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의 성전(聖戰)? 악마와의 타협? - 우크라이나 전쟁의 명(明)과 암(暗)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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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치의 성전(聖戰)과 희생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지 5개월을 맞고 있다. 지난 5개월간의 전쟁으로 우크라이나는 군인을 포함하여 최소 1만명의 사망자(민간인 5,110명 포함), 해외 피난민 956만7천명(귀국 379만3천명 포함), 물적 피해 946억 달러(Statista, July 13 기준)에 달하며, 러시아는 정부 발표 사망자는 1,351명이나 우크라라이나 국방부 발표로는 35,450명, BBC 조사로도 최소 1만명이상의 전사자가 발생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한편 7월 22일 현재로 37개국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원조에 참여했으며, 군사원조을 포함하여 인도적 지원 등 총 71개국이 우크라이나 지원에 참여했다. 특히 미국은 총82억 달러의 군사비를 지원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세계가 치루는 비용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OECD 소속 국가들의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은 1월 7.2%에서 5월 9.6%로 치솟았다. 국제 밀 시세는 2월 22일 대비 5월 17일 50% 상승했고 다행히 7월 22일 11% 하락했으며, 옥수수 시세는 2월 22일 대비 4월 28일까지 21% 상승했으며, 7월 22일 현재는 16% 하락헀다. 여기에 전쟁으로 인한 지정학적 위험이 높아지고, 미국의 금리 인상 충격이 더해짐에 달러 지수는 2월 22일 대비 7월 14일까지 13% 상승했으며, 22일 현재 11% 상승해 있다. 상품 국제시세 상승에 달러 강세 충격까지 더해져 식량난과 연료난으로 생존을 고통 받는 저소득 국가 국민들의 수는 수십억 명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스리랑카 사태가 대표적인 사례다. 주목해야 할 사실은 세계적으로 수십억 명의 인구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고통을 함께 하고 있다는 점이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22일 WSJ과의 대담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에 감사하고 이 전쟁으로 인한 세계인의 고통을 위로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와 조기에 휴전 협정을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강하게 반대했다, “그것은 가치의 문제다”(별첨 인터뷰 참조).
“가치(value)”라고? 6월 22일 발표된 NATO 마드리드 정상회담 발표문에 “Value”라는 단어가 두 번 등장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귀국 비행기 기자 간담회에서 5번 언급했다고 해서 주목 받았던 바로 그 ‘가치’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가치(value)’이기에 인류가 이토록 큰 고통을 치루면서도 지켜야 하는 것인가? 6월 29일 NATO에서 발표된 ‘마드리드 정상회담 선언문’에서 밝힌 ‘가치’의 내용은 민주주의·개인의 자유·인권·법치·국제법·유엔헌장의 목적과 원칙·규약에 의한 국제법지지 등이다(2. We are united in our commitment to democracy, individual liberty, human rights, and the rule of law. We adhere to international law and to the purposes and principles of the Charter of the United Nations. We are committed to upholding the rules-based international order.). NATO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여 이 가치를 침해했기 때문에 공동으로 응징하기 위해 우크라이나를 지원한다는 것이다. 즉 NATO는 가치의 동맹이며, 우크라이나 전쟁은 가치의 성전(聖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가치의 성전은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성전의 승리를 위해 우리는 앞으로 어떤 대가(代價)를 치러야 할 것인가?
2. 전황(戰況)
7월 들어 NATO의 장거리 화력, 특히 미국의 고기동 다연장 로켓 발사기(HIMARS)가 지원되어 장거리에서 러시아 군의 탄약 공급기지와 지휘소 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함에 따라 러시아 군은 막대한 탄약을 상실했으며, 이에 따라 돈바스 지역 공격전에서 하루 5만발을 퍼부었던 러시아군의 화력은 최근 1만발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약화되었다. 특히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상공에서 거의 제공권을 상실했다. 반면에 우크라이나 군이 NATO의 화력 지원과 예비병력 보충으로 전투력을 강화하여 최근 러시아 군이 막대한 희생을 치루면서 힘들게 점령한 돈바스 지역과 남부의 헤르손 점령지를 수복하기 위한 공세를 강화함에 따라 전세는 러시아군에게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다. 한편 영국 해외정보국(MI6) 리처드 무어 국장은 러시아 군의 병력과 물자 수송이 심각하게 어려워져 가고 있어 우크라이나 군에게 반격하기 좋은 기회가 올 것임을 언급했다(연합뉴스 참조).
3. 러시아의 ‘비대칭적 한 방’
그렇다고 해서 당하고만 있을 러시아가 아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전쟁을 한 방에 마무리 지을 수 있는 결정적인 한 수를 호시탐탐 노리고 이미 조짐을 보이고 있다. 러시아는 두 가지 결정적인 한 방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EU에 천연가스 공급과 석유 수출을 차단하는 것이며, 둘째는 핵 무기 사용이다.
러시아 국영 가스회사 가스프롬은 6월 14일 독일에 대한 가스 공급을 수송용량의 40%로 감축했으며, 11일~20일간의 정기 보수로 인한 공급중단 후 21일 공급을 재개했으나 40% 수준을 공급하고 있어 독일을 불안에 떨게 하고 있다.한편 알렉산드르 노바크 러시아 부총리는 서방이 러시아 원유에 설정한 상한 가격이 러시아의 석유 생산비용보다 낮다면 그 석유의 세계시장 공급을 보장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연합뉴스 7월 21일자). 즉 러시아는 서방 국가들에 대한 석유 판매와 가스 공급을 줄이거나 중단할 수 있는 충분한 명분을 가지고 있으며, 본격적인 추위가 닥치는 동절기에 가스와 석유의 공급 중단으로 NATO 국가들을 보복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한편 7월 21일 벨라루스 루카셴코 대통령은 AFP 통신과의 인터뷰(연합뉴스 참조)에서 우크라이나가 핵폭탄을 피하기 위해서는 러시아 통제에 들어간 동남부 지역을 포기하고 종전 협상을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러시아의 입장을 대변했다.
“더 멀리 가서는 안 된다. 더 멀리엔 핵전쟁의 심연이 도사리고 있다. 그곳으로 가선 안 된다”.
“모든 것은 우크라이나에 달려 있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의 중요성은 이번 전쟁을 우크라이나가 수용하기 유리한 조건으로 끝낼 수 있는 시점이라는 점이다”.
또 미국 Institute for the Study of War(7월 19일 보고서)는 러시아가 헤르손·자포리지아·도네스크·르한스크 등 점령지를 주민투표를 통해 러시아 영토로 합병한 후, 우크라이나가 이 지역을 공격할 경우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 영토 방위를 위해 핵무기를 사용할 것을 지시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4. 예상되는 시나리오
우크라이나 전쟁의 전개를 전망하기 위해 다음과 같이 최대한 객관적 사실에 기초한 몇 가지 시나리오를 상정해 볼 수 있다.
1. 화력의 역전으로 인하여 전황은 갈수록 우크라이나에게 유리하고, 러시아에게 불리한 상황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높다.
2. 러시아가 점령하고 있는 돈바스와 남부 회랑 지역에 대한 주민투표를 통해 점령지를 러시아 영토에 편입하는 속도와 우크라이나 군의 실지 회복 속도 간의 속도전이 중요한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 군이 실지를 회복하기 전에 러시아가 먼저 영토 편입 국민투표를 완수한다면, 러시아는 영토 보전을 명분으로 우크라이나에 대하여 훨씬 강력한 대응수단을 선택할 것이므로 이 경우, 우크라이나의 공세가 좌초하고, 전선은 장기정체되고, NATO 지원도 약화될 수 있다.
3. 반대로 러시아의 영토 편입이전에 우크라이나 군의 실지 회복이 상당한 성과를 거둔다면, 러시아는 ‘특수작전’이 실패하게 되고, 실패의 책임을 NATO 국가들의 전쟁 개입에 돌려 우크라이나를 지원한 NATO 국가들에 대해 강력한 보복수단을 선택할 가능성이 커진다.
4. NATO 국가들에 대하여 러시아가 가스 공급 차단 등으로 보복할 경우, NATO 국가들은 대러시아 제재를 강화할 것이며, 양측의 극한대치로 불확실성은 더욱 높아지게 될 것으로 보인다.
5. 양측은 어느 편도 결정적으로 유리한 입장을 확보하지 못하고 국제적인 장기적 소모전에 진입할 위험이 있다. ‘가치의 성전’도 러시아도 전력은 약화되지만, 전쟁을 끝내지 못하는 답답한 상황이 장기화할 수 있다.
6. 장기 소모전으로 갈 경우, 서방국가들은 가치의 성전을 치루는 대가로 인플레이션의 장기화와 경기후퇴의 고통을 겪을 것이며, 러시아는 서방의 제재 강화와 증대하는 국내 불만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 이미 J.P. Morgan은 러시아의 석유와 가스 공급 중단으로 금년 겨울에 최악의 경우 원유가격이 바렐 당 380달러까지 오를 수 있음을 경고한 바 있다. 이 시나리오는 2023년이 2022년보다 경제적으로나 지정학적으로 더 어렵고 불확실한 상황으로 전개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이다.
5. ‘악마와의 타협’
이상과 같은 비관적인 시나리오의 전개를 예방하는 길은 미국 등 서방국가들이 ‘가치의 성전’을 중단하고 ‘악마와의 타협’으로 노선을 수정하는 것이다. 악마의 속성은 욕망과 분노이며, 악마의 분노에는 하등의 규칙이 없다. 왜 악마인가? 분노하면 못할 것이 없기 때문에 악마다. 악마는 더 오래 더 치열하게 싸울 수 있다. 그 이유는 악마는 희생의 비용에 대한 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가치의 연대’는 참여국가 수가 많고, 국내 정치적으로 희생의 비용에 엄격한 제약을 받기 때문에 그만큼 각국의 이해관계와 정치적 속셈이 복잡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아무리 ‘성전(聖戰)’이라고 하더라도 장기적으로 악마와 치열한 싸움을 지속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악마와의 전쟁’을 포기하고 ‘악마와 타협’을 권고하는 학자들이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하여 ‘악마와의 타협’을 권고한 대표적인 학자로 촘스키 교수와 키신저 전 국무장관을 들 수 있다.
미국의 ‘행동하는 지성’으로 알려진 언어학자 놈 촘스키 교수는 러시아가 핵 무기를 사용할 위험이 증대하고 있음을 경고하고, 파국을 피하기 위해서는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요구에 양보할 것을 주장했다.
한편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부 장관은 5월 스위스 다보스 세계경제포럼(WEF)에서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빼앗겼던 영토를 모두 회복하겠다는 태도를 버리고 조속히 협상에 나서야 하며, 서방 국가들도 조기 협상을 지지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해서 주목되고 있다. 물론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강력하게 반발했다(별첨 인터뷰 참조).
6. ‘한국 시나리오’의 교훈
중국 전국시대 말기의 철학자 순자(苟子)는 “원칙을 존중하되 변화에 대응하고, 우여곡절 속에서도 합당함을 얻어라”(宗原應變 曲得其宣)고 했다. 무엇이 옳은 가를 분별한다면, 당연히 ‘가치의 성전’이 옳다. 그러나 무엇이 타당한가에 대한 판단은 감내하고자 하는 희생의 비용의 크기를 고려해야 한다. 물론 ‘가치‘를 지키기 위한 희생의 비용을 치루는 데 너무 인색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국가와 사회가 감내할 수 있는 희생 비용의 크기를 무시하고 ‘가치’에만 집착하는 정책노선은 정치적 적합성이 없다. 놀라운 점은 우크라이나 사태에 대해 해결책으로 촘스키 교수는 ‘한국 시나리오’를 권고했다는 점이다. 미국 트루만 대통령은 희생을 무한정 요구하는 ‘가치의 성전’보다 희생을 줄이는 ‘악마와의 타협’을 선택함으로써 한국전쟁을 휴전으로 마감했으며, 대한민국은 그것으로 ‘국가적 정체성’(national identity)을 확립함으로써 오늘날 번영의 역사적 기반을 이루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휴전은 러시아에게 휴식을 주는 것이며, 2년쯤 뒤에 다시 침공할 수도 있다고 반대했다. 러시아는 2014년 침공하고 2022년 다시 했으니 맞는 말이다. 그러나 1953년 7월 한국전쟁의 휴전을 앞둔 시점에서 누군가는 같은 고민을 하지 않았을까? 다행히 ‘하느님이 보우하사’ 한반도의 휴전은 70년째 계속되고 있다. 부디 우크라이나도 보호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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