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망하는 확실한 법칙 : 혼군(#6E) 후조(後趙)의 석호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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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 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 (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 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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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석륵의 청주 조억 제거(AD323)
석륵은 중산공 석호와 기병 4만명을 보내 안동장군 청주자사 조억을 공격했다. 청주 주변의모든 군현들은 전쟁이 일어나기도 전에 모두 석호에게 항복했다. 석호는 조억의 근거지 광고(산동성 익현)를 포위했다. 조억은 버티지 못하여 성문을 열고 나와서 항복했다. 석호는 조억을 양국으로 송환했고 석륵은 조억을 참수했다. 조억의 군사 3만 명 또한 땅 묻고 조억의 부하도 죽이려고 하자 후조의 청주자사 유징이 말하였다.
“ 지금 저더러 청주를 다스리라고 하셨는데
백성들을 모두 죽여 버리면
제가 다스릴 것이 무엇이 남겠습니까?“
석호가 마침내 남녀 700명을 유징에게 주면서 광고에 진수하도록 하였다.
(24) 전조와 후조의 사생결단 : 1차 전-후조 전쟁(호뢰관 전투)(AD325)
석호에 의해 초토화 되면서 낙양은 사실상 후조의 영향력 아래로 들어갔다(AD322). 석호는 낙양을 황하 이남 지역 침략의 근거지로 삼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낙양은 전조에게도 양보할 수 없는 요충지였다. 전조와 후조는 낙양 주변의 땅을 놓고 생사가 걸린 전쟁이 불가피했다. 선공은 후조의 석생이 일으켰다. 전조의 하남태수 윤평을 후조 사주자사 석생이 신안(하남성 신안)에서 공격하여 윤평을 죽이고 5천 가구를 압송한 것이다.(AD324년1월) 석생은 승리를 틈타 서쪽으로 하동(산서성 서부)과 남쪽으로 홍농(하남성 남부), 그리고 남동쪽으로 허창과 우현(하남성 우현)까지 노략질을 넓혀 나갔다.
후조의 석호군사에게 압박에 시달리던 사주자사 이구와 영천태수 곽묵은 전조 유요에게 항복하였고 유요는 중산왕 유악을 1만 5천 군사와 함께 보내 맹진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이와함께 진동장군 호연모는 형주와 사주의 군사를 이끌고 이구와 곽문과 만나서 함께 석생을 치기로 계획하였다. 유악은 맹진과 석량에서 이기고 드디어 석생이 있는 금용성(낙양의 서쪽 성)을 포위했다. 다급한 석호는 기병 4만으로 호뢰관으로 들어가 유악과 싸워 크게 이겼다. 유악은 패하여 물러나고 호연모도 사로잡혀 죽었다.
장안의 유요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유악을 지원하러 나섰다. 석호는 3만 기병을 따로 떼어내 유요를 맞아 싸웠다. 전조의 유흑이 후조의 석총을 팔특판(하남성 면지현)크게 이겼는데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는 일이 밤에 벌어지면서 군사들이 크게 두려워하자 유요는 군사를 급히 물려 장안으로 퇴각하였다. 6월에 석호는 유악과 그의 장수 80여명을 사로잡아 양국으로 압송하였다. 유요는 장안으로 돌아와 소복을 입고 곡을 그치지 않았는데 7일이 지나서야 성으로 돌아왔으나 그 때부터 병을 얻어 눕게 되었다. 이구와 곽묵의 남은 장수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지거나 동진으로 가서 항복하였다. 석륵은 회하 이북의 사주, 예주, 서주 및 연주의 모든 당이 후조의 석륵의 영토가 되면서 회하를 경계로 동진과 대치하게 된 셈이다.
일단 회하 이북을 장악한 석륵은 그 다음 단계로 장강까지 영토를 확장하고 싶었다. 장강의 동진을 공략하는 요충지는 수춘(안휘성 수현)이었다. 석륵은 석총을 수춘 공략에 투입했다. 석총은 부릉(안휘성 전초현) 지역을 노략질하고서 5천명의 주민을 잡아갔다. 건강의 동진 조정은 경악했다. 곧바로 사도 왕도에게 대사마 및 도독중외제군사의 직책을 주어 강녕(강소성 강녕현)을 근거로 석륵의 군대를 막게 하였다. 왕도가 군사를 풀기 이전에 역양 내사 소준이 부하 장수 한황을 파견하여 석총의 군대를 습격하자 석총은 도망갔다.(AD326년11월)
(25) 포판과 낙양에서 유요에게 패한 석호 : 2차 전-후조 전쟁(AD328)
유요를 호뢰관에서 격파한 후조의 중산공 석호는 4만 대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진군하여 전조의 영토를 넘보았다. 지관(하남성 제원)에서 출발하여 하동(산서성 하현)을 공격하고 나가서 포판(산서성 영제)까지 나아갔다. 이제 장안까지 거리는 200KM가 안 남았다. 석호의 군대가 황하를 건너면 모든 것이 어려워진다고 생각한 유요는 선제적으로 유술을 보내 군대를 먼저 황하를 건너게 하였다. 생각지도 않게 유요가 먼저 선공을 하고 넘어오자 석호는 놀라서 퇴각했다. 유요는 도망가는 석호의 군대를 끝까지 쫓아갔다. 이미 3년 전 뺏긴 낙양부근까지 쫓아간 유요는 낙양을 포위함과 동시에 군대를 사방으로 풀어서 지금의 정주시 부근인 심양, 형양, 급현을 공략하도록 했다. 유요는 3년 전 잃어버린 국토를 다 회복했다.(AD328)
(26) 석호의 복수와 3차 전-후조 전쟁 승리(AD328년 11월)
점령했던 낙양을 다시 유요에게 뺏긴 석륵은 낙양을 다시 탈환할 생각이었다. 정하가 반대하고 나섰다.
“ 유요가 군사를 천리 가까이 벌여 놓았으니
가만 두어도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대왕은 가만히 계시기만 하면 됩니다.
움직이시게 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석륵은 정하를 크게 꾸짖었다. 그리고 패장 서광에게 물었다.
“ 유요는 분명히 지금 승리에 도취되어 있다.
모두들 그가 승세를 타니 예봉을 피하자고 하는데
갑옷 정병 10만을 가지고 포위하고서도
100일이 지나도록 함락을 시키지 못하는 것을 보면
그 군사는 늘고 게으른 것이 분명하다.
내가 정예병을 가지고 공략하면 한 번에 격퇴가 가능하다.
지금 낙양을 지키지 못하면 반드시 양국(후조의 수도)이 위태로워 질 것이고
황하 북쪽에서부터 자리를 밀 듯 밀려 내려오면
내 할 일은 구름처럼 사라지고 말 것이다.
정하는 공격을 반대하고 있는데 네 생각은 어떠냐? “
서광이 웅크리며 말했다.
“ 유요가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 것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합니다.
지금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습니다.”
석륵이 서광을 칭찬하며 말했다.
“ 자네의 말이 옳다.”
석륵은 전쟁에 반대하는 자들의 목을 즉각 베어 버리고 군대를 규합했다. 석감, 석총, 도표 등의군사를 모두 형양 부근에 모았다. 중산공 석호에게 석문을 지키라고 하고 석륵 본인은 4만 군사를 이끌고 유요가 점령하고 있는 낙양 금용성으로 진격했다. 그러면서 부하 장수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 만약 유요가 성고관에 많은 군사를 집결시켜 놓았으면 우리로는 하책이고,
낙수를 막고 있으면 중책이며,
낙양을 지키고 있으면 상책이다. 들어가서 사로잡으면 끝이다.“
석륵의 후조군사가 성고관에 집결했다. 보병 6만에 기병 2만 7천의 대군이었다. 유요는 낙수에 집결해 있었다. 유요의 군대는 10만 이었다. 석륵은 웃음을 띠며 축하할 만 하다고 중얼거리며 큰 저항 없이 낙양으로 입성했다. 이렇게 해서 낙양성은 쉽게 탈환되었다. 석륵의 군사와 유요의 군사는 낙수를 가운데 두고 대치했다. 이 때 유요는 술에 취해 있었다. 젊어서도 술을 좋아 했지만 말년에 가서는 더욱 심해졌다. 전쟁을 앞두고도 몇 말씩 술을 들었다. 말에 올라타고도 술에 취해 고개를 숙이기 일쑤가 되자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말을 아예 조랑말로 바꾸어 버렸다.
(27) 전조 유요의 죽음(AD328)
석감의 공격을 받은 전조의 군사들이 퇴각하면서 술에 취한 유요는 달아나다 말이 구덩이에 빠지는 바람에 떨어졌고 10여 군데 칼과 창을 맞은 뒤 석감에게 사로잡혔다. 전조의 군사는 대패했다. 석륵이 명령을 내렸다.
“ 잡고자 하는 사람을 잡았으니
적군이 도망가게 내버려두라. “
유요가 석륵을 보자 말했다.
“ 석왕은 중문에서의 맹세(重門之盟, 하남성 휘현의 북문)를 기억하시오?”
중문에서의 맹세란 18년 전 유총과 유요와 석륵이 서진 태수 배정을 포위하면서 맺은 우호의 맹세를 말한다.
석륵은 서광을 시켜 유요에게 말 하였다.
“ 오늘의 일은 하늘이 만든 것이오.
다시 옛 일을 말해 무엇 하겠소.“
석륵은 유요를 다그쳐 빨리 항복하라는 편지를 아들 유희에게 띄울 것을 재촉했다. 유요는 유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나와 사직을 바꿀 생각을 하지마라.”
석륵은 이마를 찌푸리며 화를 냈다. 한 참 지나서 유요를 처단했다.(AD328년12월)
(28) 전조의 멸망(AD329)
낙양이 석륵에게 점령되고 아버지 유요가 잡혀 죽자 태자 유희는 남양왕 유윤과 함께 당장 서쪽, 즉 지금의 감숙성 방향으로 도망가려 했다. 그러나 상서 호훈이 말리며 나섰다.
“ 비록 주군을 잃기는 했지만 그래도 조국의 강토는 건재하고
장수와 병사들 또한 배반하지 않고 있습니다.
마땅히 힘을 합하여 막을 생각을 않고 먼저 도망갈 생각부터 하십니까?
힘으로 막아보고 그래도 안 되면 그 때 도망을 생각하셔도 늦지 않습니다.“
남양왕 유윤은 호훈이 자신을 막아서는 것에 분함을 느끼고 목을 베어 버렸다. 그리고 전조의 백관을 이끌고 상규(감숙성 천수)로 달아났다. 조정이 떠나버린 전조의 도읍지 장안은 무법천지가 되고 말았다. 몇 몇 잔당들이 장안을 점거하다가 결국 석륵에게 모두 투항하고 말았다. 남양왕 유윤은 수 만 군사를 이끌고 천수를 나와 장안을 향해 진군했다.(AD329년8월) 장안으로 오는 도중에 살고 있던 여러 이민족들이 모두 유윤에게 호응했다. 군사 숫자는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유윤군은 서안 북쪽 50KM 지점인 중교(섬서성 예천)까지 도달했다. 석륵 휘하 석생은 굳게 성문을 닫아걸고 방어에 치중했다. 석륵의 부하 중산공 석호가 2만 군사로 지원을 오고 있었다.
AD329년 9월 석호의 군사가 의거(감숙성 영현)에서 유윤군사를 크게 깨뜨렸다. 일격을 당한 유윤군사는 황급히 상규(감숙성 천수)로 도망쳤다. 석호는 끝까지 뒤를 쫓아 결국 태자 유희, 남양왕 유윤, 그리고 공경 이하 3천여 명을 체포하여 모두 살해하고 유민 9천 명을 수도 양국(산서성 임분)으로 압송했으며 여러 지역에 흩어 져 살고 있는 흉노무리 5천여 명을 낙양까지 끌고 와 거기서 산 채로 묻어 버렸다. 이로써 AD304년 선비족 유연에 의해 건국된 전조는 25년 만인 AD329년 9월 같은 선비족 석륵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저족의 추장 포홍과 강족의 우두머리 요과중도 나아와 석호에게 항복했다. 석호는 저족과 강족 15만 두락을 하남성과 하북성으로 이사시켰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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