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정치리더십-외천본민(畏天本民) <61> 경제개혁이 시급하다 I. 토지제도를 개혁해야 한다<上>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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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토지제도를 개혁해야 한다.
토지는 백성과 함께 국가경제를 구성하는 2대 요소이다. 특히 봉건국가에서 토지는 가장 중요한 생산요소라 할 수 있다. 백성의 생존이 달려있는 경제적 생산과 고용의 근본이고 권력 유지에 필수적인 물자의 근원이다. 그렇기 때문에 적의 침입으로부터 방어 보호해야 하는 대상이 토지이다. 세종은 즉위하면서 농잠업은 국가의 기본이다(農桑衣食之本)라고 했다. 백성의 먹고 사는 문제와 국방에 있어서 필수산업이 농업이고 농업은 반드시 토지를 필요로 한다. 그런 점에서 토지는 조선 경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토지제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려시대의 토지제도를 알아야 한다. 태조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면서 내린 교지에서 “고려제도를 그대로 답습한다.”고 했기 때문에 조선 초기의 제도는 고려와 거의 동일했다.
I.1 고려시대 토지제도
[전시과(田柴科)제도]
고려시대에는 전시과(田柴科)라는 토지제도가 운영되고 있었다. 고려 경종 1년(976) 직산전시과(職散田柴科)가 처음 시작되어 고려 문종 30년(1076)에 완성된 이 제도는 현직 및 퇴직 관료들에게 직급에 따라 일정한 규모의 밭(田) 및 시지(땔감나무 땅,柴地)를 국가가 제공하는 제도이다. 예를 들어 1등급(1科라 함)인 중서령, 상서령 문하시중의 경우에는 밭 100결과 시지 50결을 주었으며 최하등급 18등급인 잡류, 한인에게는 밭 17결을 주었다. 과전수급자의 특징에 따라 현직관리에게 주는 직전, 군인에게 주는 군인전, 공신에게 주는 공음전, 지방토호에게 주는 한전, 지방관청에게 주는 공해전등으로 불렀다.
전시과제도의 중요한 점은 국가가 과전의 수급자에게 땅에 대한 소유권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 땅의 소출에 대해 일정한 비율(통상 1/10)의 세금을 걷을 권리, 즉 수조권(受租權)을 주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수조권은 상속되지 않아서 전시과전을 받는 관리가 사망하게 되면 수조권도 당연히 국가에 귀속되었다. 해당 토지에 대한 조세 징수는 수조권을 가진 과전수급자, 즉 전주(田主)가 토지경작자(佃戶)에게 직접 징수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대신 받아서 과전수급자에게 주므로 실제로 과전수급자와 토지경작자는 직접 접촉할 필요도 없는 제도였다.
[세전(世傳)토지화 : 토지소유 양극화와 사회불안]
고려시대 전시과제도의 문제는 상속될 수 없는 전시과전이 공음전과 같이 대대로 세습될 수 있는 조업전(祖業田)으로 바뀌어 감에 따라 대토지 소유자들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점이다. 토지 소유 구조가 극심하게 양극화 되었다는 말이다. 전국 국토가 소수에 의해 장악되고 대다수 백성들은 사실상의 소작농화 됨으로써 사회불안의 근본 요인이 되어갔다는 말이다.
법적으로 세습이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전시과전이 대대로 세습될 수 있었던 원인은 고려시대 후반기의 특수한 정치사회적 환경 때문이었다. 첫째로 연이은 내란외란으로 사회가 혼란하고 국가의 통치능력이 현저히 손상되었다는 점이다. 이자겸, 묘청, 천예 등 내란이 끊임없이 일어났고 밖으로는 몽고족과 여진족의 침입으로 국가가 큰 혼란에 빠져있었기 때문에 중앙정부가 토지문제를 관리할 능력이 없었다. 또 병란으로 말미암아 토지에 관련된 많은 문적들이 없어지기도 했다. 둘째로는 정치적 혼란의 결과 무신들이 국가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이들이 기존 토지질서를 무너뜨리는 주범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셋째로는 군권을 장악한 무신을 위시하여 대부분의 관료들이 실질적으로 집권계급을 세습했기 때문에 과전도 사실상 대대로 계승되었다.
[과도한 밭에 대한 세금(田租)로 유망민 발생]
전시과전이 세습되면서 나타나는 심각한 문제점은 국정이 매우 불안해졌다는 점이다. 밭을 경작하는 백성(佃戶)들의 입장에서 보면 과도한 조세징수 로 항상 생활고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또 대토지 소유주들이 서로 결탁하여 큰 정치 세력이 됨에 따라 왕권도 약화되었다. 극심한 조세징수와 극도의 토지 소유 불균형으로 인해 사회불안이 크게 증가한 것이다.
원래 과전수급자(전주,田主)의 조세권은 연 1회 소출의 1/10이고 이를 전호로부터 국가가 대신 받아서 전주에게 주기로 되어있었다(이를 전주전호제,田主佃戶制라고 한다). 그러나 사회혼란으로 인해 중앙 통치권이 약화되면서 전주가 전호로부터 직접 세를 거두어 가는 체제로 바뀌어갔다(이를 지주전호제,地主佃戶制라고 한다). 그리고 세율도 법정 10%를 서너 배 초과하여 징수하였고 때에 따라서는 일 년에 여러 번 징수해 가기도 했다. 밭이 세습되는 과정에서 소유주가 여러 명으로 분할되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경작인인 전호는 착취만 당할 뿐 이었다. 유일한 권리라면 ‘계속해서 경작할 수 있는 권리(이를 田券 혹은 文券이라 했음)’ 밖에 없었지만 지속적으로 착취되는 상황에서는 권리가 아니라 오히려 족쇄였다. 많은 전호들이 밭을 버리고 유망하기 시작했고 따라서 많은 토지가 경작되지 않은 황무지로 변해갔다.
[막대한 토지보유자 출현]
또 다른 폐단은 막대한 토지를 보유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는 점이다. 전시과 제도 하에서 가장 많은 땅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1등급 문하시중의 150결이 전부였다. 그러나 고려 말기로 가면서 수 만 결을 가진 자들이 나타났다. 여기에는 국가의 황무지 개간 정책도 한몫했다. 전쟁으로 인한 재정 고갈을 막고 경작지도 확대하기 위해서 전쟁 황폐지를 개간하거나 새로운 경작지를 개발하는 경우 일정 부분을 사패전(賜牌田)으로 영구히 주기로 하였는데 이 제도를 활용하여 재력을 가진 자들이 앞다투어 황무지 개발에 나섬으로써 대토지 소유자가 되어 갔다. 사패란 개간허가증 같은 것으로써 오직 왕실에만 주었으며 이로 인해 개발된 땅에는 면적 제한도 없고 조세 의무도 없었다. 그리고 사패전 경작인에게는 국가의 부역 의무도 없었으므로 많은 백성들이 경작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사패전을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고 사패전을 두고 치열한 암투가 벌어졌다(冒受賜牌). 토지겸병을 유인하는 필요충분조건을 다 갖춘 제도가 사패전이었다.
[토지개혁]
백성은 물론 많은 사람들이 거대한 토지를 갖고서 중앙정치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구세력들에 대해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런 토호세력들에 대해 불만을 가진 대표적인 인물이 이성계와 최영과 이색이었다. 이 세 사람은 당시 최대 토지겸병 세력이던 염홍방과 임견미와 이인임 세력을 구축하는데 성공하면서(1388) 고려 말 정치무대에 핵심 세력으로 등장한다. 막대한 토지를 겸병한 세력들은 대개 구세력들이었다. 이들을 제거하는 데에는 토지개혁만큼 적절한 것이 없었다.
이성계, 정도전을 포함한 신진세력들은 획기적인 토지제도개혁을 시도하였다. 즉, 전국 토지를 국가에 귀속시키고 그 땅을 국민들에게 나누어 주자는 의견이었다. 말하자면 개인이 보유할 수 있는 땅에 제한을 두는 한전책(限田策)으로써 당나라 때의 균전제(均田制)와 비슷한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한편으로는 권문세가들의 토지보유를 근절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백성들에게 고루 땅을 나누어 줌으로써 중산 농민층을 확대시키자는 생각이었다. 이 안에 대해 수구 세력들이 극렬하게 반발한 것은 당연했다. 일부 보수 세력들이 보다 완화된 형태의 토지제도 개선론을 들고 나왔다. 권근과 이색이 주축이 된 토지제도 ‘개선론자’들은 먼저 정밀한 토지 실사를 한 다음에 그것을 바탕으로 토지개혁방안을 만들어 보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토지소유권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토지변정도감을 설치하자는 것이었다.
우왕 14년 8월(1388)에 사전혁파안(私田革罷案)이 조정에서 통과되었다. 전국적인 양전(量田,토지조사)을 실시하고 대대로 내려 계승하는 조업전을 없애며 국가 소유 땅 이외의 모든 민간 토지(私田)에 대한 조세를 3년간 국가에 귀속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이 조치는 사실상 사전(私田)을 폐지하는 것과 같았다. 그리고 관리에게 주는 과전도 경기지역에 국한되도록 하였다. 창왕 원년(1388)에는 급전도감을 설치하여 과전을 지급하는 기준과 대상과 규모를 새로 정하도록 하였다. 전제개혁에 미온적인 창왕을 공양왕으로 교체한 이성계 세력은 공양왕 2년(1390) 1월에는 과전수급대상자에게 전적(田籍)을 발급하고 그해 9월 이전의 전적은 모두 소각하였다. 그리고 지방관에 지급할 과전만 확정하여 과전법을 전격 시행하였다(1391년 5월). 이것이 조선의 과전법의 뿌리가 되는 공양왕의 과전 제도다.
[과전제(科田制)]
과전제(科田制)란 국가가 왕실이나 현직 관리 혹은 서울에 거주하는 전직 관리에게 과전을 주는 제도를 말한다. 수전자(受田者)는 직급에 따라 국가로부터 차등적으로 과전(科田)을 받았다. 수전자가 사망하면 부인이 과전을 물려받으나 독신을 유지하면서 자식이 있는 경우에만 전액을 받았으며 자식이 없으면 반액을 받았고(이를 수신전,受信田 이라 했음) 재혼하면 자식 유무에 상관없이 하면 환수했다. 만약 자녀가 어리고(20세 이하) 부모가 모두 없으면 전액을 받았는데(휼양전,恤養田) 자녀가 장성하면 그 자녀의 과급에 따라 새로 과전이 주어졌다. 공사천인(公私賤人)이나 상인(商人), 무속인(巫覡), 창기, 승니(僧尼)등은 과전수급이 불가능하였다.
죄를 범하면 과전이 몰수되었는데 과전이 몰수되는 죄는 다음과 같다.
(i) 장형 이상의 죄를 받고 고신(告身)을 회수당한 자,
(ii) 근친(期功) 이상의 친척과 혼인한 자,
(iii) 동성 간에 혼인한 자,
(iv) 수신전을 받고 재가한 자,
(v) 한량관으로 이유 없이 100일 이상 직무를 태만히 한자,
(v) 전토모수(田土冒受)자나 공사전을 침탈한 자 (타인에게 줌),
(vi) 무고로 남의 토지를 탈취한 자(엄벌).
토지에 대한 세금부과는 토지의 종류에 따라 달랐는데 논(水田)은 1결당 벼30두(斗)였으며 밭(旱田)은 1결당 잡곡 30두였다. 그 이상을 거두면 엄벌에 처하였다. 과전으로부터 조(租,세금)를 걷는 사람도 그 조에 대해 국가에 대해 세금(소득세)를 냈는데 그 율은 논은 1결당 백미 2두, 밭은 황두 2두를 내야했다. 세금은 구경기도에 있는 사람은 요물고에 내야하고 신경기도나 그 외 지역은 풍저창과 광흥창에다 납부해야 했다.
농사에 차질이 생겨 수확이 줄어든 경우에는 조세의 일정률을 삭감했는데 수확 손실이 1푼이면 l푼의 조를 감면했고 손실이 2푼이면 조를 2푼 감면하는 식이었다. 만약 손실이 8푼이면 조세를 전액 감면했으나 다만 이때에는 감사 수령이 직접 점검했다. 과전은 본인이 스스로 심사하여 세금을 내었다.
경작인인 전객을 보호하기 위해서 전주의 토지 탈취를 엄격히 처벌하였는데 1부-5부(1부는 1/10결) 사이의 토지를 탈취하면 태 20의 형벌을 가하였고 매 1부당 1등씩 가중 처벌하였다. 만약 1결 이상의 땅을 탈취하면 그 땅을 빼앗아 남에게 주었다. 전객은 소유지를 타인에게 매매하거나 양도하지 못했으며 사망, 유망, 경작 포기 등으로 황폐해진 경우에는 전주가 자유로이 처분할 수 있었다.이 제도가 조선이 태조 원년(1392)에 건국하면서 그대로 계승한 토지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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