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구 기자가 메모한 여의도의 모든 것 <41> 우리는 가스라이팅 피해자입니다.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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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경찰이 일명 ‘가평 계곡 살인 사건’ 용의자(아내와 내연남)들을 공개 수배했다. 용의자들은 보험금을 타낼 목적으로 수영을 못하는 남편을 가평 계곡물에 뛰어들게 한 뒤 구하지 않아 숨지게 한 혐의를 받았다. 단순한 살인 범죄인 줄 알았던 이 사건은 이후 내막이 하나 둘 알려지면서 사람들을 경악케 했다. 아내에게 철저하게 정신을 조정당한 남편은 노예보다 못한 삶을 살았다.
명문대 출신 대기업 연구원인 남편은 모든 것을 아내가 시키는 대로 했다. 이 때문에 저축한 돈도 모두 날리고 거액의 빚까지 떠안았으며 자기 집마저 내주고 혼자 반지하에서 살았다. 남편의 연봉은 6000만원이 넘었지만, 돈을 모두 아내에게 보낸 탓에 죽기 직전까지 생활고에 시달렸다. 숨지기 전에는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사 먹어야 하는데 돈이 없다’며 아내에게 ‘만원만 입금해 달라’는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이쯤 되면 피해자에게는 미안한 얘기지만 ‘멀쩡한 사람이 어떻게 그 정도까지 조종당할 수 있지?’하는 생각이 드는 게 오히려 정상일 것이다.
전문가들은 이 남편이 아내에게 가스라이팅(gaslighting)을 당한 상태라고 진단했다. 가스라이팅은 상황 조작을 통해 타인의 마음에 자신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켜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만듦으로써 그 사람을 정신적으로 황폐화하고, 지배력을 행사해 결국 파국으로 몰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게 개인 간의 범죄에만 이용되는 게 아니다. 우리도 이미 수십 년째 여의도 사람들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다른 지역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우리 지역은 망한다든가, 우리 지역이 이 모양이 된 게 저 동네 출신들이 정권을 잡아서라는 식의 말이다. 이런 유형은 대선, 총선, 지방선거를 가리지 않는다. 이번 대선도 예외는 아니었다.
20대 대통령 선거가 막바지로 치닫던 2022년 3월,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 후보는 경북 경산 유세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와 관련, “민주당 정권 사람들이 뭐라고 했나. 대구 봉쇄, 대구 손절이라고 했다. 선거 때 표 안 나오는 지역이니 손절한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 가진 사람들이 대구·경북 지역 경제 산업을 살리겠나, 죽이겠나”라고 말했다. 또 “여기 오니 멀리 집 나갔다가 돌아온 것처럼 마음이 편하다. 제가 철들어 가장 오래 객지 생활한 곳이 바로 대구다. 나라를 제대로 만들겠다. 여러분 가슴이 뻥 뚫리게 만들어 드리겠다”라고 말했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도 다를 것은 없다. 그는 2022년 1월 광주 유세에서 “박정희 정권이 자기 통치 구조를 안전하게 만든다고 경상도에 집중 투자하고 전라도를 소외시켰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의 소년공 시절을 언급하며 “초등학교를 마치고 성남 공장에 취직했더니 관리자는 경상도 사람인데 말단 노동자는 다 전라도 사람이었다. 부산 공항은 국가 돈으로 지어주면서 광주 공항은 ‘네 돈으로 해라’ 하면 안 된다. 아들딸들에게 전화해 달라”고 말했다.
가스라이팅 범죄가 발생할 때마다 언론에서는 가해자들이 흔히 쓰는 말을 분류해 보도한다. “다른 사람들은 믿지 마. 네 편은 나뿐이야”, “내가 아니면 누가 널 챙겨줘?”, “네게 그러니까 무시를 당하는 거야”, “나를 위해 이 정도도 못 해줘?” 등인데, 위의 두 대선 후보 말도 결국 맥락은 같은 뜻이다. 이런 말을 수십 년째 듣다 보니 진짜로 텃밭에서 몰표를 주지 않거나, 텃밭에서 다른 정당 후보가 당선되면 나라가 뒤집히는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정말 많다. 그런데 아니다. 그렇게 되면 나라가 뒤집히는 게 아니라 나라가 흥한다. 대구에서 민주당 대선 후보 표가 많이 나오고, 광주에서 국민의힘 후보 표가 많이 나오는 게, 호남에서 국민의힘 국회의원이 많이 나오고, 경상도에서 민주당 국회의원이 많이 배출되는 게 나라에 이로운지, 해로운지는 유치원생도 안다. 그런데 수십 년 동안 이상한 가스라이팅에 세뇌돼서 이제는 딴 동네 사람을 찍는 걸 아예 금기처럼 여긴다. ‘상황 조작을 통해 타인의 마음에 자신에 대한 의심을 불러일으켜 현실감과 판단력을 잃게 만드는’ 가스라이팅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들은 유권자에게 끊임없이 ‘우리 지역이 낙후된 것은 저놈들 탓’이라고 속삭여 판단력을 흐리게 한다. 특정 지역을 혐오하는 지역감정은 이렇게 발생한다. 겉으로는 국민통합, 지역감정 타파를 외치지만 속으로는 가장 바라지 않는 사람들이 여의도 사람들이다. 정치적 텃밭을 유지하는데 가장 효과적인 무기가 지역감정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정치적 이득을 위해 상황을 교묘하게 꾸며 국민을 오도하고, 지배력을 행사해 결국 나라에 피해를 주는 행위가 국민을 가스라이팅한 게 아니면 뭔가.
가스라이팅의 첫 단계는 친밀감 형성이다. 처음부터 나를 믿으라고 하면 누가 믿겠나. 그들이 친밀감과 신뢰를 얻기 위해 쓰는 방법이 연고 강조다. 그런데 그 방식이, 일반 국민은 살면서 낯 뜨거워 평생 쓰지도 않는 화법으로 한다. 이런 예는 숱하게 많지만 마침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벌어져 소개한다. 국민의힘 당 대표를 뽑는 전당대회를 앞두고 유력주자들이 2023년 대구시당·경북도당 신년교례회에 참석해 한 말이다.
○○○ 의원(그는 이후 출마를 포기했다.) “우리 조상이 540년 전에 안동에서 강릉으로 이주했다. 처가도 구미다. 이만하면 ‘원조 TK’ 아니냐.”
△△△ 의원 “아버지 고향은 충남이고 어머니 고향은 경북 의성이다. 어머니 고향이 보수의 심장인 TK인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 전 의원 “제가 모태 TK다. 어머니가 저를 가지셨을 때 아버지가 대구 비행장에서 근무했다.”
늘 듣던 말이라 뭐가 이상한지 잘 모르겠는 분들도 계실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싶다. 당신이 사업 차 누군가를 만났다. 그런데 그 사람이 “저와 동향이시네요. 540년 전에 저의 조상님들이 그 동네 사셨거든요”라고 한다면 당신은 어떤 생각이 들까.
이건 다른 종류지만, 우리가 저들에게 당하는 가스라이팅 중 또 하나가 ‘국민화합을 위한 대사면’이라는 말이다. 대체로 감방에 있는 정치인들을 풀어줄 때 요구하는 쪽이나, 들어주는 쪽이나 다 같이 쓰는 말인데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하자. 죄지은 정치인을 풀어주는 게 왜 국민화합인가? 정치인들 화합이지. 국민 누가 죄지은 정치인을 풀어주자고 요구했단 말인가. 자기들이 요구했으면서. 그런데 이것 또한 너무 오랫동안 듣다 보니 이젠 세뇌돼서 여의도 사람들은 정치인 사면이 진짜 국민화합 차원이라고 믿는다. 언론도 그렇게 쓰고, 국민 중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잘못된 정치인들에게 세뇌된 국가와 국민이 걷는 길은 뻔하다.
수십 년간 특정 지역 출신을 ‘빨갱이’로 몬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게 몰린 사람들은 또 상대를 친일 앞잡이, 토착왜구로 몰았다. 자신들만 그렇게 말하고 행동하면 다행이건만 자신들을 지지하는 사람까지 그렇게 여기도록 세뇌시켰다. 불행히도 이 현상은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이게 가스라이팅이 아니면 뭐가 가스라이팅인가. 가스라이팅의 가장 극단적인 예는 히틀러의 독일, 스탈린의 소련, 그리고 김정은의 북한일 것이다. 이 외에도 남의 나라를 침공하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러’자 들어가는 나라 국민들이나 2021년 이상한 정치인을 신봉해 미국 국회 의사당을 점거한 사람들이나 다 나쁜 정치인과 권력자들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한 결과다. 더 나빠지기 전에 우리가 정신 차리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도 정치인들의 잘못을 지적하다가도 축구만 이기면 잊어버리고 좋아서 거리로 나오는 그런 나라의 국민이 될지도 모른다. 그들이 가장 바라는 게 그걸 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서는 안 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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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필자가 지난 2023년 8월 펴낸 책 “여의도에는 왜 정신병원이 없을까” <도서출판 북트리 刊>의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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