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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돈의 역사해석] 통합이냐 분열이냐, 국가 흥망의 교훈 #17 : 광개토대왕과 후연(16)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02월06일 17시0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8

본문

 

 흥망의 역사는 결국 반복하는 것이지만 흥융과 멸망이 이유나 원인이 없이 돌발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 나라가 일어서기 위해서는 탁월한 조력자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진시황제의 이사, 전한 유방의 소하와 장량, 후한 광무제 유수의 등우가 그렇다. 조조에게는 사마의가 있었고 유비에게는 제갈량이 있었으며 손권에게는 육손이 있었다. 그러나 탁월한 조력자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창업자의 통합능력이다. 조력자들 간의 대립을 조정할 뿐 만 아니라 새로이 정복되어 확장된 영역의 구 지배세력을 통합하는 능력이야 말로 국가 흥융의 결정적인 능력이라 할 수가 있다. 창업자의 통합능력이 부족하게 되면 나라는 분열하고 결국 망하게 된다. 중국 고대사에서 국가통치자의 통합능력의 여부에 따라 국가가 흥망하게 된 적나라한 사례를 찾아본다.  

 

 

(89) 모용회의 군사를 빼앗아 모용륭과 모용농에게 나누어 주다(AD397)
 
3월 16일 모용보가 사람들을 데리고 계에 도착했는데 궁중 친척들은 다 뿔뿔이 흩어지고 없고 오직 고양왕 모용륭만이 수백의 기병을 거느리며 계성을 지키고 있었다. 청하왕 모용회가 2만 기병을 거느리고 와서 모용보를 알현하였다. 그런데 모용회의 얼굴색이 매우 어둡고 불안한 것을 느낀 모용보가 그것을 모용농에게 말했다. 모용농과 모용륭이 같이 말했다.
 
 “ 모용회는 나이가 어린데도(당시 25세)
   오로지 한 방면을 맡아 관할하고 있으니
   교만하기에 익숙해져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다른 뜻이야 있겠습니까?
   저희들이 예를 가지고 책망하겠습니다.
   크게 걱정하지 마십시요“ 

 

모용륭과 모용농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주군 모용보는 모용회의 군사를 해체하여 모용륭에게 귀속시켰다가 모용륭과 모용농에게 나누어 주었다. 18일 모용보는 계에 있는 모든 부고의 물자를 옮겨 용성으로 옮기도록 명령하고 또 다시 용성을 향해 이동했다.

북위의 석하두가 모용보 무리를 계속하여 쫓아오자 모용보는 싸울 생각이 없었다. 모용회가 나서서  말했다.

 

  “ 병법에 말하기를
    돌아가는 군사는 막지 말 것이며
    죽을 곳에 병사를 두면
    반드시 그들이 살아난다고 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그 두 가지를 다 얻고 있어서
    싸우면 반드시 이길 것입니다.
    만약 버리고 도망간다면
    도적은 반드시 틈을 탈 것이며 또한 다른 변란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모용보가 생각을 바꾸어 북위 추격군과 일전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모용회가 진지를 구축해서 대비했고 모용농이 기병을 거느리고 나아가 북위의 추격군을 격파하는데 성공했다.


(90) 모용회의 반란과 진압(AD397)


모용회가 비록 휘하 군사는 빼앗겼지만 그래도 아쉬운 후연 사정에 2만 군사를 보탠 것도 그렇고 추격하는 북위군을 격파하는데도 큰 공을 세운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당연히 교만하기가 하늘을 찔렀는데 형님인 모용륭과 모용농이 훈계하고 깨우쳤지만 그럴수록 모용회는 분개하며 반발했다. 그 두 사람은 나이도 많은 삼촌이었고 신분도 높았으며 또 이미 용성을 다스린 적인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이들이 자신의 지위 위에 있어서 용성으로 가더라도 대권이 자기에게 있지 않을 것이 두려운 모용회는 반란을 일으키기로 작심했다.

 

사실 유주나 평주군사들도 최근에 다스렸던 모용회의 은덕을 많이 받은 터라 오래 전에 다스렸던 모용륭이나 모용농이 오는 것을 싫어했다. 유와 평주의 장수들이 이렇게 모용보에게 건의했다.

 

  “ 청하왕(모용회)의 지략과 용기는 높고 넓어서
    신들은 그와 함께 죽고 살기를 맹세했습니다.
    황제 폐하와 태자 및 여러 왕들께서 계성에 계시면
    저희들이 청하왕과 더불어 중산을 수복한 다음
    황제를 다시 모시겠습니다.“

 

모용보의 주위 사람들은 모두 모용회를 싫어했다.

 

   “ 청하왕 모용회는 태자가 될 수도 없습니다,
    정신과 안색이 매우 불안정하여 수시로 변합니다.
    다만 그 재주가 남다르므로 쉽게 사람들의 마음을 얻습니다.
    만약 사람들의 의견을 좇아 중산 공략을 허용하시면
    나중에 위첩의 일(춘추시대 위영공의 임시 세자 위첩이 형 괴오를 받아들이지 않은 일)
    이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모용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난처했다.

 

  “ 도통(모용회의 이름)은 나이도 어리고
    능력도 두 왕을 따라가지 못하오.
    짐이 6師를 통괄하면서 모용회에게
    날개처럼 부탁하려는 것이니
    어찌 그를 내보내어 갈라놓을 수 있겠소.“

 

출정을 원했던 무리들이 실망하며 돌아갔다. 모용보 주변에서는 모용회를 죽여야 한다고 권고했다. 시어사 구니귀가 그 정보를 모용회에게 전달하며 말했다.

 

  “ 대왕이 믿을 것은 아버지 뿐 인데
    아버지의 마음이 다른 것을 계획하고 있고
    또한 거느리던 군사마저 떠났습니다.
    이제 어찌 하시렵니까?
    두 왕을 죽이고 태자를 폐하며
    대왕께서 스스로 동궁에 거하시며 장군과 재상직을 겸하시고
    사직을 바로 잡으셔야 합니다.“

 

모용회는 미적거리며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모용보가 모용농과 모용륭에게 말했다.
 
  “ 반란에 의문의 여지가 없소.
    일찍 제거합시다.“

 

모용농과 모용륭이 말했다.

 

  “ 지금 구적이 안에서 능멸하고  中土가 어지러워
    사직은 누란과 같은 지경입니다.
    모용회가 예 도읍지를 안정시키고 또 어려운 이곳까지 왔으니
    그 위엄과 명예는 사해에 떨치고도 남습니다.
    반역의 조짐이 아직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그런 그를 갑자기 죽이시면
    한갓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은덕에만 상처를 입겠습니까?
    황제의 존엄과 명망에도 큰 상처가 될 것입니다.“

 


모용보는 모용농과 모용륭에게 이렇게 말했다.

 

  “ 모용회 반역의 뜻은 이미 분명해 졌소.
    다만 경들이 자비와 용서를 구하니 차마 일찍이 죽이지 못할 뿐이요.
    아마 하루아침에라도 경들을 해치고 결국은 나에게도 이를 것이니
    때가 오면 후회하지 마시요.“

 

계를 떠나 온 모용보 무리는 4월 6일 광도(요녕성 건창현)에 당도했다. 모용회가 측근 부하 구니귀와 오제염간와 함께 2천 군사를 보내 모용농과 모용륭을 습격하여 모용륭을 장막에서 죽였다. 모용농은 부상을 입고도 구니귀를 사로잡고서 도망가 산 속에 숨었다. 모용회는 구니귀가 붙잡혀 일이 드러나게 되자 서둘러 모용보에게로 가서 말했다.

 

  “ 모용농과 모용륭이 반역을 도모하기에
    제가 먼저 제거하려 했습니다.”    

 

모용보가 놀랍게도 이렇게 말했다.

 

  “ 안 그래도 그 둘을 의심한 지 오래되었는데
    네가 제거했다니 참 잘한 일이다.“

 

4월 7일 모용회가 계엄을 준비함과 동시에 모용보를 모시고 길을 나섰다. 모용회가 모용륭의 시신을 길 가에 버리려고 하자 여숭이 눈물을 흘리며 굳게 요청하자 허락하여 수레에 싣고서 무리 뒤를 쫓아왔다. 모용농이 돌아와 인사를 하자 모용보가 크게 꾸짖으며 말했다.

 

  “ 네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이냐!”

 

명령하여 그를 체포하게 했다. 묘용희는 아버지가 자기편이라고 생각하고 아버지의 이런 행동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모용보가 군신을 모아 놓고 모용농의 죄를 다루는 자리를 마련했다. 모용회가 다가와 모용보 곁의 좌석에 앉으려 할 때 모용보는 위군장군 모여등에게 눈짓으로 모용회를 사로잡아 죽이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모여등이 칼자국만 몇 개 낼 뿐 제대로 죽이지 못하여 모용희가 빠져 도망갈 수가 있었다. 자신의 군영으로 되돌아 온 모용회는 군사를 챙겨 아버지 모용보를 습격했다. 모용보는 수 백 기병을 이끌고 200여 리를 서둘러 달려 새벽에 용성으로 들어갔다. 모용회가 끝까지 추격하였으나 따라잡지 못하였다.

 

모용회가 구니귀를 보내 용성을 공략했는데 모용보의 반격을 받고 패퇴했다. 모용회는 사자를 보내 황제 주변의 간신들을 제거할 것과 태자 책봉을 요구했지만 모용보가 들어 줄 리가 만무다. 모용회는 승여와 모든 기물을 거두어들이고는 모용보의 후궁들을 장수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며 백관을 설치하고 스스로 황태자 행세를 했다.

 

여러 번 전투에서 모용회의 군대가 패하여 군영으로 돌아 와 있는 야밤에 모용보의 시어랑 고운이라는 자가 결사대 100명을 이끌고 모용회 군영으로 잠입하여 죽였다. 놀란 모용회가 10여 기를 데리고 중산으로 도망갔는데 거기서 중산공 모용상이 그를 잡아 죽였다.(AD397년4월9일) 

 

모용보는 모용회의 무리를 모두 사면해주고 고운은 양자로 삼았다. 고운은 고구려 사람으로 모용황이 고구려를 깨뜨리고 주읍을 청산(요녕성 의현)으로 옮겼는데 이때부터 전연 혹은 후연에 신하가 된 부족 사람이다. 그는 매우 침착했으며 말이 적어서 사람들이 잘 알지 못했는데 풍발이라는 장수만이 그의 능력을 알아보아 서로 친한 친구가 되었다. 풍발은 10년 뒤 북연을 세우게 된다.

 

모용농은 머리뼈가 부서지고 뇌수가 보일 정도로 크게 다쳤는데 모용보가 손수 치료하여 상처가 많이 나았다. 모용농을 좌복야로 삼고 곧 사공 및 영상서령으로 임명했다. 모용회의 부장이었던 여숭이 자기 발로 나타나자 모용보는 그의 충성심을 높이 사서 중견장군에 임명했다. 

 

(91) 연의 분할 : 용성의 모용보와 중산의 모용상과 업의 모용덕(AD397)

 

후연 모용보는 전에 정남장군 고녹관귀를 중산으로 보내 탈환하도록 지시했다. 당시 중산에서는 황제가 빠져 나간 뒤 사촌 동생 모용상이 지키고 있었다. 모용상은 고녹관귀와 그의 일족들을 다 죽였다. 탁발규는 양식이 제대로 공급되자 않자 중산의 압박을 풀고 곡식을 찾아서 이리저리 수습을 하고 다녔다. 모용상은 북위군대를 이길 수 있으리라고 판단하고 마침내 황제의 자리에 올라 백관을 설치하면서 인질로 잡혀 있던 탁발고를 죽여 버렸다. 사람들은 업에 있던 범양왕 모용덕에게도 존호를 사용하라고 권했지만 모용보가 살아있었으므로 참람하게 황제를 칭하지 않았다.


(92) 모용린의 중산 장악과 칭제(AD397)

 

중산을 장악하고 칭제한 모용상은 거칠고 술을 좋아했으며 사치하고 또 난폭했다. 선비족의 가장 큰 씨족 종주 가족혼담을 죽인 것부터 시작하여 500여 명의 신하의 목을 날려버리자 모용상에게서 신하들의 마음이 떠났다. 성 안에서 계속 기근이 들어 궁핍했고 백성들이 들 판에 나가 야생풀을 뜯어 오는 것도 안보를 핑계로 금했다. 죽는 사람이 베개를 벨 정도로 많아지자 사람들은 숨어있는 모용린을 맞이하여 주군으로 모시자고 했다. 모용상이 5천 군사를 가지고 세금을 독려하고 있는 중에 모용린이 정령부락 군사를 이끌고 중산으로 들어 와 모용상의 목을 잘랐다. 모용린이 존호를 칭하고 백성들이 들판에 나가 야생 벼를 채취하는 것을 들어주었다.

 

중산 백성들은 모용린에게 서둘러 나아가 북위에 원수를 갚아달라고 졸랐는데 모용린이 들어 주지 않자 다시 불만에 쌓이게 되었다. 탁발규는 7천 군사 노구(하북성 요양)에 진을 쳤다가 곧 상산(하북성 정정)으로 들어왔는데 이 때 군사들 가운데 역병이 돌기 시작했다. 열 명 중 4-5명이 죽어 나갔다. 민심이 흉흉했지만 탁발규는 군사를 물리지 않고 버티었다.  

 

(93) 탁발규의 중산 점령(AD 397)

 

중산에 기근이 계속되자 견디지 못한 모용린이 2만여 군대를 이끌고 나가 남쪽 신시(하북성 신낙시)를 점거하였다. 탁발규가 모용린을 크게 격파하고 9천여 명의목을 자르자 대패한 모용린은 다시 퇴각하여 서산(태행산)으로 숨었다가 업으로 도망갔다. 당시 업에는 범양왕 모묭덕이 지키고 있었다. 

모용린이 중산에서 나와서 업으로 도망치자 탁발규는 드디어 10월 20일 중산을 손아귀에 넣게 되었다. 중산 성 안에서 항복한 사람만 2만 여명이 넘었다. 후연의 국새도 차지했고 갖은 보물이 다 북위 차지가 되었다. 탁발규는 이것을 모두 군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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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탁발고를 죽인 모용상의 묘를 파헤쳐 그 시신을 베었으며 탁발고를 죽이는데 동참한 고패와 정동을 찾아내그 5족을 멸했다. 23일에는 탁발의에게 명하여 3만의 군사를 가지고 곧 업을 공격하도록 지시했다.

 

용성에 있던 모용보 또한 모용덕이 업을 잘 지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격려하는 표문을 보냈다. 모용덕은 모용보에게 남쪽으로 돌아오실 준비를 하라고 권했다. 업은 우너래 전연의 고도였으므로 후연으로서도 정통성과 상징성이 큰 도읍이다. 모용보는 대대적인 사면령을 내리고 군사를 징발하여 남쪽 업으로 돌아 갈 계획을 깊이 품었다.(AD39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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