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려있는 정책플랫폼 |
국가미래연구원은 폭 넓은 주제를 깊은 통찰력으로 다룹니다

※ 여기에 실린 글은 필자 개인의 의견이며 국가미래연구원(IFS)의 공식입장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나라가 망하는 확실한 법칙 <4> 혼군(4a) : 알콜 중독으로 나라를 망친 동진 사마요(재위 AD372-AD396) 본문듣기

작성시간

  • 기사입력 2020년01월28일 17시00분

작성자

  • 신세돈
  • 숙명여자대학교 경제학부 명예교수

메타정보

  • 7

본문

 혼군(昏君)의 사전적 정의는 ‘사리(事理)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다. 암주(暗主) 혹은 암군과   같은 말이다. 이렇게 정의하고 보면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군의 숫자는 너무 많아져 오히려   혼군이라는 용어의 의미 자체를 흐려버릴 가능성이 높다. 역사를 통틀어 사리에 어둡지 않   은 군주가 몇이나 될 것이며 어리석지 않은 군주가 몇 이나 되겠는가. 특히 집권세력들에   의해 어린 나이에 정략적으로 세워진 꼭두각시 군주의 경우에는 혼주가 아닌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번의 혼군 시리즈에서는, 첫째로 성년에 가까운 나이   (17세) 이상에 군주가 된 사람으로서 둘째로 상당 기간(5년) 군주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군주의 역할이나 올바른 정치를 펴지 못한 군주로써 셋째로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쫓겨나   거나 혹은 제거되거나 혹은 돌연사 한 군주로써 끝으로 국가의 존립기반을 크게 망쳐 놓은   군주를 혼군이라고 정의하였다.

 

 

<1> 혼군 서진 혜제 사마충(AD259-AD307)     

 

진(晉) 2대 황제 사마충은 중국을 다시 통일한 진무제 사마염의 적장자였다. 두 살 위인 형  사마궤가 있었으나 일찍 죽었다. 사마충은 나이 8세(AD267)에 황태자로 책봉되었지만 선천적으로 지적 결함이 많았던 사람이었다. 냇가에 개구리가 우는 것을 듣고서 사마충은 시종에게 이렇게 물었다. “ 저 개구리들이 저렇게 시끄럽게 우는 것은 관청에서 시킨 것이냐 저들이 스스로 그런 것이냐?” 또 한 번은 가뭄으로 사람들이 밥을 굶어 죽는 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 밥을 못 먹으면 고기를 먹이면 될 테인데 왜 고기를 먹이지 않는가?”라고 물었던 사람이다. 이런 황태자를 걱정한 사마염은 몇 번이나 교체할까 생각했었다. 황태자를 교체해야 한다고 속으로 생각하는 대신(정북대장군 위관)이 없지는 않았으나 적통을 버리고 연소자를 채택한다고 하면 조정의 반발도 클 것이므로 선뜻 바꾸지 못하며 망설였다. 특히 사마충의 장인이 당시 실세 중에의 실세인 가충이라면 엄청남 반발을 살 것이 분명했다.
  
사마염이 황태자를 교체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것은 영특한 사마충의 아들 사마휼 때문이었다. 비록 아들 사마충이 부족하더라도 손자가 똑똑하니 사직은 잘 지킬 수 있으리라는 믿음 떼문에 사마충을 폐위시키지 않았다. 그 대신 당시 최고의 문인 이희와 이밀을 스승으로 붙여 주어 가르치도록 했다.

 

본인의 지적 결함에 더해 사마충을 더욱 무능한 혼군으로 만든 것은 부인 가황후였다. 가황후(이름 가남풍)는 가충(賈充)의 딸이다. 가충은 사마염의 아버지 사마소집권 시절부터 총애를 받아오던 권신으로써 교활하고 아첨을 잘 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순의, 순욱 및 풍담과 한 패거리가 되어 진무제 사마염이 동생 제왕 사마유를 제치고 태자로 책봉되는데 핵심역할을 한 공신이었다. 조정에서 흉노 출몰이 빈번한 진주와 양주(감숙성지역)도독으로 가충을 몰아내려고 하자 순욱의 제안을 받아 사마충 태자와 혼인함으로써 못 생기고 질투심한  딸 가남풍을 태자비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사마염은 당시 조정의 신망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위관의 딸을 며느리로 삼을 생각으로 이렇게 말했다. “위씨는 다섯 가지 장점(賢, 多子, 美, 良, 白)이 있고 가씨는 네 가지 흠(妬忌, 無子, 醜, 短, 黑)이 있소.” 그러나 가충의 처 곽외가 황금뇌물로 양황후를 꾀었고 순욱 등의 무리를 동원하여 집요하게 사마염을 설득한 결과 태자보다 세 살이나 많았고 추한 가씨를 태자비로 만드는데 성공했다.(AD271년)가비는 태자비일 때 이미 몇 사람을 죽인 일도 있고 임신한 남편의 시첩에게 창을 던져 낙태시킨 적도 있어서 황제인 사마염에게 유폐당하고 폐위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었다. 자치통감에는 태자가 두려워했다고 할 정도로 가비는 무서운 여자였다.

 

사마염이 죽고(AD290) 31세의 나이로 황제가 되었지만 정치는 오로지 가황후 및 동맹 등 환관 일당이 전횡했고 그에 반발하는 황족과 외척과 환관 사이에 끝없이 이어지는 내전으로 국가는 황폐해져 갔다. 사마 황족 사이에 벌어진 20여 년 간의 8왕의 난(AD291-AD311)으로 중국통일의 대업은 산산이 부셔졌고 혁혁한 공을 세운 훈구공신들은 거의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나라를 받드는 문무 충신들이 모두 제거된 데다가 불만에 쌓인 황족과 외척과 환관과 간신이 조정을 가득 메운 상태에서 사마충과 같은 혼군이 나라를 다스린다면 그런 나라가 어찌 나라이겠는가? 진나라가 수명을 다하기(AD316) 이전에 나라 곳곳에서 분열이 일어나면서 전량(AD301), 전조(AD304), 성한(AD306) 및 대(315)의 여러 나라로 쪼개지고 있었다. 조조나 제갈량이나 할아버지 사마의나 아버지 사마소가 달성하지 못한 중국통일의 대업을 달성(AD280)한 사마염의 공업을 한 세대 만에 다 말아먹은 것은 서진혜제 사마충이었다. 


<2> 서진(西晉)의 멸망(AD316)

 

AD316년 전조(前趙)의 유연이 장안을 포위하였다. 성내에서는 양식이 고갈되어 사람을 서로 잡아먹는 비참한 상태가 지속되었다. 황제 사마업(사마충의 조카)은 수치를 참고서라도 백성을 살리기 위해 항복하자고 생각하고서 항복문서를 시중 종창에게 건넸다. 그러나 당시 실세(상서복야)였던 삭침이 항복에 반대하면서 종창을 가두어 버렸다. 그리고는 자신의 아들을 유요의 군영에 보내 이렇게 말했다.


“성안에 1년 분 양식이 있으므로 쉽게 함락 못 시킬 것이다.
만약 나에게 의동삼사(재상에 해당)과 만호의 식읍을 준다면 항복하겠다.”   


유요는 단 칼에 삭침 아들의 목을 베어 버리고 말했다.

 

“ 내가 15년 군사를 거느렸으나
  그런 속임수 잔꾀로 이겼다는 예를 본 적이 없다.
  군량이 충분하다면 끝까지 버틸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하늘의 천명을 받게 될 것이다.“

 

삭침에게 갇혔던 종창이 빠져나와 유요 군영에 가서 항복문서를 전달했다.(AD316년 11월10일) 그 다음날 황제 사마업은 입에 구슬을 물고서 유요의 전조(前趙)에 항복했다. 사마염이 서진을 세운지 꼭 56년 만이고 사마충이 죽은 지 구년만의 일이다. 삭침과 함께 국정을 농단했던 국윤은 자살했다. 전조의 황제 유총은 사마업(서진 민제)에게 광록대부 회안후라는 직을 주어 목숨을 살려 주었지만 2년 뒤에 전조의 내분에 휩싸여 18세의 나이로 죽었다.

 
<3> 동진을 세운 사마예(司馬睿)(AD316)


서진 민제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은 건강의 사마예는 사방에 격문을 보내 군사를 일으켜 장안을 수복하려고 결심했다. 군사와 군량을 기한 내에 운반하지 못한 독운령사 순우백의 목을 즉각 벨 정도로 결의가 북벌의 의지가 강했다. 사직 유외가 사마예에게 말했다.

 

“순우백의 죄가 사형에 해당 할 정도는 아닙니다.”

 

사마예가 사과했다.

 

“ 정치와 형벌에서 적당한 정도를 잃는 다면
  내가 아둔하고 모자라서 그런 것이니 용서하시오.“

 

사마예는 화를 풀고 관련자들을 모두 사면했다. 
서진 황제 사마업은 유요에게 항복하기 사신 송철을 몰래 건강(남경)의 낭야왕 사마예에게 보내 만기를 위임한다는 조서를 전달했다. 자신을 대신하여 황제가 되라는 말이었다. 사마예는 진왕을 칭하기로 하고 백관을 갖추어 조정의 모양새를 갖추었다.(AD316년 3월 9일) 이렇게 해서 서진이 망했을 때 남쪽 건강(남경)에 동진이 서게 되었다. 

 

<4> 갈라지는 하북지역 : 오호십육국 시대의 개막(AD310년 경)

 

사마예가 건강(남경)에서 동진이라는 나라를 세웠으나 장안부근 관중과 하북에서는 끊임없는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일단 전조 조정 내부에서 유연의 아들 유총이 죽고(AD318) 황위를 아들 유찬이 이어받자 대장군 근준의 반란으로 유찬은 피살되었다.(AD318) 장안에 있던 유요가 그 소식을 듣고 군사를 일으켜 근준의 근거지 평양(임분)을 토벌하러 나서자 동북쪽 형태에 자리 잡은 석륵도 남하하여 유요-근준-석륵 군사가 대치되는 상황으로 발전하였다. 다음 해(AD319)에 석륵은 후조라는 나라를 세웠고 탁발의로 또한 내몽고 지역에 대(代)라는 나라를 세웠다. 
    

<5> 왕돈의 반란과 사마예의 죽음(AD322)
 
동진 초기에 황제 사마예는 군권을 가진 왕돈과 조정의 실권을 장악한 왕도에게 크게 의존해야만 했다. 왕씨와 사마씨가 천하를 함께 가지고 있다고 할 정도로 왕씨 가문의 세력은 강남지역에서 막강했다. 그러나 왕도와는 달리 왕돈은 매우 교만하고 방자했다. 결국은 왕돈이 반란을 일으켜 남경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다.(AD322) 왕돈은 정권을 잡자 매우 난폭하고 부패한 정치를 했다. 왕돈의 반란으로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화가 치밀어 오른 동진 동진원제 사마예는 병이 생겨 죽었다.(AD322년 윤11월 10일) 황태자 사마소가 즉위했다. 왕돈은 측근 전봉과 함께 사마소의 황제 자리를 빼앗는 계략을 세웠다. 그러나 그 계략을 몰래들은 조카 왕윤지가 아버지 왕소에게 알렸고 왕소는 왕도와 함께 황제를 지키는 대비책을 몰래 수립했다. 이 때 왕돈은 중병에 걸려 회복이 불가능한 상태였다. 황제 사마소는 왕도를 대도독으로 하여 온교, 응첨, 치감 등과 함께 왕돈의 반역군을 격퇴시켰다. 그 사이에 왕돈은 병사하였다.  

 

7
  • 기사입력 2020년01월28일 17시00분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