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구 기자가 메모한 여의도의 모든 것 <34> 초등학교 반장 선거도 그리 안 하는데…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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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고 말을 좀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
“○○○ 위원장! 천장만 보고 있으면 어쩌자는 겁니까?”
“….”
“지금 새벽 1시가 넘었는데 시내판 마감 때까지 버티겠다는 겁니까?”
“….”
2007년 9월 5일 오후 대통합민주신당 국민경선위원회가 대선 예비경선(컷오프) 결과를 발표했다. (더불어민주당의 전신인 대통합민주신당은 2007년 8월 열린우리당 탈당파가 주축이 돼 창당한 정당으로 이후 열린우리당과 다시 합당해 2007년 대선을 치렀다) 예비후보 9명 중 손학규 정동영 이해찬 유시민 한명숙 후보는 통과하고, 천정배 추미애 신기남 김두관 후보는 떨어졌다. 각 후보의 순위와 득표율은 공개하지 않았는데, 본선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기 위해 컷오프 통과자 명단만 발표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예비경선은 거의 관심 받지 못했다. 본경선도 아닌데다, 누가 대통합민주신당 대선후보가 돼도 대부분의 사람은 이미 대선후보로 확정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당선을 사실상 기정사실로 여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작아야 마땅한 기사를 엄청나게 큰 기사로 만들었다. (정말 신통한 재주다) 정치면 2단 기사 정도였을 것이 1면 기사로 커진 것이다. 단지 기사 제목이 달라졌는데, 원래대로라면 ‘대통합민주신당 본경선 5명 진출’이었을 제목이 ‘순위 뒤바꿔 발표했다 정정 소동…표심 왜곡 시비도’로 바뀌었다. (이 제목은 동아일보 기사지만 다른 언론도 대부분 비슷했다.)
처음 예비후보 9명 중 탈락자 4명을 발표했을 때만 해도 일이 이렇게 커지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갑자기 오후 4시쯤 국민경선위원회 ○○○ 부위원장이 애초 방침을 바꿔 후보들의 컷오프 통과 순위를 발표했다. 1위 손학규, 2위 정동영, 3위 이해찬, 4위 한명숙, 5위 유시민. 나는 지금도 왜 이 사람들이 애초 방침을 변경해 순위를 공개했는지 이해가 안 간다. 국민경선위는 언론에서 요구했다고 했는데 그건 그냥 하는 말이고 진짜 이유가 있었을 거라 생각한다. 궁금해서 개인적으로 물어본 기자는 있었겠지만 그게 정말로 기사 가치가 있어서 물어본 것은 아닐 것이다. 앞서 말한 대로 본경선도 아닌 예비경선이라 컷오프 통과 순위와 득표 현황까지 자세하게 쓸 기사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위 손학규 후보에게 별로 뒤지지 않는다는 정보를 입수한 정동영 후보 측이 정확한 득표 차이도 공개하라고 요구했고, 국민경선위는 정 후보 측에 구체적인 득표 수치를 알려줬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컷오프 순위가 바뀌었다’, ‘득표 결과가 조작됐다’라는 등의 이상한 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저녁 들어 분위기는 점점 더 이상하게 흘러갔다. 결국 나를 포함한 각 사 기자들 수십 명이 ○○○ 부위원장의 국회의원실로 쳐들어갔다. 그가 사실상 국민경선위 실무를 모두 총괄했기 때문이다. 그는 굉장히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담배만 피웠다. 찾아간 기자들이 하도 어이가 없어 한 마디씩 질문을 했지만, 그는 꿀 먹은 벙어리처럼 묵묵부답이었고, 2시간이 넘게 단 한마디의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이 버티기가 언론사의 최종 마감 시간을 넘겨 어떻게든 기사가 안 나가도록 만들려는 의도였다고 생각한다) 결국 본인도 지쳤는지 그는 밤 11시 반에야 처음 발표한 순위를 정정하며 “실무자 착오로 일반 여론조사 반영 비율을 잘못 대입해 곱하는 바람에 이렇게 됐다. 합산 작업은 실무자 1명이 맡았는데 이를 재차 검증하거나 크로스 체크할 사람은 두지 않았다. 후보들의 재검표 요구가 있으면 조사 결과를 낱낱이 공개하겠으며, 이런 사태가 빚어진 데 대해 책임을 지겠다”라고 말했다. 컷오프 순위 발표 후 무려 7시간이나 지난 후였다.
우리는 기가 막혔다. 집권당의 대선후보 선출과정이 이렇게 허술하다는 것에 놀랐고, 잘못했으면 실무자 실수로 엉뚱한 대선후보가 탄생하는 일도 벌어졌을지 모를 엄청난 일을 ‘착오’라는 말 한마디로 대충 넘어가려는 행태에 또 놀랐다. (실수라는 것도 그들이 한 말일 뿐 전모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정말 실수였는지, 아니면 의도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우리는 어느 부분에서 누구에게 얼마를 더 부풀려 더해줬는지, 왜 2, 3명이 크로스체크를 하지 않고 한 명이 맡도록 했는지, 발표하지 않기로 한 순위와 득표수를 공개한 이유가 정확하게 뭔지 물었지만, ○○○ 부위원장은 일절 말하지 않았다. 우리가 그의 방을 나온 것은 새벽 1시 반쯤이었던 것 같다. 더 말할 것 같지도 않았고, 말해봐야 그날은 기사를 더 이상 집어넣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오후 대통합민주신당 국민경선위 김덕규 김호진 공동위원장, ○○○ 부위원장은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당시 오충일 당 대표는 “의도적이었던 건 아니었으나 당과 후보들, 우리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준 중대한 실수”라고 말했는데 나는 그 정도로 끝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집권당의 경선 관리가 그렇게 엉망인 게 말이 되느냐는 차원이 아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사유 중 하나가 새누리당 공천 개입이다. 만에 하나라도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 후보 선출과정에서 어떤 음모가 있었고, 컷오프 과정에서 벌어진 순위 변경이 그런 작업을 하던 중에 벌어진 것이라면…. 물론 알 수는 없다. 그래서 수사에 버금가는 전모를 밝히는 작업이 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물의를 일으켜 죄송하다”라는 말로 모든 것을 덮고 갔다. 초등학교 반장 선거도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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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필자가 지난 2023년 8월 펴낸 책 “여의도에는 왜 정신병원이 없을까” <도서출판 북트리 刊>의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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