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의 정치리더십 - 외천본민(畏天本民) <16> 국정(國政)의 근본 원칙과 목표 V. 바른 국정을 도운 인재들 ②최윤덕[崔閏德(1376-1445), 시호 貞烈公, 배향공신]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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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2 최윤덕[崔閏德(1376-1445), 시호 貞烈公, 배향공신]
최윤덕은 고려 때 양장공 최운해의 아들로 음직으로 벼슬에 나왔다. 아버지 운해와 함께 영해에 쳐들어온 왜적을 물리치는 공이 있었으므로 태종이 즉위하자 역마로 그를 불러 영해전투의 상황을 묻고는 바로 부사직으로 등용시켰다. 태종 11년에는 경성절제사로 외방에 나갔으며 우군총제가 되었다. 세종은 즉위하는 그 해 최윤덕을 중군도총제로 임명하였고 그 다음해 의정부 참찬으로 임명하였다. 대마도 정벌 때에는 삼군 도절제사로 종군하여 공을 세웠고 공조판서를 제수하였다. 공조판서로 있던 세종 3년 10월 정조사로 사신을 이끌고 북경을 다녀왔으며 평안도 도절제사, 우군도총제, 의정부참찬 직을 차례로 수행하였다.
하루는 세종이 좌대언 김종서에게 이렇게 물었다.
“경은 최윤덕을 잘 아는가.
(卿知崔閏德乎 : 세종 14년 6월 9일)”
김종서는 그가 학문은 부족하나 곧고 바르며 마음가짐이 정직하고 뚜렷한 잘못을 저지른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답변했다. 세종은 이렇게 말했다.
“바르고 진실하며 근신 봉직하는 사람이니 진실로 태종의 그릇이었다.
의정부에 시험삼아 등용하고자 한다. 고려와 국초에 무신이 재상으로
있었지만 어찌 다 윤덕보다 낫다고 할 수 있겠는가. 수상이라도 가능할
것이다. 단지 많은 말들이 절실하지 못한 흠은 있지만.
(直實無僞勤愼奉職 是以太宗器之 試用於政府 前朝及國初 或以武臣爲相 豈皆過於閏德者乎 雖爲首相亦可 但多言而不切 : 세종 14년 6월 9일)”
그러면서 하륜의 예를 들면서 말하였다.
“한 사람의 재상만 잘 얻어도 나라는 걱정할 것이 없어진다.
(若得一相 則國事可無慮矣 : 세종 14년 6월 9일)”
최윤덕은 파저강 전투가 있기 오래 전부터 압록강 주변 지역에 성을 쌓을 것을 여러 번 진언하였다. 특히 여연 부근의 주민들이 자주 야인들에게 납치되므로 이 지역 요처에다 성을 서둘러 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세종은 사정이 어려워 그러지 못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최근에 사신들로 인해 서북 백성들이 매우 피폐해 있어서
축성을 미루고 있는 것이다.
(近因使臣 西北人民 困弊尤甚 因循未築 : 세종 14년 12월 13일)”
그러자 최윤덕은 당장은 임금의 덕이 높으심으로 적이 감히 쳐들어오지 않겠지만 자손 중에 어쩌다 어질지 못한 임금이 나오면 필시 적인의 침노를 받을 것이므로 반드시 서둘러야 하며 또 사신이 없는 해가 없는데 언제 사신 없을 때를 기다려 축성할 것인지 되물었다. 세종은 수긍했다.
“내가 장차 깊이 생각해 보겠다(予將熟思之 : 세종 14년 12월 13일).”
최윤덕이 좌의정으로 있던 때에 이각사건이 발생했다. 세종 18년 5월 23일
여연 조명간 지역에 올량합 500기가 침입하여 14명의 사람과 말 51필 및 소 34 마리를 포획해 갔고 군사 1명이 죽고 7명이 화살에 맞는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이 사건의 책임을 물어 해당 여연군사 김윤수와 평안도 도절제사 이각이 파면되었는데 이 지역을 방비하는 도절제사보다 더 높은 직인 좌의정 도안무찰리사 최윤덕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특히 황희는 최윤덕에게 벌을 내려야 된다고 재차 독촉했다. 세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윤덕이 성실히 선왕을 봉사하여 그 공이 작지 아니하며 또, 지금 삼공의
위치에 있으므로 이런 작은 일로 문책할 수는 없다. 더욱이 이번 여연의
피해가 크지 않은 것도 어찌 윤덕의 방어의 공이 아니라 하겠느냐.
(閏德勤事先王 其功不細 且今位列三公 不可以此小失以罪之 況今閭延之變 不至大害 焉知非閏德備禦之功乎 : 세종 18년 윤6월 25일)”
사헌부 장령이 또 최윤덕의 죄를 물어야 한다고 상언하자 세종은 이렇게 두둔했다.
“군대에서는 작은 잘못이 늘 일어나는 법이다. 북방의 도적방어는 모두
윤덕의 공이라 할 수 있다. 만약 윤덕이 없었다면 오늘과 같지 않았을 것이라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軍中小失 自古有之 北方禦寇 專是閏德之功也 若無閏德
安知不如今日乎: 세종 18년 윤6월 25일)”
지금의 모든 것이 다 윤덕의 공이니 다시는 최윤덕의 문책 문제를 꺼내지 말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특별히 영중추원사라는 매우 높은 자리를 만들어 그에게 제수하였다(세종 18년 7월 4일). 실록의 평가는 최윤덕이 “성품이 순진하고 솔직하며 간소하고 평이하였으며 용략이 뛰어나 한 시대 최고의 명장이 되었다”고 했다. 황희가 세종의 신뢰를 받은 가장 높은 직책의 문관이었다면 최윤덕은 ‘서반의 황희’라고 할 정도로 세종의 신뢰를 한 몸에 받았던 장군이었다. 물론 그 둘은 정작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지만.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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