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망하는 확실한 법칙 : 혼군(#6J) 후조(後趙)의 석호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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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 (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
(53) 전연 모용준의 내침(AD349)
이 때 패왕 석충은 계성(북경)에 진수하고 있었다. 동생 석준이 석세를 폐위시키고 황제로 앉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석준 토벌군대를 일으켰다. 5만 군사를 이끌고 업으로 내려오는 동안 사방으로 격문을 보내 정의로운 군사에 동참을 호소했다. 옛 조나라와 연나라 지역에서 구름처럼 지원군이 몰려들어 순식간에 10만이 넘는 대군이 되었다. 석준은 석충에게 편지를 보내 뜻을 충분히 이해하므로 죄를 묻지 않을 것이니 군사를 돌리라고 권유했다.
석충은 부하들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군사를 돌릴 수가 없었다. 석준은 석민과 이농에게 정예군 10만을 주어 격퇴시킬 것을 명령했다. 석충의 10만 군사와 석준의 10만 군사는 평근(하북성 석가장 동남쪽 조현부근)에서 싸웠는데 석충이 크게 패하였다. 석충은 도망가다가 원지에서 붙잡혀 참수되었고 군사 약 3만 명은 매몰되었다.
석민은 석준에게 석호의 명령에 따라 관중지역, 즉 진주(섬서성 중남부)와 옹주(산서성 서남부)를 차지하고 있는 포홍이 장차 국가의 위협이 될 것이라고 강조하면서 그 당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라고 종용했다. 석준이 포홍의 옹진주도독직을 파면하자 포홍은 화가 나서 동진에 투항하고 말았다.
석호의 죽음과 그에 다른 승계문제로 후조 조정이 혼란에 빠진 틈을 노린 것은 북쪽의 전연이었다. 평적장군 모용패가 작년 AD348년 모용황이 죽은 다음 계승한 그의 아들 모용준에게 편지를 써서 지금이야말로 한 칼에 후조를 무너뜨릴 절호의 기회라고 강조했다. 북평태수 손흥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나 모용준은 아버지 대상을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답답하다고 느낀 모용패가 말을 달려 용성으로 가서 모용준을 설득했다.
“ 잃기는 쉬워도 얻기가 어려운 것이 기호입니다.”
모용준이 말했다.
“ 업에서 비록 혼란이 일어나기는 했지만
등항이 낙안을 점거하고 있으니 쉬운 일이 아니요.
군사는 강하고 곡식은 충분한데
바다로는 내려 갈 수가 없으니 노룡으로 가야 할 텐데
그 지역은 험준하기 이를 데가 없지 않소?“
모용패가 응답했다.
“ 등항의 군사들은 하루라도 빨리 집으로 돌아가고 싶을 것입니다.
만약 대군이 몰아치면 순식간에 와해될 것입니다.
신을 선봉으로 세워 주신다면 동족 도하(요녕성 금주)로 나아간 다음에
영지(하북성 천안)를 끼고 내려와 전격적으로 공격하면
적군은 그대로 놀라 무너지고 궤멸될 것입니다.“
모용준은 미적거리며 결정을 하지 못하고 오재장군 봉혁에게 물었다. 봉혁이 대답했다.
“ 군사를 쓰는 방법이란
적이 강하면 지혜를 쓰고
적이 약하면 형세를 쓰는 법입니다.
따라서 큰 것이 작은 것을 먹는 것은 이리가 돼지를 먹는 것과 같고
잘 다스려진 것으로 혼란한 것을 교체하는 것은
마치 태양이 눈을 녹이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전부터 덕을 쌓으시고 인정을 베푸셨으니
군사는 강하고 병졸은 훈련된 정예군입니다.
석호와 그 아들들의 난폭한 정치가 극에 달한 지금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하루라도 빨리 건져주기를 목을 빼어 고대하고 있습니다.
대왕께서 계성을 빼앗고 다음으로 업도(하북성 임장현)를 향하여 기치를 높이시면
노인을 부축하고 어린이를 업고서 대왕을 환영할 것입니다.
흉적들은 깃발만 보고도 얼음 부서지듯 할 것이니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종사중랑 황홍은 이렇게 말했다.
“ 지금 태백성이 하늘을 가로질러 가고 세성은 필성의 북쪽에 모이고 있으니
음국이 천명을 받은 것이 분명합니다. 서둘러 군사를 펴십시오.“
절충장군 모여근도 거들었다.
“ 중군의 백성들이 석씨의 폭정에 쪄들어 있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모두가 주인을 바꾸고 끓는 물과불 속에서 구원해 주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이는 천년에 한 번 오는 기회이니 놓칠 수가 없습니다.“
모든 장수들이 한 목소리로 전쟁을 원하자 모용준이 웃으며 이들의 말을 쫓았다. 20만 군사를 모아 준비에 들어갔다.(AD349년 4-5월)
(54) 석감의 쿠테타와 석민(염민)의 쿠테타(AD349)
지난 4월 석세의 조정을 무너뜨릴 때 석준은 석민에게 황태자 자리를 약속했었다. 그러나 정작 쿠테타가 성공하자 자신의 아들 석연에게 황태자 자리를 주었다. 군권을 쥐고 정치를 좌지우지 하려던 석민은 석준에게 불만을 가졌지만 드러내지 않고 휘하 장수들에게 많은 상훈을 내려서 환심을 샀다. 석민의 생각을 알고 있는 석준은 석민이 내린 상훈을 대부분 거절하거나 깎아내려 버렸다. 장수들의 불만이 폭발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중서령 맹준과 좌위장군 왕난은 석민의 병권을 서둘러 빼앗지 않으면 큰일 난다고 석준에게졸랐다. 석준은 석시 종친 대신 석감과 석포와 석소 등과 이 문제를 상의했다. 이들의 생각은 한 결 같이 석씨 성이 아닌 석민을 제거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정태후는 반대했다.
“ 극노(석민의 어릴 적 이름)가 없었으면
어떻게 오늘이 있었겠소.
조금 교만하고 방종하다고 어찌 이리 급히도 죽일 수가 있겠소?“
석감이 몰래 빠져나와 환관 양환을 보내 석민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석민은 이농과 왕기 겁박하여 석준 폐위를 모의한 다음 장군 소언과 주성에게 갑옷을 입혀 3천 군사로 남대에서 석준을 체포하도록 명령했다. 석준은 태연히 부인과 바둑을 두다가 주성에게 물었다.
“ 주모자가 누구냐?”
주성이 말했다.
“ 의양왕 석감이 당연히 즉위 해야겠지요.”
석준이 말했다.
“내가 오늘같이 며칠 만에 물러나야 하는데
석감은 며칠이나 가겠느냐?“
석준은 잡혀서 그날로 곤화전에서 참수되었고 정태후, 태자 석연, 맹준, 왕난 장비가 같이 죽었다. 석감이 즉위하고 대사면령을 내렸다. 석민은 대장군, 녹상서사 및 무덕왕에 봉해졌다. 사공 이농은 대사마, 낭개가 사공 노심이 중서감이 되었다. 석감은 불만을 지닌 채 서쪽 고향으로 쫓겨 가는 포홍 세력들을 무마하기 위해 업에 포로로 있던 포홍의 아들 포건을 풀어주면서 포홍에게는 도독관중제군사, 정서대장군 및 옹주목, 영진주자사로 삼았다.
석감은 석민이 결국에는 반란을 일으킬 인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몰래 낙평왕 석포와 중서령 이송 등에게 야밤을 타고 궁중에 거처하는 석민과 이농을 습격하라고 시켰다. 그러나 거사는 실패하고 궁궐이 소란해지면서 황궁무사와 석민군사 양측 간에 전투가 벌어졌다. 황제 석감은 발뺌을 하기 위해 이송과 석포를 잡아 죽여서 자신과 무관한 일임을 보이려 했다. 석민이 일단 승기를 잡고 석감을 유폐시키면서 일은 그렇게 넘어가는 듯 했다.
그러나 석민 일당에게 반감을 가진 석호의 아들 석지는 요익중과 포홍의 지지를 등에 업고 자신의 임지인 양국에서 군대를 몰아 남쪽으로 공격해 들어왔다. 석민은 이농과 7만 군사로 석지를 대응했다. 석감을 지지하고 석민을 제거하려는 시도는 궁성 내에서도 곳곳에서 일어났다. 중령군 석성과 하동태수 석휘가 석민과 이농을 제거하려다가 실패했고 손복고도 황제 석감의 밀지를 받고 석민을 공격하려다가 성공하지 못했다. 손복도는 석민의 칼에 죽고 석감은 유폐되었으며 궁궐 안에서 무기를 들고 잇는 자는 모두 참수되었다. 한족이었던 석민은 명령을 내려서 한족으로써 호족과 갈족과 같은 이민족의 목을 베어 오는 자에게는 문관의 경우 3등급을 올려주고 무관은 모두 아문을 제수한다고 했다. 하루에 수만 명, 전체적으로 20여 만 명 이민족 목이 날아갔다. (AD349년)
(55) 국가이름을 위로 바꾼 석민(AD350)
황제 석준을 제거하는데 성공한 석민은 ‘계조이(繼趙李)’ 라는 도참설, 즉 ‘조씨를 잇는 사람은 이씨‘를 신봉하여 성을 이씨로 바꾸고 나라도 위(衛)로 고쳤다. 석준 밑에 있던 신료들은 뿔뿔이 지방으로 흩어져 할거하였다. 예를 들어 요익중은 섭두(하남성 조강현), 단감은 진류(하남성 진류현), 포홍은 반두(하남성 준현), 장침은 부구(하북성 자현) 등지를 장악하고 웅거하였다. 결국 후조는 석민이 장악하고 있는 업성 부근과 석지가 장악하고 있는 형태 부근, 그리고 군웅이 할거하고 있는 여러 지방으로 갈기갈기 찢긴 셈이었다.
기주로 달아났던 여음왕 석곤은 7만 무리를 이끌고 석민을 공격하다가 참패당했다. 갇혀있던 석감은 몰래 환관을 바깥으로 장침에게 보내 석민을 습격하도록 종용했다. 그러나 교활한 환관은 그 사실을 석민과 이농에게 고해 바쳤다. 석민과 이농은 결국 석감과 그 식솔들을 모두 죽이고 남아있는 석호의 손자 28명을 죽였다. 석씨 성을 가지고 살아남아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석민은 주변의 강권에 따라 국호를 다시 대위(大魏)라고 고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역사에서는 이 나라를 염씨의 위나라 즉 염위(冉魏)라고 부른다.
(56) 석지가 후조를 계승(AD350)
양국의 신흥왕 석지는 황제의자리에 오르고 연호를 영녕이라고 하면서 여음왕 석곤을 상국으로 삼았다. 주변에 흩어져 웅거하는 모든 이민족은 석지에게 지지를 표명하엿다. 석지는 요익중에게 우승상, 친조왕이라고 칭하면서 특별히 우대하였다. 요익중의 아들 요양이 배포도 크고 용감하며 지략이 뛰어났으므로 주변 모두가 그를 세자로 책봉하라고 권했지만 요익중은 장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석지는 요양을 예주자사 신창공에 책봉했고 부건에게는 도독하남제군사 및 연주목과 약양군공에 봉하였다.
AD350년 4월 석지는 10만 군사를 석곤에게 붙여서 왕랑과 장거 등과 함께 남쪽 염민의 위나라를 공격했다. 6월에 석곤의 군사는 한단을 점거하고 번양(하남성 내황현)에서 유국과 협공하기로 했다. 그러나 염위의 장군 왕태가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석곤의 군대는 크게 깨졌다. 유국은 군대를 돌려 돌아가고 말았다.
(57) 염민의 양국공격 실패(AD351)
염위 주군 염민은 석지가 장악하고 있는 양국(하북성 형태)을 포위하고 100여일이나 공격하였다. 다급해진 석지는 황제의 칭호를 버리고 태위장거를 급히 전연의 모용준에게 보내 전국새를 주면서 구원군을 요청하는 한편 하북성 조강에 있는 요익중에게도 손을 벌렸다. 요익중은 아들 요양에게 2만 8천 정예기병을 파견하면서 말했다.
“ 너의 재주가 염민의 열 배이니
잡아서 효수하지 못하면 날 볼 생각을 말아라.“
요익중은 동시에 전연의 모용준에게 편지를 보내 지원군의 필요함을 역설했다. 모용준은 3만 군사를 열관과 함께 파병했다. 염민은 모용준이 석지를 지원한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대사마부 종사중랑 상위를 사신으로 보냈다. 모용준은 길러준 석씨를 배반한 염씨를 극렬하게 힐난했다. 상위가 항변했지만 모용준은 상위를 감옥에 가두었다.
염민은 양국을 포위한 채 석지의 지원군 요양, 여음왕 석곤 및 모용황이 보낸 열관과 치열한 전투를 펼쳤다. 그러나 수십만 석지-요익중-모용황 연합군을 이기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염민은 수만의 군사를 잃은 채로 10명의 기병과 함께 겨우 숨어서 업성으로 돌아왔다. 염민의 군사 중에서 사로잡힌 대선우 염윤과 좌복야 유기는 물론 포로 약 10만을 모두 죽였다. 요익중은 염민을 생포해 오지 못한 요양을 곤장100대를 때려 질책했다.(AD351년 3월)
(58) 유현의 석지 살해와 후조 멸망(AD351)
양국을 무난히 방어한 조왕 석지는 장수 유현와 7만 군사를 일으켜 업성의 염민을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석지의 군대가 업성 부근까지 도달하자 겁이 난 염민은 위장군 왕태와 상의하려고 했지만 왕태는 병을 핑계로 의논하기를 거부했다. 할 수 없이 염민은 홀로 전쟁에 나섰고 유현을 대파하고 3만여 명을 참살했다. 유현이 염민에게 항복하면서 자신이 돌아가서 석지를 암살하여 보답하겠다고 하자 염민은 그렇게 믿고 회군하여 돌아갔다. 그리고는 반란음모죄로 왕태와 그 삼족을 처치했다.
양국으로 돌아온 유현은 석지와 승상 석병, 그리고 태재 조서 등 10여명을 시해하고 그 머리를 업으로 보냈다. 이로써 마지막 남은 후조의 뿌리가 완전히 절멸된 셈이다. AD319년 석륵이 후조를 세운지 꼭 32년 만에 망한 것이다. 염민은 석지의 머리를 사거리에서 태워버리고 유현에게 상대장군 및 대선우 기주목의 직책을 내렸다.(AD351년3-4월) 그러나 몇 달 뒤 유현은 다시 군사를 이끌고 업을 공격했으나 패해서 돌아온 뒤 스스로 황제를 자칭했다. 양국에서 스스로 황제를 칭했던 유현은 그 다음해(AD352년) 염민의 공격을 받고 사로잡혀 죽었고 염민 또한 그 해 전연 모용준의 장수 모용각의 공격을 받고 사로잡혀 계성(북경) 처형되었다(AD352년 5월3일). 염민의 아들 염지가 업성에서 버티었으나 7월 명위의 장수 마원이 성문을 열고 항복함으로써 염위는 건국 2년 만에 멸망했다. 모용준은 염지를 죽이지 않고 해빈후라는 작위를 주어 생계를 이어가게 하였다. 그러나 2년 뒤 반역을 모의했다는 무고로 결국 모용준에게 죽었다.
(59) 석호가 후조를 멸망시킨 이유
갈족의 작은 추장의 아들로 태어나서 이리저리 흘러 다니던 방랑아 석륵이 서진이 망한 뒤 갈래 갈래로 찢긴 북중국 거의 전역을 통일하는 대업을 세운 것은 가히 조조를 능가한다고 할 만하다. 특히 완벽한 흙수저의 빈 손으로 출발하여 큰 행운도 없이 오로지 자신의 능력으로 대업을 일구었다는 점에서 확실히 조조나 사마염에 뒤지지 않는다.
석륵이 북중국을 통일해 나가는 과정은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다. 유연의 객장으로 시작해서 북방 여러 주의 자사와 실력자들을 하나하나 정복해 나갔는데, 왕미, 근준, 업성의 사마등, 기주자사 왕빈, 연주바사 원부, 예주자사 사마확, 청주자사 이운, 기주자사 왕상, 청주도독 구희, 연주자사 전휘, 연주자사 서감, 청주자사 조억, 그리고 유주자사 왕준까지 처단하고 궁극적으로 유연의 전조마저도 멸망시켰다.(AD329)
당대 최고의 강자 후조도 석륵이 죽자(AD333) 급격하게 붕괴되었다. 첫째, 황위를 물려받은 석홍이 대업을 이을 재목이 되지 못하였다. 둘째, 이미 실권은 석호에게 넘어가 있었고 병든석륵도 조정을 거의 장악한 이복동생 석호를 제지할 능력도 기력도 상실한 상태였다. 셋째, 석호가 황제 석홍을 죽이고 등극(AD335)하는 과정에서 너무 많은 훌륭한 인재들이 제거되거나 혹은 조정을 떠나게 되었다. 석호는 석륵에 버금가는 무공을 세운 사람이다. 전투능력이나 실전 전공으로 치자면 석호는 절대로 석륵에 뒤지지 않는다. 사실 석륵 치하의 대부분의 무공은 사실은 석호가 세운 것들이었다. 따라서 석호가 황위를 찬탈하였다 하더라도 그것이 후조의 멸망으로 자동 연결될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수많은 조정의 인재를 죽이거나 잃은 것은 통일된 이후의 후조를 이끌고 갈 정치적 자산을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물론 석호는 전 중국을 통일하기 위해서 과도한 전쟁을 일으키기는 했다. 두 차례 요서정벌 및 동진정벌 로 국력이 크게 피폐해 진 것은 맞다. 그리고 수많은 토목공사와 사치로 국가재정을 고갈시킨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후조가 결정적으로 망하게 된 것은 석호의 무자비한 정치로 인한 민심이반이 끊임없는 내분 및 반란의 단초를 제공했다는 점이다. 태자 석수의 반란시도, 석선으로의 태자 교체(AD337), 태자 석선의 동생 석도 살해(AD348), 석호의 태자 석선처형(AD348)으로 후조 황실은 심각한 내부분열이 진행된 것이 멸망의 근본원인이다. 이런 와중에 석호마저 병사(AD349년 4월) 병사하자 어린 황제 석세를 두고 치열한 내분이 격화되었다. 석감(石堪)의 쿠테타(AD349), 석감의 쿠테타(AD349) 그리고 석민의 쿠테타로 황위는 계속 바뀌어 갔다. 마지막으로 정권을 잡은 석호의 양자 석민은 나라의 이름은 염위로 바꾸었고 석호의 살아남은 다른 아들 석지는 자신의 봉지 양국에서 명맥을 잇고자 했지만 결국에는 염민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AD351)
민심에 유념하여 나라를 대대로 잇는 것이 혁혁한 무공으로 나라를 세우는 것보다 몇 배나 어렵다는 것을 석륵과 석호의 후조가 잘 보여준 것이다.
<혼군(#6J) '후조(後趙)의 석호' 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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