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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민(畏天本民) <21> 국정(國政)의 근본 원칙과 목표 V. 바른 국정을 도운 인재들 ⑤ 맹사성[孟思誠(1360-1438), 시호 文貞公](上)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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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2년05월27일 17시1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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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5 맹사성[孟思誠(1360-1438), 시호 文貞公]

 

맹사성은 고려 최영장군의 손녀사위로 우왕 12년(1386) 문과 일등으로 급제하여 춘추관 검열이라는 직책으로 관문에 들어섰다. 맹사성의 초기 관직생활은 유난히 곡절이 많았다. 태조 때 예조의랑으로 이씨조선 정부에 발을 들여 놓았으나 개국공신 정희계를 똑바로 기록하지 못했다는 죄로 파면되었다. 태종 3년(1403) 윤11월 좌사간대부로 다시 복직되었지만 이번에는 사간원과 사헌부의 권력다툼에 휘말리게 된다. 이 때 맹사성이 속해 있던 사간원과 사헌부 사이에는 묘한 갈등이 있었다. 원래 법을 집행하는 세 핵심기관, 즉 사헌부, 사간원 및 형조의 삼성(三省)은 번갈아가며 범죄를 심문하고 기소를 하는 협력 관계에 있는 기관이다. 그런데 형조의 관리가 노비문제를 잘못 판결한 것이 드러나자 사헌부가 잘못한 형조관리를 처벌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간원은 형조 편을 드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좌사간대부 맹사성은 일단 원안에 대해 태종의 재가를 받은 다음에 형조의 잘못을 탄핵하겠다고 하면서 사헌부 의견을 묵살한 것이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사간원이 오히려 사헌부의 약점을 지적하고 나서자 사헌부는 사간원이 반격해 온 것으로 판단하고는 선제적으로 형조의 노비 오판문제를 탄핵하면서 사간원을 공범으로 몰아 간 것이었다. 사헌부 탄핵의 내용은 형조와 사간원이 사사로운 인정이나 뇌물 등을 받고서 공정하지 않은 법집행을 자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태종 4년 1월 18일). 이 일로 맹사성은 결국 고향에 가까운 온수(온양)로 쫓겨난다. 이 때 태종의 맏사위인 이백강의 노비가 문제의 핵심이었는데 맹사성은 이백강에게 유리하도록 진행되는 사건의 과정을 미리 알려준 게 화근이 되었다. 두 번째 파면인 셈이다.

     

[조대림 모반 무고사건]

 

맹사성은 거의 일 년 만인 태종 5년 1월 동부대언으로 다시 복귀했다. 그리고 태종 7년 9월에는 예문관 제학의 신분으로 세자와 함께 정조사로 북경에 다녀온 뒤 곧 한성부윤이 되었고 겸하여 세자의 우부빈객이 되었다. 이 때 까지는 순탄대로처럼 보였다. 바로 이즈음에 조대림 모반 무고사건이 터졌다(태종 8년 12월 5일). 조대림은 태종의 둘째 딸 경정공주의 남편이고 조선개국 공신 조준의 아들이다. 이런 조대림이 병권을 쥐고서는 모반을 도모한다는 무고가 올라온 것이다. 무고를 한 목인해는 태종의 시종을 잘 받들고 또 애꾸눈에 활도 잘 쏴 대호군이라는 직책을 하사받은 사람이었다. 목인해의 처는 조대림의 집종이었으므로, 그 인연으로 목인해는 조대림에게 접근한 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무장준비를 단단히 해야 하며 자기의 도움이 꼭 필요할 것이라고 부추긴 것이다. 특히 정변이 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상세하게 가르쳐주었다. 조대림은 무슨 정변이라도 일어난다면 목인해는 진정으로 자기를 도와줄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목인해 생각과는 달리 조대림은 전혀 정변을 일으킬 생각은 없었다. 목인해가 정변 운운한 것은 정변을 일으킬 심사가 있을 것으로 생각해서 그런 것이었는데 정작 조대림은 그럴 위인이 아닌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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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인해는 큰일 났다 싶었다. 조대림이 입만 뻥끗한다면 자기는 끝나는 셈이다. 목인해는 조대림을 죽이기 위해 계략을 생각해냈다. 목인해는 이숙번을 찾아가서는 조대림이 역모를 일으켜 이숙번 무리를 죽이려고 하고 있다고 모함했다. 그리고 이숙번에게 “장인과 딸이 사위를 욕하였는데 그 말을 딸이 사위에게 옮기자 사위가 장인을 죽인 일이 있다”고 까지 조대림이 말하더라고 모함하였다(태종 8년 12월 8일). 이숙번은 즉각 이 사실을 태종에게 알렸다.

 

이숙번의 보고를 받은 태종은 목인해를 직접 불러 그 말을 어떻게 믿겠느냐고 물었다. 목인해는 자기 무고를 진실처럼 꾸미기 위해 조대림에게 가서는 조대림을 치고자 하는 군사가 공격할 것이니 군사를 움직여 방어하라고 해 놓고는 태종한테 가서는 조대림이 군사를 움직일 것이라고 비밀리에 알려줬다. 조대림이 어리고 용렬하여 모반을 할 인물이 아님을 천하가 다 알고 있으므로 주모자로는 조대림이 잘 아는 재상급 고관인 조용으로 엮었다. 태종은 조대림을 시험하기 위해 조대림이 군사를 움직이는 때를 기하여 군대를 모으는 호각을 불었다. 어디로 군대가 움직이느냐에 따라 역모이냐 아니냐가 갈라지는 순간이었다. 

 

태종의 호각에 응하여 궁궐로 오면 조대림의 군사는 모반이 아닌 것이요 궁궐로 오지 않으면 태종의 군사동원령을 거부하는 것이 되어 모반이 되는 것이다. 게다가 조대림을 치기 위해 들어오는 이숙번 군사와 마주쳐 조대림이 노상에서 죽을 수도 있다. 조대림 군사가 이동하고 있던 중에 궁궐 쪽에서 갑자기 호각소리가 났다. 궁궐에 무슨 비상사태가 난 것으로 알고 조대림은 목인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군사를 이끌고 궁궐로 향했다. 궁궐에 도착한 조대림은 급히 말에서 내리려 했으나 목인해는 모반의 모습으로 보이게 하기 위해 말에서 내리지 말도록 말렸지만 조대림은 뿌리치고 내려 궐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이 순간 목인해가 조대림이 모반을 한다고 외치면서 궁궐로 들어간 것이다. 태종은 조대림을 잡아 가둔 뒤 장 20대를 때리고, 또 64대를 더 때려 국문했지만 불라고 해도 불 것이 없는 조대림은 승복하지 않았다. 태종도 황희도 조대림이 모반할 사람이 아닌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목인해를 심문할 차례였다. 싱겁게도 장 10대만에 목인해가 모든 것을 자백했다. 이제 목인해는 환열형(몸을 찢어 죽이는 벌)에 처해지게 되었다.


[맹사성이 죽을 뻔하다.]

 

대사헌 맹사성을 비롯한 대간 전원이 궐에 나와 목인해의 형 집행을 중지해야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조대림이 목인해의 유혹을 왜 즉시 임금께 보고하지 않았는지와 ‘사위가 장인을 죽였다’는 말의 진실 여부를 추궁해야 할 것이며 더욱이 태종의 동서인 조박이 죽어 상중이므로 처형할 상황이 아니라고 지적했다. 태종은 격노했다. 조대림은 꾀임에 빠진 것일 뿐이고 평생 따귀한데 맞아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 억울하기 짝이 없을 텐데 어디 다시 자기 사위를 추국을 한다는 것이며 대역죄에 무슨 대신의 상례 따위가 중요하냐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대간들의 주장 또한 모양이 그럴듯하니 일단 조대림을 다시 소환해 목인해와 다시 대질시켰다. 결과는 모든 것이 목인해의 모함인 것이 판명되었다. 태종은 곧바로 대사헌 맹사성과 좌사간 유백순, 지평 이안공, 정언 박안신, 우사간 서선, 지사간 박고, 우정언 이안유를 가두고 왜 목인해의 사형집행을 늦추자고 했는지, 누가 왜 목인해를 말고 다른 주범을 색출해야 한다고 했는지 추궁하였다. 태종은 사간원, 사헌부의 대간들이 ‘조대림을 죽임으로써 왕실을 허약하게 만들려 했다(모약왕실,謀弱王室).’고 생각하고 격분했다. 사간원과 사헌부가 순순히 자복하지 않고 버텼지만 무서운 매를 들이대자 모두 ‘모약왕실’을 승복했다. 자포자기 상태의 정언 박안신이 맹사성에게 “서로 얼굴이나 한 번 보고 말이나 한마디 하고 죽자.”라고 속삭였다. 곁에 있던 맹사성은 작은 쪽지에 글을 적어 박안신에게 건네줬다.

 

   “충신이 직무로 죽음을 당하는 것은 임금은혜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며       조상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다.

    (忠臣死於其職 爲不負君恩 爲不負祖宗矣 : 태종 8년 12월 9일)”   

 

죽더라도 떳떳하다는 말이다. 맹사성은 죽을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었다. 태종 또한 이들 대간 중에서 맹사성과 박안신과 이안유와 맹사성의 아들 맹귀미 네 명은 극형에 처하도록 결심하고 있었다. 서둘러 사형을 집행할 것을 독촉했다(태종 8년 12월 11일). 이숙번이 나서서 말렸으나 태종은 이숙번에게 조차 왜 대신이 남의 사주나 받고 나서냐고 질책했다. 이숙번이 사주를 받은 것도 없고 두려울 것도 없다고 대꾸하자, 태종은 자기가 알아서 잘 처리할 것이라고 화를 냈다. 이숙번도 지지 않고 이렇게 쏘아붙였다. 언젠가 ‘모진 매 앞에서는 못 구할 것이 없다.’라고 한 태종의 말을 상기시키면서 맹사성도 그런 형편 아니었겠느냐고 설득했다. 흥분이 좀 가라앉자 태종은 이숙번과 같은 재상도 말리고 나서는데 왜 지신사 황희는 가만 듣고만 있느냐고 호통을 쳤다. 이숙번도 주변의 대신들을 꾸짖었다. 어찌 임금 눈치만 보면서 옳은 말을 하지 않느냐고 질책했다.

 

    “임금이 자기가 한 말이 옳다고 우기면 주변 신하들이 바로잡기가 

     매우 어렵다. 이것이 옛사람들이 경계하는 것이다

     (君出言自以爲是 卿大夫莫敢矯其非 古人所戒也 : 태종 8년 12월 9일)”  

   

이숙번은 만약 임금이 이 사람들을 사형시킨다면 자기는 머리를 깎고 도망갈 것이라고 말했다. 형 집행을 놓고 옥신각신 하는 동안 권근, 하륜, 조영무, 성석린 등 원로대신들이 모두 나와 사형집행을 말렸다. 하륜의 말은 정말 대담했다. 섣불리 신하를 죽여 두고두고 조롱당한 한나라 선제를 빗대어 말했다.

 

    “신은 동방에는 오늘과 같은 왕은 없으리라 생각했으며,

     이런 일이 벌어 지리라고도 알지 못했습니다.    

     (臣意東方未有今日之主 不知乃有此事也 : 태종 8년 12월 9일)”    

   

태종을 한나라 폭군 선제에 비유하는 것으로 들릴 만한 말이다. 자칫하면 환열형을 면하기 어려울지도 모르는 위험한 발언이었다. 그러나 대소 신료들의 극간에 밀려 태종은 물러섰다. 좀 더 생각해 보겠다고 말했다. 빨리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형은 집행 될 수밖에 없다고 주변에서 재촉하자 할수없이 대신들의 의견을 좇기로 했다. 맹사성은 장 1백대에 한주(韓州,지금의 충청도 한산) 향교의 재복으로 내쫓고 박안신은 영덕으로 귀양을 보냈다. 둘 다 반은 죽었다가 살아났다(태종 8년 12월 12일). 세자는 이제 중국에 정조사로 갈 때 맹사성과 같이 갔으므로 강직하고 솔직한 그의 인품을 잘 알았다. 태종에게 맹사성의 용서를 조심스럽게 구했고 태종도 흔쾌히 받아들여 맹사성은 풀려나고(태종 9년 윤4월 7일), 곧 충주목사로 부임했다. 좌정승 하륜의 천거로 풍해도 도관찰사로 옮겨 간 맹사성은 태풍피해 보고를 제대로 하지 못하여 다시 파직되었다가(태종 12년 8월 21일), 4년 뒤에 이조참판으로 중앙에 복귀했다. 그 후 예조, 호조를 거쳐 공조판서로 있으면서 태종 18년 6월 5일 세자(충령)의 우빈객이 되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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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2년05월27일 17시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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