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려있는 정책플랫폼 |
국가미래연구원은 폭 넓은 주제를 깊은 통찰력으로 다룹니다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진구 기자가 메모한 여의도의 모든 것 <43,끝> 마지막 이야기-우리는 정상인가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4년02월01일 16시49분
  • 최종수정 2023년09월12일 11시29분

작성자

메타정보

  • 2

본문

“해외에 밀사를 파견하시다니요? 이토통감이 격분하고 있습니다.” (이완용 을사오적·정미칠적)

“대한 황실에 지긋한 배려를 베풀었음에도 이리 배신을 하시니 일본 정부 또한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폐하께서 사직의 안위를 바라신다면 차제에 자결함으로써 사직의 위기를 모면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송병준 정미칠적)

“경들도 그리 생각하는가. 짐이 자결해야 마땅해 보이겠는가?” (고종)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중’ 

 

 뒤늦게 넷플릭스에서 ‘미스터 션샤인’을 봤다. 그리고 많이 창피하고 부끄러웠다. 이완용을 제외하면 을사오적 중 나머지 4명이 누구인지, 정미칠적은 7명의 이름은 고사하고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나만 무식해서 그런가?’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물어봤다. 을사오적 중 이완용 빼고 다른 사람이 누구인지 아냐고. 정미칠적이 뭔지 아냐고. 아무도, 정말 아무도 답한 사람이 없었다. 서울역 앞 노숙자들에게 물어본 게 아니다. 내가 물어본 사람들은 국회의원, 대학교수, 언론사 기자, 고위 공무원과 전직 고위 장관 등 우리 사회의 지도층이었다.

 

 광복 후 친일 청산을 제대로 못 한 업보 때문에 우리는 지금까지도 많은 갈등을 겪고 있다. 보수라는 이름을 참칭한 정당은 70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친일이라는 딱지를 뗄 생각조차 안 한다. 자칭 진보라는 정당은 친일 청산을 소리치지만, 이쪽도 정적을 제거하기 위한 친일 프레임 씌우기만 골몰할 뿐 진정한 친일 청산에는 별 관심이 없다. 만약 진심으로 제대로 된 친일 청산을 원했다면 일제 잔재를 청산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그 이전에 누가 나라를 팔아먹었는지부터 국민 모두에게 각인시켰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그들에게는 진정한 친일 청산보다 상대 정당을 친일파의 후예로 낙인찍고 부각하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 같다. 초등학교 다닐 때 모든 교과서 맨 앞에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로 시작하는 국민교육헌장이 있었다. 어린 마음에 그게 뭔지도 모르고 밤새 외우고 뿌듯해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 그때 국민교육헌장 대신 나라가 을사오적, 정미칠적의 이름을 외우게 했다면 어땠을까. 

 

 다른 어떤 것도 아니고 나라를 팔아먹은 자들이다. 반만년 역사에서 중요한 것이 많고 많겠지만, 그 반만년 역사를 중단시킨, 나라를 팔아먹은 행위보다 우리가 더 새기고 교훈으로 삼아야 할 일이 또 있을까? 일제강점기로 인한 고통은 당대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까지도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그런데 국민 대다수가 이완용을 제외하면 나머지 을사오적과 정미칠적의 이름을 모른다. 이게 정상일까? 빗살무늬토기가 언제 시작됐는지는 공부해도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의 이름은 알려고 들지 않는다는 것이. 

 

 솔직히 말했으면 좋겠다. 우리들이 알고는 싶어 할까? 내가 질문을 던진 그분들 중 몰라서 부끄러워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고는 친일 청산, 적폐 청산을 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고 애꿎은 학교 교가, 도로 지명을 바꾼다. 그것도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그에 앞서 해야 할 일이 있지 않은가. 시험에 안 나온다고? 내면 되지 않나. 아니 내야 하지 않을까? 수능에 점수를 주기 위해 내는 문제들이 가끔 있다. 어떤 해에는 보기만 읽을 줄 알아도 답을 맞힐 수 있는 문제가 출제된 적도 있다. 그런 문제도 내면서 을사오적의 이름을 주관식으로 쓰게 하는 문제는 왜 내면 안 될까.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했다고 하면 핏대를 올리면서, 일본이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하면 광분하면서 정작 우리는 나라를 망하게 한 사람들의 이름도 모른다. 우리가 과연 비정상적인 정치인들을 비웃을 자격이 있을까. 제정신이 아닌 정치인들에게 정신 차리라고 아무리 말한들 소용없을 것이다. 그들을 바꾸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정신 차리는 것뿐이다. 

 

PS/을사오적(乙巳五賊)은 1905년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을 주요 골자로 하는 을사늑약에 찬성했던 5명의 고위 관료를 말한다.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어이없지만 권중현의 조상이 권율과 이순신 장군인데, 권중현 부모가 각각 권율과 이순신 장군의 9대손이다. 장군님들이 얼마나 기가 막히셨을까.

정미칠적(丁未七賊)은 을사늑약 체결 2년 후인 1907년 체결된 한일신협약(정미7조약) 조인에 찬성한 7명의 내각 대신들을 말한다.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앞서 설명했지만, 을사오적도 겸하신 대단하신 분이다) 농상공부대신 송병준, 군부대신 이병무, 탁지부대신 고영희, 법부대신 조중응, 학부대신 이재곤, 내부대신 임선준이다. 송병준을 을사오적으로 아는 사람이 많은데 헷갈리지 말자. 

 

<ifsPOST>​ 

 ※ 이 글은 필자가 지난 2023년 8월 펴낸 책 “여의도에는 왜 정신병원이 없을까” <도서출판 북트리 刊>의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편집자>

2
  • 기사입력 2024년02월01일 16시49분
  • 최종수정 2023년09월12일 11시29분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