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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이냐 분열이냐,국가흥망의 교훈 #19 : 거대한 기마제국 북위(C)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07월10일 17시05분
  • 최종수정 2020년07월02일 16시01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4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10> 북위의 후연 정벌 : 병주 장악 (AD396년 9월)

 

후연의 북벌군이 내부 사정으로 퇴각하자 북위 탁발규의 신하들은 존호를 사용하기를 권고하고 나섰다. 그리고 후연 조정이 혼란한 틈을 타서 서둘러 남쪽(후연)을 정벌하자고 졸랐다. 탁발규도 그렇다고 생각하고 보,기병 40만을 모아서 마읍(산서성 삭주)을 나와 남쪽으로 향했다. 깃발을 든 사람이 2천 여리에 걸쳐있다고 했을 정도로 대군이었다. 대군의 최선봉에는 좌장군 이율이 5만 기병을 이끌고 나아갔고 장군 봉진은 동도로 군도(북경 창평현)를 나와 후연의 유주(북경지역)를 습격하였다      

 

9월 18일 북위의 군대가 양곡(산서성 양곡)에 도달했고 이어서 남쪽 진양(태원)까지 진출했다. 요서왕 모용농이 나와 싸웠으나 크게 패하였다. 모용농이 패전군을 이끌고 진양으로 돌아왔으나 사마 모여숭이 문을 닫고 열어주지 않았다. 모용농은 동쪽으로 퇴각하여 도주의길에 올랐다. 모용농의 처자들은 쫓아오다가 모두 북위군사들에게 잡혔다. 모용농도 부상을 당한 채 기병 세 명과 함께 겨우 중산으로 도망 나왔다. 이로써 후연의 병주는 완전히 북위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11> 후연의 북위침략 대책회의(AD396)

 

북위군이 남쪽으로 쳐들어오자 다급해진 후연 주군 모용보는 막료들을 모아 대책회의에 들어갔다. 중산윤 부모는 이렇게 말했다.

 

 “ 지금 북위의 군마는 너무 많고 강합니다.

   천리까지 달려와서 싸우는데다

   승리의 기세를 타고 있으니 날카로워 대적하기 어렵습니다.

   험난한 곳을 막아 방어하는 것이 최선책일 것입니다.“

 

 

 

중서령 휴수는 이렇게 말했다.

 

  “ 저들은 기병 위주입니다.

    그러니 천호 당 1보로 삼아서

    도랑을 깊게 파고 들판을 쓸어버려 군마가 먹을 것이 없게하면

    60일 이내에 돌아갈 것입니다.“

 

상서 봉의는 이렇게 말했다.

 

  “ 지금 북위 군사는 수십만 대군으로 천하의 강적입니다.

    백성들이 보루를 쌓는다고 해봐야 수비가 안 됩니다.

    저들에게 곡식과 병사를 보태는 꼴이 되고 맙니다.

    차라리 험난한 요새를 틀어막고 방어에 몰두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조왕 모용린은 이런 계책을 내 놓았다.

 

  “ 북위는 승기를 타고 있어서 날카롭기 그지없습니다.

    당연히 중산을 완벽하게 지켜서 그들이 피폐하기를 기다렸다가

    그 기회를 타는 것이 좋습니다.“ 

 

모용보는 모용린의 전략을 택했다. 중산성을 다시 수리하고 식량을 쌓아서 장기전을 대비했다. 요서왕 모용농에게 명하여 나가서 안희(하북성 정주시 동쪽 15KM)에 주둔하도록 하여 중산의 배후를 튼튼하게 하였다.

   

 

<12> 북위의 동진정책과 쫒기는 후연(AD396)

 

탁발규가 우율제와 공손란에게 보기병 2만 군사를 주어 옛 날 전한 시절 한신이 조나라를 공략할 때 갔던 그 길로 후연의 중산을 공격했다. 그 길은 태행산맥의 끝자락 정형(하북성 정형)을 너머서 석가장에서 남쪽으로 꺾어서 업(한단)으로 바로 들어가는 길이다. 후연은 중산으로 접근하는 길을 막기보다는 중산을 지키기로 했으니 방어가 허술할 수밖에 없었다.  탁발규가 상산(하북성 정정)을 접수한 뒤 주변의 후연 도읍들은 도망가거나 항복하거나 하는 바람에 후연의 성읍은 중산, 업 및 신도(하북성 冀현) 세 성 밖에 없게 되었다.   

 

11월 탁발규는 탁발의에게 명령하여 5만 군사로 업을 공격하도록 했고 왕건과 이율에게는 그 남쪽 신도를 공격하도록 했다. 탁발규와 주력 부대는 중산성을 공격했는데 고양왕 모용륭이 외성곽을 훌륭히 방어하는 데 성공했다. 탁발규가 중산의 수비가 견고한 것을 깨닫고  이렇게 말했다.

 

  “ 중산성은 견고하므로 모용보가 나와 싸우려 하지 않을 것이다.

    급하게 공격하면 병사들이 많이 다칠 것이고

    오래 포위하면 식량을 소비할 것이다.

    먼저 업과 신도를 빼앗은 다음에 중산을 도모하자.“

 

탁발규는 군사를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갔다. 장무공 모용주는 북위가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쏜살같이 용성에서 계로 돌아와 양성왕 모용란과 함께 용성을 굳게 지켰다. 

 

탁발규는 노구에서 진을 쳤다. 그 주변 박릉태수 신영은 하남(낙양)으로 도망가고 고양(박야)태수 최굉은 바닷가로 도망갔다. 탁발규는 평소 최굉의 이름을 듣고 있었으므로 추격하여 붙잡아 황문시랑으로 삼고 또한 장곤과 함께 국가 중대업무를 맡겼다. 업성을 지키고 있던 후연 범양왕 모용덕이 모용청 등을 시켜서 업성을 나가 북위군을 습격하도록 하니 북위군이 위세에 밀려 신성(하북 비향)으로 퇴각하여 주둔했다. 승리에 도취된 모용청이 북위를 추격하고자 하자 별가 한탁이 이렇게 말렸다.

 

  “ 옛 사람들은 먼저 계획한 다음에 싸웠습니다.

    북위군에게는 추격할 수 없는 네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가, 현군과 멀리서 원정 온 군대는 들판에서 싸우기를 좋아하는 것이고 

   둘째가 쫓아가다보면 군대가 몰려 있게 되어 반격에 취약한 것이고, 

   셋째가, 선봉이 패배하면 후봉은 매우 예리하게 갖추는 것이라 어렵고,

   넷째가, 저들의 수는 많고 우리 숫자는 매우 적습니다.

   관군이 의당 움직이면 안 되는 이유가 셋입니다.

   스스로 걸어 들어가서 적의 지역에서 싸우는 것이 첫째요,

   움직였다가 뜻대로 되지 못하면 군사들의 사기가 땅에 떨어지는 것이 둘째요,

   우리 성과해자가 아직 충분히 수리되지 못했으니  

   나아가서 싸울 겨를이 없는 것이 셋 째 이유입니다.“ 

 

모용덕이 한탁의 말을 기특이 여기고 그대로 좇았다. 12월에 하눌의 동생 하뢰노가 2만 기병을 끌고 와서 탁발의와 함께 모용덕이 지키고 있는 업을 공격했다. 하뢰노는 하눌처럼 탁발규의 외삼촌이다. 다급해진 모용덕은 후진 요흥에게 구원을 요청했지만 응하지 않았다.

 

 

<13> 후연 모용덕의 북위 정건과의 내통(AD397)

 

하뢰노는 탁발규의 외숙이니 탁발규의 사촌동생 동평공 탁발의 따위의 명령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둘 사이에는 치명적인 갈등이 생겨났다. 탁발의의 사마 정건이라는 사람이 은밀히 모용덕과 내통하고 있었는데 모용덕과 함께 모용의와 하뢰노의 이간질을 계획했다.

 

정월 6일 바람이 많이 불고 흙비가 내리는 날 낮이 캄캄해지고 어두워졌을 때 하뢰노 군영에서 불이 났다. 정건이 탁발의에게 발했다.

 

  “ 하뢰노가 불을 일부러 지른 것은 무언가 변고가 있다는 것입니다.”

 

탁발의도 그렇게 여기고 군사를 모아 물러나기로 했다. 하뢰노도 탁발의가 군사를 되돌렸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뒤로 물렸다. 그 사이에 정건은 휘하 군사를 이끌고 모용덕에게로 가서 항복하고 말았다. 정건이 탁발의의 군대가 노쇠하여 전투력이 약하다고 말하므로 모용덕은 군사를 이끌고 탁발의를 쫓아가 섬멸해버리고 말았다.

 

모용덕이 업 주변에서 승전하는 동안에 모용보는 모여등을 보내 빼앗긴 박릉을 탈환하고 지키고 있던 왕건을 잡아 죽였다. 북위가 60여 일 동안 신도를 공격했지만 쓰러뜨릴 수 가 없었고 탁발규가 몸소 대군을 몰고 오자 지키고 있던 의도왕 모용봉이 성을 타넘고 내려가 중산으로 도망가 버렸다. 25일 신도는 함락되어 북위에게로 떨어졌다.

 

 

<14> 후연-북위의 호타하 전투(AD397년 2월)

 

신도가 북위에게로 떨어지자 후연 주군 모용보는 심택(하북성 심택)에 주둔하며 조왕 모용린을 양성(하북성 순평)으로 보내 함락시켰다. 신도를 함락시킨 탁발규는 2월 초하루 군대를 북으로 몰아서 양성 주변에 주둔했다. 북위의 병주 감군이자 몰근의 조카인 추제는 삼촌 몰근이 후연으로 도망간 것(AD396년 12월)이 화가 될까 두려워 본국으로 돌아와 반란을 일으켰다. 탁발규는 추제의 반란도 걱정되기도 하고 또 쉽게 업이나 중산이 함락되지 않자 회군을 할 생각으로 후연에게 재상 탁발섭연을 보내 화해를 청하면서 동생을 인질로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모용보는 북위 내부에 혼란이 있다는 정보를 접하고는 탁발규의 요청을 거절했다. 가지고 있던 전군, 즉 보졸 12만 명과 기병 3만 7천을 모두 발동하여 곡양으로 모아 호타하 북쪽에 진을 쳤다. 탁발규는 호타하 남쪽에 진을 쳤다. 모용보의 군사 1만여 명이 밤을 타고 몰래 호타하를 건너 바람을 이용해 북위군영에 불을 지르고 습격하도록 했다. 놀라서 도망가는 탁발규의 옷과 신발을 습득하였고 북위진영은 큰 혼란에 빠져 들었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후연 군사들 가운데 놀라는 혼돈이 일어나면서 서로 도끼나 활로 공격하는 일이 벌어졌다(募兵无故自惊,互相斫射). 이 틈을 이용하여 탁발규가 군사들을 추슬러 반격에 나서 혼란을 잘 수습할 수 있었다. 다음 날 탁발규의 대군은 강을 건너 후연을 공격했다. 모용보의 대군은 서둘러 중산으로 퇴각하려 했으나 쫓아오는 북위군에게 거의 전멸 당하였다. 모용보는 겨우 2만 기병을 데리고 퇴각하면서 북위군에게 붙잡히지 않기 위하여 모든 무기와 갑옷 수십만 점을 버리도록 명령하고 단검조차 소지하지 못하도록 하고서 도망갔다. 후연의 사졸은 물론 많은 신하들이 북위에 항복하거나 포로로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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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모여호의 반란 시도와 모용린의 반란시도(AD397)

 

북위에게 참패하여 중산으로 황급히 모용보가 돌아 온 다음날 밤 후연의 상서랑 모여호가 무능하게 패전한 모용보를 시해하고 그의 동생 조왕 모용린을 세우는 모의하다가 실패하여 북위로 도망가는 일이 발생했다. 모용린은 이 일에 직접 간여하지는 않았지만 몹시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AD397년2월)  

 

모용보의 뒤를 바짝 쫓아온 탁발규는 본국에서 여러 소란한 일들이 발생했지만 돌아가지 않고 곧바로 중산을 포위해 버렸다. 중산이 북위에게 포위된 지 다섯 달이 되어가자 장수와 무사들은 차라리 나가서 결전을 벌이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정북대장군 모용륭이 모용보에게 말했다.

 

  “ 북위군이 오랫동안 전쟁터에 나아와 

    많이 죽기도 하고 부상도 많이 당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고향을 생각하며 빨리 돌아가기를 원할 것입니다,

    그리고 내부에도 여러 크고 작은 반란들이 있어서

    지금이야말로 저들을 깨뜨릴 절호의기회가 아니겠습니까.

    이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서둘러 저들을 공격하자는 전의로 불타있습니다.

    이 날카로움을 이용하면 이기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만약 계속해서 신중함만 지키시면서 결단을 내리지 않으시면

    사기는 날로 떨어질 것이고

    함께 곤궁과 결핍만 더해질 것이니 

    그 때에는 변란이 안에서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을 이용하고 싶어도 못 할 것입니다.“  

 

모용보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출병하려는 것을 모용린이 네 번이나 막으면서 반대했다. 궁지에 몰린 모용보는 마침내 탁발규에게 화해를 요청했다. 후연에 인질로 잡혀있는 동생 탁발고를 돌려보내고 또 상산(하북성 정정) 서쪽을 할양한다는 조건이었다. 탁발규는 얼른 조건을 받아들였다. 모용보는 얼마 있지 않아서 화해 요청을 후회하고 번복했다. 탁발규는 풀었던 포위를 다시 되돌렸다. 후연의 장수와 군사 수천 명이 모용보에게 간청했다.

 

 “ 지금 앉아서 궁색한 성을 지키다가는 곤핍하고 지쳐서

   저절로 쓰러지고 맙니다.

   저희들은 강력히 원하지만 폐하께서 

   지난 번 번번이 억누르시는 바람에 날로 피폐해지고 있습니다.

   오랑캐들은 결단코 스스로 물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한 번 결단을 내려주십시오.“     

 

마침내 모용보가 출병을 허락하였다. 모용륭이 물러 나와서 보좌관을 불러 회의를 열었다.

 

  “ 황상이 위엄이 떨치지 못하고

    오랑캐들이 안으로 업신여기고 있으니

    신하된 자로써 수치를 금할 길이 없소.

    의로움이란 살 것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라 했소.

    다행히 살아 돌아온다면 좋은 것이나 

    만약 죽는다 하더라도 신하의 절개와 뜻을 펼쳐 보이는 것이니

    나쁠 것이 없소.

    경들 중에 만약 북쪽(용성)에 계신 나의 어머니를 뵙거든

    나의 이런 마음을 꼭 전해주시오.“

 

모용륭이 갑옷을 입고 말에 올라타 출병 명령을 기다리는 와중에 모용린이 또다시 강력하게 반대하는 바람에 출병은 지체되었다. 대부분이 화를 내고 분개해 했는데 모용륭이 눈물을 흘리며 되돌아갔다.

 

그날 밤 모용린은 군사를 이끌고 북지왕 모용정을 위협하여 그의 휘하에 있는 금병을 거느리고 가서 모용보를 시해하도록 했다. 모용정과 금병들이 반발하자 모용린은 모용정을 죽이고는 성을 빠져나가 이민족 정령족들이 살고 있는 서산(태행산)으로 숨어들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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