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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핵 30년 : 해결되지 않은 이유는?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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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4년03월15일 10시06분

작성자

  • 홍현익
  • 세종연구소 안보전략센터 수석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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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1993년 3월 NPT 탈퇴선언 후 1994년 6월 클린턴 행정부가 영변 폭격을 검토하는 등 전쟁 발발 위기를 거쳐 동년 10월 21일 제네바 핵 합의로 수습된 지 어언 30년이 지났다. 유감스럽게도 그 동안 북한은 핵 개발에 성공해 여차하면 남한을 핵무기로 초토화하고 미국도 공격할 수 있다고 위협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남북한 간에 합의된 한반도 비핵화공동선언을 준수해 왔고 대량 살상을 초래할 수 있는 핵 공격을 차단하는 주 임무를 미국의 확장억지에 맡기고 있다. 남북관계는 적대적 대립국면으로 악화했고 한국은 상시적으로 대량살상 감수 위기에 처했으며 북한은 미국의 대화 제안을 무성의하다며 외면하고 있다. 더구나 북핵은 윤석열 정부가 대북 강경기조를 취하게 하고 미일편중 외교를 촉진해 결과적으로 한중, 한러관계가 불편해지는 등 한국 외교가 국익 극대화 실리외교를 취하는 것도 막고 있다. 북핵문제가 존재하는 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이나 평화통일 등 주요 국가과제는 사실상 달성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도 매우 엄중하다.

 

북한 정권의 목표가 어떻게든 체제 생존을 유지하는 것이라면 한국과 미국은 북한의 비핵화를 목표로 삼아왔다. 냉정하게 평가하면 북한은 목표를 거의 달성했고 한국과 미국의 한반도 안보정책은 실패했다. 그런데 한국과 미국 정부는 물론이고 대다수의 전문가들도 그 책임을 북한의 술책과 기만에 돌리고, 한국과 미국이 몇 차례의 비핵화 기회를 놓치는데 상당한 역할을 했던 대북 정책과 정책기조는 분석하거나 성찰하지 않고 거의 외면해 왔다. 그 결과 북핵 대화나 협상은 성사될 가능성이 거의 없어졌고, 북한의 실질적인 핵무장과 고도화가 기정사실화되고 있으며 북한은 일상적으로 대남, 대미 핵 위협을 가하는 최악의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이런 문제 의식하에 북한의 핵 개발 동기와 어렵게 성사 시켰던 비핵화 합의가 실행단계에서 번번히 무산된 이유를 북한을 다루는 한국과 미국의 정책을 중심으로 분석함으로써 한반도 비핵화 대화를 재개해 북핵 문제를 해결 국면으로 진전시키고 한반도 평화를 회복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북한의 핵 개발 배경과 1차 북핵위기

 

북한의 핵 개발은 한국과의 한반도 비핵화공동선언을 위반하고 국제안보체제의 주축인 비확산 체제를 깨며 한반도 안보를 결정적으로 위협하는 것이므로 규탄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북한 정권은 체제 유지를 최고의 정책목표로 삼고 있으므로 핵 개발은 역사적, 지정학적 당위이자 합리적인 결정이었을 것이다. 태평양전쟁이 두 발의 핵 폭탄 투하로 종전되는 것을 목도한 김일성은 한국전쟁 시 맥아더의 만주 폭격 주장에 떨었으며 1958년 한국에 미국의 전술핵이 배치되고 1964년 중국이 핵 개발에 성공하자 핵 개발 필요성을 절감했을 것이다. 더구나 1960년대 말 경에는 남한에 배치된 각종 핵무기가 900여기나 되었고 1970년대에 미국은 북한 남침 억지를 위해 제한핵사용론을 내세우며 비핵국가인 북한에게 핵 보복을 위협했었다.

 

더구나 1970년에 남북한 생활 수준이 비슷했지만 1990년이 되면 남한의 경제력이 북한의 10배 이상이 되었을 뿐 아니라 군사력도 남한의 우세로 기울게 되었다. 게다가 동구 공산권과 소련이 해체되고 남한과 수교했으며 중국마저 1992년 8월 남한과 수교하는 등 외교적으로도 고립되는 과정에서 북한 체제 수호를 위해서는 부족한 경제력으로 국방력을 획기적으로 강화해야만 한다는 절실한 필요성을 느껴 최소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얻을 수 있는 핵 개발에 나선 것으로 볼 수 있다. 때맞춰 노태우 정부가 북방정책을 취하자 김일성은 체제 위기와 외교적 고립을 모면하기 위해 남북한 유엔 동시 가입, 남북기본합의서, 한반도비핵화선언에 응했다. 하지만 1993년 새로 출범한 김영삼 정부가 1년 중단했던 팀스피리트 한미연합훈련을 재개하자 1993년 3월 12일 NPT 탈퇴를 선언하고 핵 개발에 본격 돌입했다. 1994년 6월 카터 전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 김일성에게 핵 동결과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이끌어 내 전쟁 위기는 넘겼지만 김일성이 급사해 남북관계는 진전되지 못했다. 다행히 1994년 10월 북미 간에 제네바 핵합의가 성사돼 북핵 동결과 사찰 수용이 영변 경수로 건설 및 중유 지원과 교환되는 내용으로 북핵 위기는 수습되었다.

 

그러나 한반도 안보 정세는 미국 의회의 다수당인 공화당이 대북 중유 지원에 협조하기를 꺼렸고 경수로 건설이 지연되었으며, 1998년에는 북한이 대포동1호 미사일을 발사하는 등 순탄하지 않았다. 다행히 김대중 정부의 설득이 효과를 보아 클린턴 행정부의 페리프로세스가 성공해 2000년 6월 김대중-김정일 평양 남북정상회담이 이루어졌다. 동년 10월 북한 총정치국장 조명록 차수가 백악관을 방문, 양측은 북미 공동코뮤니케를 통해 상호 존중과 내정불간섭, 회담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장거리미사일 발사 중단 등을 약속했다.마침내 미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의 평양 방문으로 북미간 신뢰가 정상회담 개최 직전 수준으로 제고되었다. 그러나 2001년 집권한 부시 행정부가 선악관과 대북 불신에 입각해 경수로 주요  부품타설 이전에 북핵 특별사찰을 종용했는데, 이는 제네바 합의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또 휴전선 인근 북한군의 후방 이전 등을 일방적으로 압박하자 생성되어 가던 북미간 신뢰는 무너졌다.

 

2차 북핵위기와 9·19 합의 이행 무산

 

2002년 남북관계는 북한의 제2연평해전 도발에도 불구하고 화해기조를 이어갔고 북미관계도 7월 31일 아세안지역안보포럼에서 외교 수장(백남순-콜린 파월)이 전격적으로 만나 특사의 평양 방문이 합의되는 등 개선 분위기가 조성되는 듯했다. 그러나 10월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태차관보의 평양 방문 시 북한의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 진행에 대한 미국의 강력한 의혹 제기에 북한이 반발함으로써 2차 북핵 위기가 시작되었다. 추정컨대 북미간 신뢰가 여러 이유로 진전되지 않자 북한 정권은 플루토늄 방식과 다른 우라늄 고농축 방식의 프로그램을 은밀히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복귀했던 NPT를 탈퇴했고 한국과 중국의 적극적인 외교 노력으로 2003년 4월 북·미·중 3자회담이 열린 뒤 결국 동년 8월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6자회담이 베이징에서 열렸다.

 

이 시기 북한의 주요 주장은 미국의 상호 공존 의지를 믿지 못하겠으므로 북·미 불가침조약을 체결하고 상원의 비준을 받아준다면 핵을 포기하겠다는 것이었지만 미국은 거부했다. 마침내 2005년 4차 6자회담에서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9·19 공동성명’이 채택되었는데, 이는 한국의 대통령,외교장관, 통일장관, NSC, 6자회담 대표가 전방위 총력전을 펼친 결과였다. 한국과 중국이 협의해 작성한 합의안에 러시아와 북한에 이어 일본마저 호응하자 홀로 남은 미국도 내키지 않지만 동의한 것이다. 

 

그러나 대북 경수로 제공 조항을 유보하고 성명에 서명한 미국은 이미 사흘 전 재무부가 마카오에 있는 벙코델타아시아(BDA) 은행을 제재하는 방식으로 북한을 제재하고 나섰다. 북한은 반발했고 결국 1년 뒤 2006년 10월 1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놀랍게도 그간 양자회담을 전면 거부하는 등 북한과의 회담 자체에 거부감을 보였던 미국의 태도가 바뀌었다. 동년 11월 중간 선거에서 공화당이 참패하자 부시 대통령은 대북 초강경 기조를 펼쳐온 네오콘들을 경질했다. 그 결과 2007년 1월 북미 양자회담이 열린 뒤, 2월 6자회담에서 9·19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2·13 합의가 도출되었고 남북정상회담과 때를 맞춰 10·3합의까지 순탄하게 합의되었다. 대북 중유 지원이 일본을 제외하고 순탄하게 이루어졌고 북한은 경수로의 폐쇄(shut down)를 거쳐 불능화를 90% 수준까지 이행했다.

 

그러나 “꼬리가 몸통을 흔든다”는 말처럼 비핵화라는 중차대한 안보 과제가 검증과 사찰이라는 마지막 과제로 인해 파국을 맞았다. 2008년 7월과 12월에 열린 6자회담에서 미국은 북한에게 통고 후 짧은 시간 내 현장 방문, 시료 채취, 연구자 심문 등 공격적인 검증과 사찰을 요구했고, 북한은“우리가 패전국도 아닌데 점령군처럼 주권을 무시하는 방식을 강요한다”고 반발했다. 교훈을 얻을 점은 7월 6자회담 합의문 두 곳에 “사찰은 만장일치에 따른다,” “전원합의 방식으로 한다”고 이미 기술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말은 북한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의 사찰을 의미할 수밖에 없는데, 미국은 끝까지 공격적인 사찰을 압박했다.결국 6자회담은 북핵 폐기 과정 진입 직전에 종결되었고 이후 북한은 핵 개발에 박차를 가했으며 6자회담은 아직까지 열리지 않고 있다.

 

2018년 한반도의 봄과 미국의 싱가포르 합의 무시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2017년 새로운 안보 위기가 펼쳐졌다. 북한이 미사일과 핵 실험으로 계속 도발을 일 삼자 대북 최고의 압박정책을 펼쳤던 트럼프 대통령은 “화염과 분노”로 압박한 뒤,“북한을 완전히 파괴하겠다”고 위협했으며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했다. 김정은은 11월29일 미 본토까지 날아갈 수 있는 화성 5형 장거리 미사일을 시험 발사한 뒤 국가 핵무력 완성과 로켓 강국 실현을 선언했다.

 

문재인 정부가 인내심을 발휘하면서 북한을 평창 동계올림픽에 초청하고 한미연합훈련을 연기하자 김정은이 호응했다. 북한의 올림픽 참가와 김여정 등 특사 방한 이후 남북 정상회담을 거쳐 마침내 북미간 최초의 정상회담이 2018년 6월 싱가포르에서 개최되어 북미관계 정상화,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 북한의 한반도 비핵화 노력, 유해 송환 등 4개항이 합의되었다. 김정은은 3-4항 이행을 위해 핵 실험장을 붕락시키고, 미국인 인질들을 석방했으며 미군 유해를 송환했다. 핵 실험과 중거리 이상 미사일 시험을 유예하고 장거리 미사일 발사대도 조건 없이 해체 과정을 진행했다. 그러나 미국은 북한이 바라는 합의사안인 1-2항 이행에서 의지를 별로 보이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해 대북 제재 일부 해제와 영변핵 시설 및 장거리미사일 발사대 전폐 맞교환에 합의해 북미 회담의 동력을 살렸지만, 2019년 2월 말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예상 외의 추가 양보를 요구해 결국 북미 화해 과정은 중단되었다. 문재인 정부의 노력으로 6월말 판문점에서 문 대통령과 트럼프-김정은이 만났지만 트럼프가 여기서 약속한 한미 연합훈련 중단 약속을 어기자 결국 김정은은 미국과의 화해를통한 정권 유지 전략을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바이든 행정부가 등장해 대화의 문은 열어두고 있지만 원점에서 실무회담을 하자는 것이다. 김정은은 미국이 북미 정상 간 싱가포르 합의를 이행하지 않으면서 실무회담에서 정에서부터 재협상하자고 제안하는 것은 문제 해결 의지가 없는 것이라고 판단해 일체의 북미 대화를 거부해 왔고,자력 갱생과 러시아 및 중국과의 협력 도모를 통한 핵 무장과 대남 대미 적대 노선을 정권 생존전략으로 채택 중이다.

 

북핵 합의 이행 실패의 교훈

 

이제까지 살펴본 것처럼 북핵 문제는 여러 차례 해결을 위한 합의를 이루었으나 합의 실행 단계에서 계속 좌초되었다. 물론 무엇보다도 북한이 한반도 비핵화공동선언을 완전히 무시하고 체제 생존의 유일한 수단으로 간주한 핵을 쉽게 포기하지 않기 위해 살라미 전술을 펴고 여간해서 타협하거나 합의 사항을 이행하지 않으려 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우리 측에서도 상당한 정책적 오류가 있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이명박, 박근혜 정부는 남북 간에 북핵 문제를 해결한다면서 6자회담 재개 노력을 크게 기울이지 않았는데, 북한은 핵 문제는 지정학적으로 또는 안보 면에서 취약한 남한하고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 북한 정권의 생존을 좌우할 미국과 해결할 문제로 보고 한국 정부를 무시했기 때문에 6자회담을 포함해 북핵 협상 자체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또 부시 행정부는 북한의 일방주의적인 양보를 종용했고 9·19공동성명이 도출될 때 대북 제재를 가해 북한의 불신을 키웠으며, 북한 핵 시설의 불능화 완성 직전에 공격적 사찰을 고집해 이 문제를 핵 폐기 단계에서 다시 논의할 기회를 방기함으로써 결국 6자회담은 파국을 맞았다. 또 오바마 행정부는 ‘전략적 인내’ 기조의 수동적·소극적 대북정책을 펼쳐 북한과의 협상을 경시했다. 끝으로 트럼프나 바이든 행정부는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합의이행 의사를 보여주지 않았다. 이런 정책들은 오랜 기간의 북핵 해결 노력을 수포로 만들었다.

 

이런 점에 유의하면서 가능성은 크지 않지만 향후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회담을 재개하고 비핵화를 성공시키려면 유념해야 할 주요 사안을 정리해 본다.

 

첫째, 미국과 서방, 한국 정부는 미국이 대화의 문을 열어 놓고 있는데 북한이 응하지 않고 있는 것을 북한에 문제가 있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는데, 이런 태도와 입장이 지속되면 바이든 행정부에서는 물론이고 차기 행정부에서도 북핵문제는 회담이 열리기 어려울 것이고 결국 북한의 핵 무장 고도화로 귀결될 것이다. 특히 북한은 최고지도자인 김정은이 미국 대통령과 합의한 내용들을 준수하고자 몇 가지 성의를 보였지만 트럼프 행정부는 북미관계 정상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에 대해 별 성의를 보이지 않았으므로, 현 바이든 행정부가 제안한 원점에서의 실무회담 제안은 문제 해결 추구를 위한 회담이 아니라 대화 흉내를 내는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이 크게 이상해 보이지 않는다. 행정부가 바뀌었다고 하더라도 미국의 대통령이 합의한 사항은 이행하겠다는 의지를 보이는 데서 출발해야 북한도 체면을 세우고 회담에 응할 것이다.

 

둘째, 문재인 정부가 북미 간 신뢰가 부족한 것을 메우기 위해 싱가포르 합의 중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을 위한 1단계 과정으로 종전선언을 제안하고 미 행정부를 설득 했지만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윤석열 정부는 바이든 행정부의 원점에서의 실무회담 개최 제안에 북한이 응하지 않을 것이 예견되는 상황에서 바이든 행정부에게 대북 협상을 보다 적극적으로 펼칠 것을 요청하거나 설득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북핵 대화 한번 해보지 못하고 북한의 핵 고도화를 초래할 수 있는 현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미국이 대북정책을 보다 전향적이고 적극적으로 추진하도록 설득하는 것이 요망된다.

 

셋째, 만약 한미 정부가 태도를 전환해 보다 전향적인 대북정책을 펼쳐 북미 대화가 성사된다면 우선 싱가포르 합의부터 복원해야 할 것이다. 한국과 미국은 국제정치에 대한 선악관을 넘어서서 북한이 미국을 신뢰하지 않는 이유를 성찰해야 한다. 예를 들어 미 트럼프 행정부가 이란과의 핵 합의를 정권이 바뀌었다고 파기했으므로 김정은은 미 행정부를 상당히 불신하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바이든 행정부든 아니면 정권이 교체되어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선 뒤 북미간 합의를 이루고 또 실행하려면 북한이 미국을 신뢰할 수 있도록 해주는 선행 조치가 필요하다.

 

넷째, 북한이 합의한 뒤에 실행 단계에서 어깃장을 놓지 못하게 하려면 애초에 합의를 볼 때 조금 더 시간이 걸리더라도 양측의 행동 방안을 6하 원칙에 의거하여 최대한 구체적으로 명기하는 것이 필요하다.

 

다섯째, 북한이 엄격한 사찰과 검증을 받도록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울 뿐 아니라 공격적인 사찰에 합의하더라도 북한이 핵 물질이나 무기를 숨기려 하면 찾기 어려우므로, 결국 북한의 비핵화는 상호 신뢰를 구축하고 평화의 이득을 느끼게 하여 기만하는 것이 자기 손해임을 깨달은 북한이 자발적으로 합의를 준수하도록 만드는 것이 성공의 요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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