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민(畏天本民) <14> 국정(國政)의 근본 원칙과 목표 V. 바른 국정을 도운 인재들 ① 황희[黃喜(1363-1452), 시호 翼成公, 배향공신](中)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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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황희 중용의 이유]
태종 18년 재위기간 중 네 번, 기간으로는 약 8년 동안 파면되었던 황희는 세종 32년 재위기간 중에는 두 번 밖에 파직되지 않았다. 그것도 합하여 11개월 밖에 안 되는 짧은 파직이었다. 세종 재위기간으로 본다면 거의 파직되지 않은 것이나 다를 바 없다. 그만큼 세종은 황희를 신뢰했다는 말이다. 세종이 황희에 대해 전폭적인 신뢰를 한 이유는 무엇인가. 물론 아버지 태종의 유훈이라 할 수도 있다. 태종은 진정으로 황희를 믿고 신뢰했었기 때문에 진심으로 아들이 그를 중용해 주기를 바랐다. 세종의 말이 그랬다.
“우시면서 황희의 재능을 아까워 하셨다.
(因泣下 其愛惜喜之才之矣 : 세종 13년 9월 8일)”
태종이 전위를 하면서 세종에게 ‘물려 준’ 수많은 인재 중에 태종이 직접 나서서 사람됨을 칭찬하고 천거한 사람은 황희 밖에 없다. 태종은 그것은 종묘사직에 직결되는 문제라 생각했음에 틀림없다. 황희에 대한 세종의 판단도 태종과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태종의 신임을 받은 신하인데
어떻게 이런 일로 영원히 끊을 수가 있다는 말이냐.
(且太宗信任之臣 豈可以此而永絶哉 : 세종 13년 9월 8일)”
[절개]
여러 번 내쳤음에도 불구하고 태종이 황희를 다시 불러들인 믿음의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는 양녕의 폐세자 반대 사건에서 보여준 황희의 ‘절개’이다. 사실 태종으로서 양녕 폐위는 그야말로 어쩔 수 없는 차선의 선택이었다. 양녕이 조금만 더 착실했다면 폐위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항상 마음 한 구석 깊이 깔려 있었다. 그런 양녕을 두둔하고 폐세자를 반대하는 황희를 태종은 속으로 ‘한나라 사단(史丹)과도 같은 정말 제대로 된 신하’라고 생각했던 게 분명하다. 세종도 같은 생각이었다.
“이제 생각해 보니 희에게 정말로 죄가 없다.
(予今思之 喜實無罪 : 세종 13년 9월 8일)”
세종이 인재의 조건에 대해 늘 말해 온대로 ‘절개와 염치가 있는 자(有節氣廉恥者)’와 ‘세운 마음이 강개하여 직언과 극간을 할 수 있는 자(立心慷慨 能直言極諫者)’의 전형으로 황희는 꼭 들어맞는다. 비록 충령 편이 아닌 양령 편에 서 있었지만 그건 세종이 왕이 되기 전의 문제일 뿐이다. 이제는 세종이 황희의 절개를 높이 사야 할 시대가 열린 것이다.
[신뢰]
둘째로는 태종의 신하로 있으면서 보여준 ‘신뢰감’이다. 얼마나 황희를 믿었으면 태종은 기밀사항을 희에게만 알려주면서 “이 일이 누설되면 너 아니면 내가 발설한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민무구, 민무질 형제를 처단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지신사 황희의 비밀유지는 그동안 남아있던 황희의 정체성에 대한 의혹, 즉 태종이 자결케 한 심온과 황희 사이의 내통의심을 털어주기에 충분했다. 양녕폐위사건 이후 폐서인 되어 쫓겨 나간 황희의 심정을 넌지시 알아보니 ‘살과 가죽은 부모의 것이나 의식과 종들은 모두 태종임금의 은혜이므로 어찌 은덕을 잊겠으며 어찌 딴 마음으로 반대를 했겠냐’고 하며 황희가 애통해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루라도 충신 황희가 곁에 없으면 태종은 꼭 불러서 보았으며 남원에 귀양 가 있는 중에도 세종에게 누누이 “무슨 죄가 그에게 있겠는가(有何罪焉)”라고 하며 신뢰감을 보였다. 황희를 탄핵하는 상소가 빗발 칠 때마다 세종이 황희를 막아주는 최고의 무기는 ‘세종의 신뢰’였다. 황희의 죄는 분명 죄이기는 하나 대신을 벌을 줄 만큼 심각한 죄는 아니라는 것이다. 태석균 불법청탁 건으로 사헌부의 탄핵요구가 올라 왔을 때에 세종은 이를 거부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벌써 다 알고 있다. 그러나 대신을 가볍게 벌을 줄 수는 없다.
(予己知之 然大臣不可輕罪也 : 세종 12년 11월 21일)”
[판단력과 경세지재(經世之才)]
세 번째로는 황희의 뛰어난 ‘판단력’이다. 황희는 사태의 핵심을 정확히 꿰뚫어 보는 능력을 여러 번 보여줬다. 그 첫 번째 사건이 목인해 무고사건(태종 8년 12월 5일, 1408)이다. 무예에 재능이 있는 관노로서 사저에 있는 태종을 모셨던 목인해는 태종의 사위로서 나이가 어리고 우둔한 평양군 조대림을 모반의 혐의가 보인다고 무고한 것이다. 자기도 무력으로 정권을 잡은 터라 몹시 긴장한 태종은 황희를 불러 계엄조치를 내려 대비해야 한다고 서둘렀다. 황희는 누가 주모자라 하더냐고 물었다. 태종은 들은 대로 조용 이라고 대답했다. 황희는 “조용의 사람 됨됨이는 아버지나 임금을 시해하려는 사건에 따를 사람이 절대 아니라.”고 확신했다. 따라서 이 사건은 무고일 뿐이라고 직감했다. 예견대로 그 사건은 목인해의 무고였던 것이 판명되었다.
황희의 정확한 판단력은 그의 인재를 보는 눈에도 여실히 나타난다. 최윤덕과 허조를 중용하고 장영실을 천거한 사람이 황희였다. 그가 인재를 보는 눈이 얼마나 공평무사한가를 잘 보여주는 예가 있다. 황희가 좌천되어 잠깐 평안도 도순문사로 나가 있을 때(태종 17년 5월), 의주에 급거 파견된 사헌부 행대감찰 이장손과 마찰이 있었다. 이장손이 희를 모욕하기도 하고 또 논박하기도 하였으므로 태종이 나서서 말리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황희는 복귀한 뒤 이장손을 칭찬하였다. 오히려 이장손을 추천하여 더 높은 직책인 헌납과 사인을 삼았다.
황희의 능력을 세종이 얼마나 높이 사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구체적인 실록기사도 있다. 난언을 한 혐의가 있는 박용이라는 사람으로부터 말과 술대접을 받았다는 건으로 사헌부가 황희를 탄핵했다. 이 때 좌의정 황희가 억울함으로 사직을 요청하였는데 세종은 허락하지 않으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 생각에 재상 임명은 매우 중요하여 국가가 의존하는 것이다.
인재 구하기 어려움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경은 세상 다스리는 재능이
있고 학문을 정확히 응용할 줄 알아 지혜(꾀)를 내면 만 가지 업무를
해결할 수 있고 덕망은 모든 신하들의 스승이 되기 족하다.
아버님이 신임하셨고 내가 의지하고 믿는 신하로서 재상으로 임명하였
으니 허락하여 모두 우러러 봄에 부응하도록 하라.
(予惟輔相之重 國家所依 人材之難 古今所同 惟卿經世之才 適用之學
謀猷足以綜萬務 德望足以師百寮 皇考之所信任 寡躬之所倚毗 爰命作相
允副具瞻 : 세종 10년 6월 25일)”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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