과 공로로 연좌되지 않게 되었다. 고중밀의 처는 사형에 처해졌으나 고징이 성대히 차려입고 유혹하자 마침내 이씨가 고징을 받아들였다.
<43> 동위 고징과 최섬의 공포정치(AD544)
당시 동위는 기강이 무너지고 관리들은 탐오에 빠져있었다. 고환은 국기문란을 바로잡기 위해 송유도를 어사중위로 임명하고자 했는데 고징이 강권하는 바람에 최섬과 송유도가 같은 자리를 나누어 임명했다. 상서령 사마자여는 고환의 오랜 친구였으므로 함양왕 원탄과 함께 권세와 부귀를 한껏 누렸는데 어사중위 최섬과 송유도가 사마자여, 원탄, 가조혼도원, 손등 고륭지 등 훈구대신의 비리를 적발하고 탄핵을 강행했다. 사마자여는 옥에 갇힌 며칠 사이에 머리카락이 하얗게 변했다.
” 저 사마자여는 상왕(고환)에 의존하여
왕께서 수레 하나와 암소 및 송아지 한 마리를 주셨는데
송아지는 죽었고 암소만 살아남았으니
그 외의 모든 것은 다른 사람에게 뺏은 것이 맞습니다.“
고환이 사마자여의 딱한 사정을 듣고 고징에게 편지를 써서 명령했다.
” 사마령은 내 옛 친구니 너는 마땅히 그를 용서하라.“
고징이 즉시 사마자여를 풀어주었다. 사마자여가 풀려나면서 놀란 얼굴로 물었다.
” 설마 다른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요?“
사마자여의 직책은 모두 삭탈되었다. 함양왕 원탄도 집으로 돌아가게 했으며 죽은 사람도 많았다. 한참 지나서 고환이 초췌한 사마자여를 만났는데 그의 머리를 무릎에 누이고 이를 잡아주면서 술 100병과 양 500마리와 쌀 5백석으로 위로했다. 고환은 업에 있는 여러 고관들에게 말했다.
” 이제 최섬이 헌대에 있소.
함양왕이나 사마령은 모두 더 이상 친할 수 없는 친구고 또 높은 직책까지 올라갔지만
동시에 죄를 얻으면 나도 구원할 수가 없으니
여러분들도 신중히 행동하셔야 하오.“
송유도 또한 관리들의 비리를 낱낱이 적발하여 채찍질을 치거나 관리들을 제척하였다. 고륭지가 송유도의 신하답지 못한 말을 하였다고 고발하니 송유도의 죄는 사형이었다. 급사황문시랑이 이렇게 송유도를 변호했다.
” 개를 기르는 것은 짖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개가 자꾸 짖는다고 죽여 버리면
나중에는 짖을 개가 없어질 것입니다.“
송유도를 제명시키는데 그쳤다. 고징은 송유도를 이끌어주어 자신의 참모로 삼았다.
<44> 제5차 동위의 서위공격 실패(AD546)
고환이 동위 수도 업에서 태원에 있는 모든 군사를 긁어모아 서위의 옥벽(산서성 직산)를 포위했다. 옥벽을 지키던 서위의 위효관은 밤낮으로 계속된 동위의 공격을 잘 받아냈다. 성안에는 물이 없어서 성 밖 분수에서 물을 끌어다 썼는데 고환은 그 물길을 돌려 물을 끊어버렸다. 고환은 성 남쪽에 토산을 쌓고 성을 공격했지만 위효관은 성벽위에 나무 탑을 항상 토산보다 높게 쌓아서 막아냈다. 고환이 토굴을 10개를 뚫어 공격해오자 위효관은 성 안에 해자를 뚫고 병사를 배치해 막았다. 또 토굴에 풀무로 불을 지펴 불어넣어 막기도 하였다. 고환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했지만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자 사신을 보내 위효관에게 항복을 권유했다. 위효관의 대답은 당당했다.
” 나의 성과 해자는 대단히 튼튼하고 병사와 식량은 충분하고도 남는다.
공격하는 사람들이야 힘이 들지만
막는 사람들은 편안하니 바깥에서 구원군이 없어도 어렵지 않다.
오히려 그대들이 돌아가지 못할까 걱정된다.
나는 관서의 남자로 항복하는 장군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고환이 위효관을 죽이는 사람에게 태위 벼슬을 주겠다는 편지를 화살로 성 안으로 쏘아 보내자 위효관도 응수했다.
”고환의 목을 베어오는 자에게도 같은 상을 내릴 것이다.“
동위가 무려 50여 일을 공격했으나 전사자만 7만 명 발생하자 실패하자 고환은 병이 나서 11월 1일 포위를 풀고 돌아왔다. 태원으로 돌아온 고환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도독중외제군사의 직책을 내놓았다. 동시에 아들 고양을 업에 보냈고 고징은 태원으로 불렀다. 서위에서는 옥벽을 훌륭히 막아 낸 위효관을 표기대장군, 건충공으로 올렸다.
<45> 고환의 죽음(AD547)
동위의 사도이면서 하남대장군 대행대인 후경은 한 쪽 다리가 짧아서 말을 타거나 활을 쏘는 것이 불편했지만 지략이 매우 뛰어났다. 후경은 고오조나 팽락과 같은 용맹한 장수들을 가볍게 여기면서 돼지들이 돌진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라고 비하했다. 후경은 3만 명만 있으면 강남 양나라 소연을 묶어서 태평사 주지스님으로 만들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늘어놓았는데 고환은 후경을 자신의 반쪽처럼 믿고 10만의 군사를 주었다.
후경은 평소에 고징을 매우 가볍게 생각해서 사마자여에게 이렇게 말했다.
“ 고왕(고환)이 계시는 경우에는 내가 다른 뜻을 가질 수가 없지만
왕이 죽으면 나는 선비족 어린 아이(고징)와 더불어 같이 일을 할 수는 없다.”
사마자여는 황급히 후경의 입을 틀어막았다. 고환이 병이 들자 고징은 고환의 거짓 편지를 써서 후경을 업으로 불렀다. 예전에 고환은 후경과 약속하기를 편지에는 항상 작은 점을 덧찍기로 했었는데 이 번 편지에는 그 덧붙인 점이 없었다. 후경은 가짜 편지인줄 알아채고 업으로 가지 않았다. 그리고 고환의 병이 위중함을 알고 스스로 방어를 튼튼히 했다. 고환은 고징의 표정이 어두운 것을 알고 그 이유를 물었지만 대답하지 않자 이렇게 말했다.
“ 후경의 반란을 걱정하는 것이냐?”
고징이 그렇다고 하자 고환이 말했다.
“ 후경은 하남(낙양부근)을 다스린지 14년이나 되었다.
항상 펄펄 나는 뜻을 가지고 있어서
나는 그를 잡아 키울 수가 있었지만 너는 그것이 어려울 것이다.
지금 사방이 아직 안정이 되지 않았으니
내가 죽더라도 상을 발표하지 말거라.
선비족 노인 고적간과 곡률금칙륵은 절대로 너를 져버리지 않을 것이고
가주혼도원과 유풍생은 동위로 도망온 사람들이어서
다른 뜻이 없을 것이다.
반상낙은 마음이 고르고 두터워 믿을 만하고
한궤는 조금 어리석으나 너그럽게 용서할 만하다.
팽락은 뱃속을 알기 어려우니 조심해라.
후경을 대적할 사람은 모용소종 밖에 없어서
일부러 그를 후하게 대접하지 않은 것은 너를 위해 남겨둔 것이다.
네가 그를 융성하게 대접하여 귀하게 대접하여 너의 사람으로 만들어라.
그리고 단효선은 충성스럽고 지조가 굳으며
마음이 어질고 두터우면서도 지혜와 용기를 모두 다 갖추었으니
친척 가운데 이 사람만 있을 뿐이다.
군사의 큰일은 그와 함께 의논하도록 하라.
그리고 지난 번 망산의 패배(4차 동서위 전쟁, AD543년)
내가 진원강(그 때 우문태를 끝까지 추격하자고 했으나 고환이 듣지 않았음)의
말을 듣지 않아서
너에게 근심을 남겨주는 꼴이 되었으니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는구나.”
고환은 해를 넘겨 AD547년 1월 8일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52세였다.
<46> 고환의 됨됨이
자치통감에 기록된 고환의 됨됨이는 성격이 매우 깊고 치밀하였으며 하루 종일 자세가 흐트러짐이 없어서 그 깊이나 속내를 읽을 수가 없었다고 했다. 국가기밀을 다룰 때에는 마치 신과 같았으며 군사를 부리는 일에는 법과 명령이 엄숙했다. 듣고 판단하는 것이 명석해서속이거나 기만할 수가 없었다. 재능을 가지고 사람을 뽑았으며 하인이라도 담당할 능력이 거리낌이 없었고 헛된 명성을 좇는 알맹이 없는 사람은 임용하지 않았다.
평소 항상 검소했으며 금이나 은으로 칼과 무기를 장식하지 않았다. 젊어서는 폭주를 사양하지 않았으나 큰 직책을 맡고부터는 세 잔을 넘기지 않았다. 사람을 잘 알아봤으며 선비를 좋아해서 문무관원들이 등용되는 것을 즐겁게 생각했다. 훈구대신을 끝까지 믿고 의지했다. 관대해서 적국의 충신을 붙잡으면 대부분 죄를 묻지 않았다.
<47> 후경의 반란(AD547)
이미 후경은 각오하고 있었다. 고환이 죽고 고징이 서면 자기의 앞날은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공공연히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떠들기도 했었다. 고환이 죽자마자 AD547년 1월 13일 하남을 들어서 반란을 일으키고 서위에 투항했다. 영주(하남 장갈)자사 사마세운도 호응했다. 후경은 호응하지 않는 예주(하남 여남)자사 고원성, 양주(하남 방성)자사 이밀, 고아주(하남 노산)자사 포현을 꾀어 낸 다음 생포했다.
여러 사람들은 후경이 반란을 일으킨 것이 최섬의 독단 때문이므로 최섬을 죽여서 후경을 다독거려야 된다고 말했다. 진원강이 말했다.
“ 지금 사해가 아직은 평정되지 않았지만 그런대로 안정되어가고 있습니다.
몇 몇 소란을 일으킨 장수 때문에 죄가 없는 삶을 죽이면
어찌 하늘에 대해 죄를 짓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조조의 고사를 반복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조조(晁错)의 고사란 전한 경제 때 오초7국의 난(BC154년) 이 일어났는데 그것이 조조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 하여 조조를 죽였던 고사를 말한다. 고징은 최섬을 죽이지 않았다. 고징은 한궤를 보내 후경을 토벌하게 했다.
서위에서는 후경을 태부로 임명했지만 후경은 남쪽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13개 주를 들어서 귀부하겠으며 청주와 서주는 쉽게 투항 할 것이므로 편지를 써 주시기만 하면 된다고 제의했다. 황하 이남은 자신이 오래 다스렸으니 조금만 더 있으면 동위도 쉽게 처리할 수가 있다고 호언을 늘어놓았다.
양나라 황제 소연은 그 문제를 가지고 의논에 들어갔다. 다수의 신하들은 동위하고의 우호관계가 AD536년부터 11년 간 수립되어 왔는데 후경을 받아들이면 그 관계가 깨어질 것을 우려하였다. 그러나 소연은 후경을 받아들이고 북쪽 영토가 확장되는 것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해서 수용하기로 했다. 또 중원의 목사들이 항복하는 꿈을 꾸기도 했다. 좋은 조짐이라는 확신이 섰다. 간신 주이 또한 이렇게 말하면서 응수했다.
“ 우주가 하나로 합쳐지는 조짐입니다.”
소연이 후경을 받아들여 대장군으로 삼고 하남와, 도독하남북제군사, 대행대로 임명했다. 점을 잘보는 주홍정이 이렇게 중얼거렸다.
“ 몇 년 뒤에 국가는 병사들이 일어나는 일을 보게 될 것이다.
난을 일으키는 단계는 여기서 부터다.”
<48> 패역한 아들 고징(AD547)
아버지 고환이 죽고 후경이 반란을 일으킨 상황에서 고징은 본거지 태원을 단소에게 맡기고 수도인 업으로 향했다. 아직 공식적으로는 고환이 죽은 것을 발표하지는 않았으나 진원강 정도만 알고 있었다. 업에 도착하자 동위 주군 원선견은 고징을 위해 잔치를 열었는데 고징이 일어나서 춤을 추었다. 고환의 사망 소식을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아버지가 죽었는데도 술에 취해 춤을 춘 고징을 보고 끝을 제대로 맺지 못할 것을 알았다.
AD547년 5월 동위에서는 대대적인 인사조치를 내렸다. 고적간이 태위가 되고 손등이 태부, 하발인이 태보가 되었다. 가주혼도원은 사공, 고환의 아들이자 고징의 동생 고양은 상서령이 되었다. 고징이 동생 고양에게 업을 맡기고 다시 태원으로 들어간 다음에야 고환의 사망을 공식발표하였다.(AD547년 6월 12일)
<49> 한궤의 후경 포위(AD547)
동위의 한궤가 영천(하남성 장갈)에서 후경을 포위했다. 후경은 동형주, 북형주, 노양 및 장사의 네 성을 쪼개 주면서 서위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서위의 상서좌복야 우근은 동위를 지원하는 것이 섣부르다고 생각하고 움직이지 말자고 했지만 형주자사 왕사정은 오히려 지금과 같은 기회를 살리지 않으면 후회가 막급일 것이라고 하면서 군사 1만을 가지고 노산으로 출병했다. 우문태는 후경에게 대장군 겸 상서령이라는 직책을 내렸다. 그리고 태위 이필에게 1만을 덧붙여 영천으로 보냈다. 후경은 양나라가 섭섭해 할 것 같아서 소연에게 사신을 보내 급해서 서위에게 구원을 요청한 것이지 속으로는 고징이든 우문태든 복속할 마음이 없음을 해명했다. 황제는 후경의 듯을 가상하게 여겼으며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후경을 믿었다. 그리고는 파양왕 원범을 정북대장군으로 하여 한수 이북을 토벌하는 일을 맡겨서 양성(하남성 등주)으로 보냈다.
영천을 포위했던 동위의 한궤는 서위의 이필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황급히 군사를 돌려 업으로 돌아갔다. 후경은 서위의 이필과 조귀가 온다고 하자 유인하여 사로잡을 생각이었는데 조귀와 이필이 말려들지 않았다. 조귀 또한 후경을 역으로 유인하여 체포하려고 했지만 이필은 후경을 사로잡은들 하남의 광대한 지역을 관리할 여력이 아직은 없고 오히려 동위만 유리해진다고 판단하여 후경을 사로잡는 계획을 중단시켰다. 양나라의 지원군이 도착하자 이필도 군사를 돌려 돌아갔다.
후경이 땅을 경략한다는 핑계로 서위에게 군사지원을 다시 요청하였다. 대행대 좌승 왕열이 우문태에게 그렇게 친했던 고환을 배반한 후경의 속내는 절대로 믿을 수가 없으니 도와주면 안 된다고 강하게 말했다. 우문태도 그렇게 생각하고 후경을 조정으로 불렀다. 후경이 진정한 속내를 파악하기 위한 조치였다. 들어오면 서위를 반란할 진심이 없는 것이고 들어오지 않으면 그럴 마음이 있다는 증거였다. 우문태와 서위의 여러 장군들은 후경이 속내를 꿰뚫고 있었다. 후경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후경이 우문태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 내가 고징과 더불어 안행(기러기 같이 서로 돕는 일)하기를 부끄럽게 여겼는데
하물며 큰 동생인 너와 어깨를 나란히 같이 하겠는가?”
후경은 서위와의 관계가 깨졌다고 판단하고 양나라와 손을 잡기로 결심했다. 고징은 후경의 어머니와 처자가 다 업에 거주하고 있었으므로 그들을 미끼로 다시 동위로 돌아오기를 회유하였다. 후경은 죽이려면 말려도 죽일 것이고 그들이 동위의 손아귀 안에 있지만 자신의 대업성취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고 잘라 말했다.
우문태는 후경에 내린 태부 대장군 겸상서령 하남대행대 도독하남제군사를 형주(하남성 등주)자사 왕사정에게 내렸는데 왕사정이 받지 않았다. 여러 번 받기를 요청하자 왕사정은 도독하남제군사만 받았다.
<50> 개다리 황제라고 놀린 고징(AD547)
동위 황제는 고징에게 사지절, 대승상 도독중외제군사 대행대 발해왕 등 아버지 고환의 직책을 그대로 물려 주었지만 그는 계속 사양했다. 그렇지만 고징은 사실상 동위 최고의 권력자였다. 이 때 그의 나이는 26세였다.
동위 황제 원선견은 얼굴과 겉모습이 매우 아름다웠으며 활 쏘는 솜씨나 체력이 보통 사람을 뛰어넘었다고 기록되어있다. 문학을 좋아하고 태연한 자태가 사람을 매혹하는 힘이 커서 전에 사람들은 효문제 원굉을 많이 닮았다고 칭찬했다. 죽은 고환은 AD535년 원선견을 황제로 세우고 격을 갖추어 각별하게 공경했었는데 고징은 반대로 거만하게 굴면서 황제 원선견을 깔보았다. 한 번은 연회를 하면서 원선견이 이렇게 말했다.
“ 자고로 망하지 않는 나라는 없다고 했는데
짐이 이런 삶을 살아 어디에 써 먹겠는가”
그러자 고징이 이렇게 내뱉었다.
“ 짐, 짐이라니 무슨 개뼈다귀 같은 짐이냐.”
내시 최계서로 하여금 주먹으로 세 번 황제를 내려치게 하였다. 그 다음날 고징은 최계서를 다시 보내 사과했는데 황제도 그 사과를 받아들이고 최계서에게 비단 100필을 하사했다. 그러나 황제는 울분과 치욕을 참을 수가 없어서 사령운의 시를 읊었다.
“ 韩나라가 망하니 자방이 분을 참지 못하고 일어나
진나라가 황제를 칭하니 노중련이 치욕을 당하였네.
본래 강해로부터 왔으니
충성과 의로움이 군자를 감동하네
(韩亡子房奋,秦帝鲁连耻。本自江海人,忠义动君子)”
사령운(AD385-AD433)은 동진과 유송시대의 유명한 산수(山水)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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