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파는 제3지대에서 만나야 한다 본문듣기
작성시간
관련링크
본문
1. 보수-진보와 좌파-우파
노무현정부의 주요인사가 보수(保守)는 지키는 것이고 진보(進步)는 나아가는 것이니까 역사의 추동력은 진보에서 나온다고 말하였다. 용어전쟁부터 패색이 짙어지니까 많은 보수층은 한국정치를 편가르기할 때 보수-진보 대신에 좌파-우파를 선호한다. 좌파란 용어는 색깔을 떠올리게 하고 부정적 낙인효과가 있기 때문에 좌파인사들조차도 기피하고 대신 진보라고 하면 평등, 환경, 인권, 약자보호등 멋져 보이는 가치를 추구한다고 예단한다.
찐 보수는 지킬 가치가 있는 것을 지킬려고 하는 것이다. 국가, 가족, 종교, 자유, 근면, 책임과 명예를 존중하고 일상생활에서 실현할려고 노력한다. 진보가 비하하는 보수는 가짜보수이다. 봉건제도, 가부장적 문화, 기득권, 가진자의 오만등 버려야 할 가치에 집착하는 것은 수구에 지나지 않는다.
찐 진보는 이상을 추구하되 현실에 발을 굳건히 디뎌야 한다. 특히 정치인은 그러해야 한다. 평등한 사회를 지향하되 절대평등은 망상이라는 현실을 자각해야 한다. 상대적 평등조차도 희망고문만 가하면서 국민을 기만하지 말고 계층사다리를 복원하여 노력하면 성과가 따라 온다는 믿음을 심어 주어야 한다.
지금 한국에는 가짜 보수, 가짜 진보가 판을 치고 있다. 이기심을 보수,진보의 허울로 위장하고 거짓과 선동으로 반대파를 제거할려는 정치쇼가 벌어지고 있다. 국민 역시 무미건조한 사실관계 규명보다 흥미진진한 편싸움에 끼어 들어서 상대의 말은 들을려고도 않고 같은 말이라도 어느 진영이 하느냐에 따라서 박수를 치거나 야유를 보낸다.
두 개로 쪼개진 나라를 하나로 합치는 길은 좌-우 모두 제3의 길을 가는 것이다. 성장에서 평등으로 가건, 평등에서 성장으로 오건 간에 결국은 성장과 평등이 공존하는 사회를 이룩하는 것이 제3의 길이다.
2. 우파 제3의 길
22대 총선에서 국민의 힘은 참패하였다. 그런데 참패가 아니고 '졌잘싸'라고 우기는 보수유권자도 부지기수이다. 21대 총선보다도 다섯석을 더 얻었다느니, 총득표수에서는 불과 5.3% 밖에 뒤지지 않았다느니를 늘어 놓으면서 자위한다. 그런다고 진짜 위로가 되지도 않을 텐데 말이다.
여당의 낙선후보들이 바닥민심을 전하는 보도가 줄을 있고 있다. 하나같이 당 지휘부의 선거전략이 민심과 동떨어져서 자다가 봉창두드리고, 자다가 남의 다리 긁는 격이었다는 혹평을 서슴치 않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이재명, 조국 심판론이 특히 수도권에서 전혀 먹혀 들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면에 윤석열 정권 심판론은 표심을 아낌없이 갉아 먹었으니 수도권에서의 전멸에 가까운 패배는 필연이었다는 것이다.
3건의 죄목으로 기소되어서 재판을 받고 있는 이재명 대표와 항소심에서 2년형을 선고받고 대법원의 최종판결을 앞두고 있는 조국 대표를 찍어 주는 좌빨을 보수는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할 수 없고 나라에 망조가 들었다고 개탄한다.
그러나 한탄과 분노도 보수의 일방적인 한풀이일 뿐이다. 야당을 찍은 유권자들은 나름대로 판단해서 한 표를 행사하였을 것이니 그들의 표심을 놓고 왈가왈부하는 것도 오만과 독선의 소치에 지나지 않는다.
한동훈 위원장은 운동권 청산을 들고 나와서 보수진영의 속을 시원하게 해주었고 한동안은 정권심판의 대항마로서 위력을 발휘하기도 했으나 오래가지는 않았다. 이 역시 찐 보수의 심사를 불편하게 긁어 놓았다. 민주화운동했다는 이유만으로 국회의원 감투달고 공기업 낙하산 취업해서 권력과 돈의 단맛을 향유하면서 때로는 횡령, 수뢰, 이권개입등 비리를 저지르고 위선과 거짓말과 내로남불로 신기득권층의 특권을 누리는 일부 운동권인사들을 왜 유권자들은 심판하지 않느냐고 묻고 또 묻는다.
나의 친한 친구는 조국대표를 비롯한 진보좌파 정치인들이 쓴 책을 나오는 족족 서점으로 달려가서 구입하는 광팬이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그들을 돕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조국 의원이 검찰의 표적수사, 과잉수사의 칼날을 맞고 가정파탄의 시련을 겪고 있는데 책이라도 사주어서 인세수입에 보탬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진심으로 다시 물었다. 서울대 교수와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낸 지도급 인사가 죄를 지었으면 뉘우치고 근신해야 하는데 고개 빳빳이 들고 권력의 피해자 코스프레 하고 있는데 그 내로남불이 눈에 보이지 않느냐고.
내 친구는 분노를 담아서 역습해 왔다. 너같은 보수 기득권이 그동안 행한 숱한 불법과 비리는 잊어 버렸냐고. 위선과 이기심과 내로남불은 보수의 징표아니냐고. 조국 씨에게 들이 댄 현미경 잣대로 털어 내면 보수의 지도급인사중에서 법의 심판을 비켜 갈 자가 몇이나 남겠냐고. 나는 말문이 막혔고 오랜 우정에 금이 갈까 두려워서 입을 닫았다.
나는 역지사지(易地思之)를 떠 올렸다. 내 친구가 볼 때에는 선거때마다 주야장천 보수후보만 찍어대는 나같은 사람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을 것이라는데 생각이 미쳤다. 내가 보수후보가 마음에 쏙 들어서 지지했다기 보다는 진보좌파 후보는 무조건 거부해야 한다는 투표관이 투철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빠짐없이 진보 후보에게 표를 던지는 유권자 역시 보수후보에게 나라를 맡길 수 없다는 확신을 가졌을 것 아닌가?
보수적 국민 중에서 나처럼 반대파의 심중을 헤아릴려고 노력이라도 하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짐작하건데 별로 많지는 않을 것이다. 종북, 친북, 친중으로 독재를 옹호하고 퍼주기 포퓰리즘으로 유권자의 신성한 표를 매수하며 선동과 프레임 씌우기에 능한 자들은 하루빨리 정치판에서 쫒아내어야만 한다고 열 올리는 사람들이 대다수일 것이다.
나의 주위에는 국민수준을 개탄하는 자들이 여럿이다. 국민은 그 수준 이상의 지도자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다. 종북, 반미, 반일, 반기업, 탈원전, 소득주도성장, 부동산급등으로 나라를 거덜내고 있었던 정권의 연장을 겨우 막아낸 지가 2년도 채 안지났는데 이념적으로 더 좌편향되고 도덕적으로 더 타락한 이재명당에게 표를 찍다니 가재, 붕어, 개구리는 연년세세 그 꼴로 살아가라고 악담을 하기도 한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선민의식의 포로아닌가? 좋은 부모, 일류학교, 고소득직장이 모두 자기 잘난 덕택이라고 착각하는 비뚤어진 엘리트의식에 푹 젖어 있는 자들이다.
지금 보수가 해야 할 일은 자기반성이다. 남탓하지 말고 스스로를 되돌아 보는 것이다. 유권자들의 마음을 얻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야 할 것 아닌가? 다음 대선에서 이길려면 상대방 비난하는 것 만으로는 엄두도 내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지난 총선패배의 뼈아픈 교훈이다. 보수가 변하는 것이 대선승리의 길이다.
어떻게 변해야 하나? 단초가 되는 민심이 있다. 도봉갑 국민의힘 김재섭 당선자는 보수가 서민들의 편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국힘은 자기들끼리만 나누어 가질려고 하는데 반해서 민주당은 도와줄려고 노력한다는 바닥 민심을 전한다. 성동구에서 낙선한 윤희숙 후보는 시장의 원리인 적자생존의 수정이 필요하다고 현장의 분위기를 전한다. 시장원리의 신봉자이었던 그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왔다는 보도를 보고 나는 적지 않게 놀랐다. 경제학이론이 정치의 현장에서 맞닥뜨리는 도전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보수가치는 개인주의, 능력주의, 자유주의이다. 정책에 반영되면 탈규제, 작은 정부, 친기업이 된다. 하위 정책단계에서는 감세, 반복지, 반노동의 구체적 형태를 취하면서 경제운용의 방향을 규정한다.
보수가치는 한국이 고성장할 때 위력을 발휘했다. 일자리가 늘어나고 임금이 올라가는 낙수효과가 작동하여 분배불평등에 대한 불만이 심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2%대의 성장도 버거워하는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자산과 소득이 양극화되고 영세자영업과 비정규직으로 대표되는 근로빈곤층의 생활고가 가중되고 있다.
강남의 고가 아파트촌에 사는 사람들은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여기지만 한국 전체의 분포에서는 최상층에 포진하는 사람들이다. 보수가 이들만을 바라보고 그늘에서 쪼들리며 살아가는 다수를 안중에 두지 않으면 보수의 미래는 없다.
기존의 보수가치에 더해서 상생의 가치가 추가되어야 한다. 자유주의는 차가운 머리로 경제를 운용하라고 가르치지만 상생의 가치는 따뜻한 가슴으로 어려운 이웃을 보듬으라고 속삭인다.
능력주의는 승자독식이 당연하다고 치부하지만 상생은 약자에게 돌아가야 할 정당한 몫을 챙기는 것이다.
상생가치를 진보에게 빼앗긴 것은 보수의 뼈아픈 실수이다. 그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 보수는 상생에 좌파의 딱지를 붙이고는 비난하고 반대한다. 상생은 나눠먹기이고 사회주의적 평등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서 더 큰 실수를 저지르는 꼴이다.
옛날 보수는 상생가치를 선행적, 능동적, 주도적으로 실현하였다. 지금 보수가 반드시 소환하고 배우고 본받아야 한다.
박정희정부는 1972년 “기업공개촉진법”을 제정하였다. 기업이 주식시장에서 자본을 조달하여 은행대출 편중을 줄이고 재무구조를 개선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니까 당연히 기업오너들이 찬성할 것 같지만 당시 그들은 격렬히 반대하였다. 자신이 소유한 주식을 내다 팔라고 하니까 기업소유권을 빼앗길까 두려워하였다. 반대의 명분은 사유재산보호이었다. 사유재산인 주식을 국가가 팔아라 말아라 간섭하는 것은 자유시장경제의 원리에 반한다고 강변하였다.
정부의 취지는 다분히 사회적이었다. 재무구조개선이외에 국민이 주식을 보유할 수 있는 길을 열어서 성장의 과실을 나누자는 분배적 목적이 있었다. 기업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국민들의 저축자금을 낮은 이자로 대출받았으니 이익을 오너가 전부 갖지 말고 국민들에게 배당으로 돌려 주어야 한다는 상생의 선한 뜻이 있었다.
보수정부가 편 상생의 정책은 여럿이다. 굵직한 것들만도 농지개혁, 공정거래법, 재벌 부동산 소유규제, 금융실명제, 건강보험과 국민연금및 고용보험도입등이 있다.
당시의 정치지형은 보수정당 독점이었고 진보좌파정당은 겨우 명맥을 유지할 뿐이었으니 지금처럼 좌파세력의 공세와 압력이 없었다. 왜 진보적인 정책을 채택하였을까? 유권자들의 표를 얻기 위해서이었을까? 아니면 평등한 사회와 공정한 시장경제를 이루어 내겠다는 공익적 목적이 있었을까?
어느쪽이 되었던지 간에 지금의 보수정부는 반성하고 본받아야 한다. 민생을 위하는 것이라면 좌파진영이 내세우는 정책이라도 경청하고 대안을 마련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전국민 25만원 뿌리기를 사악한 포퓰리즘으로 매도하지만 말고 대상을 좁히면서 영세자영업자들의 매출증가를 유발하는 효과를 낳는 방안을 제시할 수도 있다. 중대재해처벌법이 기업최고경영자의 사법리스크를 과도하게 키운다는 이유로 반대만 할 것이 아니라 한국의 산업재해가 심각하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줄이기 위한 효과적인 대안을 강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진보좌파는 재벌지배구조에 대한 법률안을 수시로 내어 놓는다. 재벌측은 기업을 옥죄는 악법으로 반대하고 국민의힘도 그들에게 힘을 실어준다. 그런데 한국의 재벌은 아직도 세계표준에 못 미치는 지배구조의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자유시장경제의 수호자를 자처하는 보수정당이 더욱 경쟁적이고 공정한 시장질서를 구축하는데 앞장서야만 반기업적인 좌파정당의 공세로부터 기업을 지켜줄 수 있다.
윤대통령이 대선구호로 내세웠던 공정과 상식은 윤정권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신선함으로 득표에 보탬이 된 것을 넘어서서 윤정부의 앞날에 대한 국민적 기대를 불러 모았다. 공정과 상식이 지배하는 사회를 열어 나갔다면 지난 총선에서 승리하였을 것이며 나아가서는 보수의 앞날에도 서광이 비치었을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막중한 가치는 한낱 선거구호에 그치고 이미 잊혀진지 오래이다.
공정과 상식은 보수의 상생을 구현하는 도구이다. 보수의 상생은 좌파의 결과적 평등을 배제하고 불공정한 불평등을 없애자는 것이기 때문이다. 출발선을 같게 해 주고 경쟁과정이 공정하게 이루어 지도록 해 주되 그 결과로 나타나는 불평등은 받아들이는 것이다.
같은 일을 하는데 비정규직이라는 낙인만으로 절반의 월급만 받는 것,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감수해야 하는 박봉, 중소기업을 빈혈환자로 전락시키는 과소한 납품대금, 부모찬스의 불평등을 본인능력의 차이로 당연시하는 착각 등은 상생사회의 적(敵)들이다. 이 모든 모순들은 공정과 상식의 잣대를 통과하지 못한다.
윤대통령은 남은 임기동안에 공정과 상식의 심판기능을 십분 활용해서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을 더 공정하고 상식에 부합하는 살 맛 나는 세상으로 탈바꿈시키는데 진력해야 한다. 공정과 상식이 통하는 사회는 공동체안에서 차별을 없에고 불평을 덜어주고 억울함을 씻어 내어서 대립과 갈등을 해소시켜 나갈 것이다.
2. 좌파 제3의 길
한국 좌파의 뿌리는 일제 식민지 시대의 공산주의 운동이다. 이걸 놓고 좌파는 빨갱이라고 우파가 공격한다면 색깔론일 뿐이다. 당시의 공산주의운동은 1917년 제정러시아를 무너뜨린 볼세비키혁명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아직 소련에서 공산당의 독재와 대학살, 국가의 농지약탈, 국영기업의 파탄등이 현실로 나타나기 전이었고 봉건질서를 붕괴시키고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한 유일한 외국세력에게 민족주의자, 독립운동가들이 호감을 가진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해방후 미 군정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70%가 사회주의를 지지한다고 응답할 정도로 한국인들은 심정적으로 동조적이었다. 함께 잘 사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달콤한 선전에 매혹되었다고나 할까. 물론 이승만 초대대통령은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공산당이 통제하는 공산주의는 자유를 추구하는 인간본성에 배치되기 때문에 성공할 수 없다고 명쾌히 단언하기도 했다.
정부수립과정에서 공산주의자들이 보여준 폭력적인 저항, 6.25 남침이 야기한 인명과 재산의 막대한 손실, 이승만과 박정희 정부의 공산주의 탄압으로 좌파운동은 지하로 숨을 수밖에 없었으나 반독재-민주화투쟁의 가면을 쓰고 대중운동을 전개하면서 명맥을 유지해 나갔다.
1980년대 후반의 정치민주화는 사상과 이념의 해방을 수반하였고 좌파인사들이 현실정치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이념보다도 민족이 우선이라는 김영삼 대통령, 대중경제론을 주창한 김대중 대통령, 역대 보수정부를 반칙과 특권의 역사로 폄훼한 노무현 대통령, 보수를 적폐로 몰아서 초토화시킨 문재인 대통령을 거치면서 좌파인사들은 정권의 핵심세력으로 부상하였다.
한국의 좌파는 스펙트럼이 넓다. 해산된 통합진보당은 폭력으로 체제전복을 꾀한 과격혁명노선이었지만 이와 유사한 군소좌파 정당들이 세계 10위권의 경제선진국인 한국에서 주요한 정치세력으로 부상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지금 제1당인 더불어민주당은 사회주의정당이 아니다. 자본주의를 습관적으로 미워하지만 무너뜨릴 의도는 없다. 공산주의가 대안이 아니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자각하였고 그 외의 대안도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들에게 자본주의는 밉지만 헤어질 수 없는 딜렘마적인 존재이다.
선거때마다 표를 얻기 위해서 과격노선의 민노총과 군소좌파 정당의 손을 잡지만 내심으로는 부담스러워한다고 나는 추측한다. 정권을 잡기도 하고 권력의 맛에 빠지기도 해 본 정당이 진심으로 과격해 진다는 것은 위험부담이 너무 크다고 본다.
더불어민주당은 자유시장경제를 평등한 삶의 터전으로 바꿀려고 하다보니 시장의 자유를 구속하는 정당으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평등의 정체성에 집착하다 보니 시장실패의 교정이 지나쳐서 사회주의자라는 비판도 듣게 되지만 중도좌파정당이라고 보면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평등은 잡히지 않는 신기루이다. 더불어 민주당이 표를 얻기 위해서 평등에 집착할수록 자가당착에 빠지고 국민들을 희망고문할 뿐이다.
세상은 원래 불평등하고 평등의 이상(理想)은 가슴을 뛰게 하지만 현실(現實)의 벽에 가로막힌다. 같은 부모의 유전자를 물려 받고 교육환경이 비슷한 형제자매들이 평등한가? 형은 공부를 잘하여 좋은 학교와 직장을 구해서 잘 사는 반면에 동생은 입시에 낙방하고 중소기업을 전전하다가 자영업을 시작해서 실패하는 삶을 살아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더불어 민주당의 평등사회구호가 진정성이 없다고 믿는 이유 중에서 비정규직문제가 있다. 좌파는 박정희 정부의 고도성장을 노동자착취의 성과로 비하하지만 그 때에도 정규직-비정규직의 구별이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비정규직의 제도적 출현이 분배정의를 강조하던 김대중정부 때이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원내 제1당의 힘을 엉뚱한 곳에 쓰지 말고 비정규직문제 해결에 경주해야 하는 것 아닌가?
문재인 전 대통령은 '기회는 균등하고, 과정은 공평하며, 결과는 정의로운 사회'를 약속하였다. 기회의 균등과 과정의 공평은 좌우를 막론하고 강조하는 정치적 구호이다. 그러나 실현방법에서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다. 극단적 예이지만 재벌후계자와 노동자의 자녀를 비교해 보자. 기회의 균등을 어떻게 확보할 것인가? 좌파는 상속세 중과이고 우파는 장학금 지급이다.
지금 진행중인 상속세 감세논쟁은 좌파의 기회균등과 우파의 사유재산권 보호의 대립이다. 더불어민주당이 상속세 감세에 대해서 긍정적이라는 보도가 사실이라면 이는 중도좌파적인 정체성을 다져나가는 출발점이 될 수 있고, 주류좌파의 일대 변신을 가져 올 제3의 길이라고 칭송할 만 하다. 또한 국민의 힘이 최상층 부자들의 상속세 인하보다도 중산층의 상속세 인하에 중점을 둔다면 적어도 상속세 인하에 있어서는 좌우파가 접근하는 계기가 될 것이고 진영전쟁의 종식을 위한 의미있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이 내친 김에 자본주의에 대한 태도를 ‘미워도 다시 한번’의 자세로 바꾸어 나갈 것을 제안한다. 자신들이 유권자들에게 베푸는 시혜적 복지의 재원은 대기업과 부자들이 내는 세금이고 그 세금은 자본주의가 번성하기 때문에 창출되는 소득에서 나온다. 그러니 자본주의를 진정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할지언정 적어도 고마워는 해야 할 것이다. 기업이 개처럼 벌어주는 돈을 자신들이 정승처럼 쓰는 행운을 계속 누리고 싶으면 반기업적 정책으로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가르는 어리석음은 버려야 한다.
3. 제3의 길에서 좌우가 만나자.
좌우파 정치가 협치하기 위해서는 먼 미래를 바라보는 지향점이 같은 방향이어야 한다. 정치인이 눈앞의 권력만 쫓고 자기 이익만 챙기는 것 같지만 사이비 협잡꾼이 아니라면 더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뜻이 어찌 없겠는가?
더 좋은 세상이 뭔가? 골고루 잘 사는 세상아니겠는가? 이러면 좌파라고? 우파는 색안경을 끼고 볼 것이다. 골고루 잘 사는 세상이라니. 가진 자로부터 빼앗아서 잘 살겠다고?
그렇다면 우파 정부는 무슨 이유로 누진세를 걷고 복지를 늘려가는가? 좌파선동가들이 표심을 훔치는 것을 방관할 수는 없어서 마지못해서 그런다고? 그렇다고 해도 좌파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아니 좌파의 존재이유를 인정해야 한다. 자본주의가 천민화의 추악한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고 이 정도나마 인간의 얼굴을 띄게 된 것은 좌파의 체제위협과 비판이 절대적으로 기여했다고 본다. 좌파가 비록 생산력을 키우는데 주역은 아니었지만 우파의 욕망과 부패를 억제하는 소금의 역할을 한 것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좌파의 ‘골고루 잘사는 세상’은 그 숭고한 뜻만으로도 가슴을 뛰게 한다. 소련과 모택동 중국의 현실 공산주의가 망한 이후에도 좌파세력이 건재하는 이유이다. 희망고문으로 그칠 지라도 이웃과 더불어 잘 사는 삶의 이상을 버리기 싫어하는 사람은 언제나 존재한다.
좌파는 사상적 원조인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의 경이로운 생산력에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된다. 막강한 생산력이 노동자들을 착취해서 쌓아 올린 저주받은 성공이었기 때문에 계급모순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다는 그의 과학적 예언은 여지없이 빗나갔다. 그가 대안으로 내세운 공산주의체제는 북한을 제외하고 지구상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좌파는 역사적 실체를 외면하지 말고 자본주의를 받아들이고 엄청난 생산력이 평등하게 분배되는 사회를 꿈꾸어야 한다.
우파가 ‘골고루 잘사는 세상‘을 포용하는 제3의 길을 택하고 좌파가 ’자본주의의 생산력‘을 인정하는 제3의 길을 취할 때 좌우는 공존하게 된다. 우파는 좌파의 평등담론에 대해서 실행안을 제시하고 좌파는 우파의 성장담론에 대한 보완을 강구하여 치열한 정책논쟁을 벌이고 국민의 심판을 받으면 된다.
정치인들이 국민들로 하여금 이구동성으로 정치를 혐오하고 정치인을 욕하게 만들어 놓고 그들인들 속이 편하겠는가? 국회의원이 백가지가 넘는다는 특권을 즐기고 권력에 취해서 살맛이 나는지 모르겠으나 좌우가 경쟁하고 협치하면서 민생을 도모할 때 쏟아지는 존경과 찬사에 비하면 허망하기 짝이 없는 짓 아니겠는가?
<ifsPOST>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