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구 기자가 메모한 여의도의 모든 것 <39> 아이에게 소홀했다던 어떤 아빠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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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봄이었다. 기고와 칼럼 등을 관리하는 부서에 있었는데 지금은 은퇴한, 높은 선배가 이메일을 보내왔다. 메일에는 기고 하나가 첨부돼 있었는데, 필자 관리 차원에서 전달하니 가급적 긍정적으로 검토해달라는 것이었다. 신문에 기고가 실리는 방식은 다양하다. 필자가 담당 부서 이메일로 직접 보낸 글이 실릴 수도 있고, 출입처에서 출입 기자를 통해 게재를 요청하기도 한다. 언론사에 있는 아는 사람을 통해 보내는 경우도 있는데, 대체로 어느 정도 ‘급’이 되는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 이용한다. 물론 담당 부서에서 직접 필자를 찾아 의뢰하는 경우도 많다.
기고를 보낸 이는 당시 우리 사회 최고의 상아탑 교수이자 대표적인 진보 지식인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전혀 모르는 사이였는데, 메일을 본 후에는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과는 달리 좀 좀스러운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쓴 글을 게재하고 싶어 전달하는 사람은 봤지만, 자기 자식의 글을 부탁하는 사람은 처음 봤기 때문이다. 그는 고등학생인 아들의 스펙 때문에 아비 노릇도 힘들다며 글의 수준이 안 되면 ‘노’해달라고 했다. 그 글은 그의 아들이 쓴 게 확실하다고 생각한다. 국내 최고 대학 교수인 아버지가 썼다고 보기에는 너무 조악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그냥 자식 사랑이 유별난 사람 정도로 생각했다. 그러다 1년쯤 지난 후 그가 모 언론에 쓴 칼럼을 보면서 좀스러운 것을 넘어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그가 재직 중인 대학 인터넷 커뮤니티에 한 학생이 ‘지역·기회균형선발’ 출신 학생을 비하하는 글이 올렸는데, 이게 대학 내는 물론이고 사회적 논란을 일으켰다. 그의 칼럼은 자신이 재직하는 최고의 상아탑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게 부끄럽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대학이 고교 졸업 시 우수성적을 뽐내는 데 급급한 학생들이 모여 ‘실력’보다는 ‘연고’를 쌓는 장소로 전락한다면 재앙 중의 재앙이다.” 그리도 또 미국 최고 명문 사립대 중 하나인 애머스트대학의 앤서니 마르크스 총장의 말도 인용했다. “SAT 과외를 받는 부유층 학생과 그 시간에 ’세븐 일레븐‘에서 일해야 하는 학생을 같은 기준으로 볼 수는 없다. (명문대의) 위로부터 3분의 2의 학생이 상위 4분위에서 오고 오직 5%의 학생만이 하위 4분위에서 온다면, 우리(명문대)는 확장되고 있는 경제적 격차를 해결하는 방책의 일부가 아니라 경제적 격차라는 문제의 일부이다”
대학이 실력보다 연고를 쌓는 장소로 전락하는 게 재앙 중의 재앙이라면, 지인을 통해 아들의 기고를 부탁하는 건 연고·연줄을 쌓는 게 아니란 말인가. 더군다나 그의 메일을 전달해준 사람과 그는 같은 대학 같은 과 선후배 간이었다. 명문대가 경제적 격차를 줄이는데 기여하지 못하고 오히려 확장하는데 일조하는 것이 문제라면, 최고 대학을 나온 아버지가 아들의 스펙을 더하기 위해 동문 선배라는 ‘빽’을 쓰는 건 뭔가. 이때부터 그의 말과 행동을 조금 더 관심 있게 지켜보게 된 것 같다. 그가 정말 사회적 소명 의식이 투철한 지식인인지, 아니면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인지.
그가 교수로만 머물렀다면 누구도 그의 속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운명의 장난인지 그는 일국의 장관이라는 공인이 됐고, 각종 의혹 제기가 끊이지 않자 스스로 기자 간담회를 요청해 무려 11시간 동안 해명했다. 그리고 “변명이 아니라 아이나 집안 문제에 소홀한 남편이자 아빠였다고 솔직히 고백합니다. 제 일에 바빠서…”라고 말했다.
당시는 제기된 각종 의혹에 대한 사실관계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을 때였지만, 나는 이 말을 듣고 다른 의혹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자녀 문제에 대한 그의 해명은 거짓말이라고 확신했다. 아들의 스펙을 위해 기고 부탁까지 하는 아빠가 자녀에 소홀했다니…. 그는 완전한 내로남불의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기고 부탁 정도의 일은 부모로서 뭔가 해줬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도 부족한, 말할 가치도 없는 낮은 수준이라 진심으로 아이들에게 소홀했다고 생각한 걸까. 처음에는 내로남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뒤에 그들 부부가 한 일이 하나씩 드러나면서 어쩌면 그 정도는 해준 것 축에도 못 든다고 진심으로 생각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가 쓴 한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학생들에게 잠시라도 수험서를 덮으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입시나 취업 준비가 아닌 다른 무엇을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중략…) ‘스펙 사회’의 요구를 거부하고 재미와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삶을 살 때 비로소 자존감을 지킬 수 있다.”
2017년 대선을 앞두고 한 언론 인터뷰에서는 당시 시점에서 가장 중요한 진보의 가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능력과 노동에 따라 공정하게 재화를 분배하는 것이 진보의 중요한 핵심 가치 중 하나다. 공정이 실현되면 ‘격차 사회’ 현상이 해소된다. 최순실 사태로 드러난 대한민국의 민낯은 기득권층이 힘과 돈을 쥐고 부를 세습하는 모습이다. 정유라가 ”돈도 실력이야“라고 말했는데, ‘세습 자본주의’의 핵심을 이야기했다고 본다. 계층 상승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이 사라질수록, 흙수저가 노력을 해도 금수저로 가기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을수록 분노는 커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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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필자가 지난 2023년 8월 펴낸 책 “여의도에는 왜 정신병원이 없을까” <도서출판 북트리 刊>의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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