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민(畏天本民) <13> 국정(國政)의 근본 원칙과 목표 V. 바른 국정을 도운 인재들 ① 황희 [黃喜(1363-1452), 시호 翼成公, 배향공신] (上)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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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이 즉위한 바로 다음날 대대적인 인사개편이 단행되었다. 좌의정에 박은, 우의정에 이원, 예조판서 변계량, 예문관대제학에 유관, 호조참판 이지강, 이조참판에 이명덕, 예조참판에 탁신, 지신사에 하연, 옥천부원군에 유창 등이 임명되었다. 이들 중 박은, 이원, 유창, 유관, 이지강 은 세자 때 세종의 사빈이었기 때문에 특별히 승진 발령된 것이다. 그러나 이번 인사는 태종의 인사라 할 수 있다. 태종이 구체적으로 이름을 들어 승진을 지시한 것이다. 이것은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 세종 스스로 즉위교서에서 부왕의 유지와 큰 사업(丕業)을 이어 가겠다고 선언한 바 있고 또 세종에게 왕좌를 양위하기 하기는 했지만 군사문제를 비롯하여 인사를 포함하는 중요한 국사에 관해서는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뜻을 태종은 이미 분명히 밝힌 바 있었다.
“내가 비록 전위를 하더라도 나라의 중대사는 대신들과 함께
의논하여 그 부족하고 미흡한 부분을 보완할 것이다.
(予雖傳位 國有大事 則當與大臣議之 以補其不逮也 : 태종 18년 8월 9 일)”
“주상이 성장하기 전까지 군사문제는 내가 친히 다룰 것이며
또 국가의 어려운 문제는 영의정부와 육조가 각각 가부를 물어
시행할 것이니 나도 당연히 가부의사에 참여 할 수 있을 것이다.
(主上未壯之前 其軍事 予親聽斷 且國家難端之事 領議政府
六曹各陳可否以施行 予當參與於可否之一可也 : 태종 18년 8월 10일)”
V.1 황희[黃喜(1363-1452), 시호 翼成公, 배향공신]
현명한 신하의 표상으로 평가되는 황희는 세종의 가장 대표적인 인재로 손꼽히는 사람이다. <세종실록>은 그를 ‘안팎에서 우러러 보기를 모두 현명한 재상이라 한다(中外仰望 皆曰 賢宰相也 : 문종 2년 2월 8일)’고 했다. 어릴 적부터 영특한 기운(神氣)이 넘쳤던 황희는 고려 공양왕 원년(1389)에 스물 여섯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학관이 되었으나 3년 만에 고려가 망하자 2년 동안 야인으로 있다가 조선개국 직후인 태조 3년(1394) 세자의 가정교사(世子右正字)를 겸직으로 맡아 관직을 시작한다.
이후 예문춘추관과 사헌부 감찰과 우습유의 직책으로 옮겨 다니다가 1398년에 지방으로 좌천되었다. 다음해 정종이 즉위한 뒤(1399) 중앙으로 복귀했지만 회안군 이방간의 매부 민공생을 탄핵하다 다시 면직되었다. 태종이 즉위하고 나서 습유의 벼슬로 복귀했으나 또 파면되었고 조금 후에 우보궐이 되었으나 임금을 거슬리는 말로 잠시 파면되었다가 곧 복직된 것을 보면 황희가 간관으로써 바른 말을 자주했고 이것이 성질 급한 태종의 비위를 자주 건드렸던 것 같다.
황희와 태종과의 관계에 있어서 가장 심각한 상황은 양녕대군의 폐세자 문제와 관련하여 불거졌다(1406). 황희가 세자의 폐위를 강력히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이 때 황희는 세자 양령 편을 들면서 나이가 어려서 그런 것이니 큰 과실이 아니라고 양녕을 옹호했다. 양녕과 황희가 작당을 이루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한 태종은 1417년 2월 황희를 평안도 도순문사로 좌천시켰다가 곧 판한성부사직으로 복귀시켰다. 그러나 1418년 양녕이 폐세자되면서 황희도 폐서인 되고 가족과 함께 지금의 교하로 퇴출시켰지만 대신과 대간들의 탄핵 성화를 못 이겨 태종은 황희 가족 모두를 더 먼 곳 남원으로 이주시켰다(1418). 항상 황희를 곁에 두고 싶었던 태종은 황희를 남원으로 보내면서 황희의 생질을 보내어 위로의 말을 전하였다.
하루 이틀이라도 황희가 보이지 않으면 궁금해 늘 곁에 두고 싶지만 대신들의 반대가 극성이라 어쩔 수 없으니 고향에 가서 편히 쉬고 있으라는 말이다. 남원에서 황희가 한성으로 돌아오기까지 꼭 4년이 걸렸다. 1422년 2월 12일 황희가 서울로 돌아와 세종과 함께 태종을 알현할 때 기뻐하며 이렇게 외쳤다.
“내가 이궁에 있을 때 매일 주상(세종)에게 경의 일을 말하곤 했는데
오늘이 마침내 경이 돌아오는 날이요.
(予在豊壤 每言卿事於主上 今日乃卿來京之日也 : 문종 2년 2월 8일)”
태종은 세종에게 황희를 중용하라고 권했다. 태종의 이 독촉은 곧바로 태종의 유언(遺旨)이 되어버렸다. 황희가 돌아온 지 석 달 열흘 만인 5월 10일 태종이 사망한 것이다(1422). 세종은 황희가 돌아온 직후 직첩(자격증 또는 신분증명서)을 돌려주고(1422년 2월 22일), 곧 경시서제조로 임명하였으며(1422년 10월 13일), 보름 뒤에는 의정부 참찬직을 제수하였다. 그리고 5년 뒤인 1427년 6월 사위 서달 건으로 파직되기까지 예조판서, 강원도 도관찰사, 판우군도총제부사, 의정부찬성, 겸대사헌, 의정부찬성, 이조판서,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까지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였다. 서달 사건이 발생하여 1개월 파직되었다가 좌의정으로 다시 돌아왔으며 1430년 12월 태석균의 청탁사건에 연루되어 사헌부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지만 9개월 만에 돌아왔는데 이번에는 영의정으로 승진하여 복귀한 것이다.
[황희의 다른 허물]
황희에게 허물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세종실록>에는 황희의 많은 허물을 싣고 있다. 서달과 태석균사건 말고도 황희가 부정에 연루된 사건이 많다. 대사헌으로 있던 중 남원부사로부터의 뇌물(유지장롱)을 받은 적이 있었고 세종 7년 5월 대사헌 직을 김익정에 물려주고 의정부찬성사로 승진하였는데 두 사람 다 대사헌으로 있으면서 중 설우의 금을 받았다고 해서 ‘황금(황희와 김익정) 대사헌’이라는 비아냥 소리를 듣기도 했다. 간통죄를 범한 박포의 아내가 여러 해 동안 황희의 집에 숨어 지내면서 서로 사통하였으며 박포의 아들에게 관직을 주고 토지를 받기도 했다. 뇌물을 받고 형량을 줄여 주기도 했다. 원래 매우 가난했던 황희는 부정축재로 큰 재물을 얻게 되었다. 심술이 바르지 못하여 뒤에서 중상모략하기도 했고 또 박용의 말(馬) 뇌물도 사실이었다(세종실록 10년 6월 25일). 하윤도 황희를 몹시 비방하는 비밀편지를 태종에게 올린 적이 있다(태종 13년 6월 22일). 매우 간악한 소인이며 고관으로 있는 것도 마땅치 않지만 과거시험을 관장하는 것은 더 마땅치 않다고 밀고하였다. 태종이 그 의도를 알고 싶어 지신사 조말생을 하륜에게 보냈더니 그는 황희의 부정사건이 더욱 많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공이 많아 내칠 수는 없겠지만 중직에 맡겨서는 안 되는 인물이라고 평가하였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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