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청 시인의 문학산책 <57> 50년 전, [心象(심상)] 창간 때를 돌아보며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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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시지 [心象](심상) 창간호가 나온 것이 1973년 10월호 였으니 어느새 50년 전의 일이 되었다. 내가 [心象](심상) 편집자로 일한 1973년부터 목월선생께서 타계하신 1978년 까지의 5년은 젊은 시인 이건청의 혼신의 열정이 뜨겁고 밝게 따오르던 때였고 월간시지 [심상]이 한국 시잡지사(詩雜誌史)의 황금시대로 빛을 발하던 때였다.
지금은 시를 게재하는 잡지가 350여종 쯤된다니까 발표지면이 넘쳐나는 시대가된 셈이다. 그러나, [心象](심상) 창간호가 나온 1970년대 초반엔 그렇지를 못했었다. [현대문학] [사상계]등이 시를 게재하고 있었고 시전문지 [현대시학]이 시 전문지로 시를 싣고 있었다.
1973년 3월경 박목월 선생께서 "이군, 앞으로 시간을 좀 내도록 하거래이" 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시잡지를 내신다는 것이었다. 선생께서는 1950년대에 [여학생] [시문학] 등의 잡지를 간행 하신 적이 있었다. 바람직한 시 잡지를 내는 것이 선생의 오랜 포부이기도 하였다. 게다가 그때 한국 시단은 발표지면이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기도 하였다.
잡지등록이 나오고, 종로 관철동에 사무실이 열렸고 심상사 전용전화가 개통되었다. 74-6085. 1973년 5월부터 편집실이 활기를 띠기 시작하였다.
"바람직한 교양시지"를 캐치프레이즈로 내 건 이 잡지는 밤에 만들어졌다.
한양대 강의를 끝내시고 박목월 선생이, 외환은행 근무를 끝내고 김광림 선생이, 정음사 근무를 끝내고 김종해 시인이, 이건청은 한안공고 수업을 끝내고 관철동 사무실에 모였다.
그때는 12시 통행금지가 있을 때여서 10시쯤 사무실을 나와 집으로 달려가곤 했었다.
신혼 무렵 아내가 기다리고 있는 내 집은 중량교 너머 망우동, 김종해 시인은 더 먼 상계동이었다. 늘 숨이 차오른 채 통행금지 사이렌 소리를 듣곤 했었다.
1973년 10월호 창간호가 나오자 한국시단은 이것을 일대 사건으로 받아들였는데, 우선 잡지 필진의 수준이 그랬고, 잡지 편집의 참신성도 놀라운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박목월 박남수 김종길 이형기 김광림 편집 기획 스텝,
김종해 이건청 실무스텝이었다.
[心象](심상) 창간호가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면서 시 전문지의 기준으로 우뚝 서게 된 것은 다음의 몇 가지 잡지 특성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 월간 시 잡지로 매호 편집기획에 의해 원고를 청탁하였으며, 원고가 접수되면 원고료를 지불하기로 하였다.(한국 시잡지사 초유의 시도였다. 나중엔 그 일이 어렵게 되기도 하였다.)
2. 대학강단의 필진을 개발하여 시 잡지의 폭과 깊이를 넓히려 하였다. 서울대의 차주환 김현, 연세대의 이상섭, 고려대의 김우창 정종화, 이화여대의 민희식, 충남대의 손재준같은 분들이 그들이었다.
3. 작품수록의 경우 시 경향 등을 고려하여 청탁하고 수록 시인 좌담, 작품평 등을 곁들여 시단에 이슈를 제공하려 하였다.
4. 신인 작품 선정 방법을 1회 수록으로 모든 등단 절차를 끝내도록 하였다. 지금은 모든 잡지에서 1회 등단으로 하고 있지만 좋은 작품을 골라 1회에 등단할 수 있는 제도는 [心象](심상)에서 최초로 도입한 것이었다.
5. 작품과 시 이론의 건실한 발전을 추구하는 잡지를 지향하였다. 특히, 동양쪽의 시론도 개발하려 했었다. 서울대 차주환 교수의 '中國詩論'(중국시론) 연재는 [心象](심상)에서 최초로 기획한 동양시론(東洋詩論)으로 연재 후 단행본으로 출간되어 서양시론(西洋詩論) 일변도의 한국시에 큰 수확이 되었다.
6. [心象](심상)은 본격 광고를 싣는 시 잡지였다. 시인 편집진들이 광고 캡션을 만들기 위해 머리를 맞대곤 하였다.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OB" 같은 광고 캡션이 만들어 졌다. 맥스웰 커피 광고엔 모 시인의 회사 탐방 기사가 실렸고 담배 파이프 두 개와 낙엽 그림이 실려 있는데 목월 선생이 직접 그리신 것이다. 맥스웰 커피. OB맥주. 코카콜라. 계몽사. 삼중당 등의 광고가 실렸고, 잡지 운영에 큰 보탬이 되었었다
1978년 3월 24일 새벽 나는 전화 한통을 받는다. 박동규 교수가 울먹이며 선생의 별세를 알리고 있었다. 택시를 타고 댁에 도착하니 9시경. 선생은 주무시듯 자리에 누워계셨다. 우선, 신문 방송국에 선생의 별세를 알리는 전화를 해야 했었다.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 1978년 5월호 [心象](심상)을 "전권 특집 시인 박목월"로 펴내고 5년 동안 몸과 마음을 봉헌한 잡지 [心象](심상)을 떠날 수 있었다.
1959년 고등학생 때 목월선생 댁을 찾아뵌 적이 있었다. 이후 선생 슬하에서 선생께 옳은 시인되는 길을 익혔으며, [心象](심상)사무실에서 매일 선생을 뵙고 선생 호흡 속에 시인의 길, 삶의 길을 찾을 수도 있었다. 선생님 작고 후 나는 한양대 교수로 임용되었으며, 30여년 봉직 후, 2007년 정년을 맞게 되었다. 선생님께서 베풀어주시는 음덕이 하해같다.
[心象](심상) 창간 50년을 회상하며, 내 삶의 보랏빛 피리어드로 깊게 각인된 나의 '心象時代'(심상시대)를 바라보며 그 때가 내 삶의 금강석(金剛石)의 날들이었음을 알겠다. 다만, 선생 타계 후, 선생의 열정과 정신이 오래 이어지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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