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이냐 분열이냐,국가흥망의 교훈#20 : 잔학한 황제로 이어진 북제北齊(X,끝)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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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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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진양(태원) 함락
돌궐이 땅인 북삭주로 향하던 고위는 영군장군 매승랑이 말 앞에서 막고 조아리자 생각을 바꾸어 업으로 가기로 했다. 도망온 고아나굉이 수행했고 무리의 숫자는 광녕왕 고효형과 양성왕 고언도 등 십여 명이었다.
목제파는 서쪽으로 달아나 북주에 투항했다. 육령훤은 자살하고 그의 친족들은 모두 주살되었다. 우문옹은 목제파에게 주국 및 의주(산서성 동천)자사를 주었다. 그리고는 조서를 내렸다.
“ 만약 사람이 꾀를 묘하게 쓴다면 천명에 깊이 통달하여
관직을 높이고 상작을 더 높이 내릴 것이다.
저쪽으로 투항한 옛 나의 장수들도 귀천을 막론하고 모두 사면해 줄 것이다.”
우문옹의 사면 조서가 알려지자 북제의 신하들은 다투어 북주로 투항했다.
<145> 고연종의 황제등극(AD576)
고위가 업으로 가고 나서 진양을 지키던 안덕왕 고연종은 주변으로부터 황제의 자리에 오르라는 독촉을 많이 받았다.
“ 대왕께서 천자가 되지 않으시면
여러 사람들이 대왕을 위해 목숨을 버리려 하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었다. 무능하고 무책임한 황제 고위는 업으로 내뺐지만 업도 안전하다는 보장이 없었다. 또 북주에 항거할 군사를 모으기 위해서는 천자라는 권위가 꼭 필요했다. 고연종은 어쩔 수 없이 황제의 자리에 오른다고 선언했다.
“ 무평(고위의 연호)이 연약하여
정치가 환관에서 비롯되고
빗장을 부수고 달아난 곳을 모르는 형편이 되었다.
왕공과 경사에 외람되게 추대 받아 보좌를 계승하고자 하노라.”
고연종은 창고를 열고 궁궐에 있는 후궁과 미녀들도 마찬가지로 여러 장수와 병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북제의 주군은 그 소식을 듣고 이렇게 말했다.
“ 차라리 병주를 북주에게 주는 것이 더 낫겠다.
안덕왕이 갖게 하고 싶지는 않다.”(AD576년 11월 14일)
11월 15일 우문옹이 진양에 도착했다. 고위는 11월 16일 업에 들어갔다. 주의군사는 구름처럼 진양성을 에워쌓았다. 고연종에게 충성을 바치려는 부하들의 필사적인 항전의 기세에 눌려 북주의 대군이 진양을 함락시키지 못했다. 우문옹은 거의 죽을 뻔하기도 했다. 고연종은 우문옹이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사체 중에서 긴 수염(우문옹)DF 찾으라고 했으나 찾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번 전투에서 승리한 것으로 판단한 군사들은 술에 한껏 취하고 도취되어 정돈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우문옹은 전쟁을 계속할 생각이 없었는데 우문헌, 우문흔, 왕의 등이 재촉하는 것을 이길 수가 없어서 다음날 전투를 다시 개시했다.(AD576년 11월 17일) 진양성 동문을 함락시킨 북주군은 달아나는 고연종을 사로잡았다. 우문옹이 말에서 내려 고연종의 손을 잡자 뿌리치며 말했다.
“ 죽을 사람의 손인데 어찌 지존을 가까이 하겠습니까.”
우문옹이 말했다.
“ 두 나라 천자는 원망이나 미움을 가진 것이 아니라
단지 백성을 위하여 온 것일 뿐이오.
끝내 해치지 않을 것이니 두려워하지 마시오.”
고연종의 옷과 모자를 돌려주고 그를 극진하게 예우하였다. 당옹 등 진양의 대신들도 모두 북주에 투항하였다.
고연종이 황제를 칭하면서영주(하북성 하간)자사인 고개에게 사신을 보내 사태가 수습되면 황위를 숙부인 고개에게 넘길 것이라고 약속했다. 고개는 신하로써 참람한 말을 했다고 하여 사신을 잡아 업으로 압송했다. 고개는 고담의 동생이므로 황제 고위와 고연종에게는 숙부였다.(AD576년)
<146> 이루겸과 고준(AD576년)
북주의 이루겸이 북제를 염탐하러 사신으로 왔을 때 이루겸의참군 고준이 그 사실을 북제에 몰래 고해바쳤었다. 북제는 북주와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고준을 잡아 가두어 버렸다. 우문옹이 진양을 함락시키고 이루겸의 공을 치하하면서 업에 갇혀있던 고준을 불러왔다. 이루겸이 머리를 조아리며 그의 사면을 요청하였다. 우문옹이 이루겸에게 말했다.
“ 경은 무리를 모아놓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아 부끄러움을 알게 할 수도 있지 않소?”
이루겸이 말했다.
“ 고준의 죄는 얼굴에 침을 뱉어서 질책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우문옹은 납득이 되지 않았지만 이루겸에게 처분을 맡겼다. 이루겸은 그 후에도 예전과 똑같이 고준을 대우했다.
사마광은 이 사건에 대해 이렇게 비판했다. 즉, 큰 계획을 누설한 것으로 보면 고준의 죄는 역적에 해당되는데 이를 직접 처단하지 않고 이루겸에게 맡긴 것은 정치와 형벌의 요체를 잃은 것이라고 했다. 덕으로 원수를 보답하는 사람은 무엇으로 덕을 베푼 사람에게 보답할 것인가 라는 공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이루겸을 위해서라면 먼저 법과 형벌에 따라 고준의 죄를 먼저 바로 잡았어야 한다고 했다. 결국 사면해 주어 사사로운 명성으로 아름답기는 하나 공의는 아니라고 했다.
<147> 북제 황위를 고항에게 선양(AD577)
북제 주군 고위는 업에서 군사를 모았지만 욕심이 많아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물을 내놓지는 않았다. 곡률효경은 주군이 직접 나서서 군사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격려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고위는 피식 웃기만 할 뿐 그럴 줄도 몰랐고 또 그럴 의향도 없었다. 주군이 절박함이 없으니 군사들도 전쟁의사가 있을 까닭이 없었다. 북삭주로 도망가던 태후와 태자도 업으로 돌아왔다.
진양을 접수한 우문옹은 창고의 물자들을 전부 풀어서 장수와 병사에게 나누어 주었다. 고연종에게 업을 공략할 방법이 무엇이냐고 묻자 고연종이 대답했다.
” 그것은 나라를 잃어버린 신하가 답할 것이 못 됩니다.“
그래도 재촉하자 고연종이 말했다.
” 만약 임성왕 고개가 업을 점거하고 있다면 신은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만약 주군이 지키고 있다면 폐하의 병사는
칼에 피를 묻히지 않아도될 것입니다.“
우문옹은 동생 우문헌을 앞세워 업으로 진격했다.(AD576년 12월 29일)
<148> 업 함락과 이덕림을 얻음(AD577)
북주의 대군이 업을 향해 내려오는데 북제 주군 고위는 막을 방법을 몰랐다 주변에 물어보면 사람마다 의견이 다 달랐을 뿐 아니라 대부분 고관들은 틈을 타서 빠져나가 북주로 투항하고 있었다. 상서령 고원해가 주청하여 태자 항에게 황위를 선양하였다. 8세짜리 황제였다.
AD577년 1월 18일 북주의 대군이 업성 밑까지 밀려와 포위했다. 북제의 상황 고위는 100여기를 거느리고 빠져나와 동쪽으로 도망갔다. 업성은 모용삼장에게 맡겼는데 힘이 달려 우문옹에게 잡히고 말았다. 우문옹은 모용소종을 크게 예우하였다. 업성의 모든 장수들이 투항하여 우문옹은 1월 20일 업성으로 들어갔다. 업으로 들어간 우문옹은 북제 중서시랑 이덕림의 집으로 사람을 보내 초빙하는 뜻을 밝히고 위로하며 타이르면서 말했다.
” 내가 북제를 평정하여 얻은 이익이란 오직 경을 얻은 데 있다.“
이덕림을 궁으로 데리고 온 뒤 내사 우문앙을 시켜 북제의 풍속, 실정 그리고 인물에 대해 세세하게 물어서 파악했다. 그런 다음 이덕림을 돌려보냈다. 이덕림은 북주조정과 이어지는 얀견의 수나라 조정에서 중책을 맡게 된다.
낙주(낙양)자사 독고영업이 북주에 항복하면서 북제의 영토는 절반 이상이 북주에게 흡수되었다. 고위는 1월 21일 제주(산동 제남)으로 들어갔는데 이 날 고항은 황위를 고개에게 넘겼다. 그 다음날 고위는 호태후를 제주에 남겨두고 고아나굉에게 제주관을 지키도록 하고는 목황후, 풍숙비, 고항, 한 장란, 등장웅 등을 이끌고 동쪽 청주로 도망갔다.
청주에 도착한 고위는 남쪽 진나라로 도망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고아나굉이 은밀히 북주 군대를 부르고 북제의 주군을 잡아 산 채로 압송하기로 약속한 터였다. 고아나굉은 거짓으로 고위를 속이며 말했다.
” 북주의 군대는 아직 멀리 있습니다.
이미 다리와 길을 불 질러 다 차단해 두었습니다.“
고위는 이 말을 믿고 느긋하였다. 북주의 군대가 제주고개에 당도하자 고아나굉이 즉시 항복했다. 북주군대가 쏜살같이 청주로 달려가 고위를 생포했다.(AD577년 1월 25일) 잡힌 장소는 정확히 남등촌(산동성 임구현 서남)이었다. 고위는 후, 비 및 어린 아들 등 10명을 데리고 금 주머니를 말안장에 달고 가다가 잡혔다. 호태후와 나란히 업으로 압송되었다.
북주의 주군 운문옹이 조서를 내렸다.
” 고 곡률광과 최계서 등에게 시호를 내리도록 하고 장사를 다시 고쳐서 지낼 것이다.
그 자손들에게는 마땅한 관직과 전지와주택을 내리도록 하라.“
우문옹이 말했다.
” 곡률광이 있었더라면 내가 어떻게 업에 도착할 수 있었겠는가!“
AD577년 2월 3일 우문옹은 북제 태극전에 올라 모든 북제 관리와 장수를 불러 잔치를 베풀었으며 차이를 두어 상과 작위를 내렸다. 북제 상황 고위가 업에 도착하자 계단을 내려가 영접하였으며 예와 격식을 갖추어 빈객으로 대접했다.
<149> 북제의 마지막 항거와 북제 멸망(AD577년)
북제 광녕왕 고효형은 창주(하북성 염산)에 도착하여 5천의 병사를 모았다. 임성왕 고개를 신도(하북성 기현)에서 만나 도합 4만 군사를 다시 규합할 수 있었다.북주에서는 양견과 우문헌을 보내 공격하게 하는 한편 고위에게 편지를 써서 소환했으나 올 리가 없었다. 우문헌은 고개의 첩자 두 명을 생포했는데 그들을 다시 돌려보내면서 말했다.
” 내가 다투는 것은 너희들이 아니다.
지금 풀어 줄 터이니 내 사자가 되어라“
고개에게 보내는 편지를 두 첩자에게 쥐어 보냈다. 상황을 깨닫고 진작에 항복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고개가 버티는 동안 고개의 장수 울상원은 북주와 대항하는 척 하다가 북주에 투항하고 말았다. 그 다음날 벌어진 전투에서 고개의 군사는 우문헌에게 크게 패했다. 전사자와 포로의 숫자만 3만 명이었다. 고개와 광녕왕 고효형도 사로잡혔다. 우문헌이 고개에게 말했다
” 어쩌다 이런 고생을 하게 되었소.“
고개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나는 신무황제(고환)의 아들이고 형제가 열다섯 명이지만
용케 혼자 살아남았소.
종묘와 사직이 전복될 지경이지만 부끄러운 점이 하나도 없소.“
우문헌은 그 듯을 높이 사서 처자를 돌려보내주었다. 또 고효형의 상처를 직접 약을 발라주었고 후하게 예우해 주었다. 고효형이 탄식하며 말했다.
” 신무황제를 제외하고 숙부 형제들 중에서 나이 40에 이른 사람이 없다.
이것은 운명이 아니고 무엇인가.
주군은 총명함이 없고
재상은 기둥과 주춧돌이 될 재목이 아니었으니
병부를 쥐고 부월을 받아 힘을 발휘할 수 없었던 것이 통한스러울 뿐이오.,“
북삭주에서 옛 장사였던 조목이 고소의(고양의 3자)를 추대하여 반항을 계속했다. 그러나 역부족을 느끼고 돌궐로 도망가고 말았다. 동옹주의 부복과 영주(요녕성 조양)의 고보녕도 북주에 굴복하지 않았지만 나머지 50주 162군 380현이 북주에 귀속되면서 북제는 멸망하였다. 북제의 뺏긴 가호는 303만 2500호라고 기록되었다. 북제의 도읍 업에 잇던 동산, 남원, 삼대는 다 부수었고 달린 땅은 모두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우문옹은 이덕림을 내사로 삼고 북제의 훌륭한 인재를 등용하는 작업을 모두 맡겼다.
<150> 북제의 마지막 항장 부복(AD577년)
북주가 AD566년 10월 평양(임분)을 함락시키면서 울상귀를 사로잡았는데 이 때 인근 동옹주자가 부복을 불렀으나 부복이 따르지 않았다. 북주가 병주를 장악하고 나서 또다시 위효관을 보내 아들에게 고관직을 내리면서 불렀지만 부복이 거절하며 말했다.
” 군주를 모시면서 죽으면 죽었지 두 군주를 섬기지 앖습니다.
우리 아이를 신하로 등용하시겠다고 하나 충절을 바칠 수도 없고
아들이 되어서 효도도 하지 못해
사람들이 원수로 생각하며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어서 죽여서 천하의 영을 바로 세워주십시오.“
우문옹이 업으로 돌아 온 뒤 투항한 고아나굉과 100여명을 함께 보내 또 부복을 설득했다.부복이 강을 사이에 두고 고아나굉에게 물었다.
”지존은 어디에 계시오?“
고아나굉이 사로잡혔다고 말했다. 부복은 곧바로 돌아서 성 안으로 들어가 청사 앞에서 북쪽으로 향하여 큰 소리로 통곡한 다음에 항복하였다. 우문옹이 오래 버틴 부복을 불러 물었다.
” 왜 일찍 내려오지 않았는가?“
부복이 눈물을 흘리면서 답했다.
” 신은 삼대에 걸쳐 북제의 신하였습니다.
북제의 봉록을 먹은 주제에 스스로 죽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늘과 땅을 보는 것이 부끄럽습니다.“
우문옹이 그의 손을 잡고 말했다.
” 신하란 응당 이와 같아야 하는 법이다.“
먹던 양갈비를 부복에게 주면서 말했다.
” 뼈는 가깝고 고기는 소원하니 그래서 주는 것이요.“
부복을 끌어들여서 숙위를 맡겼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 성급히 관작을 올려주면 귀부한 사람들의 마음이 동요될 것이다.
힘껏 짐을 섬기기만 하면 부귀는 천천히 올 것이다. 걱정하지 마라.“
부복에게 이렇게 물었다.
“ 예전에 하음을 구원하고서 무슨 상을 받았던가?”
부복이 한 등급이 올랐고 특진하여 영창군공이 되었습니다.“
우문옹이 고위에게 가서 말했다.
” 짐은 3년 동안 싸우는 것을 가르치고 준비한 다음에야
하음을 뺏기로 결정했소만
부복이 하도 잘 지켜서 뺏지 못하고 물러났소.
그런 그에게 상이 너무 야박하지 않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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