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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망하게 하는 확실한 법칙 혼군 #18 : 작은 아버지의 유업을 못 지킨 남연의 모용초(B)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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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2년05월06일 16시5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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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

 

(6) 고구려 고국원왕의 전연 복속(AD343)

 

다음 해 고구려 고국원왕 고소는 동생을 전연 수도 용성에  보내 신하를 자칭하면서 조현하고 수 천 개 보물을 바쳤다. 모용황은 고소의 아버지 미천왕 시신을 돌려 보내주었지만 어머니는 인질로 계속 붙들어 두었다. 

 

이 틈을 타고 우문일두귀가 재상 막천혼을 파견하여 전연의 서쪽 변경을 침략했다. 제장들이 곧바로 반격하자고 했지만 모용황은 그냥 놔두라고 지시했다. 전연의 반격이 없자 막천혼은 겁을 먹은 것이라고 판단하고 술을 마시면서 사냥에 빠졌고 방비를 전혀 하지 않았다. 그 틈을 타고 모용황은 모용한을 보내 공격하도록 했다 막천혼은 대패하고 겨우 목숨만 살아서 돌아갔다.(AD343)

 

대나라 탁발십익건의 처는 모용씨로 모용황의 여동생이였다. 처 모용씨가 죽자 탁발십익건이 또 다시 직접 와서 모용황에게 혼례를 요청하였다. 모용황은 말 천 필을 받고 딸을 주어 빙례를 치르게 했는데 스무 세살이나 나이 어린 탁발십익건이 매우 건방진데다 장인어른인 자신에 대한 태도 또한 불손했다. 8월 모용황이 세자 모용준을 파견하여 탁발무리를 공격했다. 탁발십익건은 신부 얼굴도 보지 못하고 혼비백산 본국으로 도망갔다.    

 


(7) 전연왕 모용황의 죽음(AD348)

 

전연왕 모용황에게 병이 들었다. 나이 51세였으니 한창의 나이였다. 세자 모용준을 불러 이렇게 부탁했다.

 

“ 지금 중원이 아직도 평정되지 못했구나.

  바야흐로 현명하고 걸출한 인물을 밑천으로 

  세상을 경륜하는데 힘써야 할 것이다.

  동생 모용각은 지혜와 용기를 모두 갖추었고 

  그 재주 또한 중임을 감당할 만하니 너는 국사를 그에게 위탁하여

  나의 뜻을 완성시켜라.

  또한 양사추(양무)는 선비로서의 품행이 매우 고결하고 

  충성스러운 줄기가 곧고 굳으니 큰일을 그에게 부탁할 수 있을 것이다. “

 

9월 17일 모용황이 죽고 시호를 문명왕이라 했다. 그 큰 아들 스물아홉 살 모용준이 왕위를 계승했다. 동생 모용교를 좌현왕으로 삼고 양무를 낭중령으로 등용했다.

 

 

(8) 전연 2대 황제 모용준의 남진 천도(AD351)

 

모용준은 후조가 뿌리째 흔들리면서 남쪽 영역을 확대하자 수도를 용성(요녕성 조양)에서 계(북경)로 옮겼다. 그리고 세 갈래로 나누어 대대적인 남진 정책을 펼쳤다. 모용각에게 중산(하북선 정현)을 공격하게 하고 모용낙에게 상산(하북 정정)을 내침하도록 했으며 모용평은 노구(하북 요양)의 왕오를 침범하도로 했다.

 

양국(하북성 형태)을 무난히 방어한 후조왕 석지는 장수 유현과 7만 군사를 일으켜 업성의 염민을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석지의 군대가 업성 부근까지 도달하자 겁이 난 염민은 위장군 왕태와 상의하려고 했지만 왕태는 병을 핑계로 의논하기를 거부했다. 할 수 없이 염민은 홀로 전쟁에 나섰고 후조의 유현군사를 대파하고 3만여 명을 참살했다. 유현이 염민에게 항복하면서 자신이 양국으로 돌아가서 석지를 암살하여 보답하겠다고 하자 염민은 그렇게 믿고 회군하여 돌아갔다. 그리고는 도와주지 않은 왕태와 그 삼족을 반란음모죄로 처치했다.  

 

양국으로 돌아온 유현은 석지와 승상 석병, 그리고 태재 조서 등 10여명을 시해하고 그 머리를 업으로 보냈다. 이로써 마지막 남은 후조의 뿌리가 완전히 절멸된 셈이다. AD319년 석륵이 후조를 세운지 꼭 32년 만에 망한 것이다. 염민은 석지의 머리를 사거리에서 태워버리고 유현에게 상대장군 및 대선우 기주목의 직책을 내렸다.(AD351년 3-4월). 몇 달 뒤 유현은 다시 군사를 이끌고 염민의 업을 공격했으나 패해서 돌아온 뒤 스스로 황제를 자칭했다. 

양국에서 스스로 황제를 칭했던 유현은 그 다음해(AD352년) 염민의 공격을 받고 사로잡혀 죽었다. 

 

염민 또한 전연 모용준의 장수 모용각의 공격을 받고 정현(하북 정주)에서 사로잡혀 계성(북경)으로 압송된 뒤 다음 해인 AD352년 5월 처형되었다. 염민의 군대는 보병 중심이라서 산에 숨었으므로 기병 중심의 모용준 군대가 쉽게 이길 수가 없었다. 모용준은 염민의 군대를 평지로 유인하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포위를 풀고 퇴각하는 척했다. 산 속에 고립되어있던 염민의 군대가 모용준이 퇴각하는 것을 보고 산을 내려오다가 모두 포획되었다. 모용평은 군대를 몰아서 진군해 염민의 아들이 염지가 버티고 있는 업성을 포위했다. 다른 지역을 모두 평정한 모용준이 모용군, 모여근, 황보군과 2만 기보병을 보내 업성 포위를 강화했다. 염민의 아들 염지가 업성에서 버티었으나 7월 염위의 장수 마원이 성문을 열고 항복함으로써 염위는 건국 2년 만에 멸망했다. 모용준은 염민의 아들 염지를 죽이지 않고 해빈후라는 작위를 주어 생계를 이어가게 하였으나 2년 뒤 반역죄의 무고를 덮어씌워 죽였다. 

 

전연이 막강한 세력으로 남쪽으로 밀려들자 예전에 후조의 장수였던 사람들은 속속 전연에 항복했다. 모용준은 이들을 후대하면서 예전의 직책을 그대로 수여했다. 왕탁은 익주자사, 기일은 진주자사, 장평은 병주자사, 이력은 연주자사, 고창은 안서장군 그리고 유녕에게 거기장군의 칭호를 내렸다. 모용각은 군사를 안평에 주둔시키고 왕오가 지키고 있는 안국을 공략했다. 왕오의 부장 진흥이 왕오를 살해하고, 여호라는 사람은 그런 진흥을 죽이고 스스로 안국왕이라고 칭했다. 소림이라는 자도 무극(하북성 무극)에서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자 모용각이 나서서 소림을 토벌했다. 모용각은 노구(하북성 요양)를 포위하고 공략했는데 2년 뒤인 AD354년 마침내 노구를 함락시켰다. 자칭 안국왕이라고 떠던 여호는 남쪽으로 도망갔다가 결국에는 전연에 항복하고 말았다. 

 

북경으로 수도를 옮기고 나서 하북 지역 후조의 영토를 거의 장악한 모용준은 부하들의 지극한 요청으로 스스로 황제라고 칭하면서 신하들의 직책을 걸맞게 올려 주었다. 국상 봉혁을 태위로 삼고 좌장사 양무는 상서령, 우사마 황보진은 상서좌복야 그리고 전서령 장희를 우복야로 임명했다. (AD352년 10월) 다음 해 AD353년 모용준은 모용엽을 황태자로 삼았다.

 


(9) 후연의 시조 모용패(수)의 동진(AD354)

 

남쪽의 강대국 동진이 전진에 대해 북벌정책을 벌인 것은 모용준의 전연을 철저히 믿었기 때문이다. 만약 전연이 배후를 치고 들어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환온은 장안의 전진을 공격할 생각을 못했을 것이다. 비록 지난 해(AD352년 10월) 칭제를 하기는 했지만 회수를 건너 동진 땅을 넘보기에는 전연의 그동안의 행적이 너무 고분고분했고 복종적이었다.  

 

그러나 모용준의 속내는 그게 아니었다. 동진이 전진을 제어하려고 국력을 쏟는 동안 전연은 화북지역 일대를 넘어 황하 이동의 회하지역을 넘보기 시작했는데 그 전략의 핵심에는 모용패가 있었다. 모용패(AD326-AD396)는 모용준의 동생으로써 용기가 넘치고 씩씩하여 이름을 ‘패’라고 붙여 주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 모용황이 세자로 삼으려고 했을 만큼 매력이 넘치는 아이였다. 신하들의 격렬한 반대로 장자 모용준이 세자가 되기는 했지만 분명히 모용패는 남다른 데가 있었다. 모용패가 말을 타다가 떨어지는 바람에 결혼 후 이름을 모용수로 바꾸었는데 이 사람이 후연의 시조가 된다. 모용수는 동쪽으로 나아가 지금의 산동성 일대를 전연의 영토로 편입하는 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곳에 뿌리를 내려 모용준에게 대항할 우려가 있어서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10) 모용패(수)와 동진의 마찰(AD356)

 

AD350년대 중엽 동진과 전진이 격렬하게 싸우는 동안 용맹한 모용패(수)가 산동성 서부 일대를 장악한데다 요양이 회남 땅을 가지고 전연에 귀속하자 갑자기 전연은 당시 어느 나라 못지않게 영토가 넓고 강대해 졌다. 전연의 영토는 황하를 경계로 동진과 맞붙게 되었는데 이 때 이 지역 동진군대의 수장이 광고(산동성 익도, 지금의 청주 북쪽)성에 주둔하던 진북장군 단감이었다. 단감은 모용준에게 편지를 보내 황제를 칭한 것의 참람함을 지적하였다. 모용준 어머니가 단씨였으므로 단감의 외사촌 이었다. 모용준은 화가 나서 모용각을 대도독 무군장군으로 삼고 양무를 부이관으로 삼아서 단감을 치도록 했다. (AD355) 모용준은 모용각을 보내 황하를 건너게 했다. 단감의 동생 단비가 자신이 전연의 모용각 군사를 먼저 막겠다고 간청했으나 단감이 허용하지 않았다. 전연의 군사를 들여보낸 다음 공격하겠다는 것이 단감의 전략이었다. 단비가 계속해서 우겨대자 단감은 동생 단비를 죽였다.

        

전연의 군사는 무방비 상태의 황하를 건넜다. 단감은 곧바로 3만 대군을 보내 전투에 들어갔다. 치수에서 양 쪽 군대가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으나 결과는 모용각의 대승이었다. 단감의 동생 단흠이 포로로 잡히고 모용각은 군대를 몰아서 광고성(산동성 익도현)을 포위했다.(AD356) 단감은 부하 단온을 동진 조정으로 보내 구원병을 요청했다. 동진은 서주자사 순선을 보내 낭야(산동성 임기)에 주둔시켰다. 전연에서도 모용각을 후원하기 위해 견성(산동성 견성)에 있던 왕등을 보냈으나 왕등은 양도(산동성 기남 북쪽)에서 순선에게 붙잡혀 죽었다. 모용각이 단감이 장악하고 있는 광고(청주)를 포위한지 오래되자 제장들이 서둘러 공격하자고 졸랐다. 모용각이 이렇게 말했다.

 

“ 군사 사용에는 천천히 할 때와 서둘러 할 때가 따로 있는 법이다.

  옛 말에 열 배면 포위하고 다섯 배면 공격한다고 했는데

  아직 단감의 군사가 많고 또 흐트러지지 않았으며 

  굳건한 성채에 의지하여 위아래가 힘을 합하고 있으니 아직은 쉽지 않다.

  필사적으로 공격한다면 못 뽑을 것은 없겠으나

  우리 병사가 많이 다치게 된다.

  잠시도 쉬지 못한 병사들 때문에 나도 잠을 자지 못했고

  또 요점은 함락하는 데 있는 것이지

  급하게 공을 세우려 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포위상태가 오래 지나자 단감의 식량이 부족해졌다. 단감은 속전속결하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성 밖으로 나와 전투를 도발했다. 기다리고 있던 모용각의 병사들은 재빨리 성문으로 들어가는 퇴각로를 차단했다. 결국 안팎으로 곤궁해진 단감이 그 해 11월 면박하고 투항해왔다. 모용각은 단감과 2년 전 전연을 배반하고 동진으로 도망갔던 주독을 계로 압송했다. 모용준은 단감에게는 복순장군이라는 칭호를 내렸지만 다음 해에 3천여 동진 무리들과 함께 죽여서 묻었다. 주독은 5형(묵형, 주형, 태형, 절형, 참형)을 다 갖추어 죽였다. 왜냐하면 주독이 배반하면서 황족 모용수를 죽였기 때문이다. 모용준은 모용진을 광고성에 주둔시켰다. 이 해 여름에 태자 모용엽이 일찍 죽었는데 모용준은 다음해에 일곱 살 된 모용위를 태자로 책봉했다. 동진의 순선은 단감이 패하자 임기에 주둔하던 군사를 물려 서주자사의 본영이 있는 하비로 돌아왔다. 

 

 

(11) 모용준의 150만 대군 동원령 (AD358) 

 

업으로 수도를 이전하고 광대한 지역으로 영토가 팽창하자 전연황제 모용준은 더욱 당돌해졌다. 전국에서 각 호당 1명을 제외하고 모든 장정을 징집하여 150만 병졸을 동원하여 서쪽 전진과 남쪽 동진을 모두 아우를 생각을 한 것이다. 유귀가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 폐하, 지금 천하는 전쟁으로 시들고 지쳐있습니다.

  그러한 때에 그렇게 군사를 징발하는 것은 법에 맞지도 않습니다.  

  반드시 토붕의 변고를 당할 것입니다.“ 

 

법에 따르면 가호 당 3장정인 경우 1인, 5장정인 경우 2인 징집이 적법했으므로 1 장정을 빼고 모두 징집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모용준은 유귀의 반대상소가 타당하다고 생각하고 징집규정을 적법하게 고쳤고 징집 기일도 크게 늦추었다.

 

 

(12) 모용준과 친동생 모용수의 갈등(AD358)

 

모용준의 둘째 동생 모용패(수)는 단말배의 딸과 결혼하여 모용령과 모용보를 낳았다. 모용수의 어머니도 같은 단씨였다. 당시 단씨는 선비계통 종족 중에서 모용씨와 거의 동급일 정도로 높은 신분이었다. 그러니 단씨 사람들은 황제 모용준의 처 가족혼씨를 아주 가볍게 보았다. 비록 모용준과 모용수가 피를 나눈 형제로 서로 일곱 살 차이였지만 재능이나 용맹이나 인물 면에서는 우열을 가릴 수가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두 사람 사이에는 치명적인 경쟁관계가 있었다.  

 

형제간 갈등의 호기를 알아차린 사람이 중상시 열호였다. 열호는 모용수의 처 단씨와 그의 측근 고필을 엮어서 무고죄를 뒤집어 씌웠다. 모용준은 정위에게 즉각 조사를 명령했고 혹독한 심문절차가 이어졌다. 그러나 아무런 혐의를 찾지 못했다. 모용수가 가혹한 고문을 당하는 처 단씨가 안타까운 마음에 이렇게 말했다.

 

“ 어찌 그렇게 매섭고 독하시오.

  자복하는 것만 못하지 않소?“

 

단씨가 단호하게 대꾸했다.

“ 어찌 죽는 것이 무섭거나 애석해서 그랬겠습니까?

  스스로 반역 무고를 인정하게 되면

  위로는 조종으로 

  아래로는 오왕(모용수의 존호)에 누를 끼칠 것이라 

  자복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단씨는 옥중에서 죽고 모용수는 화를 면하고 평주(지금의 요동지역)자사로 강등되어 요동지역으로 내보냈다. 모용수가 죽은 단씨의 동생을 처로 삼자 모용준의 처 가족혼씨가 동서 단씨마저 쫓아내고 대신 자신의 동생을 처로 맞이하게 했다. 모용수가 반가울 리가 없었다. 모용수가 처 가족혼씨를 매우 냉대하자 형수 가족혼씨는 더욱 모용수를 미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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