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흥망의 교훈 #19 : 거대한 기마제국 북위(F)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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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27> 탁발규 시해(AD409)
자신의 건강에 대해 우려가 되었던 탁발규는 장자인 제왕 탁발사를 태자로 삼으려했다. 북위에는 태자로 책립하기 전에 먼저 태자의 생모를 죽이는 풍습이 있었으므로 탁발사의 생모 유귀인에게 죽음을 내린 뒤 아들에게 그런 풍습이 생긴 이유를 잘 설명했다. 그러나 효성심 깊었던 태자 탁발사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매일 밤마다 통곡하며 울부짖었다. 탁발규가 화를 내며 책망하면서 탁발사를 소환했다. 탁발사의 측근들은 탁발규의 정신건강이 정상이 아니므로 아들을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그를 도망가도록 하여 비밀장소에 숨겼다. 낮에는 산에 숨고 밤에는 측근 왕낙아의 집에서 잠을 잤다.
탁발규는 자신을 낳아준 생모 하태후의 이복여동생의 미모에 반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어머니에게 그 사실을 말하면서 이모뻘인 그 여자 하씨를 얻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하태후는 허락하지 않았다.
“ 안되오.
아름다움이 지나치면 반드시 착하지 못함이 있소,
또 그 여자에게는 이미 남편이 있소.“
탁발규는 몰래 사람을 보내 남편을 죽이고 그 여자를 받아들여 아이를 낳았는데 이 사람이 탁발소다. 탁발소는 성격이 흉폭하고 사나웠으며 놀기를 좋아하고 아주 무뢰하고 난폭하고 무자비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을 겁탈하는 것을 즐기며 괴롭혔다. 탁발규가 그를 불러 우물에 거의 죽을 때까지 거꾸로 매달며 훈육했다. 큰 형인 탁발사가 그런 동생을 가엽게 여겨 책망하기도 하고 타이르기도 하였으나 탁발소는 형을 원망하고 이를 악물었다. 탁발규가 죄를 지은 탁발소의 생모 하부인을 견책하려고 가두었고 장차 죽일 생각이었으나 감히 결행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하부인이 아들에게 몰래 사람을 보내 이렇게 물었다.
“ 네가 나를 어떻게 해서라도 구해야 할 것 아니냐?”
탁발규의 잔인함을 잘 알고 있던 궁궐 내부에서 섣불리 탁발소를 도와주려고 나설 사람은 없었다. 당시 16세 탁발소는 자기의 침전 시종 환관 몇 명과 함께 궁궐 천안전의 담을 타넘고 들어가 탁발규를 죽였다.(AD409.10.13) 그 때 탁발규의 나이는 39세였다. 시호는 북위 태조 도무제다. 다음날 탁발소는 아버지의 시해를 알리지 않고 백관을 불러 물었다.
“ 내게는 숙부도 있고 형님도 있는데
여러 공경들은 누구를 따르시겠소? “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아무도 나서서 말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한참 뒤에 장손숭이 나서서 말했다.
“ 왕(청하왕 탁발소)을 따르겠습니다. ”
그제서야 탁발소가 탁발규의 시해 당했음을 알려주어 대신들이 알게 되었지만 누구도 소리 내 슬퍼할 수가 없었다. 오직 탁발렬만이 소리내어 통곡을 했다. 이때부터 궁중에서는 탁발소에 대한 반발은 지방에서부터 일어났다. 특히 탁발규를 보호하고 지원해 줬던 하란부 군사들이 수도로 진격해 왔다. 탁발소는 창고를 풀어 대대적으로 곡식과 비단으로 환심을 사려고 했다. 최굉만 받지 않았다.
숨어있던 제왕 탁발사가 이 소식을 듣고 몰래 왕낙아의 집에 숨어 들어왔다. 주민들이 그 소식을 듣고 필요한 물자를 제공했고 자원자들도 몰려들었다. 탁발소가 그 정보를 듣고는 자객을 보냈지만 자객 또한 탁발소에게 등을 돌리고 말았다. 전국에서 지원병이 몰려들고 궁궐 내부에서조차 탁발소의 령이 서지 않았으니 탁발소가 무너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결국 탁발소의 시위군사가 탁발소를 붙잡아 탁발사에게 송환했다. 탁발사는 탁발소와 그 어미 하씨, 그리고 시해에 참여한 환관과 시녀 10여명을 모조리 처형했다. 그 다음날 탁발사가 황제에 올랐다.(AD409.10.17) 열일곱 살 나이였다.
<28> 탁발사의 인재 등용(AD409)
황제에 오른 탁발사가 맨 먼저 한 일은 쫓겨났거나 숨어있는 인재를 등용하는 일이었다. 장손숭, 안동, 해근, 최굉, 탁발굴 등 여덟 명(이를 팔공, 八公이라 함)을 최측근에 배치했다. 공신 왕낙아와 치로두를 산시상시로 삼고 숙손준을 위장군(황궁호위)으로 명했다. 탁발사가 대신들에게 선제 탁발규가 아끼고 신뢰한 신하가 누구냐고 묻자 모두들 이선이라고 대답했다. 탁발사가 이선을 불러 물었다.
“ 경은 무슨 재주와 공로가 있어서
돌아가신 선제께서 믿으셨소?“
이선이 이렇게 대답했다.
“ 신은 재주도 없고 공로도 없습니다.
다만 충성과 곧음으로 선제께 알려졌을 뿐입니다.
(臣不才无功,但以忠直为先帝所知耳)“
탁발사는 이선에게 안동장군을 명하고 항상 궐내에 유숙하면서 자문에 임하도록 했다.
<29> 선(先)사면 후(後)징벌
당시 지방의 토호들은 가혹한 정치를 일삼았으므로 백성들의 큰 원성을 사고 있었다. 지나친 혹정에 반발한 주민들은 산적이 되어 지방 토호들과 대치하는 상황이었다. 탁발사로써는 산적과 민란을 발생시킨 지방 토호들을 심하게 징계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우대하며 상을 내려 달랠 수도 없었다. 탁발사는 팔공(八公)을 불러 이 문제를 의논하면서 말했다.
“ 짐이 산적문제로 골머리가 아픈데
그 죄는 산적에게도 있고 또 토호들에게도 있소.
지금 이미 죄를 지은 사람들의 숫자가 너무 많아져서
모두 죽일 수는 없는 지경이니
사면령을 내려 일단 죄를 한 번에 다 씻어 주는 게 어떻겠소?“
탁발굴이 반대했다.
“ 백성들이 죄다 도적이 되어도 징벌하지 않고 사면한다면
이는 윗사람이 아랫사람들에 구걸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먼저 징벌하시고
사면은 나중에 고려하심이 옳습니다.“
최굉이 그렇지 않다고 했다.
“ 성스런 황제께서 다스리심의 근본은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일이 최우선 입니다.
그들과 더불어 이기고 지는 것을 논하는 것은 생각할 것이 없습니다.
탁발굴은 선 징벌, 후 사면이라고는 하지만 둘 다 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면한다고 어찌 모두 평정이 되겠습니까?
반드시 반성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먼저 사면하시고 말을 듣지 않는 경우에 징벌하심이 옳겠습니다.“
탁발사는 최굉의 말을 채택했다.(AD410)
<30> 북진하는 동진(東晋)
대동에 도읍한 북위가 비교적 평온한 세월 보내는 AD410년대 후반기에 후진이 장악하고 있는 관중하서지역과 동진의 강남 지역은 각각 격변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먼저 후진의 경우에는 탁월한 지도자 요흥이 AD417년 죽으면서 조정이 내분에 휩싸였고 동진에서는 조정의 실권을 잡은 유유가 장강을 넘어 회수와 사수를 넘어 한수이북으로 후진을 압박하려던 상황이었다.
북위의 탁발사는 AD415년 후진 요흥의 딸을 황후로 맞이하였으므로 서로 혼인지간의 국가였다. 동진으로써는 후진 공격시 그런 북위의 배후 공격 가능성에 항상 신경이 쓰였다. 유유는 탁발사에게 잠시 길을 빌려 달라고 요청했다.(AD417) 후진도 동진의 공격에 대하여 북위에게 도움을 요청해 왔다. 탁발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난처했다.
탁발사는 여러 대신들을 모아 놓고 이 문제를 의논했다. 대부분의 의견은 길을 빌려 주면 안 된다는 의견이었다.
첫째, 동관은 매우 험조한 요충지이고 수군에 약한 동진군이 황하를 거슬러 올라가 봤자 승산이 매우 낮은데다가
둘째, 유유의 진심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며
셋째, 후진과는 혼인한 나라라는 것이 반대의 주된 이유였다.
명신 최굉의 아들 최호의 생각은 달랐다. 유유의 진심은 진실로 안으로 혼란한 후진을 노리는 것이지 다른 생각은 없으며 만약 북위가 허락지 않으면 먼저 우리를 공격하려 들 것이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길을 터주어 후진을 공격하게 한 뒤 그들의 후미를 틀어막아 버리면 그것이 상책이라는 말이었다. 유유가 이기면 그에게는 빚을 지게 하는 것이고 유유가 지면 우리가 후진을 도왔다는 명분이 생기는 일이라는 말이다. 한 여자(황후 요씨)의 혼인관계에 매여 큰일을 그르치는 일은 군자가 할 일이 아니라고 책망하였다. 탁발사는 대신들의 말과 최호의 말을 절충하는 안을 내었다. 동진 유유에게 길을 허락하되 장손숭 등에게 군사 10만을 주어 황하 북안에서 유유군사를 방어하도록 조치했다.
<31> 탁발사와 최호의 문답(AD417)
탁발사는 최호에게 물었다.
” 유유가 요홍을 이기겠는가?
최호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 이깁니다.”
탁발사가 왜 그렇다고 보는지 물었다. 최호가 대답했다.
“ 요흥이 헛된 명성을 좇았으니 실제 쓰임이 적었고
요홍은 병이 많고 나약한데다가
그 형제간에 다툼이 심합니다.
유유는 그 틈을 탔고
그의 장수와 병사는 날카롭고 용감하니
어찌 이기지 못하겠습니까?”
탁발사가 다시 물었다.
“ 그렇다면 유유와 모용수(후연의 창업자)를 비교하면 어떤가?”
최호가 대답했다.
“ 유유가 낫습니다.
모용수는 아버지(전연 창업자 모용황)와 형제의 밑천을 빌어서
예전의 대업을 성공시킨 것입니다.
반면에 유유는 가난하고 미천한 집에서 태어나
벼슬이나 한 치의 땅도 없이 시작하여
환현을 토벌하고
동진을 튼튼히 세웠으니
재능이 보통사람을 넘지 않고서야 어찌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탁발사가 물었다.
“ 유유가 이미 함곡관을 넘어 들어서고 있는데
만약 우리가 그 배후를 공격하고자
팽성과 수춘을 공격하면 어떻겠는가?”
최호가 대답했다.
“ 우리 서쪽에 누가 있습니까? 혁련발발이 있지 않습니까?
북쪽에는 유연이 우리를 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훌륭한 장수가 없습니다.
장손숭은 유유의 적수가 되지 못합니다.
유유가 후진을 이기면 반드시 동진을 찬탈할 것입니다.
관중지역은 화족과 융족이 복잡하게 섞여 있으므로
억세고 사나워서 유유라 할지라도 쉽게 통치하지 못합니다.
마치 옷을 벗고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이나
그물을 벗겨놓고 호랑이를 잡는 격입니다.
병사를 후진 땅에 남겨두고 떠날 것이 확실합니다.
주민들의 원망이 하늘에 치닫고 혼란에 빠질 것은 분명하니
지금은 백성과 군사를 쉬게 했다가
그 때를 노리면 앉아서 후진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탁발사는 감탄해 마지않았다.
“ 헤아림이 상세하고 깊구려.”
최호가 말했다.
“ 왕맹(전진 부견의 충신참모)은 부견에게 관중이며
모용각은 모용위의 곽광이고
유유는 사마덕종의 조조입니다.”
최호는 유유가 동진 정권을 탈취할 것을 읽고 있었다. 탁발사가 다시 물었다.
“ 굴개는 어떤가?”
최호가 대답했다.
“ 소인배에 불과합니다.
한 때 제멋대로 사나울 수는 있으나
마침내 다른 사람에게 먹힐 것입니다.”
탁발사는 감사의 뜻으로 최호에게 비단과 술과 수정염 한 냥을 하사하였다.
“ 경의 말이 이 소금과 술맛과 같으니
같이 향유하고자 내리는 선물이오.”
탁발사는 몰래 장손숭과 숙손건에 명령하여 군사를 보내 동진 땅인 팽성(강소성 서주)과 패군(안휘성 회북)을 공략하도록 지시했다.
유유군사는 항하를 타고 거슬러 올라가 장안을 함락시켰다.(AD409년 8월) 요흥의 아들 요홍은 왕진악에게 잡혀 건강으로 붙들려 온 뒤 참수되었다. 후진이 멸망한 것이다. 2년 뒤 유유는 동진을 해체시키고 선양받아 송(역사상 유송劉宋이라는 나라)을 세운 뒤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AD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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