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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혼군 #16-1 : 전한(前漢)의 창읍왕 유하(BC92-BC52) <E>​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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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1년09월10일 16시5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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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둘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

  

 <15> 마하라(马何罗)의 역모계획(BC89)

 

그해 여름 6월에 어사대부 상구성도 저주사건에 연루되자 자살을 택했다. 시중복야 마하라는 원래 강충과 매우 친하고 가까웠다. 위태자가 반란을 일으키자 마하라 동생 마하제는 힘껏 반란을 막아 그 공으로 중합후에 봉해졌다. 그 후 무제가 강충의 종족을 멸족시키자 그를 따르던 무리들과 마하라 형제들도 두려움을 느낀나머지 반란을 일으키기로 음모를 꾸미게 되었다.    

시중부마도위 김일제는 마하라의 심중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은밀히 그의 동정을 유심히 살펴보면서 같이 떨어짐 없이 가까이 움직였다. 마하라는 까다롭게 들러붙는 김일제 때문에 역모를 행동으로 옮길 수 가 없었다.    

 

당시 무제는 임광궁으로 행차했는데 김일제가 조금 몸이 불편하여 궁궐의 휴게소에서 쉬고 있었다. 마하라는 마통과 어린 동생 마안성을 데리고 야밤에 황제의 조서를 위조하여 군대를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다음날 아침 무제가 아직 일어나지 않았는데 별안간 마하라가 들어왔다.  

김일제는 이상한 느낌이 들어 화장실 가려다말고 들어와 문 아래에 앉아 있었다. 잠시 지나마하라가 소매에서 흰 칼을 빼 들고 동쪽 책상을 따라 들어오다가 김일제를 보고는 얼굴색이 변할 정도로 깜짝 놀랐다. 마하라는 무제의 침실을 향해 달려 들어가다가 큰 북을 건드리면서 넘어졌다. 김일제는 마하라를 껴안고서는 큰 소리로 외쳤다.

 

      ”마하라가 반역을 저질렀습니다.“   

 

낱낱이 수사한 끝에 가담하거나 연루된 모든 사람이 복주를 당하고 말았다. 

 

<16> 무제가 유불릉을 태자로 세우기 위해 그 어미 조씨를 죽이다.(BC88)

  

연왕 유단은 무제의 셋째 아들로 죽은 장남 유거와 일찍 죽은 차남 유굉의 아래 동생이어서 순서상 당연히 태자가 될 순서였기 때문에 스스로 궁으로 들어와 숙위를 서겠다는 청원서를 올렸다. 자기 딴에는 아버지를 직접 모시고 살피겠다는 생각이었지만 무제는 그 청원서를 보고 격노했다.청원서를 가지고 온 사신을 즉각 북궐에서 목을 잘랐다. 그리고 망명한 사람을 숨겨 주었다는 죄에 연루시켜 연국의 영토에서 세 현을 삭제시켰다. 이 일로 무제는 유단을 미워하기 시작했다.  

유단은 판단력이 뛰어났고 박학했으며 그 아우 광릉왕 유서와 함께 힘도 셌다. 그러나 모두 법을 지키지 않고 실수를 많이 범했으므로 무제가 세우지 않았다. 그때 구예부인 조씨(BC113-BC88)에게는 무제의 여섯 째 아들 다섯 살짜리 유불릉(BC94-BC74)이 있었는데 덩치가 크기도 하고 또 똑똑했으므로 59세의 늙은 무제로서는 손자처럼 귀엽게 여기면서 마음속으로 장차 자리를 물려주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다만 나이가 너무 어리고 그 어미 또한 스물 넷 정도였으므로 서로 같이 오래 지낼 것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어미가 황제 위에서 군림할 것이 걱정스러웠다. 여러 대신 중에서 보필할 사람을 살펴보니 봉거도위이자 광록대부인 곽광만이 충성스럽기가 두터원 큰 일을 맡길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황문을 시켜서 주나라 주공이 성왕을 모시고 제후를 접견하는 그림을 그리게 한 뒤 곽광에게 보냈다. 

 

며칠 뒤 무제는 구예부인 조씨를 이유도 없이 꾸짖고 감옥에 가두었다. 끌려가던 조구예가 뒤를 돌아보자 무제가 큰 소리로 말했다. 

 

      ” 빨리 가거라. 너는 살아남지 못하리라.“ 

 

결국 구예부인은 사약을 받고 죽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무제가 한가히 탁상위에 걸터 앉아서 좌우에게 물었다.

 

     ” 바깥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하더냐?“ 

 

좌우시종들이 말했다.

 

     ”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 아들을 세우면서 어미를 죽이는 이유가 뭔가?’ 라고 합니다.” 

 

무제가 말했다.

 

     “ 그럴 것이다. 

       옳고 그름은 조씨와 같은 어리고 어리석은 사람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옛날에 국가가 혼란했던 이유는 

       군주는 나이 어린데 어미는 장성해서 그런 것이었다.

       여자가 (사실상 군주가 되어) 홀로 교만하고 건방지게 굴면서

       음란하고 스스로 방자하게 된다면 막을 방법이 없다. 

       너희들은 여후(유비의 부인)가 저지른 짓을 모르느냐?

       그래서 할 수 없이 먼저 손을 본 것이다.”

 

 

<17> 유불릉을 황태자로 옹립한 무제가 곽광과 금일제와 상관걸에 유조를 내리다.(BC87)

 

무제의 병이 깊어졌다. 이 때 나이는 만 70세. 곽광이 눈물을 흘리면서 물었다.

 

     “ 꺼리는 일이 발생하면 누구를 마땅히 후사로 세워야 하겠습니까?”

 

무제가 말했다. 

 

    “ 군은 전에 내가 그림을 그려 깨우쳐 준 뜻을 파악하지 못하는가?

      어린 아들을 세우고 그대가 주공의 역할을 맡도록 하시오.” 

곽광은 머리를 숙여 사양하며 말했다.

 

     “ 소신은 금일제 보다 못합니다.”

 

금일제 또한 사양하며 말했다.

 

    “저는 외국인 주제에 곽장군보다 못합니다. 

     또 흉노들이 한나라를 가볍게 볼 우려가 있습니다.”

 

을축일에 무제는 유불위를 황태자로 올렸다. 여덟 살이었다.

병인일에 곽광을 군권의 최고책임자인 대사마 및 대장군으로 임명하고 금일제는 거기장군, 태복 상관걸은 좌장군으로 임명하고 이 세 사람에게 어린 태자를 보필하도록 유조를 내렸다.  그리고 수속도위 상홍양은 어사대부로 임명했는데 누워있는 황제 내전 침상 아래 무릎 꿇고 앉았다. 곽광은 황제를 20여년 보필하였지만 나깔 때에는 수레를 호위하고 들어 와서는 좌우에 입시하면서 항상 마음을 가다듬고 근신하였으므로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었다.   사람 됨됨이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꼼꼼이 챙겼으며 매번 드나들 때마다 대궐 문 앞에서는 말에 내려서 들어왔고 멈추고 나아가는 것이 항상 일정했는데 하급관리들이 몰래 훔쳐서 지켜보았지만 매번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했다.       

금일제는 무제의 좌우에 있는 십 수년 동안 전혀 건방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으며  무제가 궁녀를 하사했지만 감히 가까이하지 않았다. 무제가 그의 딸을 후궁으로 들이고 싶었지만 금일제가 거절하는 바람에 바라는 바를 이루지 못했다. 금일제의 깊고 조심함이 이와 같았으므로 황제는 그를 더욱 기특하다고 생각했다.   

 

금일제의 장자가 어려서 황제의 말벗이 되어 황제의 사랑을 많이 받았는데 나중에 커서는 자못 방자해져서 궁 안 여자와 희롱하는 일이 있었다. 금일제가 그 사실을 재빨리 알아내고서는 아들을 죽였다. 무제가 그 사실을 듣고 크게 노하자 금일제는 머리를 숙이고 사죄하면서 죽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설명했다. 무제는 심히 슬퍼하면서 눈물을 흘렸고 그 사건 이후 금일제를 더욱 존경하였다.   

 

상관걸이라는 사람은 처음에는 재능으로 아낌을 받아서 미앙궁의 마굿간 책임자가 되었다.무제가 몸이 불편했다가 다시 좀 나아졌는데 마굿간의 말들이 몹시 야위어 있었다. 크게 화를 내며 말했다.

 

     “ 내가 다시는 말을 못 볼 줄 알았던 게로구나.”

 

마굿간 책임자를 감옥에 구돌 참이었다. 상관걸이 머리를 숙이며 들어와 말했다.

 

     “ 신이 듣기에 성상의 옥체가 심히 불안하다고 들었습니다.

       밤낮으로 걱정이 되어서 말을 보살필 겨를이 없었습니다.” 

 

말이 그치기도 전에 그의 눈에서 눈물이 수없이 떨어졌다. 무제는 자신을 지극히 아껴서 그런 일이 발생한 것으로 믿고 그 이후 그를 매우 가까이 하게 되어 시중으로 임명하고 점점 승진하여 태복이 되기까지 이른 사람이다.  이 세사람 모두무제가 평소 아끼고 믿던 사람이어서 특별히 중요한 자리에 임명하고 또 후사를 위탁한 것이다. 정묘일에 무제는 오작궁에서 사망했고 미앙궁 전전에서 입관되었다. 

 

<18> 여동생의 청을 들어주지 않은 무제(BC87)

 

무제는 총명하고 결단력이 좋았다. 사람을 잘 골라 썼으며 법을 집행함에 있어서도 관대하거나 너그러움 없어 쉽게 용서하는 일(假贷)이 드물었다. 무제의 여동생 융려공주의 아들 소평군이 무제의 딸 이안공주와 결혼하였다. 융려공주가 늙고 병이 들었는데 아들 소평군이 죽을죄를 지을지 몰라서 미리 금 천근과 천만 전을 들여 속죄예약을 무제에게 애원하므로 무제가 그것을 허락해 주었다. 그 후 융려공주가 마침내 죽었는데 소평군이 교만하고 술에 빠져 주부를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옥리가 보니 융려공주의 아들인 까닭에 사형을 집행하기에 앞서 무제에게 다시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물었다. 사람들은 전에도 속죄를 허락했으니 이번에도 폐하께서 속죄를 허락할 것이라고 말했다. 무제가 말했다.     

 

   “ 내 동생이 늙어 오직 이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죽으면서 그 아이를 나에게 맡겼었다.” 

 

그리고는 눈물을 흘리면서 오래 탄식을 하더니 이어서 말했다.

 

   “ 법령이라는 것은 선제께서 만드신 것이다. 

     동생의 어려움을 들어서 선제의 법을 짓밟는다면  

     내가 어떻게 고조(유방)의 묘실에 면목이 서겠는가.

     또 어떻게 밑으로 만민에게 누를 끼치겠는가.”    

 

마침내 옥리가 주장한 대로 법대로 사형을 집행했는데 스스로 애통함을 그칠 수가 없었고 좌우 또한 깊이 슬퍼하였다. 

 

 

대조 동방삭이 무제에게 축수를 올리면서 말했다.

  

    “ 신이 듣기에 성왕이 정치를 할때에는

      오랜 원수라고 상을 피하지 않으며

      골육이라도 주살을 가리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书》에 쓰이기를 ‘불편부당不偏不党,왕도탕탕王道荡荡。’ 이라 하였습니다.

      이 두가지는 오제게서 소증하게 생각하시던 것이고 

      삼왕이 어렵다고 보았던 것입니다.

      폐하께서 하시는 것(조카를 법에 따라 집행)을 보니   

      천하가 심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신 동방삭이 죽기를 무릎쓰고 재배하며 

       폐하의 만세수잔을 올립니다. ”  

 

무제는 처음에는 놀리는 것으로 생각하여 화를 내었으나 곧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 선한 뜻을 받아들여 중랑이라는 직책을 내렸다.  

 

반고가 무제치세에 대해 이렇게 찬양하며 평하였다:

     “ 한나라가 여러 왕들의 폐단을 이어받았지만

       고조(유방)이 반정을 일으켜 바로잡았고

       문제와 경제에 이르러 열심히 백성을 잘 길렀지만

       옛적 예절과 법도를 지킴에 있어서는 부족한 점 많았다.

       무제가 처음 즉위하고 잡다한 백가들을 파출시키고

       오직 <육경>만을 장려하면서 마침내 해내 누구든지와 함께 자문을 받고 

       뛰어난 준재를 영입하여 공을 세우는데 참여하게 하였다.

       학교를 세우고 제사를 지내며 달력을 고치고 역법을 바로 잡으며

       음악을 조절하고 시와 음악을 지으며

       봉선당을 세우고 백신에게 예를 올리며 주나라 후손을 잇게 하며 

       문장을 호령하게 하였으니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후사들이 홍업을 따르고 준수하여 삼대의 기풍이 있다고 할 수 있었다.

       만약 무제의 큰 능력과 꿈 위에 

       문제나 경제처럼 공경하고 검소하게 백성을 다스리는 풍조를 바꾸지 않았다면

       비록 시경이나 서경에서 칭찬하는 것과 비교하여 무슨 덧붙일 것이 있겠는가.  

사마광은 이렇게 평했다.

      

     효무제는 극도로 사치하고 욕심을 부렸으며

     형벌을 자주 내렸고 세금을 많이 거두었다.   

     안으로 궁실을 사치하게 꾸몄고 밖으로 

     사방의 야만족을 다스리느라 분주했으며 

     귀신을 깊이 믿었고 사방 시찰을 무절제하게 진행하였다. 

     백성들이 피폐해져 도적이 되게 했으니

     그 진시황과 다른 것이 거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은 망하고 한은 흥한 이유는 

     효무제가 선왕의 법도를 존중하고,

     통치하고 지켜야 할 곳이 어딘지 알았으며

     충직한 간언은 받아들이고 사악한 간교를 증오하였으며

     현자를 좋아하기를 그치지 않았고

     상벌 내리는 것이 엄명했고 

     나이가 들어서 잘못을 고치는데 주저하지 않고 

     또 돌아보아 좋은 사람을 얻어 후일을  부탁했으니 

     이것이 바로 진나라가 망할 이유를 갖고 있으면서도

     진나라처럼 망하는 화를 당하지 않은 이유이다.

 

무진일에 태자가 즉위했다. 당시 여덟 살이었는데 이 사람이 소제(재위BC87-BC74)다. 소제의 여동생 악읍공주 도한 궁중에서 길러졌는데 곽광과 금일제와 상관걸 세 사람이 공동으로 영상서사가 되어 정사를 나누어 처리했다. 곽광이 어린 황제를 보살피며 정치가 자기로부터 나오게 되자 천하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귀를 기울이며 관심을 갖게 되었다.    

궁궐 안에서는 괴담이 돌고 있었는데 어느날 밤 군신들이 놀라서 난리를 치는 소동이 벌어지자 곽광이 옥새를 보관하는 관리를 불러서 가져오라고 지시를 했지만 그 관리가 완강히 거절했다. 곽광이 옥새를 뺏으려하자 그 관리가 칼을 만지며 말했다.

 

      ” 신의 머리를 가져가실 수는 있습니다만

        옥새는 가져갈 수 없습니다.“  

 

곽광은 그가 심히 옳다고 생각했다. 직급을 두 등급 승진시켜 주었는데 이런 곽광을 중히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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