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대전환이 묻고(問), CES 2023이 답(答)하다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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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CES가 돌아왔다. 스며드는 혁신인 ‘캄 테크(Calm Tech)’의 정수를 보여준 CES 2023은 이제 막 산업 대전환의 출발선에 오른 우리에게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찬사와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쓴소리를 동시에 전했다. 이번 CES가 보여준 혁신의 방향은 ‘산업 대전환’, 즉 디지털 전환과 그린 전환, 그리고 그 패러다임의 기본 단위인 사람(Human)이었다. ‘산업 대전환’의 거대한 파도 앞에서 바라본 우리의 명암(明暗)은 선명했다. 초연결·개인화로 가속화된 디지털 전환, 기업·산업의 생존 조건이 된 그린 전환, 사람이 중심이 된 제품 혁신 등 ‘보이는 부문’에서 압도적인 역량을 발휘했다. 반면 혁신의 이면(裏面)에 있는, 그러나 혁신의 저력인 사이버보안, 청정에너지의 충분한 공급, 혁신을 포용하고 담보하는 소프트파워 등 ‘보이지 않는 부문’에서는 허약한 체력을 드러냈다. 길고 험난한 산업 대전환 여정에서 ‘보이는 부문’과 ‘보이지 않는 부문’ 간의 균형 잡힌 전환이 지속성과 품질을 좌우한다. 균형 잡힌 전환을 위해서는 정책 역시 대전환이 필요하다. 산업 대전환으로 인해 경쟁의 ‘판’과 ‘방식’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정책 구성의 기본 단위 확장, 미션 중심으로 정책을 생산·공급하는 방식의 전환, 정책의 인텔리전스 강화를 통해 우리의 고품질 전환을 준비할 필요가 있다. CES 2023이 우리에게 남긴 소중한 교훈이다 |
1. 돌아온 CES, 그리고 우리의 물음(問)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VR 기기를 쓰자 눈앞에 김해공항이 나타났다. 그렇게 VR 속 UAM은 곧바로 실제보다도 더 실제 같은 비행을 시작했다. 쏜살같이 하늘로 날아오른 기체는 우리가 드넓은 부산 앞바다를 감상할 새도 없이 해운대의 마천루와 광안대교를 가로질렀다. 너무나 생생한 자극에 매료되어 손에 땀을 쥐고 있을 때쯤 마침내 부산 엑스포 광장에 도착했고, 그렇게 5분여의 UAM 체험이 끝이 났다. 의자를 붙잡고 있던 손을 떼고 VR 기기를 벗자 체험을 기다리는 수많은 관람객들의 호기심과 흥분에 가득 찬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렇다. CES가 돌아왔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정확히 3년 만에 대규모 오프라인 행사로 다시 돌아온 세계 최대 가전·IT 박람회인 CES(Consumer Electronics Show) 2023이 지난 1월 8일(현지시간)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남긴 채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빠져들어라(Be In It)’라는 주제로 혁신이 우리의 삶에 서서히 스며드는 ‘캄 테크(Calm Tech)’의 정수를 보여준 이번 CES는 디지털·그린 전환으로 대표되는 ‘대전환(Great Transformation)’이 우리 목전에 이르렀음을 전시장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던 대회로 기록되었다. 인류의 생산과 소비 활동에 근본적 변화를 초래할 산업 대전환은 이제 더 이상 먼 이야기가 아니다. 조금 전 놀란 마음을 부여잡고 내린 UAM처럼 눈앞에 다가온 현실이다. 축구장 30여 개 크기의 전시장을 가득 채운 ‘스며드는 혁신’의 거대한 파도는 이제 막 산업 대전환의 출발점에 선 우리의 물음(問)에 어떤 답(答)을 하고 싶었을까? 본고는 이번 CES 2023에 나타난 주요 특징과 함의를 점검하고, 우리의 성공적 산업 대전환을 위한 길을 모색해 본다.
2. CES 2023에 나타난 주요 흐름: ‘눈앞으로 다가온 혁신’
CES 2023이 보여준 혁신의 방향은 명확했고 그 속도와 힘은 예상보다 빠르고 강했다. 전 세계 2,400여 개의 기업들이 선보인 스며드는 혁신의 제품과 서비스들은 나름의 차별성을 강조하는 듯하였으나, 현장을 지배한 패러다임은 하나였다. 바로 ‘산업 대전환’이다. 디지털 전환과 그린 전환 그리고 그 패러다임의 기본 단위인 사람(Human)이 이번 CES의 중심이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공상과학영화 같고, 먼 미래라고 생각했던 대전환의 시대가 눈앞까지 성큼 다가왔음을 전 세계가 함께 조명한 것이다. 이번 절에서는 CES 2023에 나타난 혁신의 주요 흐름과 그 안에 감춰진 함의를 살펴본다.
(1) 초연결과 개인화로 가속화된 디지털 전환
“연결은 보다 쉬워지고 개개인의 맞춤 경험은 인공지능(AI)으로 정교해지며
기기 간 연결은 안전해질 것” _한종희 삼성전자 부회장
“모든 것의 디지털화(Digitalization)”. 어쩌면 이번 CES 2023은 디지털 전환 시대의 서막을 열었던 대회로 미래 디지털사(史)에 기록되지 않을까. 그만큼 라스베이거스 컨벤션센터(LVCC)는 그 자체로 화려하게 디지털화(化)되어 있었다. 전통적인 제조기업, 글로벌 빅테크기업, 신생 스타트업을 막론하고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디지털 기술을 초석(礎石)으로 혁신의 비전을 제시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진화된 ‘초연결(Hyper-connectivity)’과 ‘개인화(Personalization)’가 있었다.
이번 CES는 모든 물리적 디바이스가 연결될 수 있음을 보여준 전시회였다. 업종과 제품의 경계는 더 이상 연결의 장애물이 아니었다. 이를 가장 잘 구현한 기업은 단연 삼성전자와 LG전자였다. 그간 CES에서 언제나 히로인(Heroine)이었던 두 기업은 각각 압도적인 디바이스의 완성도를 토대로 스마트홈 연결 플랫폼인 ‘스마트싱스 (SmartThings)’와 ‘씽큐(ThinQ)’를 통해 디지털 전환 시대로 가는 전제 조건인 ‘초연결’을 구현해 냈다.
특히 삼성전자는 완전히 이례적인 방식으로 오픈 부스를 운영했는데, 라스베이거스 컨벤션센터 중앙홀에서 가장 큰 규모의 전시관을 혁신 제품과 서비스 소개가 아닌 ‘연결 경험’을 위한 체험관으로 활용했다. 새로운 제품에 대한 기대를 안고 입장 한 일부 관람객들에게는 혁신 제품의 부재로 혹평을 받기도 하였으나, 약 1,019평에 달하는 부스를 관통하고 있던 미래 디지털 생활에 대한 스토리텔링을 가장 선명하면서도 차별적인 방식으로 전달했다. 한 마디로 삼성전자 부스는 가전, 모바일, IT, 게임, 모빌리티 등 업종과 제품의 경계를 넘어 모든 디바이스가 연결된 초연결 사회를 그대로 조성해 놓은 우리의 일상, 가정 그리고 도시의 축소판이었다. 스마트싱스로 연결된 각각의 디바이스들은 사용자가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에서도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설계되어 소비자의 사용성과 수용성을 극대화한 모습이었다. 예를 들어 에어컨이 공기의 질을 인식하면 로봇청소기, 공기청정기 등이 자동으로 가동되거나, 새로운 제품을 구입했을 때 ‘캄 온보딩(Calm Onboarding)’ 기술로 블루투스가 자동으로 탐색하고 인증하였는데, 실제로 전시장 내에서 갤럭시폰을 사용 중인 관람객들은 이동할 때마다 여러 가전제품으로부터 스마트싱스 연결 팝업 알림을 수시로 받으며 스마트싱스를 경험했다. 캄 테크의 정수는 이렇듯 우리 주변까지 왔다.
반면 LG전자는 국내 대표 가전기업답게 TV, 디스플레이, 냉장고, 워시타워, 에어로타워, 에어컨 등의 혁신 제품을 대거 선보였다. 라스베이거스 컨벤션센터 중앙홀 입구에서 압도적인 OLED 플렉시블 사이니지를 통해 관람객의 눈길을 사로잡은 LG전자는 이번 CES에서 최고 혁신상을 수상한 OLED 플렉스를 포함해 다양한 폼팩터를 제품으로 구현하며 개발부터 구매, 이용까지 고객 맞춤형 경험을 높일 수 있는 완성도 높은 하드웨어를 선보였다. 소개된 모든 제품들은 LG의 스마트홈 플랫폼 씽큐에 연결되었으며, 한발 더 나아가 HCA(Home Connectivity Alliance)1)의 타사 제품 및 플랫폼 간 연동을 시연하며 브랜드를 넘나드는 연결성을 과시했다.
‘초연결’과 함께 디지털 전환을 관통하는 또 다른 키워드 ‘개인화’는 인공지능, Web3, 그리고 메타버스 간의 시너지로 한층 더 정교해졌음이 확인되었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간 간극(Gap)이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사용자의 디지털 수용성은 크게 향상된다. 여기에 똑똑하고 안전한 개인화는 소비자의 사용성을 획기적으로 확장하는 결정적인 촉매제이다. 이번 CES는 그 가능성이 이미 손에 잡힌 현실임을 보여주었다. 교육, 금융, 쇼핑, 엔터테인먼트뿐만 아니라 제조 현장, 심지어 공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업종과 현장에서 손에 잡힌 혁신이 확인됐다. 특히, 이번에 처음 CES에 참가한 인천공항은 고도화된 메타버스를 기반으로 개인화에 최적화된 미래 공항의 모습을 제시했다.2) 이제 디지털은 현실이다.
눈앞까지 다가온 ‘초연결’과 ‘개인화’가 가지는 함의는 작지 않다. 무엇보다 경쟁의 기본 단위가 기존 개별 기업에서 초연결·개인화 생태계로 확장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경쟁우위를 쌓는 방식을 근본부터 바꿔야 하는 중차대한 이슈이다. 이미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글로벌 기업들은 생태계 확장을 위해 IoT 표준 매터(Matter)와 HCA가 추진하는 플랫폼 연동에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뛰어들었다. 현재 구글, 애플, 아마존 등 500여 개에 육박하는 글로벌 기업들이 매터에 참여하고 있으며, LG전자는 작년 하반기 HCA에 의장사로 합류하면서 생태계 확장에 속도를 내고 있다. 그러나 생태계 간 연결과 확장이 부가가치와 경쟁력을 모두 담보하지는 않는다. 머지않아 다가올 글로벌 초연결·개인화 시대에는 오픈 플랫폼 내에서 얼마만큼 매력 있는 디바이스를 확보했는지가 경쟁력의 중요한 척도가 될 것이다.우리는 이미 애플 (Apple)의 생태계에서 그 중요성을 확인한 바 있다. 미래 디지털 생태계의 견인력은 초연결·개인화를 구현할 수 있는 매력도 높은 디바이스에서 발현된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을 개별 기업이 감당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융합된 제품에서 그 경향이 더 뚜렷하다. 그런데 그 실마리를 풀 수 있는 한 가닥을 소니·혼다 모빌리티에서 제시했다. 이번 CES 2023에서 큰 관심을 받은 혁신 제품 중 하나인 아필라 (AFEELA)는 ‘기술의 혼다’와 ‘센서의 소니’가 힘을 모아 만든 새로운 콘셉트의 자율 차이다. 자율주행 환경에서 다양한 엔터테인먼트를 즐길 수 있도록 고안된 아필라는 개별 기업의 ‘강한 것’과 ‘강한 것’이 만날 경우, 상호 시너지를 내면서 각자 가지고 있는 취약 부분이 상쇄될 수 있다는 좋은 사례를 제공했다. 디바이스의 매력도뿐만 아니라 연결 생태계의 확장에도 의미 있는 시도라고 평가할 수 있다.
(2) 기업과 산업의 생존과 직결된 그린 전환
“Doing more with less” _ John May, John Deere CEO
전통적으로 CES 개막일의 첫 기조연설은 그해 기술혁신의 보편적 가치와 방향성을 규정하는 빅 이벤트이다. 이런 의미에서 3년 만에 원상 복귀한 이번 CES 2023 개막일의 기조연설은 매우 상징적이었다. ‘농기계의 테슬라’라 불리는 글로벌 1위 농기계 제조기업인 존 디어(John Deere)의 CEO 존 메이(John May)가 맡았기 때문이다. 그는 기조연설에서 존 디어의 미래와 혁신만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가 가장 강조한 키워드는 바로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이었다. 이제 가장 혁신에 둔감할 것 같은 전통적인 산업 중 하나로 여겨지는 농기계 기업에도 넷제로(Net Zero)로 대표되는 그린 전환과 이를 통해 달성되는 지속가능성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다.
이번 CES에 참가한 모든 기업들은 디지털 전환과 더불어 친환경과 지속가능성을 미래 비전으로 제시하면서 제품의 생산과 소비, 그리고 에너지의 생산 및 공급 과정에서 발생하는 탄소배출을 최소화하기 위한 기술을 대거 선보였다. 개막일 첫 기조연설로 이목을 끌었던 존 디어는 비료 사용의 60%를 감축할 수 있는 로봇 살포기 기술 이그젝트샷(Exactshot)과 새로운 전기 굴착기 등을 선보이면서, 경제적이면서도 친환경적인 방식으로 지속 가능한 식량 생산이 가능하다는 미래 비전을 제시했다. 또한, 우리에게 친숙한 전자기업인 일본의 파나소닉은 라스베이거스 컨벤션센터 중앙홀의 한가운데에 녹색 빛을 내는 ‘페로브스카이트 태양 나무(Perovskite Solar Tree)’를 전시하며 친환경 에너지 선도기업으로의 위상을 과시했다. 그들은 나무의 각 잎사귀를 차세대 태양광 전지인 페로브스카이트로 제작하여 빛 에너지를 전기 에너지로 바꾸는 모습을 시현했다.
그러나 라스베이거스 전(全) 전시장을 통틀어 그린 전환된 미래를 가장 호소력 있게 제시한 기업은 놀랍게도 석유화학 기반의 사업 포트폴리오를 가진 SK였다. 지난해 2030년 기준 전 세계 탄소 감축 목표량의 1%를 줄이겠다고 공표하며 글로벌 파트너사들의 ‘동행(同行)’을 이끌어냈던 SK그룹은 올해 ‘행동(行動)’을 슬로건으로 걸며 전시관 내 전체 테마를 온전히 넷제로로 설정하였다. 가장 많은 주목을 받았던 도심항공교통(UAM) 체험부터 액화수소 드론3), 차세대 소형모듈원자로(SMR), 고성능 하이니켈 배터리 NCM9 플러스, 심지어 반도체까지 SK그룹에서 생산되는 모든 제품과 기술이 그린 전환이라는 하나의 주제를 담고 있었다. 석유·화학 등에 기반을 두고 성장한 SK이노베이션, SK에너지, SK지오센트릭 등의 성장 과정을 돌이켜볼 때, 이번 CES에서 SK그룹의 행보가 주는 메시지는 더욱 강력하다. 그린 전환이 이제는 단순히 ‘선택’이 아닌 기업과 산업의 ‘생존’과 직결된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린 전환은 새로운 ‘판’을 여는 기폭제이다. 탈탄소 시대의 도래는 제품을 만드는 방식과 소비되는 제품이 전면적으로 전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판’은 친환경 방식으로 만들고 쓸 수 있는 제품과 서비스가 차지할 것이며, 이들이 바로 새로운 성장동력이다. 그리고 새로운 ‘판’을 선점하기 위한 기업의 경쟁은 이미 시작되었다. 이번 CES에서 그린 혁신의 맨 앞자리에 우리 기업의 상당수가 발견된 건 고무적인 일이다.
SK E&S는 기체수소보다 에너지 저장 밀도가 높고 안정성도 뛰어난 액화수소 드론을 전시하며 차세대 모빌리티를 선도할 수 있는 역량을 과시했으며, 수소연료전지, 탄소포집활용저장(CCUS) 등 다양한 탄소 감축 기술을 선보이면서 새로운 ‘판’을 먼저 차지하기 위한 여정에 합류했다. 또한, 글로벌 1위 조선사인 HD현대는 ‘Ocean Transformation’을 슬로건으로 내건 전시장을 통해 고객들에게 미래 해양에서 파생하는 이동, 라이프 그리고 에너지의 진수를 경험하게 했다. 특히, 가장 주목을 끈 것은 현재 HD현대가 개발 중인 미래형 선박의 실물모형(Mock-Up)이었는데, 미래에서 온 것같이 매끈하게 디자인된 선체 상단에 친환경 차세대 돛인 ‘윙 세일’이 날렵하게 솟아있었고, 수소·액화천연가스(LNG) 연료를 사용한 기관실도 확인할 수 있었다. 해양 모빌리티의 미래뿐 아니라 SMR, SOFC(고체산화물연료전지)기반의 해양에너지 기술도 소개하면서 해양·선박부문에서 상상할 수 있는 그린전환의 모습을 구현했다.
이번 CES에서 발견된 전방위적인 그린 전환의 흐름은 친환경이 단순히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지키는 수준을 넘어 이제는 국가의 산업 경쟁력을 판가름하는 핵심 요소임을 다시 한번 모든 경제 주체에게 각인시켰다.
전 세계 어느 국가들보다 탄소 집약적이며 수출 의존도가 높은 산업 구조를 가진 우리에게 그린 전환은 우리 제조업의 미래 생존이 걸린 도전 과제인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번 CES는 새로운 ‘판’에서 우리도 충분히 경쟁력을 가지고 싸울 수 있는 역량이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다. 태양광, SMR, 수소 등의 친환경 에너지, 에너지 효율, 배터리, 반도체, 친환경 소부장, 재활용 등 넷제로 시대의 핵심 제품과 서비스들은 이미 우리가 경쟁력을 갖고 있거나 준비만 잘하면 글로벌 산업 생태계에서 충분히 위상을 확보할 수 있는 분야이다. 우리에게도 길은 있다.
(3) 수요(니즈)를 포착하고 구현하는 것이 경쟁력
전반적으로 이번 CES는 전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할 만한 혁신 기술과 제품이 없었다는 평가가 중론이다. 동의한다. 그러나 필자가 주목한 것은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기술혁신을 바탕으로 대전환 패러다임의 기본 단위인 사람(수요)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가 전례 없는 수준으로 확장되었다는 점이다. 사람이 필요로 하는 다양한 니즈를 찾고 구현하는 수많은 시도들이 예상보다 빠르고 강도 높게 제품과 서비스의 혁신으로 이어졌다.
사실 그 수요의 상당 부분은 인간의 변치 않는 욕구에 그 근원이 있다. 이동, 생존(식량과 건강한 삶), 놀이 등은 인류가 지구상에 등장한 이래 지금까지 본능 속에 가장 강하게 담고 있는 일종의 본성이다. 특히, 이동에 대한 니즈와 이에 따른 비즈니스 잠재력은 올해 처음 오픈한 웨스트홀을 가득 채운 300여 개의 모빌리티 기업들을 통해 확연히 드러났다. BMW, 벤츠 등 기존의 완성차 업체 외에도 아마존, 소니,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등 빅테크 기업들까지 ‘모빌리티’를 화두로 대거 참가하면서 다양한 모빌리티 경험을 관람객에게 선사했다. 그중에서도 앞서 언급한 소니·혼다 모빌리티 의 콘셉트카 ‘아필라(AFEELA)’는 기존 자율차가 선보이지 않았던 차별화된 경험을 제시하며 가장 큰 이목을 끌었다. 40개 이상의 센서가 배치된 고도화된 자율주행 기술을 선보인 아필라는 게임, 영상, 음악 등 엔터테인먼트 기능을 이동 중에 사용자가 경험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도 자사의 클라우드 서비스인 ‘애저’를 활용한 차량용 소프트웨어 기술과 연결성을 선보였으며, 아마존은 ‘알렉사’를 탑재한 스마트카 서비스를 공개했다. 현대모비스도 CES 2019에서 최초로 공개한 목적기반차량(PBV) ‘엠비전’ 시리즈의 업그레이드 버전인 ‘엠비전 TO’와 ‘엠비전 HI’를 선보이며4) 이동 수단의 의미를 확장했다.
한편, 외부의 공격이 없다면 인간의 ‘생존’은 먹거리의 충분한 공급과 건강 관리에 달려있다. 이는 ‘인간의 안보(Human Security)5)’ 수준을 결정하는데, 인간 안보의 핵심으로 ‘식량 안보(Food Security)’가 떠올랐다. 푸드테크는 식량 안보 수준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는 혁신 기술로 평가되는데, 최근 기후위기가 현실화되고 식량 안보가 국가적인 의제로 대두되면서 그 중요성이 더욱 높아졌다. 이번 CES는 식량의 생산부터 폐기까지 전 과정에 인공지능과 데이터 기술 기반의 푸드테크가 접목되면서 시스템 전체가 지능화되고 고부가가치화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존 디어는 GPS, 센서, AI 기술 등이 적용된 자율주행 트랙터를 통해 농업생산 현장에서의 혁신을 구현했으며, SK는 미국의 스타트업인 퍼펙트 데이(Perfect Day)와 함께 대체유 단백질로 만든 대체유 식품 3종 세트를 선보이며 호평을 받았다. 푸드테크의 상징이 된 대체식품이 어느덧 이렇게 한 발짝 더 가까워졌다.
‘생존’의 또 다른 축인 건강한 삶에 대한 욕구도 접근성이 높아진 의료 데이터와 진화된 디바이스 간 결합으로 빠르게 채워지고 있었다. SK바이오팜에서 선보인 뇌전증 감지 디바이스인 제로 글래스는 인류의 또 다른 난제를 풀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생활의 질적 수준을 좌우하는 수면의 품질은 슬립테크의 발전을 통해 향상될 수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실생활의 근본적인 수요에서부터 제품·서비스의 혁신이 시작됨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특히, 바이오·헬스 분야는 이번 CES에서 처음으로 부문명이 ‘디지털 헬스케어’로 변경될 만큼 디지털 전환이 화두였다. 디지털 기술과 융합된 원격의료 서비스는 진단의 간소화와 의료 접근성 개선을 이끌어낼 수 있는 지렛대이며, 이제 막 첫발을 내디딘 디지털 치료제는 전통적 치료법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선보였다.
마지막으로 미국소비자기술협회(CTA)가 선정한 5대 핵심 키워드에 Web3와 메타버스가 포함될 만큼, 인간이 소비하고 놀이하는 방식에서도 강력한 혁신이 일어나고 있음이 확인됐다. 탈중앙화의 상징인 Web3는 개인 맞춤형 차세대 인터넷 환경으로 디지털 자산의 안전한 거래, 데이터 주권의 회복, 소유권에 대한 인식 등을 더욱 고도화·개인화할 수 있는 핵심 인프라이다. 메타버스 분야에서는 하드웨어 기기를 통한 게임 전시가 주를 이루었는데, AR/VR 기기의 인지 채널이 시각을 넘어 촉각, 심리, 감정까지 확장되면서 가상 세계를 더욱 현실화했다.
이렇듯 인간의 변치 않는 본질적 니즈는 여전히 견고했다. 그러나 그 니즈는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해지고 복잡해졌다. 새로운 질서와 수요를 누구보다 빨리 포착해 내는 일, 그리고 이를 구현해 내는 역량이 앞으로의 기업 경쟁력을 좌우할 것이며, 이것이 딥테크(Deep Tech)6)의 혁신이 필요한 이유다. 우리 사회와 세계가 마주하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포착하고, 해결하고, 제품과 서비스로 구현하는 것은 결국 딥테크의 혁신에서 시작된다. 인공지능의 혁신을 이끌었던 알파고, 코로나19 백신으로 알려진 모더나, 그리고 전기차 시장을 개척한 테슬라도 한때는 인간의 본질적 수요를 찾고 구현하기 위해 애쓴 딥테크 스타트업이었다. 산업 대전환으로 인해 열릴 새로운 ‘판’에서 경쟁우위는 보다 본질적인 데 있다.
3. 혁신의 이면(裏面): ‘보이지 않는 것의 중요성’
(1) 연결만큼 중요한 보안(Security)
올해 CES를 관통했던 ‘초연결’이 향후 디지털 전환 시대를 앞당긴 핵심기술과 성과임에는 이견이 없지만, 디지털 전환의 필수재료인 오픈 소스가 사이버 공격의 매력적인 타깃이 된 점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지난해도 전 세계적으로 사이버 공격은 강하고 맹렬했다. 랩서스(LAPSUS$)나 킬넷(Killnet)과 같은 국제 해킹 조직에 의해 삼성전자나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대기업이 고초를 겪었으며, 국가의 핵심 인프라인 공항도 그들의 거센 공격을 피할 수 없었다. 지난해 10월에 발생한 미국의 10여 개 공항에 대한 디도스 공격은 언제 어디에서든 사이버 공격이 단행될 수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글로벌 사이버 보안 업체인 ‘팔로알토 네트웍스(Palo Alto Networks)’의 조사에 따르면 2022년 클라우드 보안 사건 발생률이 전년 대비 무려 188%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세계이동통신협회(GSMA)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5G 연결이 2025년에 약 4억 3,000만 개에 달할 것으로 전망하면서7), 클라우드에 이르는 경로에 대규모 사이버 공격이 언제라도 일어날 수 있음을 경고했다. 이제는 ‘디지털 팬데믹’도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닌 현실이 될 수 있다.
이번 CES는 제품 간, 산업 간 연결이 무한히 확장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연결 속도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빠르다. 그러나 산이 높으면 계곡이 깊듯이, 연결의 범위와 깊이가 크면 클수록 지켜야 할 범위와 깊이도 동일하게 커진다. 우리가 짜릿하게 경험했던 미래 모빌리티 혁신의 상징인 UAM이 현실 속에서 해킹된다면, 그 결과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하다.
연결의 확장을 통한 가정, 이동, 산업 등의 혁신 흐름은 우리 주변에 치명적인 사이버 공격의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음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미래 디지털 생태계에서는 사이버 보안(security)이 개인부터 국가 전체 안보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동전의 양면과 같은 연결과 보안 사이의 균형이 더욱 중요한 이유이다.
한편, 사이버 보안을 위한 인공지능의 활용이 새로운 형태의 사이버 공격 유형을 낳을 수 있듯이, 기술이 기술을 제한하는 과정에서 또 다른 위협이 발생할 가능성도 충분하다. 따라서 사이버 보안 문제는 국가 혹은 세계 차원에서 윤리적 이슈와 함께 다룰 필요가 있다. 대표적으로 현재 미국, 일본 등 67개국이 참여하고 있는 부다페스트 협약8)이나, 바로 얼마 전 일본이 내각관방에 사이버 안전보장체제 정비준비실을 별도 신설(2023년 2월 1일)한 것도 같은 맥락의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디지털 전환의 성패와 완성도는 디지털 생태계와 사이버 보안 생태계 간 균형을 어느 수준까지 확보하느냐에 달려있다.
(2) 친환경 에너지의 충분하고 안정적인 공급
CES 2023에서 디지털 전환과 함께 대세로 떠오른 그린 전환이 주는 메시지는 매우 간단하지만 실현까지 가는 길은 매우 험난하다. 지향점은 제품과 서비스의 생산과 소비 과정에서 탄소배출에 의한 환경 부하를 최소화하면서 사회의 지속가능성을 높이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위해서는 보다 깨끗한 에너지가 필요하다. 깨끗한 에너지는 두말할 것 없이 태양광, 풍력, 지열 등의 에너지이다. 이들은 현재 화석연료 대비 비싸고, 간헐적이며, 불충분하다. 그러나 그린 전환의 품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이들의 충분하면서도 경제적이며 안정적인 공급이 선결되어야 한다. 쉽지 않은 여정이다.
특히, 최근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여파로 에너지 안보가 국가적 현안으로 부상하면서 글로벌 탄소중립 기조와 에너지 공급 리스크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일은 난제 중의 난제가 되었다. 지정학·기정학 리스크와 맞물려 작은 변동에도 더욱 취약해진 에너지 공급의 안정성을 위해 각국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으며, 안보동맹 중심의 에너지 공급망 재편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러-우 전쟁이 한창이던 지난해 미국과 EU는 에너지협의회를 개최하여 에너지 안보와 양 경제권 간 협력 강화 방안 을 논의하였으며, 이와 동시에 러시아, 중국 및 인도 간 에너지 교역도 지속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추세다.
특히 친환경화가 가속화될수록 경제의 무한 전장화(Electrification)를 피할 수 없는데, 이는 예전과는 차원이 다른 전력 수요를 촉발시킨다. 국제에너지기구(IEA)가 2022년 발표한 세계 에너지 수요 전망에 따르면 전 세계 총에너지 수요는 2030년까지 매년 1%씩 증가할 것으로 전망되었는데, 특히 넷제로 목표 달성을 위해 전기 및 히트펌프가 화석연료를 대체하면서 전력이 총에너지 수요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21년 20%에서 2030년 22%로 상승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또한 에너지 믹스 측면에서도 전력이 전체 에너지 소비의 50% 이상을 차지할 것으로 예측되었다.
경제의 그린화가 확대될수록 친환경 전력 수요 증가는 불가피하다. 결국 그린 생태계의 경쟁력은 안정적이고 충분한 친환경 에너지 공급에 의해 완성된다. 동시에 전력 수요 증가를 최소화하기 위한 초저전력화 기술과 함께 혁신적 친환경 에너지 생산기술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한편 전장화 확산으로 인해 수소 및 배터리 생산에 필요한 녹색 광물 등의 전략적 가치도 더욱 높아질 전망이다. Bloomberg(2023)의 금속 전망 보고서에 따르면 태양광, 풍력, 배터리 및 전기차와 같은 에너지 전환 기술을 위한 주요 금속 수요는 2050년에 지금보다 5배 이상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9) 사실 현재 수요 추세를 보면 누구나 예측가능한 결과이다. 그만큼 전장화의 경로는 뚜렷하다. 따라서 해외 수소 시장 선점이나 녹색 광물 공급망 확보와 같은 에너지 안보 강화 전략이 시급하며, 장기적으로는 에너지 효율 혁신을 위한 전력 인프라 지능화도 차근히 해 나갈 필요가 있다.
(3) 혁신을 수용할 수 있는 사회의 소프트 파워
혁신의 씨앗이 발아되어 성과의 열매를 맺기까지는 인고의 시간이 필요하다. 기나긴 겨울을 견디어 맺은 열매는 매우 달콤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혁신은 그 보상의 맛을 보지 못한 채 죽음의 계곡(Death Valley)에서 사그라진다. 혁신의 성과화를 가로막는 여러 요인이 있다. 기술, 자금, 수요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걸림돌은 혁신을 수용할 수 있는 사회 포용력의 크기가 아닐까.
혁신의 생명은 속도(speed)인데, 이들을 받아들이는 사회 제도와 인프라의 본질은 안정성(stability)이다. 속도와 안정성은 일종의 모순과 같다. 특히 그 모순은 소위 말하는 민주주의 국가에서 더 크다.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는 지난한 과정으로 인해 법·제도의 변화 속도가 매우 더디기 때문이다. 반면 역설적이게도 권위주의 국가에서 제도와 인프라의 변화 속도는 매우 빠르다. 방향만 올바를 경우 혁신의 스피드 경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다. 지난 10여 년간 나스닥에 상장된 중국의 유니콘 기업이 얼마나 많았는지 헤아려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권위주의 국가에서처럼 일방적으로 혁신의 방향과 크기를 재단할 순 없다. 민주주의적 절차와 질서하에서 포용의 크기를 키워나가는 것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이다. 즉, 혁신을 수용할 수 있는 사회 제도, 분위기 그리고 인프라 등의 소프트파워(Soft Power) 를 키워야만 한다. 예전에 한 아이는 온 마을이 힘을 모아 키웠다. 혁신기업도 마찬가지다. 혁신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온 사회의 힘을 모아야 한다. 그것이 국가의 소프트파워다.
잘 만들어진 사회적 인프라는 혁신에 대한 경제적·심리적 진입 장벽을 대폭 낮춘다. 또한, 엄청난 속도로 진화·발전하는 혁신의 전장(戰場)에서 기업들이 Fast Follower가 아닌 First Mover로서 두려움 없이 마음껏 싸울 수 있는 체력도 키워준다. 결국 혁신의 씨앗이 열매를 맺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리스크를 최소화하면서, 혁신의 ‘과정’과 ‘결과’를 얼마만큼 포용하는지에 따라 국가의 혁신 성과가 결정된다.
이번 CES에 나타난 산업 대전환의 흐름은 예상보다 빠르고 강했다. 그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면 기업은 도태될 것이며,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는 속도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번 라스베이거스 컨벤션센터를 가득 채운 혁신 제품과 서비스다. 이에 반해 제도의 혁신은 여전히 더뎠지만, 제도의 혁신을 바라보는 각 국가의 자세는 달랐다. 자세가 다르다는 건 이미 그들도 소프트파워의 중요성을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산업 대전환에 대응하는 국가 간 보이지 않는 치열한 경쟁의 장(場)이 바로 이곳이다. 보이지 않지만 보이는 것 이상이다. 혁신의 진정한 저력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4. CES 2023의 답(答): 전환의 균형과 정책의 대전환
산업대전환의 거센 바람이 우리의 살결을 스치기 시작했다. 개념도 방향도 막연하기만 했던 산업대전환은 놀라운 속도로 우리 눈앞까지 다가왔고, 전환의 수준 또 한 예상보다 훨씬 강렬했다. 산업대전환이 그동안의 ‘질서’를 송두리째 바꿀 수 있을 만큼의 파급력을 가졌음을 CES 2023이 증명했다. 이제 새로운 게임의 법칙이 시작된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나라는 지난 게임의 법칙, 즉 아날로그, 탄소집약적, 그리고 중국을 중심으로 형성된 글로벌 공급망 구조하에서 가장 경쟁력 있는 국가 중 하나였다. 그러나 새로운 게임의 법칙에서는 우리가 어렵게 쌓아 올린 이 많은 경쟁우위 요소들이 오히려 우리의 전환을 가로막는 걸림돌이다. 문제는 산업화에 성공한 다른 어떤 나라들보다 이 걸림돌이 크고 많다는 것이다. 우리가 산업대전환에 더 적극적으로 그리고 절실하게 대응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번 CES 2023에서 우리 기업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글로벌 최고 수준의 IT 기업들이 격돌하는 최전선에서 스토리텔링이 가득한 인상적인 부스와 완성도 높은 디바이스를 통해 우리 기업들은 일상 속에 스며든 디지털·그린 혁신의 정수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참가 규모부터 미국에 이어 2위를 차지할 만큼 우리 기업의 혁신에 대한 의지는 뜨거웠다. 삼성, LG와 같은 대기업뿐만 아니라 중소·스타트업 모두 디지털·그린 전환 관련 혁신 기술을 선보이며 산업대전환이 가져올 미래를 제시했다. 참여한 업종도 참가국 중 가장 다채로웠다.
CES의 단골손님인 IT·전자·가전 기업이 외에도 모빌리티, 조선, 기계, 화학, 에너지, 금융, 쇼핑, 엔터테인먼트 등 다양한 업종의 기업이 이번 CES를 통해 개별 도메인의 산업대전환 이슈를 선도하며 혁신의 대열에 동참했다. 우리가 돋보인 건 규모만이 아니었다. 최고 혁신상을 포함하여 141건의 혁신 제품 및 기술상을 받는 쾌거도 이뤘다. 올해 CES에서 총 499건이 시상된 점을 감안하면 우리가 글로벌 혁신 생태계에서 얼마나 높은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다. 분명 희망적이다.
반면, 이번 CES는 대회 주관사인 CTA(미국소비자가전협회)를 통해 우리가 산업대전환으로 가는 길이 상당히 도전적이고 험난할 것임을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며, 자칫 외형적 성과에 도취될 수도 있었던 우리의 마음가짐을 다시 한번 다잡게 해주었다. CES 2023의 흥분이 채 가라앉기도 전인 지난 1월 9일(현지시간), CTA는 전 세계 70여 개 국가 중 한국이 26번째 수준의 혁신역량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10) 우리 기업이 보여준 놀라운 양적·질적 성과를 감안하면 다소 충격적인 결과이다. CTA에서 작성한 “글로벌 혁신 스코어카드(Global Innovation Scorecard)”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말레이시아, 라트비아, 폴란드, 체코 등과 같이 ‘혁신 리더(Innovation Leaders) 그룹’에 속해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가 ‘혁신’에서는 중진국 수준에 불과하 다는 것을 의미한다.11)
특히 이 결과가 더 주목받는 이유는 혁신 활동을 활성화하고 뒷받침하는 경제·사회적 인프라 부문에서 우리가 낙제점에 가까운 성적을 받았다는 점이다. 우리는 R&D 투자, 디지털자산, 인공지능, 인적자본 등에서 A 이상의 우수한 평가를 받았으나, 사이버보안, 환경, 세금 우대, 다양성 등 경제주체의 혁신 활동을 촉진·보장하고, 과정과 결과를 포용하는 인프라 및 소프트파워 관련 지표에서는 매우 낮은 성적표를 받았다. 특히, 사이버보안의 경우 낙제점인 F를 받아 충격을 안겨줬는데, 향후 산업대전환을 향한 여정에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들이 무엇 인지는 이번 CTA의 평가를 통해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이제 막 우리는 산업대전환의 출발선에 올라섰다. 산업대전환의 여정은 길고도 고되다. 그래서 이 기간 버틸 수 있는 인내심과 체력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이번 CES에 드러난 우리의 명암(明暗)은 분명했다. ‘보이는 부분’에서는 우리 기업이 선보인 혁신에 대한 뜨거운 의지와 그 결과물로 전 세계의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는 우리가 그간 축적한 경제·사회적 자산과 체력이 매우 허약하다는 진 단서를 받았다. 빛이 센 만큼 그림자도 짙었던 셈이다.
‘보이는 것’만으로는 장기전이 어렵다. 초반에 강하게 치고 나갈 수는 있지만 장기 레이스에서는 힘이 부칠 수밖에 없다. 산업대전환의 진정한 승자가 가려질 후반에 ‘보이지 않는 것’의 뒷받침이 있어야 힘을 낼 수 있다. 보이지 않는 부분에서 나오는 힘이 혁신의 저력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이버 보안, 충분한 청정에너지, 혁신을 포용하고 담보하는 소프트파 워 등을 보강하면서 소위 말하는 ‘전환의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 지 않는 것’은 어쩌면 우리가 ‘잘하는 것’과 ‘해야만 하는 것’일 것이다. 누구나 ‘잘하는 것’을 더 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해야만 하는 것’을 해야 성과의 품질이 좋아진다.
산업 생태계적 관점에서도 전환의 균형은 매우 중요하다. 기존 기술·산업의 장벽이 허물어지면서 융합되고 전환되는 새로운 ‘생태계’에 우리 기업, 특히 중소·스타트업 기업들이 최대한 많이 참여해야 한다. 그런데 기술, 자본, 인재 등의 측면에서 이 들 기업들은 산업대전환의 흐름에 취약하다. 산업대전환의 성패가 전환 속도와 강도에서 판가름 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들 기업이 앞서가는 대기업의 전환 속도와 강도에 따라갈 수 있도록 세심하게 정책을 공급해야 한다. 산업대전환의 품질은 결국 전환의 균형에 얼마만큼 가까이 다가가느냐에 달려있다.
전환의 균형을 맞춘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특정 부분에 대한 집중적 투자와 효율성을 토대로 산업화를 이뤄낸 우리에게 특히 그러하다. 우리의 자원 배분은 언제나 눈에 잘 띄고 잘하는 것에 집중되었다. 그리고 가장 최대의 성과를 내기 위해 프로세스를 나누고, 각 부분의 효율성을 극대화하면서 지금의 자리까지 왔다. 정책의 공급도 마찬가지였다. 최적의 정책 분업은 최대의 효율을 창출했다. 지난 게임의 법칙에서는 이러한 접근이 유효했다.
그러나 산업대전환이 가져올 새로운 게임의 법칙에서는 분절적 정책 생산과 공급 방식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특정 섹터에 한정해서 발생하는 기존의 혁신과 다르게 산업대전환을 가져오는 혁신은 매우 빠르고, 중첩적이며, 복잡다단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정책을 만들고 전달하는 방식도 유연하면서도, 연계가 잘 되고, 똑똑해져야 한다. 정책은 시대의 메시지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지금의 메시지는 ‘전환’이다. 산업대전환, 특히 도전적인 과제인 품질 좋은 전환(균형 잡힌 전환)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이제 정책도 대전환되어야 한다.
“품질 높은 산업대전환은 정책의 대전환이 필요하다”
정책의 대전환은 먼저 정책의 기본 구성 ‘단위’를 확장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산업대전환의 가장 큰 특징은 분절적이지 않고 연속적이며, 단일적이지 않고 융복합적이라는 것이다. 그린 전환을 예로 들어보자. 탄소중립은 달성해야 하는 과제이지 만, 청정에너지의 안정적이고 충분한 공급을 담보해야 한다. 친환경 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생산하면서 에너지 사용을 제품 생산에서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디지털 전환 기술도 반드시 접목되어야 한다. 즉, 그린 전환은 개별 세 가지 정책이 아닌 여러 기능이 동시에 포함된 패키지형 정책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정책의 기본 단위를 더 키우되, 세부 미션 간에 상호 중첩되고 연계되도록 고안될 필요가 있다. 다음으로는 정책을 생산하고 공급하는 방식도 전환해야 한다. 산업대전환의 여정에서 발생하는 이슈는 생성과 소멸이 규칙적이지 않고, 문제의 해결 경로가 융복합되는 경향이 짙다. 그래서 기존의 촘촘한 칸막이와 경직적 조직 체계에서는 효율적으로 대응하기 어렵다. 따라서 미션 중심의 정책 수립 단위를 조직해서 운영할 필요가 있다. 이는 우리가 그간 익히 보아왔던 위원회 혹은 TF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슈 및 현안에 따라 유연하게(agile) 구성하고, 이들을 뛰어넘는 기능과 역할을 임무지향형 정책 수립 단위에 부여해야 한다. 특히 조직의 운용 실효성과 지속가능성을 담보하기 위해 이들 조직의 구성·운영을 위한 제도적 기반을 확보하고 성과보상 체계를 갖추는 것도 놓 쳐서는 안 된다. 마지막으로 정책의 인텔리전스 강화가 필요하다. 사실 산업대전환은 아직도 어렵다. 국가의 시스템 전환을 요구하는 산업대전환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보다 영리하고 시의성 있는 정책이 필요하며, 이와 관련하여 고도의 지능화된 정책 지원 인프라가 필요하다. 정책이 생산되는 각 과정마다 관련 정보를 수집, 보관, 관리하고 우리 여건에 맞게 해석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해서 정책 수립에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김해공항에서 부산 엑스포 광장까지의 첫 UAM 비행이 초읽기에 들어갔다.12) VR 속 UAM이 아닌 실제상황이다. 이는 산업대전환으로 열릴 새로운 ‘판’도 이제 본격적인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국민과 기업이 스릴 넘치던 UAM에 믿음을 가지기 위해서는 자율비행이 가능할 만큼 똑똑해야 하며, 탄소배출을 최소화한 동력원도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안전해야 한다. 품질 좋은 산업 대전환하에서 가능한 일이다. 전환의 품질은 전환의 균형에서 나온다. 그리고 이는 정책의 대전환을 필요로 한다. 산업대전환의 출발점에 선 우리에게 이번 CES가 준 답(答)이다. <KI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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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로벌 IoT 표준 기구 및 연결 협의체로, 여러 브랜드의 IoT 제품과 플랫폼을 클라우드로 연결하여 상호운용 가능한 사용자 경험과 스마트홈 생태계 확대를 위한 목적으로 2021년 9월 설립되었다
2) 인천공항은 집에서 탑승까지 공항 서비스의 전 과정을 메타버스를 통해 구현했는데, 집에서 생체정보를 등록하고 등록된 생체정 보로 공항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개인화된 마이에어포트와 스마트패스를 선보였다.
3) SK E&S가 선보인 액화수소 드론은 리튬이온배터리를 이용한 기기보다 26배 이상 연속비행이 가능하며, 이를 통해 구조, 물류, 수송 등 드론의 활용 가능성을 획기적으로 확장할 것으로 기대된다.
4) ‘엠비전 TO’는 크랩 주행(게가 움직이듯 좌우로 이동하는 방식)이 가능한 전동화 시스템 기반 자율주행 차량이며, ‘엠비전 HI’는 레저와 휴식, 아웃도어 목적에 맞게 개발된 PBV이다.
5) 1994년 UN이 처음 주창한 개념으로 식량 안보, 의료·보건, 경제 안보, 환경보호 등 인간을 둘러싼 주요 이슈를 포괄한다. 이번 CES 2023에서 주최 측인 CTA는 ‘Human Security for All’을 핵심 키워드로 선정했다.
6) 인도의 스와티 차투르베디(2014)에 의해 개념이 알려진 딥테크(Deep Tech)는 기술 중에서 사회에 큰 파장을 끼칠 수 있지만 아직 수면 밑에 있어 발견되지 않은 기술을 의미한다.
7) 신동윤(2023), “2023년 핵심 보안 이슈 ‘5G와 메타버스, 클라우드, 의료, 데이터 주권’”, 「Global Trend & Technology KOREA」, 1.10.
8) 사이버 범죄 관련 신속한 국제공조 수사 체계 구축을 위해 형성된 최초의 사이버 범죄 협약으로, 2001년 11월 23일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공식 발효되었다. 현재 미국, 일본 등 총 67개국이 협약에 참여하고 있으나, 한국은 2022년 10월이 되어서야 협약 가입의향서를 제출하여 승인 절차를 기다리는 중이다.
10) CES(2023), “2023 International Innovation Scorecard”, https://www.cta.tech/Advocacy/Innovation-Scorecard/ International-Scorecard(검색일: 2023년 2월 6일).
11) 글로벌 혁신 스코어카드는 혁신 역량 수준에 따라 분석 대상 국가를 크게 4개 그룹으로 나누고 있다. 가장 혁신 역량이 높은 그룹은 Innovation Champions이며, 이후 수준에 따라 Innovation Leaders, Innovation Adopters, 그리고 마지막으로 Modest Innovators 순으로 구분된다. 우리나라는 이번 평가에서 Innovation Leaders 그룹으로 분류되었는데, 여기에 는 불가리아, 칠레, 크로아티아, 헝가리, 그리스 등 총 16개 국가가 포함되어 있다. 주로 동유럽 국가가 대거 포진되어있는 점이 특징이다.
12) 2030부산세계박람회 유치위원회는 이번 달 2일 SK텔레콤, 한화시스템, 한국공항공사, 티맵모빌리티와 UAM 사업 협력 양해 각서를 체결하고, 2030년 부산세계박람회 때 방문객의 실질적 교통수단으로 활용할 계획을 밝혔다. 산업통상자원부(2023), “차세대 교통수단 UAM, 2030년 세계박람회 부산 유치를 지원한다”, 2월 6일 보도자료.
※ 이 글은 산업연구원이 발간한 [월간 KIET 산업경제 2월호] 특집으로 게재된 것으로 연구원의 동의를 얻어 게재합니다. <편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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