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오콘의 역사-기원, 이상, 그리고 실패 <2> 사상적 뿌리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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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사상적 뿌리 : 레오 스트라우스와 앨런 블룸
국내 문헌을 검색해 보면 흔히 네오콘의 사상적 뿌리가 레오 스트라우스(Leo Strauss,1899-1973년)라고 한다. 1973년에 사망한 독일 출신 유태인 철학교수가 어떻게 해서 이라크 전쟁을 일으킨 네오콘의 사상적 시조(ideological father)가 되는지,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사실 스트라우스가 무덤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흔히 신보수주의라고 할 때는 조지 W. 부시의 외교정책을 연상하지만, 1960년대 이후 미국사회에서 팽배해진 신좌파(New Left) 성향에 대한 비판도 신보수주의라고 지칭하기 때문이다. 레오 스트라우스는 그런 의미에서 분명히 이정표를 세웠다고 하겠는데, 그는 많은 저술과 논문을 남겼고 많은 이에게 영향을 주었지만, 일반 독자(나 같은 사람)가 읽을 수 있는 책은 별로 남기지 못했다. 여하튼 그의 이력은 다음과 같다.
1899년 당시 프러시아의 독실한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난 스트라우스는 1차대전에 참전한 후 함부르크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많은 논문을 썼지만 독일 대학에서 교수 자리를 얻지 못하자 출국해서 파리, 런던에서 강사 생활을 하다가 1937년에 미국으로 옮겨서 콜럼비아 대학을 거쳐 뉴욕의 뉴 스쿨 교수로 정착했다.
미국 시민권을 얻은 그는 1949년에 시카고 대학 교수가 되어 그 후 많은 제자를 키웠고, 괄목할 만한 연구업적을 남겼다. 그는 무엇보다도 서구 문명과 정신을 대학이 가르쳐야 한다면서, 고전 교육을 강조했다. 스트라우스가 시카고 대학에서 가르친 학생 중에는 코넬 대학 교수가 된 앨런 블룸(Allan Bloom, 1930-1992)이 있는데, 블룸이 1987년에 쓴 <미국 정신의 몰락>(Closing of the American Mind)은 베스트셀러가 되어서 큰 파문을 일으켰다.
스트라우스는 나치의 법이론가 칼 슈미트를 비판했는데, 그는 나치 독일과 공산 소련을 니힐리즘의 산물이라고 공격했다. 그는 당시 유럽에 팽배한 극단적 상대주의(relativism)가 허무주의를 조장했고, 이로 인해 전체주의도 대안이 된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어서 나치즘을 불러왔다고 보았다. 그 자신이 나치 정권으로 인해 가장 참혹한 피해를 당한 유태인이기에 스트라우스는 자유주의 자체를 파괴하는 상대주의를 경계한 것이니까, 여기까지 본다면 스트라우스를 보수주의와 엮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1960년대 들어서 미국과 서유럽에 신좌파 운동이 성행하자 스트라우스는 미국에서의 균등주의 운동(egalitarian movement)와 과도한 쾌락주의(hedonism)도 니힐리즘이라면서 경계했다. 그러자 이를 둘러싼 논쟁이 일었고 이런 과정에서 스트라우스는 엘리트주의자라는 비난이 일었으니, 일종의 문화전쟁(culture war)이 시작된 것이다. 그는 1973년에 사망했고, 신좌파를 상대로 한 본격적인 문화전쟁은 스트라우스의 제자이기도 한 앨런 블룸에 의해 촉발됐다.
유태인 가정에서 태어난 앨런 블룸(Allan Bloom, 1930-1992)은 시카고 대학의 수재학생반에 들어가서 18세에 졸업하고 계속 공부해서 25세에 철학박사 학위를 땄다. 레오 스트라우스는 그의 은사였다. 블룸은 코넬대, 토론토대 교수를 거쳐서 1980년에 모교인 시카고 대학으로 돌아와서 1992년에 62세로 사망하기까지 고전에 관한 연구를 하고 고전을 강조하면서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시카고 대학은 이른바 위대한 저서(Great Books)를 강조하는 교육으로 유명했었다.
블룸이 캠퍼스 밖으로 유명해진 계기는 1987년에 출간된 <미국 정신의 몰락>(Closing of the American Mind)이였다. 이 책은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가 되어서 초기에 75만부가 팔렸으니, 저자도 깜짝 놀랐다 한다. 400페이지 가까이 되지만 각주도 없이 거침없이 써내려가서 대체로 쉽게 읽히는데, 이 책은 한마디로 1960년대 후반 이후 미국 대학을 휩쓴 신좌파 풍조를 반지성적이고, 반서구적이고, 반문명적이라고 정면으로 비판한 것이다.
레오 스트라우스와 마찬가지로 블룸도 미국 사회가 도덕적 상대주의에 물들어 있다면서 절대적 가치에 대한 회의주의, 그리고 균등주의가 미국의 정신을 파괴한다고 주장했다. 문화적 상대주의가 팽배해서 서구의 보편적 가치를 파괴하는 행태를 또 다른 문화라고 포장하고 있으며, 교육이 지향하는 도덕적 가치를 소멸시켜 버렸다는 것이다. 스트라우스와 마찬가지로 블룸도 도덕적 상대주의를 그토록 경계한 이유는 그들이 유태인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상대주의가 전체주의를 불러들였고 그로 인해 유태인 600만 명이 죽었기 때문이다.
블룸은 좌파에 의해 팽배해진 허무주의는 가수 믹 재거(Mick Jagger)에 의해 표상화 됐다면서, 재거가 우상화된 현실을 비판하면서, 재거의 인기가 시들면 그 보다 더 괴상한 마이클 잭슨, 프린스, 보이 조지가 그 자리를 이어갈지 모르겠다고 꼬집었다.
블룸은 대학에 흑인학생들의 입김이 커지더니 흑인역사, 흑인영어 같은 흑인교과목이 생겼으나 대부분 실패했다면서 아카데미즘의 추락을 개탄했다. 그는 코넬대학에 있을 때 흑인운동권 학생들이 성실하게 공부하고자하는 흑인학생들을 협박하는 일도 있었다면서, 대학당국이 이런 상황을 묵인하고 있다고 했다.
이외에도 블룸은 대학에서 칸트 이래의 문화와 도덕을 다루는 철학교육이 사라져 가고 있고, 1950년대에 매카시즘에도 굳건히 버텨냈던 대학 교수들이 1960년대부터는 오히려 대학 내부로부터의 압력에 무력화됐다고 지적했다.
블룸은 미국 대학은 인문교육(liberal education)기능을 상실했고, 경영학석사 MBA 학위가 성행함에 따라 학부도 비즈니스 관련 과목 수강생이 폭증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러한 문제가 중대하기 때문에 어느 때보다도 철학이 필요하고, 또한 그러하기에 대학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끝을 맺었다.
이 책이 선풍적 인기를 끌자 언론은 그를 보수 또는 우파로 지칭했는데 정작 그는 자기는 보수가 아니라고 말하기도 했다. 블룸을 두고 많은 논쟁이 일었지만 그는 1992년에 타계해서 그 이상의 저술을 남기지 못했다.
블룸이 미친 지적 충격은 대단한 것이었다. 당시는 레이건-부시의 공화당 정부 시절이었다. 블룸의 뒤를 이어서 신좌파 또는 진보진영을 상대로 담론(polemic)을 이어간 사람이 여럿 있는데, 나는 그 중에서 로저 킴볼(Roger Kimball)이 대표선수라고 생각한다. 킴볼이 알려진 계기는 1990년에 나온 <정년보장 급진파>(Tenured Radicals)이었다.
<계속>
블룸이 1987년에 쓴 <미국 정신의 몰락>(Closing of the American Mi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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