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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가 망하는 확실한 법칙 4 혼군 (#4b) : 알콜 중독으로 나라를 망친 동진 사마요(재위 AD372-AD396)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02월04일 17시0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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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   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   (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   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6> 환온의 황권 찬탈(AD371년) 시도와 죽음


사마소가 죽고 동진의 황위는 사마연(동진 성제:재위 AD326-AD342), 사마악(동진강제:재위 AD342-AD344), 사마담(동진 목제:재위AD344-AD361), 사마비(동진애제:AD361-AD365) 및 사마혁(동진폐제:AD365-AD371)로 이어졌다. 사마혁이 황제로 있을 당시 동진의 군권을 잡고 있던 환온은 한편으로는 모용위의 전연을 북벌하려는 계획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황제자리를 뺏으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동진 황제 사마혁은 평소 매우 행동을 삼가고 조심했으므로 흠을 잡을 수가 없었다. 환온은 측근 치초의 권고에 따라 황제의 침상의 일로 무고하기로 하고 다음과 같은 소문을 퍼뜨리게 하였다.

 

“ 성불능인 황제가 두 명의 미인인 전씨와 맹씨에게
  세 남자를 부쳐주어 아들을 낳게 한 다음      
  장차 황위를 건저(후계)하려고 한다.“

 

그런 다음 환온은 건강(남경)으로 군사를 몰고 와서 저태후에게 사마혁 폐위와 사마욱 옹립을 요구하였다. 저태후는 어쩔 수가 없이 승낙했다. 사마혁은 폐위되어 동해왕으로 강등되었고 그의 세 아들과 생모는 살해되었다. 그리고 황권에 도전할 위험이 있는 사마욱의 친형 사마희를 무고로 참소하여 그 일족 모두 축출해버렸다.(AD371년 12월 22일) 사마욱 황제는 환온의 전횡에 대해 깊이 애통해 하며 이렇게 통탄해 했다.

 

“ 지사는 조정의 위태로움을 깊이 아파하며(志士痛朝危)
  충신은 주군이 욕보임을 당하는 것을 애석해 한다.(忠臣哀主辱)“    

 
마음 깊이 병을 앓던 황제 사마욱(간문제)는 다음 해(AD372)에 죽었다. 사마욱은 본처 왕씨로부터 도생, 유생, 주생, 천류 등 여러 아들을 두었으나 모두 행실이 좋지 않아 폐출되거나 병으로 죽었고 말레이시아 출신 비녀 곤륜에게서 낳은 사마창명과 사마도자가 건강하게 살아 있었으며 그 중 큰 아들 사마창명이 10세의 나이로 황태자가 되었다. 죽기에 앞서 사마욱은 왕탄지에게 이렇게 유언을 남기려 하였다.

 

“ 대사마 환온은 주공과 같이 섭정하되
  만약 어린 아들이 보필한 만하지 않으면
  그대(왕탄지)가 황위를 빼앗으라.“

 

왕탄지는 조서를 보자마자 찢어버리며 말했다.

 

“ 나라는 선제(사마의)와 원제(사마예)의 나라인데
  어찌 폐하께서 오로지 하려 하십니까?“

 

황제가 다시 조서를 썼다.

 

“ 국가의 일은 대사마 환온에게 품의하되
   제갈무후(제갈량)와 승상왕(왕도) 고사를 따르도록 하라.“

 

그날 사마욱이 53세의 나이로 죽었다. 왕탄지와 사안의 강청에 의해 우여곡절 끝에 10세의 황태자 사마창명이 황제가 되었는데 이 사람이 동진 효무제 사마요다. 은근히 자기에게 황위가 선양될 것을 바랐던 환온은 불만에 가득 찼다. 환온은 황제의 측근인 왕탄지와 사안을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62세의 나이로 병사했다.(AD373년 7월14일) 왕탄지는 사마창명의 친정을 원했으나 사안의 생각은 달랐다. 사안은 환충과 가까운 왕탄지를 믿지 못하여 동진강제 사마악의 부인인 태황태후 저씨, 즉 숭덕태후에게 섭정을 맡겼다.(AD373)     
 
<7> 숭덕태후가 섭정을 돌려 줌(AD376)

 

AD375년 왕탄지가 46세로 요절하자 조정의 실권은 사안에게 돌아갔고 군사대권은 환충에게로 돌아갔다. 다음 해(AD376) 숭덕태후는 정권을 황제에게 돌려주었다. 그 해에 대나라가 전진의 부견에게 멸망당하자 하북 천하를 통일한 전진과 강남의 동진의 양강이 대치하는 형국이 되었다. 막강한 군사력으로 하북지역을 통일한 부견은 여세를 몰아 강남으로 침략해 내려왔다. 동진의 환충 또한 막강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한수지역에서는 전진 군사와 동진 군사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었다. 선공은 동진 환충이 감행했다.(AD383년 5월) 10만 대군으로 곡성과 양양 지역을 공격한 것이다. 부견은 백성 10명 당 1명 꼴로 군사를 징발하여 대대적인 반격에 들어갔다. 25만 군사를 부융에게 주어 환충을 방어하게 하는 한편 부견 스스로 60만 대군과 27만 기병을 이끌고 장안을 출병하여 곧바로 동진의 수도 건강으로 진격했다.(383년 8월8일) 부견의 전진군사가 비수에 도달한 것은 두 달 뒤인 10월이었으나 동진 장군 사현과 환이는 자신에 넘쳤던 부견의 군사를 대파하였다(비수대전).   
 
이로부터 전진은 몰락하게 되어 하북지역은 후연(모용수), 서연(모용충), 후진(요익중) 북위(탁발규), 서진(걸복국인) 및 후량(여광)의 여러 나라가 난립하는 상태로 발전한다. 오호십육국의 발흥시대로 접어든다. 막강 전진이 비수대전 한 판의 패배로 기우뚱거리자 그 최대의 수혜자는 동진이었다. 비수대전 승리의 여세를 몰아 동진은 혼란에 빠진 하북의 틈새를 비집고 계속 북진하게 되는데 그 중심에 사현이 있었다. 그러나 사현은 AD388년 46세를 일기로 죽었다.


<8> 타락하는 사마요


사마요가 황제가 된 것(AD372)은 열 살 때이었으나 숭덕태후가 섭정을 그만두어 정권을 넘겨줄 때(AD376) 사마요(=사마창명)의 나이는 14살 이었으며 그 후 십여 년 동안 동진은 사현과 왕탄지와 왕표지 등의 훌륭한 신하들 덕분에 비수대전을 승리하면서 국력을 크게 신장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동진의 국운은 지도자의 무능으로 다시 추락하고 만다. 인주가 될 역량을 충분히 지녔던 사마요였지만 나라가 안팎으로 부강해지자 곧바로 타락하고 말았다. 첫째로는 술과 여자에 빠져 국정을 보살피지 않았다. 모든 정사를 두 살 어린 동복동생 사마도자에게 맡겨 버린 것이다. 사마도자 역시 술과 여자와 오락을 좋아하는 한량에 불과하였다. 둘째로 불교에 심취하여 오로지 승려와 비구니만 가까이 하였으며 그들이 모든 인사와 포상을 마음대로 휘둘러 댔다. 뇌물이 횡행했고 관직과 포상이 어그러졌으며 형벌과 송사가 혼란하게 무너졌다.
 
상서령 육납이 궁궐을 바라보며 탄식했다.

 

“ 좋은 집안에 살면서
  섬아(형편없는 아이)가 이를 때려 부수려 하는구나.“

 

좌위영영 허영도 상소문을 올렸다.

 

“ 지금의 승려와비구니들은 왕왕 법복을 입고는 있으면서도
  오계(간, 도, 살, 허언, 술)의 기본법도도 지키지 못하고 있으니
  오묘한 참법을 어찌 지킨다고 하겠습니까.
  이들이 다투어 뇌물로 고관자리를 꿰차고 앉아서
  백성들의 재물을 갈취하면서도
  고마운 줄 알라고 하면서 더욱 강탈하고 있으니
  어찌 부처님의 보시의 법에 합당하다고 하겠습니까?“  
    
황제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상소를 묵살했다.


<9> 사마도자의 총신 왕국보의 국정농단


사마도자의 권력이 막강해지자 아첨과 참소에 능한 교활한 사마도자의 총신 시중 왕국보의 권력도 함께 높아졌다. 황제 사마요도 동생의 권세가 막강해지자 긴장하고 불안했다. 황제 사마요가 신임하는 측근 범녕과 서막은 왕국보를 파면해야 한다고 황제에게 간청했다. 황제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낌새를 알아차린 사마도자와 왕국보는 황제를 강요하여 범녕을 예장태수로 내쫓아버리게 하였다.

 

황제 사마요도 사마도자의 국정농단이 너무 심하다고 생각하여 사마도자를 견제하는 세력으로 왕공과 은중감을 번진(황제를 수호하는 지방군벌)으로 세워 왕공은 청주(산동성)지역, 은중감은 형주(호북성 지역)에 주둔하도록 시켰다.(AD390)

 

사마도자가 총애하는 사람 중에 조아라는 광대와 여천추라는 하급관리가 있었다. 이들은 모두 아첨과 뇌물로 승진에 승진을 거듭한 자들이었다. 사마도자는 조아에게는 위군태수, 여천추에게는 자의참군이라는 직위를 주었다. 조아는 사마도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사마도자의개인 집을 지어 그 안에 인공으로 산을 올리고 강을 파내었다. 한 번은 황제 사마요가 사마도자의 집에 들렀다가 산과 강을 보고는 놀라면서 말했다.
      
“ 보기에 좋기는 하나 너무 장식이 심한 것이 아닙니까?“

 

사마도자도 놀라서 아무 말을 하지 못하였다. 황제가 가고 나서 사마도자가 조아에게 이렇게 꾸짖었다.

 

“ 황상께서 산과 강이 인공으로 만들어 진 것을 알면 너는 죽은 몸이나 다를 바가 없다.”

 

조아가 이렇게 대꾸했다.

 

“ 사마도자 공께서 곁에 계시는데
  감히 누가 저를 죽이겠습니까?“

 

그 후로 건축은 더 없이 호화롭고 사치스럽게 진행되었다. 황제는 왕공, 치회, 은중감, 왕수느 왕아 등을 발탁하여 사마도자를 견제하려고 하였으나 사마도자 또한 왕국보, 왕서 등을 끌어들여 방어에 나섰다. 조정은 붕당으로 갈라졌으며 사사건건 국론이 분열되었다. 왕국보는 매우 교만하고 사치하여 집을 황제와 같이 지었다. 왕국보가 황제에게 아첨으로 붙어 가까이 하여 권력을 농단하자 사마도자가 질투하여 황제 앞에서 검을 던지기도 하였다. 효무제가 죽자 왕국보는 권력이 사마도자에게 돌아갈 것을 눈치 채고 태도를 바꾸어 사마도자에게 붙었다. 왕국보의 사촌동생 왕서 또한 사마도자와 한 편이 되어 국정을 농단했다.
 

<10> 장귀인에게 질식당한 동진 효무제 사마요(AD396)

 

사마요는 알콜 중독이 심했다. 술 깬 날이 드물었다. 술에 취한 황제는 자신의 총애를 받고 있던 장귀인에게 농담 삼아 이렇게 말했다.

 

“ 너는 나이가 서른이 넘었으니
  마땅히 폐출되어야 할 나이다.
  내 마음은 벌서 어린 아이에게로 가고 있다.“

 

장귀인이 격노했다. 환관을 시켜 술에 취한 황제에게 술을 더 마시도록 한 뒤 이불로 덮어 황제 사마요를 질식사시켜 버렸다.(AD396) 그리고는 가위에 눌려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말했다. 황태자 사마덕종(당시 15세)는 어리석고 겁이 많아 아버지가 죽은 이유를 묻지도 않았다. 황태자 사마덕종은 어리석고 지혜롭지도 못했으며 말도 제대로 못하고 춥고 더운 것을 분별하지 못했다고 기록되어있다. 실세 사마도자 또한 복잡하게 사인을 따지고 규명할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형님 사마요는 있으나마나 한 존재였으니까. 동진 최대의 난신적자 환현은 사마도자를 독살시키고(AD402) 사마덕종을 폐위시켜 자신이 황위를 빼앗았다.(AD403) 환현이 황궁에 들어가 보좌에 앉으려 할 때 마루바닥이 꺼지는 일이 일어났다. 곁에 있던 은중문이라는 신하가 기막히게 대답했다.

 

“ 성덕이 너무 깊고 무거워
  땅바닥마저 폐하를 견딜 수가 없습니다.”

 

환현은 후에 송(=劉宋)을 세운 유유와 유의 무리에게 공격을 당하여 결국 유의에게 참수 당한다.(AD404) 당시 환현의 나이는 36세였다. 이후 동진 조정은 완전히 유유의 동조세력에게 장악되었다가 16년 뒤인 AD420년 동진 마지막 황제 공제 사마덕문이 유유에게 황위를 선양함으로써 동진 건국 104년 만에 멸망했다. 강적 전진을 비수대전에서 격파하며 중국을 다시 통일할 절호의 찬스를 얻은 동진이었으나 무능하고 혼미한 군주 사마요 때문에 조정은 사마도자 무리에 의해 농단되다가 결국 유유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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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입력 2020년02월04일 17시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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