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민(畏天本民) <23> 국정(國政)의 근본 원칙과 목표 V. 바른 국정을 도운 인재들⑥변계량[卞季良(1369-1430), 시호 文肅公](上)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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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6 변계량[卞季良(1369-1430), 시호 文肅公]
“내게 좋다하고 남 슬흔 일 하지 말며 남 한다고 의 아니면 좇지 마라
우리는 천성을 지켜 삼긴대로 하리라(변계량).”
황희가 세종의 행정의 대들보라면 변계량(호 春亭)은 세종의 학문과 예식의 대들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황희의 명성이 의정(영의정,좌,우의정)직에서 돋보임에 비해 변계량은 거의 20여년에 이르는 대제학(문형,文衡)직에서 두각을 보이기 때문이다. 계량은 고려 말 이조판서를 지내다가 조선조에 들어와 원종공신이 되어 판중추원사를 역임한 변옥란의 둘째아들이다. 계량도 황희와 같이 어렸을 때부터 재능이 남달랐다. 네 살에 옛 시의 대귀를 외웠으며 여섯에는 글을 지었고 열네 살(1383)에는 진사시험에 합격하고 열일곱 살(1386)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교주부라는 직을 시초로 관계에 들어왔다. 조선조에 들어와 태조 때 예문관제학으로 있다가 태종 7년(1407) 4월 실시된 친시문과에 을과 1등으로 합격함으로써 예조참의로 특별히 발탁되었다.
[태종의 신임]
황희, 허조와 마찬가지로 변계량도 태종의 신임이 매우 두터웠다. 태종이 계량을 얼마나 총애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상왕으로 물러나 앉은 다음 해 태종의 생일이 되었다(5월 16일). 정종과 세종과 모든 백관들이 잔치를 벌였다. 정종도 천고에 오늘 같은 모임이 또 어디 있겠냐(千古罕聞今日會)고 축하했다. 모두가 밤늦도록 술 마시며 춤을 추던 중에 태종이 특별히 변계량과 허조를 불러 내 자기와 같이 맞춤(對舞)을 추도록 한 것이다. 세종실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있다.
“상왕이 춤을 추시고 변계량과 허조를 명하여 같이 춤을 추시었고
한 참 뒤에 궐로 들어왔다. 사람들은 두 대신이 임금과 함께 춤을 춘
것이 세상에 드문 영광이라 하였다. (上王舞 命卞季良許稠對舞 良久入
內 人以二臣對舞君王爲罕世之榮 : 세종 1년 5월 16일)”
이 정도면 태종의 변계량에 대한 신임은 결코 황희보다 떨어지지 않는다 할 수 있다. 즉위한 세종에게 계량을 예조판서로 임명하게 한 것은 이런 태종의 신임이 밑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양녕의 스승과 책임]
태종 때 예조참의로 특채 된 이후 태종이 물러나기 까지 계량은 예문관대제학직과 동시에 세자 양녕의 교육을 담당하는 시강원의 최고직인 빈객을 맡았다. 그러나 기생 소앵 및 어리에 얽힌 양녕의 추문들이 불거지자 책임의 화살은 세자의 교육을 맡은 시강원으로 쏠리게 되었다. 태종은 평양기생 소앵을 몰래 궁으로 들인 추문에 대하여 빈객 조용과 변계량을 불러놓고 심하게 한탄하였다.
“세자를 바르게 가르치는 일이 경들의 직무인데
안 좋은 일이 어찌 저 지경까지 이르렀는가.
(敎養儲副 卿等之職 不義之事 何至此也 : 태종 13년 3월 27일)”
5년 뒤에 발생한 어리사건에 대해서는 태종이 더 신랄하게 계량을 꾸짖었다.
태종이 직접 계량을 불러 세웠다.
“형(중량)은 용렬하나 경은 선량한 것을 내 이미 알고 있다. 세자를
가르칠 사람을 부득불 선택해야 하므로 경으로 세자빈객을 삼아 선한
곳으로 인도하기를 바랐으나 좋지 않은 것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비록
경은 모르는 일이라 하나 세자의 빈객이 되어 어찌 부끄럽지 않은가.
(兄之謂庸 卿之謂良 予宿知之 敎世子不可不擇人 使卿爲世子賓客 導之以
善 今乃不善如此 是雖卿之所不知 爲賓師者 無乃有愧乎
: 태종 18년 5월 10일)”
[가정문제]
세자 양령의 빈객 책임 말고도 계량에게는 흠이 많았다. 누님은 행실이 아주 나빠 주살되었고(정종 1년), 그 딸 소비 또한 나쁜 행실로 추궁 받다가 목매어 자살했다(태종 10년 6월). 소비의 자살 뒤에 계량이 관련되어 있다는 소문으로 한 때 탄핵 당하기도 하였다(태종 12년 6월). 그러나 이런 가정문제에 대한 태종의 생각은 의외로 대범했다. 오히려 계량을 위로했다.
“경이 기묘년(1399) 누님의 일로 인하여 옥리에 의해 잡혀 왔을 때
내 마음이 몹시 상했다. 가족 중에 그런 사람이 있어 누(累)가 자기에게
미치는 것은 또한 항상 있는 일이다. 경은 너무 한스러워 하지마라.
(卿於己卯年 以妹之故 爲獄吏所執而來 予頗傷心 族內有如此人
累及乎己 亦常事也 卿勿恨 : 태종 10년 6월 13일)”
변계량은 결혼생활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처음에 철원부사 권총의 딸에 장가들었다가 처를 버렸으며 그 다음 오씨와 재혼하였으나 처가 죽자 이촌의 딸을 처로 맞았는데 이씨를 이혼하지도 않은 채 버려두고는 도총제 딸 박씨를 따로 처로 둔 것이다. 계량은 처 이씨를 방에 가두어 두고 모든 것을 방 안에서만 해결하도록 처를 학대했다. 참다못한 장인 이촌이 계량을 욕하며 딸을 데리고 갔고 그 일로 계량을 사헌부에 고소한 것이다(태종 12년 6월 26일). 이 사건으로 계량은 검교 판한성부사직의 사직을 청하였으나 태종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비록 성인이라 하더라도 작은 허물을 면할 수가 없는데 하물며 그
아래 있는 자들이야 어떻겠는가. 만약 지금 계량의 직을 파면하면
문서를 작성하는 일은 또 누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
(雖聖人 未免有小過 況其下者乎 若今罷季良之職
於文翰之任 誰能當之 : 태종 12년 6월 26일)”
[청빈]
이런 책망에도 불구하고 태종은 계량을 끝내 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아들 세종에게 변계량을 중용할 것을 부탁했다. 그것은 무슨 이유일까. 태종이 계량을 믿은 것은 그가 뛰어난 능력과 청빈함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태종 18년 1월, 즉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그 해, 아직 양령이 세자로 있었을 때 중국에 진헌한 물건의 물건목록을 잘못 기록하는 일이 발생했다. 오미자 백근을 잘못 추가한 것이다. 바로 사헌부에서 탄핵이 올라왔다. 황제에게 진상하는 물건에 착오가 생긴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불경죄라는 것이다. 사헌부는 담당부서인 예조판서 변계량과 참판 허조와 좌랑 설순 등을 징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신사 조말생과 하연도 이들이 죄가 없지 않다는 생각이었다. 태종이 물었다.
“이 죄는 용서받지 못할 죄이다. 그러나 변계량과 허조가 다 예조의
직책에 합당하고 또 청렴가난한 데 녹봉을 못 받으면 어떻게 되겠느냐.
(此罪宜不宥 然季良與稠合於禮曹之任 且淸寒未受祿奈何
: 태종 18년 1월 9일)”
결국 책임은 묻되 직책은 유지시켜주는 쪽으로 계량을 보호했다. 사흘 뒤 예조판서에서 예문관대제학으로 옮겨 준 것이다. 능력도 있고 청빈하니 인재임에 틀림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세종은 즉위하는 그 다음 날 바로 변계량을 예조판서에 임명한다. 황희는 세종의 재임기간 중에 두 번 파면되었다. 비록 짧기는 해도 세종 9년 6월에 1개월, 그리고 세종 12년에 10개월 파직된 적이 있었다. 그러나 변계량은 세종 재임 중 한 번도 파직된 적이 없다. 정 2품직인 대제학과 참찬직과 예조판서를 옮겨 다니다가 말년 종일품 무관직 판우군 도총제부사로 승진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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