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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부채의 덫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07월05일 17시10분

작성자

  • 조장옥
  • 서강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前 한국경제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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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전염병과 전쟁은 인간과 역사를 함께하였다. 하나는 자연재해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 스스로 초래하는 재앙이다.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고 인명, 재산, 시간을 낭비하는 것을 보면 눈부신 과학의 성취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경우 인간은 이성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다는 것이 자명하다. 그와 더불어 자연 앞에서 더없이 약한 존재라는 사실도 분명하다. 우리의 많은 조상들이 안심입명(​安心立命)을 신조로 살다 간 것을 돌이켜보면 인간본성과 환경에 대한 이해가 도저(到底)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최근 코로나19는 인간이 얼마나 취약한 존재인가를 다시 한 번 뼈저리게 일깨워주고 있다. 그리고 경제는 '교류와 순환과 상호작용'이라는 단순한 원리를 웅변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와 모임 자제에 따라 경제의 순환이 정지하다시피 하니 거의 모든 경제인들이 쉽지 않은 지경이 되었다. 사정이 이러하니 여러 가지 정책을 통해 고통을 분담하는 노력이 없을 수가 없다. 경제정책이라는 것이 경제학에서 하나의 연구 분야로 독립된 것이 그리 오랜 것이 아니지만 이제는 상황에 따라 어떤 정책을 펼쳐야 하는가에 대하여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미국을 비롯하여 지금 세계는 정책과잉이다.포퓰리즘 정책으로 경쟁하는 듯하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규모와 방향으로 정책이 시행되고 있다. 벌써 한 차례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소위 재난기본소득이라는 것을 지급하였다. 그리고 정부는 벌써 올해 세 번째 35.1조 원의 추경예산을 편성하였다. 그렇지만 지금의 이 위기는 하루아침에 가라앉을 성질의 것이 아니다. 따라서 어려울수록 적재적소에 예산을 쓰면서 길게 대비해야만 한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는 무분별하게 나라 돈 쓰는데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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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부가 그런 여유를 부릴 수 있게 된 것은 역설적이게도 과거의 위정자들이 재정을 아껴서 운용했기 때문이다. [1]에는 OECD 국가들의 GDP 대비 국가부채비율을 보여주고 있다. 표의 왼쪽에는 호주, 체코, 룩셈부르크, 뉴질랜드, 스위스 등 우리보다 국가부채비율이 낮은 나라들이다. 그리고 오른쪽은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일본, 미국, 영국, 스페인 등 높은 나라들이다.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우리의 국가부채비율은 OECD평균과 비교하여 낮은 편이다. 최근의 발언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데, 청와대 참모들이 그렇기 때문에 대통령께 재정을 풀어도 된다는 인식을 심어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림 1]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우리의 국가부채비율은 빠르게 증가하여 왔음을 알 수 있고 작년부터는 그 전보다 훨씬 빠르게 증가할 것이 분명해 보인다. [1]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의 국가부채가 GDP225.6%로 매우 높다. 일본이 그와 같이 높은 비율에 이르게 되는데 20년이면 충분했음을 명심해야만 한다. 국가부채는 중독성이 있다. 지금 대한민국은 점점 그 중독증이 심해지고 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가 없다. 위기가 멀리 있지 않음을 왜 모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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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시피 버블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1638-1715)가 왕위에 오른 것은 1643514일이었다. 다섯 살이 채 안 된 나이였다. 그는 72년 이상, 유럽의 그 누구보다도 긴 기간 왕위에 군림하였으며 유럽 절대군주의 표상이었다. 그의 재임기간 프랑스는 유럽의 강자였다. 그만큼 전쟁도 많았고 씀씀이도 컸다. 그를 뒤이어 왕위에 오른 것이 증손자인 루이 15(1710-1774)였다. 공교롭게도 왕위계승서열이 높은 인사들이 천연두나 홍역과 같은 전염병으로 사망하자 기대하지 않았던 그가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그 또한 59년이나 재위함으로써 증조부에 버금가는 재위기간을 자랑하였다.

 

루이 15세가 왕위를 물려받은 것은 다섯 살 때였다. 당연히 어려서 국정을 운영할 수 없기 때문에 섭정과 위원회가 마련되고 왕이 열세 살이 될 때까지 국정을 담당해야만 하였다. 섭정은 왕과 가까운 친척이 맡는 것인데 루이 15세의 섭정은 오를레앙 공 필리페(Philippe d’Orleans, 1674-1723)였다. 그는 루이 14세의 조카였으니 루이 15세에게는 할버지뻘이었다.

루이 14세가 증손자에게 물려준 것은 왕위뿐만이 아니었다. 막대한 국가부채를 유산으로 물려주었다. 당시 프랑스 정부의 수입은 145백만 리브르(livre)였다 (리브르는 801년 샤를마뉴 시대부터 1794년까지 프랑스에서 사용된 화폐단위이다). 그리고 국채에 대한 이자지급 이전의 정부지출은 142백만 리브르였다. 그런데 국가부채는 30억 리브르였다. 이자를 4%만 쳐도 연 12천만 리브르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자상환에 쓸 수 있는 예산은 고작 145-142=3백만 리브르였다.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섭정 필리페가 취할 수 있는 조치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국가파산의 선언, 조세의 급격한 인상, 주화에 포함된 귀금속의 양을 감소시키는 화폐가치의 저감(debasement)을 통한 시뇨리지(seniorage)의 확보, 특정 상품의 무역이나 식민지에서의 독점권 매각, 부패한 관료재산의 압수 등. 섭정 필리페는 이 가운데 의 조치를 취하여 15천만 리브르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이 자금은 국가부채의 6%에 불과하였으며 1년 이자를 상환하고 나면 남는 것이 거의 없는 액수였다.

 

섭정 필리페의 지인 가운데 스코틀랜드 사람으로, 결투에서 사람을 죽이고 대륙으로 대피해 있던 존 로(John Law, 1671-1729)가 있었다. 그는 종이 화폐 곧 지폐발행을 주장하는 인사였다. 물론 그가 주장한 것은 오늘날과 같은 법화(fiat money)가 아니라 완전히 귀금속과 토지를 담보로 하는 지폐였다. 일종의 토지은행(land bank)의 개념이었다. 필리페를 만난 그는 프랑스 왕실의 재정을 관리하고 지폐를 발행하는 은행을 설립할 권한을 얻게 된다. 그가 171655일에 설립한 은행이 ‘Law & Company’였다.

 

은행의 설립과 함께 프랑스의 모든 세금은 Law & Company의 지폐로 납부하여야만 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은행의 지분을 매입하기 위해서는 25%는 주화로 나머지 75%는 정부공채 billets d’etat로 지급하여야만 하였다. billets d’etat는 루이 14세가 막대한 재정적자를 메꾸기 위해 발행한 공채였다. 원래 billets d’etat의 액면가는 100리브르였는데 국가파산 위험 때문에 일종의 정크 본드로 추락하여 당시에는 21.5리브르에 거래되고 있었다.

 

지폐를 발행하면서 로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천명하였다. 첫째, Law & Company의 지폐는 언제라도 주화로 교환된다. 둘째, 지폐는 항상 변함없는 가치의 주화로 교환된다. 만일 정부가 주화에 포함된 귀금속의 양을 저감시키는 조치(debasement)를 취하더라도 그 이전 원래의 주화로 지급한다. 셋째, 주화나 토지의 담보 없이 지폐를 발행하는 자는 사형을 받아 마땅하다. 이와 같은 조건 아래 발행된 화폐는 주화와 교환되어 시중에 풀렸고 유동성의 증가는 나날이 프랑스의 경기를 진작시켰다. 그리고 지폐의 가치가 주화에 비하여 1년 사이 15%나 증가하였다.

 

지폐 가치가 상승하는 것은 여러 가지를 함의하고 있었다. 먼저 대중이 지폐를 신뢰하고 있음(confidence)을 보여주는 현상이었다. 그리고 공급이 부족하다는 것을 보여주었으며 지폐로 나라의 번영을 일으킬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한편 지폐는 정부가 싸게 자금을 빌릴 수 있는 방법임이 분명했다. 이와 같은 인식 아래 섭정 필리페는 로의 은행으로 하여금 10조 리브르의 지폐를 찍어내도록 지시하였다. 이는 그 이전의 화폐발행액보다 16배가 많은 양이었다. 이를 반대하는 재상 다게쏘(Henri François d'Aguesseau, 16681751)를 파면하였으며 금은을 정제할 수 있는 독점권 등 은행에 주어지는 여러 특혜를 확대하였다. 은행의 이름도 ‘Banque Royale’로 바꿨다. 이제 은행은 왕실의 주관 아래 놓인 것이 분명했으며 은행을 통해 섭정이 할 수 없는 것이 없었다.

 

이와 같이 은행의 설립과 지폐의 발행을 통해 프랑스 왕실은 막대한 국가부채를 해결할 방도를 찾게 되었다. 그러나 billets d’etat를 매입하는 것은 현실적인 대안이 아니었다. 국가가 매입을 시작하면 시장가격이 상승하기 때문에 부담이 크게 증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존 로가 은행을 설립하면서 실시한 공채/지분 스왑(debt/share swap)이 하나의 방법으로 떠올랐다. 그런데 Law & Company의 공채/지분 스왑은 규모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새로운 회사를 설립할 필요가 있었다. 그런 목적으로 설립된 것이 미시시피 회사(Mississippi Company)였다.

 

1719년 초에 설립된 미시시피 회사의 공식명칭은 ‘Compagnie des Indes’였다. 설립 당시부터 이 회사에는 온갖 특혜가 주어졌다. 미국의 미시시피 강 유역과 루이지애나, 중국, 동인도, 남아프리카와의 독점적 무역, 9년 동안 왕실의 주화를 주조하는 독점권, 9년 동안의 조세징수 권한, 담배무역의 독점권 등이 주어졌다. 그리고 서 아프리카, 중국, 인도와의 무역을 각각 담당하던 세네갈회사(the Senegal Company), 중국회사(the Chinese Company) 및 프랑스 동인도회사(the French East India Company)의 소유권을 부여하였다.

 

회사를 설립하면서 존 로는 40%의 수익을 기대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런데 기대되는 수익은 그보다 훨씬 컷다.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은 주화나 지폐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반드시 billets d’etat를 사용하여야만 하였다. 당시 billets d’etat의 가치는 액면가의 20%였다. 그런데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과 액면가로 교환이 가능하였으니 실제 기대되는 수익률이 40%의 다섯 배인 200%에 달하였다.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수요는 폭발할 수밖에 없었다. 주식을 매입하기 위해서는 몇 주의 대기기간이 필요했으며 그 사이 군중이 존 로의 사무실 밖에 진을 치기 시작하였다. 시장에서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가격은 10배 이상 급등하였다. 이에 부응하여 회사는 그때까지의 주식가치보다 12배나 많은 15억 리브르의 주식을 추가로 발행하였다.

 

전형적인 거품이 일어난 것이다. 그런데 실상 미시시피 회사의 수익성은 존 로가 예상했던 바와 같이 그렇게 높은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미시시피 강 연안과 루이지애나에 금과 은광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미시시피 회사 주식가격의 폭등은 허상에 기초한 것이었다. 거품이 붕괴하기에는 1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존 로에 의해 주식거래가 거부된 귀족 한 사람이 마차 두 대에 지폐를 가득 싣고 와서 주화로 바꾸어줄 것을 요구하였다. 로는 약속한 바와 같이 주화로 바꾸어 주었고 이는 섭정 필리페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섭정은 주화의 2/3를 다시 입금하도록 명령함으로써 사태를 수습하였다.

 

그러나 이는 거품이 붕괴하는 단초가 되었다. 거품의 붕괴는 의구심의 작은 씨앗으로부터 시작되는 법이다. 만일 모든 사람이 지폐를 주화로 교환을 요구하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충분한 주화가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위의 사건은 이러한 불안감과 의구심을 투자자들의 마음에 심어준 것이다. 현명한 투자자들은 위의 사건 이후 지폐를 주화로 바꾸어 프랑스를 탈출하였다. 그 가운데에는 23세의 젊은 깡띠옹(Richard Cantillon)도 있었다. 그는 2천만 리브르의 이득을 챙겨 프랑스를 떠나 유럽을 여행한 다음 런던에 정착하였다. 프랑스 사람으로 잘못 알려져 있지만 그는 아일랜드 사람이다.

 

거품은 터지기 시작하면 수습할 방법이 없다. 결국 파국을 맞고 많은 귀족과 재력가들이 파산하였다. 지폐는 구리로 교환해 주다가 결국은 모두 몰수되었다. 미시시피 회사의 각종 특혜는 박탈되었다. 해고되었던 재상 다게쏘를 다시 등용하여 뒷수습을 맡겼다. 그러나 미시시피 버블을 해결하는 데에는 많은 비용과 기간이 소요되었으며 경제적 일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대가를 치렀다. 1789년 일어난 프랑스 혁명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하는 주장까지 존재한다.

 

South Sea 버블

 

세계에서 발권력을 가진 중앙은행의 시초인 영란은행(the Bank of England)이 창립된 것은 1694년이다. 영란은행의 창립은 1688년에 일어난 명예혁명이라는 정치적인 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영국 왕실의 부채와도 연관이 있다. 당시 영국은 윌리엄 3(William III, 16501702)와 메리 2(Mary II, 16621694)의 공동 치세였다. 윌리엄 3세는 네덜란드의 지배자였다. 그의 왕비는 영국 제임스 2(James II, 1633-1701)의 딸 메리였다. 제임스 2세는 의회와의 충돌과 가톨릭이라는 종교적 배경 때문에 명예혁명에 의해 물러나고 영국 성공회의 전통 아래 자란 그의 딸 메리 2세와 그녀의 남편인 윌리엄 3세가 영국의 공동 통치자로 등극하였던 것이다.

 

사족이지만 미국의 대학 가운데 윌리엄 앤드 메리(the College of William and Mary)가 있다. 1693년에 이들의 서한(letter patent)에 따라 설립된 곳이다. 미국의 대통령 가운데 제퍼슨(Thomas Jefferson, 17431826, 3), 먼로(James Monroe, 17581831, 5), 타일러(John Tyler, 17901862, 10)가 이 대학 출신이었다.

 

윌리엄 3세는 네덜란드의 통치자를 겸하고 있었는데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침공하여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소위 9년 전쟁(Nine Years' War, 16881697)이다. 물론 제임스 2세와의 전쟁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국가부채가 쌓였다. 설립의 전적인 목적은 아니었지만 그와 같은 국가부채를 해결하기 위해 스코틀랜드의 은행가인 패터슨(William Paterson, 1658-1719)의 제안으로 의회의 허가를 받아 설립된 것이 영란은행이다. 처음 영란은행은 정부의 금융 업무를 대행하고 발권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유한책임을 지는 주식회사였다.

 

결국 중앙은행의 역사도 국가부채와 함께 한 것이었다. 국가부채와 관련하여 역사적으로 영국에서 유명한 사건은 'South Sea' 거품이다. 프랑스의 미시시피 거품보다는 1년 정도 늦게 시작되어 유사한 거품붕괴의 과정을 걷는다. 그리고 국가부채, 주식시장과 연관된 점도 미시시피 버블과 판박이이다. 공식적으로는 1801년 설립되지만 비공식적으로는 런던에 주식거래소가 등장한 것은 영란은행이 설립된 시기와 일치한다. 그리고 많은 주식회사들이 그때부터 등장하였다. 1700년이 되면 100개 이상의 주식회사가 존재하였고 그 이후 더욱 많이 등장한다.

 

영국에서 South Sea Company가 설립된 것은 1711년이다. 알려진 목적은 남태평양과 아시아를 잇는, 신대륙의 은과 동양의 비단 무역을 통해 막대한 이득을 얻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비단은 세계에서 가장 비싸고 인기 있는 섬유였고, 은은 비단이 생산되는 동양에서 특별히 선호되는 귀금속이었다. 그러나 밖으로 드러나지 않은 South Sea Company의 설립목적은 정부부채를 지분과 스왑하는 것이었다. 당시 영국 정부부채는 영란은행, 동인도회사가 다량 소유하고 있었고, 나머지는 시장에서 유통되고 있었다. 그 나머지를 매입하는 것이 회사설립의 목적이었다.

 

1720South Sea Company는 시중에 남아있는 정부부채 £31,490,890를 추가적으로 매입하기 위해 추가로 주식을 발행하였다. 그리고 소문과 프로모션을 통해 액면 £100의 주식이 같은 해 1월에 £120에 거래되기 시작하더니, 6월에는 £1,000까지 상승하였다. 이때도 역시 정부채권을 회사주식과 교환하여 주었다. 주식가격을 시장가격으로 계산하기는 하였지만. 주식가격을 끌어올린 것은 적은 주식으로 많은 정부채권을 매입하기 위한 일종의 사기였던 것이다. 투기가 심화되면서 90%의 빚을 내서 하는 투자가 횡행하였다. 이 틈을 타 190개 이상의 소위 거품회사(Bubble Company)’가 설립되어 투기의 광풍에 부채질을 하였다.

 

이와 같은 거품회사의 등장은 South Sea Company의 경영진의 분노를 샀다. 시장의 많지 않은 자금을 놓고 경쟁하는 것이 마땅치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의회를 움직여 그해 4거품법(Bubble Act of April 1720)’을 제정하도록 한다. 그리고 법은 6월부터 효력을 갖게 되었다. South Sea 버블은 그해 8월부터 붕괴하기 시작하여 12월이 되면 완전히 붕괴되어 버블 이전 수준으로 복귀한다. 이에 놀란 영국 의회는 거품범의 해석을 엄격히 하여 전적으로 공공목적이 아닌 경우 주식회사의 설립을 허가하지 않았다.

 

당시는 산업혁명이 발아하던 시기였고 1750년이 되면 본격적으로 그에 진입한다. 그러나 주식회사의 형태로 자금을 모으는 것은 사실상 봉쇄되어 있었다. 버블법이 폐지되는 것은 1세기 이후인 1825년이다. 그 사이 산업자금의 금융은 오히려 보험회사 등을 통해서였다. 아마도 버블이 아니었다면 주식시장이 산업혁명에서 주된 역할을 하였을 것이고 그 양상도 훨씬 활발하였을 것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평가이다. 국가부채로 시작된 위기가 역사의 진행방향을 꽈배기처럼 꼬아 놓은 것이다.

 

국가부채와 스페인의 쇄락

 

앞에서도 여러 번 언급한 바 있지만 유럽의 역사를 읽다보면 왕가 사이의 빈번한 혼인에 놀라게 된다. 그리고 나라가 왕의 사유물처럼 상속되었다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된다. 왕이 서거하였을 때 국가가 다른 나라의 군주 혹은 누군가에게 상속되기도 하고 다른 나라를 상속받기도 하였다. 때로는 이와 같은 상속에 의하여 대제국이 탄생하기도 하였다.

 

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와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Charles V, 1500-1558)는 동일 인물로 그가 상속받은 나라가 그랬다. 상속받은 나라가 다르니 왕명도 나라에 따라 달리 불렸던 것이다. 1519년이 되면 상속에 의하여 그는 스페인, 네덜란드, 부르고뉴, 독일,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헝가리와 이태리의 일부를 차례로 거느리게 된다. 그와 더불어 콜럼버스가 1492년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적극적으로 신대륙의 정복에 나선 것이 스페인이었다. 코르테스와 피사로로 하여금 마야와 잉카를 정복하도록 허락한 것도 그였으며 마젤란의 세계일주항해가 이루어진 것도 그의 치세에서다. ‘태양이지지 않는 제국이라고 하면 영국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그 원조는 스페인이었다.

 

16세기 신대륙에서 막대한 금과 은이 유럽으로 유입되었다. 신대륙에서 유럽으로 유입되는 귀금속은 스페인의 세비야로 집중되도록 되어있었다. 세비야에 금과 은의 무역을 관리하는 무역거래소(Casa de la Contratación)가 있었다. 이를 통해 신대륙에서 유입된 금과 은은 유럽의 각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신대륙의 귀금속은 한 세기 가까이 유럽의 물가를 상승시키고 그것이 자본주의의 근본이 되는 자본 축적의 중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다.

 

카를로스 1세가 다스리는 영역은 불란서를 에워싸고 있었다.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다. 당시 유럽은 만만치 않은 세력가들이 다스리고 있었다. 카를로스 1세를 비롯하여 지금도 불란서 사람들이 가장 사랑하는 왕이라는 르네상스 시대의 계몽군주 프랑수와 1, 영국을 로마 가톨릭의 지배로부터 독립시킨 헨리 8세 등 서로 잘 지내기가 쉽지 않은 절대군주들의 치세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런저런 이유로 전쟁도 끊이지 않았다. 신흥 이슬람 세력인 오토만 제국과도 전쟁이 없을 수가 없었다.

 

1556년 스페인, 네덜란드 등은 아들 펠리페 2세에게,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보헤미아 등 신성로마제국은 동생 페르디난드 1세에게 제국을 분할하여 양위하고 카를로스 1세는 스페인의 한 수도원에서 여생을 마친다.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마찬가지로 그가 아들에게 물려준 것은 양분된 제국만이 아니었다. 막대한 국가부채와 재정적자도 함께 물려주었다.

 

펠리페 2, 그 자신도 만만찮은 호사가였다. 특히 가톨릭교회의 수호자로서 루터 이후 크게 일어서고 있던 신흥 개혁종교에 대하여 적대적이었다. 개신교 세력의 핵심이었던 네덜란드에 대한 탄압으로 독립전쟁이 촉발되었고 그것이 길고 긴 80년 전쟁이다. 개신교 국가인 영국을 쳐부수겠다고 보낸 무적함대가 참패를 당한 것도 그의 치세이다. 펠리페 2세는 1557, 1560, 1569, 15751596년 국가파산을 선언하였다. 당시에는 왕이 파산한다고 채권자들이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그 이후 스페인은 60여 년 동안 여섯 번 더 국가파산을 선언한다. 그리고 다시는 카를로스 1세나 펠리페 2세 시대의 국가적 위세를 회복하지 못한다.

 

결언

 

지금까지 역사에서 국가부채와 관련된 몇 사례를 살펴보았다. 특히 유럽의 강국 스페인이 몰락하는 과정을 보면 국정이라는 것이 쓸모없는 이념과 감정에 휩쓸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우리는 언제나 역사 한가운데 있다. 지금의 잘못을 바로잡기에는 이미 늦게 되는 시간이 온다. 그래서 두려운 것이다. 지금 코로나와의 전쟁 중이다

그러나 빚을 내서 전쟁을 치르는 후과를 어찌할 것인가. 지금 집권세력은 정신을 못 차리고 나랏돈을 쓰는데 몰두하고 있다. 재정은 잘 사용하지 않으면 화염이 되어 되돌아온다는 것을 역사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화염은 지금의 집권세력뿐만 아니라 나라 모두를 태운다.     <ifsPO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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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0년07월05일 17시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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