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오콘의 역사-기원, 이상, 그리고 실패 <5> 군인, 지식인 그리고 전쟁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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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군인, 지식인 그리고 전쟁
전쟁은 군인한테만 맡겨 둘 수는 없다고 어떤 프랑스 정치인이 이야기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을 뽑으라면 맥조지 번디 안보보좌관과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을 들어야 할 것이다.
30대 초에 하버드 대학원장을 지낸 뛰어난 수재였던 맥조지 번디, 그리고 포드 가문이 아닌 최초의 전문경영인 CEO로 포드 자동차를 이끌었던 전략경영의 귀재라는 로버트 맥나마라는 기가 막힌 환상의 콤비였다. 하지만 그들이 시작한 베트남 전쟁은 미국이 최초로 패배한 전쟁으로, 미국 사회를 분열시켰고 그 경제적 여파는 1980년대 들어서야 치유가 될 정도였다.
2차 대전 때 연합군 사령관을 지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전쟁이 무엇인지를 뼈저리게 아는 사람이었다. 프랑스가 베트남에서 패배하고 나오자 그 군사적 공백을 미국이 메워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자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육군참모총장을 지낸 매튜 리지웨이 장군을 베트남에 보내서 상황을 알아보라고 부탁했다. 리지웨이 장군은 아이젠하워가 총지휘한 노르망디 상륙작전시 82공수사단을 손수 이끌고 후방에 낙하해서 치열한 전투를 했고, 6.25 전쟁 때는 8군 사령관 월튼 워커 중장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후에 후임으로 부임해서 전쟁을 지휘했으며 맥아더가 해임 된 후에는 유엔군사령관이 되어 전쟁을 마무리한 인물이다.
리지웨이는 베트남을 방문한 후에 베트남에 미군을 보내서는 안된다는 결론을 담은 보고서를 아이젠하워에게 제출했다. 이 보고서를 읽은 아이젠하워는 미군을 파견해야 한다는 CIA와 펜타곤의 먹물들의 주장을 묵살해 버렸다. 전쟁을 치뤄 보았기에 전쟁을 쉽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라크가 쿠웨이트를 침공하자 조지 H.W. 부시 대통령은 전쟁을 결심했지만 2차대전을 태평양 최전선에서 경험한 그는 전쟁이 신속하게 끝나야 하고 아군 희생자가 최소화돼야 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 부시는 19세 나이에 해군 조종사가 되어 급강하 폭격기를 몰고 태평양 전쟁에서 싸웠다. 부시의 가장 친한 친구였던 조종사와 항공모함에서 룸메이트였던 조종사는 출격 후 항모로 돌아오지 못했다. 부시 자신도 격추되어 바다에 떠 있다가 지나가던 미군 잠수함에 의해 극적으로 구조됐다. 그의 폭격기 뒷좌석에 탔던 포격수는 실종되고 말았다. 이 경험은 부시의 일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
미군 총사령관으로서 전쟁을 결정한 부시는 구체적 시행은 콜린 파월 합참의장이 이끄는 군 수뇌부에 맡겼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콜린 파월은 전쟁이 무엇인지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그 결과는 미군의 눈부신 승리였고 세계 유일 초강대국의 탄생이었다.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과정에서 이른바 네오콘의 역할은 독특한 것이었다. 유태인인 그들은 나치라는 사악한 집단에 대한 관용으로 유태인이 당했던 그 경험이 사고 체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막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었던 프랑스와 영국이 나치 독일을 선제공격했으면 유태인 600만 명이 죽을 이유가 없었고, 폴란드 등 동유럽이 공산치하에서 반세기 동안 고생할 이유도 없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전쟁은커녕 총 한번 쏴보지 않은 지식인 집단이 미국을 전쟁으로 이끌어 가는 과정의 한 복판에는 네오콘으로 불리는 얽히고설켜있는 일단의 유태인 지식인 그룹이 있었으니, 지식이란 때로는 위험할 수 있음을 새삼 느끼게 된다. 그 핵심인물인 폴 월포위츠를 중심으로 풀어가기로 한다.
<리차드 펄과 폴 월포위츠>
1차 대전이 끝난 직후인 1920년, 10살 유태인 소년 제이콥 월포위츠(Jacob Wolfowitz,1910-1981)는 부모를 따라서 폴란드 바르샤바를 떠나 뉴욕에 도착했다. 그와 헤어진 유태인 친척 친지들은 그 후 나치의 수용소에서 전원 사망했다. 그는 고등학교 수학 교사를 했고, 공부를 계속해서 뉴욕대학에서 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3년에 아들 폴 월포위츠 (Paul Wolfowitz)가 태어났고, 1951년에 코넬대학 교수가 되었다. 나중에 국방차관이 되어 이라크 전쟁을 기획하게 되는, 폴 월포위츠가 코넬 대학 학부에서 수학을 전공하게 되는 것은 순전히 부친 제이콥 덕분이었다. 제이콥 월포위츠가 코넬 대학교수가 되어 이타카로 옮기기 전 뉴욕시에 살 때 교류했던 유태계 수학자 동료에 앨버트 월스테터(Albert Wohlstetter, 1913-1997)가 있었다.
뉴욕에 자리 잡아 살아온 유태계 가정에서 태어난 앨버트 월스테터는 컬럼비아 대학에서 수학 논리를 공부했는데, 그 때 부인 로베르타(Roberta Wohlstetter,1912-2007)를 만나서 결혼했다. 그는 박사과정을 거의 끝내가던 중 2차대전이 발발하자 연방정부 기관인 전시생산국 (War Production Board)에서 일했고, 캘리포니아에 랜드(RAND)가 설립되자 부부가 함께 일하게 됐다. 그는 랜드에서 수학논리에 근거한 핵전략을, 부인 로베르타 여사는 정보 역사 (intelligence history)를 담당해 부부가 해당 분야의 전문가로 알려지게 됐다. 앨버트 월스테터는 1964년부터 1980년까지 시카고 대학 정치학과에서 비핵화 전략 등을 연구하고 가르쳤다.
리차드 펄(Richard Perle, 1941-현재)은 뉴욕 태생의 유태인인데, 어릴 때 근처에 살던 월스테터 부부의 딸과 같은 학교에 다녀서 앨버트 월스테트를 알게 됐다. 월스테터는 자신의 자식 나이인 리차드 펄과 꾸준히 연락을 하는 등 멘토 역할을 했다. 리차드 펄은 남가주대학을 나온 후 1967년에 프린스턴 대학에서 정치학 석사학위를 했다.
1943년에 태어난 폴 울포위츠는 부친이 교수를 하던 코넬대학에 진학해서 수학을 공부했으나 정치학으로 전공을 바꾸기로 마음먹고 시카고대에 진학해서 1972년에 비핵화 전략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했다. 시카고 대학에서 그는 레오 스트라우스 교수의 강의를 들었고, 박사논문 심사를 앨버트 월스테터 교수가 했다.
프린스턴 대학에서 공부를 하던 리차드 펄은 헨리 잭슨 상원의원과 일을 해보지 않겠냐는 월스테터 교수의 연락을 받고 워싱턴으로 갔더니 역시 월스테터의 연락을 받고 온 폴 월포위츠가 와 있어서 두 사람이 만나게 됐고, 두 사람은 잭슨 의원의 보좌진으로 일하게 됐다. 리차드 펄은 1980년까지 11년간 잭슨 의원의 보좌관으로 일하면서 외교 군비 분야에서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잭슨 의원은 상원 전략무기 소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었으며 민주당의 유력한 대선 주자였고, 국방부에 영향력이 큰 의원이었고, 대표적인 친이스라엘 성향 의원이었다. 게다가 리차드 펄 자신이 앨버트 월스테트 같은 영향력 있는 지식인과 관련이 있었으니, 그는 단순한 의원 보좌관이 아니라 막후에서 워싱턴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유력인사였다.
폴 월포위츠는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잭슨 의원실을 떠나서 닉슨 행정부의 군비통제국 (Arms Control and Disarmament Agency)에서 일했다. 카터 행정부 들어서는 국방부에서 지역방위 담당으로 일했으나 카터 행정부의 안보국방 정책에 실망해서 1980년에 사임하고, 존스홉킨스 대학의 국제전략대학원(SAIS) 객원교수로 옮겼다. 그러면서 그는 민주당적을 버리고 공화당원이 됐다.
레이건 행정부가 들어서자 폴 월포위츠는 국무부 정책기획국장이 됐고, 조지 슐츠가 국무장관이 되자 동아태담당 부차관보로 승진했다. 1986년에는 인도네시아 주재 대사가 됐으며, 1989년에 조지 H. W.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자 국방부 정책담당 차관보(Under Secretary of Defense for Policy)가 됐다. 이렇게 해서 폴 월포위츠는 1991년 걸프 전쟁을 기획하는 데 참여하게 됐다. 클린턴 행정부가 들어서자 월포위츠는 존스 홉킨스 대학으로 돌아가서 국제전략대학원(SAIS) 원장이 됐다. 그 지위와 경력으로 그는 워싱턴 안보 서클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쳤고, 야당이던 공화당에 자문을 했다. 그리고 조지 W. 부시가 대통령이 되자 국방차관이 됐다.
리차드 펄은 1980년 대선을 계기로 잭슨 의원실을 떠나서 공화당으로 당적을 옮기고, 레이건 행정부에서 국방부 지구전략 담당 부차관보(Assistant Secretary of Defense for Global Strategic Affairs)가 되어 8년 동안 일을 했다. 그 후에 국방정책자문위원회(Defense Policy Board Advisory Committee) 위원을 지냈으며,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자 2005년까지 그 위원장을 지냈다. 조지 W. 부시 1기 행정부에서 리차드 펄은 국방정책자문위원회 위원장을, 폴 월포위츠는 국방부 차관을 지내게 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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