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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써 모른체 하며 살고 있다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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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1년09월20일 17시10분

작성자

  • 김동률
  • 서강대학교 교수. 매체경영. 전 KDI 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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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정원의 꽃들로 느끼게 된다. 올해도 과꽃이 피었다. "꽃이 피면 꽃밭에서 아주 살았다"는 바로 그 꽃이다.  마당 한 구석에 피었다. 과꽃은 화려하지도, 향이 그리 뛰어나지도 않다. 아주 작고 소박하다. 그래도 한국 사람들은 과꽃을 좋아한다. 초등학교 때 배운 동요 <과꽃>이 한몫했다. 누나는 과꽃을 좋아했지만 시집간지 어언 삼년 소식도 없다는 노래말이 자못 애상적이다. 뭔지 모르지만 어린 나이에도 그 노래를 따라 부르면 마음이 짠해 왔다. 아마 기성세대는 대부분 고개를 끄떡일 것임이 틀림없겠다. 

 

과꽃이 핀 마당은 이제 가을꽃들로 찬란하다. 다알리아는 여전이 큰 키를 바람에 날리며 새빨간 꽃송이를 매달고 있고, 금잔화는 말 그대로 접시처럼 여기저기 피어 있다. 백장미가 딱 한송이 피어 "초추의 양광"에서 바람에 떨고 있다. 아마 올해 피는 마지막 장미꽃이리라. 무성하던 호박은 요며칠 서늘한 초가을 공기에 눈에 띠게 시든 모습이고, 노각(늙은 오이)이 담장에  힘겹게 매달려 있다. 도시 사람들에게 낯설은 부추꽃도 피었다. 꽃이라고 하기엔 너무 초라하다. 그래도 부추꽃이 피는 그 어느 곳에도 사람이 산다고 어느 시인이 그랬다. 

 

봄 여름 피는 화려한 꽃보다 가을에 피는 소박한 꽃들이 마음에 와 닿는다. 구절초, 쑥부쟁이, 산국, 감국들도 날씨가 서늘해지면서 저마다 조그만 꽃망울을 달고 있다. 조금 더 추워지면 그들도 꽃망울을 터뜨릴 것이다. 마당은 가히 꽃밭이다. 해마다 가을은 너무 빨리 왔고 우리들의 청춘은 속절없이 너무 빨리 떠나갔다. 애인하고도 안 바꾼다는 가을볕이 꽃밭에 가득하다.

 

꽃밭에 앉아 꽃잎을 본다. 고운 빛은 어디에서 왔을까. 동요 <꽃밭에서>가 생각난다. 태어나서 최초로 배운 노래였다. 하루 고작 세 번, 신작로에 먼지를 풀풀 날리며 시골버스가 다니던 시절, 마초 아버지를 하염없이 기다리던 어머니는 밤이 이슥해지면 취학전 어린 삼형제에게 하모니커를 불어 가며 이 노래를 가르쳤다.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 봉숭아도 한창입니다/ 아빠가 매어놓은 새끼줄 따라/ 나팔꽃도 어울리게 피었습니다/ 애들하고 재밌게 뛰어 놀다가/ 아빠 생각날 때는 꽃을 봅니다/ 아빠는 꽃보며 살자 그랬죠/ 날 보고 꽃같이 살자 그랬죠.’ 

 

노래가 끝날 때쯤이면 아랫목에 고이 모셔진 아버지 밥그릇의 온기를 발가락으로 느끼며 어린 생명들은 잠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하나의 거룩한 종교였던 것이다. 

 

동요 <꽃밭에서> 를 모르는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지금도 초등 음악교과서에 실려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노래가 전쟁에 나가 돌아올 기약조차 없는 아버지를 기다리는, 지독히 슬픈 노래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나도 어른이 되어서 비로소 알았다. 6.25전쟁중이던 1953년 발표됐고 전쟁통에 헤어진 아버지를 그리는 노래다. 예쁘게 핀 꽃과 꽃밭을 만든 자상한 아빠와 딸아이를 상상하던 사람들은 놀라게 된다. 가만히 불러보면 슬프고 애잔한 노래임을 서서히 눈치채게 된다. 

 

전쟁으로 인해 돌아오지 못한 아빠를 그리워 하고 있는 것을 상상하면 목이 메어 끝까지 부르기 어렵다. 6.25전쟁이 시작된 6월과 삼년의 전쟁 끝에 휴전이 된 7월, 모두 여름이다. 채송화도 봉숭아도 한창이고 나팔꽃도 어울리게 피는 계절이다. 동요, 그러나 전쟁의 비극, 슬픔을 형상화한 노래다. 

 

북한이 최근 이틀에 걸쳐 미국의 ‘토마호크’와 비슷한 신형 장거리순항미사일을 시험발사했다고 스스로 공표했다. 불행하게도 우리 군은 전혀 탐지하지 못했다고 한다. 앞서 3월 단거리탄도미사일인 ‘북한판 이스칸데르(KN-23)’ 개량형의 종말(최종 낙하) 단계를 놓친 데 이어 또다시 미사일 탐지에 실패하면서 대북 요격·방공망에 허점을 드러냈다는 비판이 나온다. “주변국을 위협하는 행위”라는 미국의 대북 경고성 입장 표명과 달리 우리 정부는 “오히려 대화가 필요하다”는 황당한 입장을 내놓았다. 귀를 의심할 만한 발표다. 

 

언젠부터인가 우리는 6.25전쟁을 도발한 북한공산정권에 대해 애써 모른체 하며 살고 있다. 4.3사태에 대한 일방적인 비판에서 보듯이 오히려 전쟁중에 발생한 국군과 미군의 잘못만 부각하는 황당한 시대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동요 <꽃밭에서>에서 아빠가 돌아오지 못한 것은 북한이 일으킨 남침이 원인이었다는 것을. 뽕나무밭이 푸른 바다가 되어도 변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사실 6.25는 미국에서도 오랫동안 잊혀진 전쟁(forgotten war)으로 불리며 외면당해 왔다. 2차대전과 베트남 전쟁 사이에 낀, 잊고 싶은 전쟁에 불과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얼마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랠프 퍼킷 주니어 예비역 대령에게 수여한 명예훈장도 6.25 당시 장진호 전투에서의 무공을 기린 것이다. 훈장수여 자리에는 방미중인 문대통령이 초대됐다. 외교가에서는 중공군과 맞선 자국의 6.25 참전장교의 훈장수여식에 문대통령을 예외적으로 초대한 것은 문정권의 지나친 친중 행보에 대한 일종의 경고라는 분석이 나왔다. 

 

불현듯 어릴 때 배운  6.25 관련 노래가 생각난다. “무찌르자 오랑캐 몇백만이냐? 대한 남아 가는데 초개로구나”란 노래다. 어린 시절, 여자 아이들이 고무줄 놀이할 때 많이 불렀던 ‘승리의 노래’다. 또 있다. “아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날을/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 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초등시절, 양철 확성기를 통해 학교 운동장에 곧잘 울려 퍼졌다. 청록파 시인 박두진 선생이 지은 노래말이다. 북한이 가공할만한 위력의 신형미사일을 최근 들어 하루가 멀다하고 시험 발사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애써 모른체 하며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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