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려있는 정책플랫폼 |
국가미래연구원은 폭 넓은 주제를 깊은 통찰력으로 다룹니다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민(畏天本民) <26> 국정(國政)의 근본 원칙과 목표 V. 바른 국정을 도운 인재들 ⑦김종서[金宗瑞(1383-1453), 시호 忠翼公](中)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2년07월01일 17시1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0

본문

[사헌부 문책상소]

 

세종의 명을 받들어 혼신의 힘을 쏟아 북변을 지키고 있던 김종서에게 또 사헌부의 상소가 날아들어 왔다. 지난 해 경원과 회령에서 3천 2백 명이나 죽었는데도 그 지역 책임관들을 전혀 문책하시지 않음이 온당치 않다는 것이다. 도관찰사 정흠지, 판회령부사 이징옥, 판경원부사 송희미는 물론 도절제사 김종서의 책임이 매우 큼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처벌하지 않는 것은 온당치 않으므로 그들의 죄를 다스리라는 것이다. 특히 김종서는 책임을 덮으려고 사망자 수를 줄여서 말하기까지 했다고 탄핵했다. 세종은 그들의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인정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민감하고 중요한 시점에 더 큰 일이 우려되므로 문책을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어찌 죄가 없다고 하고 법으로 다스리지 않는 것이겠느냐.

    새로 설치한 사읍은 민심이 쉽게 흔들리므로 열심히 진무하고 

    안심시켜 모으려고 할 때에 조그마한 실수로 가볍게 책임자를 갈아

    버리면 민심이 크게 소요하여 영영 성과가 없을 것이다. 또 역질에 

    걸려 죽은 자의 숫자를 제멋대로 올린 것은 그 사실만 보면 죄가 없지  

    않으나 그 심정을 보면 용서할 만하다. 죽은 사람 수는 한 두 번의 계   

   산으로 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내가 깊이 생각해 보니 과연 그럴 만   

   한 이유가 있구나 싶다. 이것이 어찌 기망죄가 된단 말인가. 모두 사면  

   하려고 한다. 너희 사헌부직원들이 내 뜻도 모르고 감히 상소하였으나 

    이후로는 또 다시 감히 말하지 말라.      

    (予豈謂無罪 而不置於法 新設四邑 民心易搖 方鎭撫安集之時 若以小過 

    輕遞其任 則民必騷擾 永無成效矣 且疫死人數加減啓達 觀其事 

    則不無罪焉 論其心 則猶有可恕 四邑人數 未可一二計也 予惟思之 

    果有其理 是豈欺罔哉 肆蓋赦之 今爾憲司 不知予意 敢進封狀 

    自此以後 勿復敢言 : 세종 18년 5월 16일)”  

 

[사직요청과 불허]

 

김종서는 세종 20년 11월에 함길도 도절제사 직을 그만두기를 원했다. 이미 만 5년이 넘었고 또 제대로 이루어 놓은 일도 없이 걸핏하면 실수와 잘못만 저질렀다고 자책했다. 건강도 좋지 않고 또 내년 운세가 매우 나쁠 것 같은데 자기는 어떻게 되든 문제가 없으나 그것이 국가의 안위문제가 되면 안 되는 것이므로 사임의 뜻을 밝혔다. 세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북문의 자물쇠는 적임자가 아니면 맡길 수가 없소. 근년 이래로

     변경이 조금 조용해지고 인심이 차차 안정되는 것은 경의 공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4진을 신설했지만 아직 견고하지 못하고 야인들이 

     처음으로 이주해 들어오지만 믿기도 어렵소. 나의 기대는 매우 큰데 

     어찌 경은 그 직을 급히 사임하려는 생각을 하오. 사임하지 말고

     끝까지 내 소망을 따르시오.   

     (北門管鑰 非其人 不可任 近年以來 邊境稍息 人心漸安 非卿之成效而何

     今四鎭新設而未固 野人初附以難信 予之期望方深 而卿何遽欲辭其任乎

     其勿辭免 以終予望 : 세종 20년 11월 14일)”

 

곧이어 세종은 김종서를 위로하는 뜻에서 안장을 갖춘 말을 하사하고(세종21년 2월 17일), 공주에서 병을 앓고 있는 종서의 처에게는 고기류를 충분히 공급하도록 충청감사에게 지시하였다(세종 21년 윤2월 15일-3월 5일). 또 그 해 6월에는 품계를 가정대부(종2품)에서 자헌대부(정2품)로 높여 주었다.

 

[불명예 퇴진]

 

김종서가 사임을 호소한 세종 20년 말부터 김종서에 대한 흉흉한 소문들이 나돌았다. 모친 장례 후 복귀하는 도중에 기첩을 데리고 갔다는 소문과 홀라온 여진족이 기생을 바쳤는데 그 기생을 서울로 보냈다는 스캔들이 나 돌았다. 밭을 주고 빼앗는 것을 자기 마음대로해서 원성이 높다는 말도 들렸다. 그런 소문을 근거로 사헌부가 탄핵하려다 중단할 일도 있었다. 김종서가 자신의 억울함을 세종께 낱낱이 해명하면서 소문이 밖으로 드러났다. 김종서의 해명(세종 22년 1월 17일)의 요지는 이렇다.:

 

  (i) 군사 훈련을 과도하게 하다 보니 병졸들의 불만과 분노심이 클 것이다,  

  (ii) 변경의 특성 상 백성들의 이동을 까다롭게 관리하다 보니 이에 대한

      불만도 클 것이다,

  (iii) 이런 불만자들이 이런저런 말을 만들어 낼 것이다,

  (iv) 그러나 제게 털끝만한 불의라도 있다면 틀림없이 밖으로 나타나 

      하는 일마다 그르칠 것이다,

  (v) 만민이 보고 있으며 삼군이 듣고 있으니 감추고자 하여도 감출수가 

      없으며 판별하기가 어렵지 않다.

  

예로부터 큰 일을 하는 신하에게는 항상 비방과 헐뜯음이 따라다니니 겁이 날것은 없지만, 이제 풍이 들어 반신불수가 되어 만약을 써도 낫지 않으니 여생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고 눈물을 흘렸다. 이 때 김종서 나이는 58세였다. 김종서의 해명을 보고 깜짝 놀란 세종은 도승지 김돈에게 이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대충 내막을 들은 그것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고 확신했다. 절대로 그럴 인물이 아니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 모함 뒤에는 반드시 누군가 개재되어 있을 것이라고 직감했다. 이틀 뒤 모든 신하를 다 물리고 도승지 김돈에게 말했다. 

 

   “김종서의 공은 작다고 할 수 없다. 새 백성들을 모아 다스리고

    여러 종족들을 투항토록 하여 동북일방을 안정되고 큰 변란이 

    없었던 것이 다 그 공이 큰 점이다.   

    (金宗瑞之功 不謂小矣 撫集新民 招降諸種 使東北一方晏然無警 

    此其功之尤者也 : 세종 22년 1월 19일)”

 

그리고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 종서의 공은 매우 크다. 소인배들이 이간질 할 수가 없을 만큼 크다.

     이제 새로 네 진에 사람을 모아야 할 때에 종서를 교체할 수는 없다.

     그러나 네 진이 이미 안정되어 그의 공이 완성되었고 또 바깥 진지에       나간 지 7-8년이 되었으며 가사를 돌보지 않은 점도 가련하다.

     장수를 선택하여 부장(副將)으로 삼고 종서가 친임 할 때 매사를 같이 

     의논하여 변방의 일을 익히게 한 뒤 종서를 대신하면 좋겠다. 

     (宗瑞之功甚大 非小人所能間也 今當新附人民安集四鎭之時 宗瑞不可遞也       然四鎭其安 而厥功旣成 則出鎭于外 今其七八年 不顧家事 亦可憐也 

     欲擇將爲都節制使者 以爲副將 使宗瑞親任 每事同議 習知備邊之事

     則可使代宗瑞 : 세종 22년 1월 19일)”

 

여기까지는 명예퇴진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사이 김종서에 관한 새로운 정보들이 입수되면서 김종서의 교체가 결정된다. 왕의 지시에 따라 황희의 집에서 비밀회의가 열렸다. 좌승지와 삼 의정의 비밀회의 결론은 김종서를 좌부승지 이세형으로 교체하는 것이었다(세종 22년 6월 19일). 김종서에 대한 세종의 평가는 완전히 달라졌다. 야인들에 대한 김종서의 무리한 조치가 밝혀진 것이다. 

 

   “본래 유학선비로서 체모가 왜소하고 또 무예도 모자라며 관리업무만   

    잘하므로 장수로는 적절치 않으나 일에 임할 때마다 부지런하고 삼가   

   하여 정밀하고 상세하게 처리했다. 네 진을 설치할 때 모든 조치가 적    

   절하고 신속하게 효과를 보아 역시 포상할 만하므로 작은 허물은 덮고   

  교체론을 일축했던 것이다. 이번에 오도리 동창과 범찰을 대할 때 번번   

  이 위압과 난포함으로 하고 관용과 인자함을 보이지 않아 끝내 모든   

    야인들을 도망가게 한 것은 실로 무안할 뿐이다.반드시 중국이 비웃을  

    것이다.(本以儒臣 體貌矮小 且短於武藝 長於吏才 不宜爲將 但取其臨事   

   勤謹處事精詳耳 至於四鎭新設之時 處置得宜 驟見其效 此亦可褒也 

    以故雖有小過 不敢遞論 今者待吾都里童倉 凡察 輒以威猛而不施寬仁 

    終使野人擧種逃叛 誠可愧赧 必將胎笑於中國 : 세종 22년 7월 5일)” 

 

함길도 도절제사를 이세형으로 교체할 때에 김종서의 발령은 나지 않았다. 그것은 이세형으로 하여금 김종서의 곁에서 충분히 업무를 체득하게 함으로서 교체에 따르는 위험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이세형이 부임하고 5개월이 지나 김종서는 형조판서로 제수되고(세종 22년 12월 3일), 일 년 뒤인 세종 23년 11월에는 예조판서가 된다.

 

[사헌부 탄핵] 

 

세자의 섭정 문제로 세종과 의정부 및 육조 대신들 간의 갈등과 긴장이 한창 고조되고 있는 가운데 사헌부로부터 예조판서 김종서에 대한 탄핵이 올라왔다. 업무를 태만히 하고 있고, 사헌부 직원을 우습게보고 경멸하였으며 말이 광패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예조판서 김종서는 예조의 수장이 되어 제사를 관장함에 있어서

    신속하게 거행하지 않았으며 문서를 보내어도 늑장을 부렸으며  

    그 사유를 조사하는 과정의 언사가 심히 광패하고 사헌부의 기강을 

    멸시하여 그 죄가 작지 않으므로 임금님의 재가를 바랍니다. 

    (禮曹判書 金宗瑞 以一曹之長 所掌祭祀 不卽檢擧 文移稽緩 又於劾問之際  

    辭甚狂悖 蔑視臺綱 其罪不細 伏望上裁 : 세종 26년 12월 18일)”

 

네 가지 죄목의 심각한 탄핵이었다. 김종서는 일단 임금께 적극적으로 해명하였다. 자기 잘못이라면 열배 백배 사죄 드리겠지만 이번 건은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부인하고 나섰다. 다만 조사과정에서 당황하여 잘못 자백하고 스스로 뉘우치고 책망하여 몸 둘 바를 몰랐으나 ‘광패’하다는 말은 너무 충격적인 부끄러움이라고 했다. 자신만이 아니라 대대손손 불명예가 계승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광패’한 자가 예조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고 하면서 사직을 요청했다. 세종은 위로하듯 말했다.

 

   “대저 사법기관에서 사람의 잘못과 정상을 따짐에 있어 어떻게 

    한자 한자 글자마다 상세하게 해석하고 풀이하겠는가. 내가 듣고

    믿으면 부덕한 게 되는 것이고 내가 듣고 믿지 않으면 부덕한 것이 

    되지 않는 것이니 어찌 후세에 누가 되겠는가. 경은 이 일로 

    부끄러워하지 마라.

    (大抵法司論人過精 豈可字字以詳解之耶 人君聽而信之 則爲不德矣 

     聽以不信 則未可爲不德也 豈爲後世之累哉 卿勿以爲愧

     : 세종 26년 12월 19일)”

(다음에 계속)

 

3473e5f34e8d4b18da5632be76a1b4e3_1648271
3473e5f34e8d4b18da5632be76a1b4e3_1648271
3473e5f34e8d4b18da5632be76a1b4e3_1648271
3473e5f34e8d4b18da5632be76a1b4e3_1648271

 

0
  • 기사입력 2022년07월01일 17시10분
  • 검색어 태그 1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