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융성, 그 화려한 껍데기를 채우려면...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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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통령 가운데 문화에 대한 이해가 가장 높은 사람은 누구일까? 누구는 김대중 정부를 이야기하고 가장 훌륭한 문화부 장관으로 박지원 의원을 꼽는다. 세간의 평이다. 그 이유는 공공기관을 민간 중심의 위원회 체제로 바꾸었기 때문이란다. 문예진흥원은 문화예술위원회로 영화진흥공사는 영화진흥위원회로 공연윤리위원회는 영상물등급위원회로 명칭을 바꾸고 관 주도에서 민간의 자율기구로 전환했기 때문이란다.
보수정권은 문화 중심이 아니다. 보수정권에서 문화가 위축되는 이유는 껍데기는 화려하나 내용물이 없기 때문이다. 내용물은 참신성에서 나오는데 체제안정을 지향하는 사고의 틀에서 참신한 아이디어가 나올 리 없다. 예술가들의 가장 중요한 덕목은 창조성이다. 이 창조성은 자유정신을 근간으로 탄생한다. 뭔가 현실에 불만이고 안정이 본능적으로 맘에 들지 않을 때 창조정신이 꿈틀거리면서 새로운 예술 정신의 모색이 시작된다.
지난 십 수 년 간 국산 영화의 성장세는 놀랍다. 한국 영화는 특히 소재의 검열이 사라진 이후 비약적인 발전을 했다. <실미도>, <공동경비구역 JSA>, <태극기 휘날리며>, <쉬리> 등 남북 분단 상황에서 이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큰 흥행을 기록한 바 있다. 이는 스토리의 탄탄함과 전반적인 영화기술의 향상에도 기인하지만 금기시된 소재인 분단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다루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사전검열제도의 폐지가 한국영화 도약의 전기를 마련한 것도 사실이다.
소재의 확장은 사고의 자유로움을 전제한다. <변호인> 역시 영화 소재 확장에 기인한 바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사실 아무도 1천만 관객 돌파를 예상하지 못한 놀라운 결과이다. 이 영화를 두고 현 정부는 심기가 매우 불편했고 야권은 이를 정략적으로 이용했다. 그러나 최근 이순신 장군을 그린 <명량>의 대성공으로 보수정권은 돈 안들이고 인기 몰이에 편승한 느낌이다.
<변호인>이 야권에 유리하게 작용했다면 <명량>은 상대적으로 현 보수 정권의 이미지 메이킹에 일조하는 영화다. 바꾸어 생각해 보자. 만일 <변호인>이란 영화를 대통령이 청와대 비서관들과 함께 관람을 하고 무릇 변호사란 인권을 존중하고 약자를 대변하는 영화 속 주인공과 같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무언의 메시지를 국민들에게 던진다면 어떠했을까? 반대로 영화 <명랑>을 야당의 대표와 국회의원들이 대거 관람하고 구국의 일념으로 자신을 희생하는 이순신 장군의 애국심에 머리 숙이는 모습을 언론이 보도하고 있다면 어떠했을까?
영화는 시청각 매체로서 매우 강력한 선전선동성을 가지기 때문에 때로는 대중들을 최면 상태로 몰아넣고 이데올로기를 주입시키기며, 독재자를 미화하기도 한다. 매우 위험한 매체인 영화이기에 집권 세력은 영화에 관심이 많다. 그러기에 항상 통제하기를 원한다. 그럼에도 정부는 창작의 자유를 억압하기보다 창작의 생태계가 활성화 될 수 있도록 자금 지원과 정책적 배려를 해야 한다.
<변호인>의 흥행 성공으로 정부의 심기가 불편했다손 치더라도 영화의 제작사와 투자자를 조사하고 부당한 압력을 가한다면 잘못이다. 그렇다고 <명량>을 제작한 영화사에 정부가 인센티브는 준다면 그것도 우스운 일이다. 문제는 창작자가 아니라 창작물을 악용하는 정치꾼들에게 있다.
문화융성은 문화적 가치의 확산에 기초한다. 문화적 가치란 무엇인가? 인문정신이라 말할 수 있다. 현 정부의 문화융성은 껍데기만 화려할 뿐 가치 정립과 확산에는 매우 미흡하다. 노력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 ‘문화융성’과 ‘문화가 있는 날’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는 국민이 10명 중 8명이라는 최근 여론조사 결과 보고서가 이를 대변한다.
문화 융성의 기본 가치인 인문정신은 인간의 자유를 더욱 보장하는 것이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주창하는 공리주의 철학자 J.S. 밀이 <자유론>에서 주창하는 바를 굳이 인용하지 않더라도 “개인의 자유 보장은 표현과 사상의 자유를 담보하는 것”이다. 한편 자유는 질서의 전복을 꿈꾸며, 전복은 기존 가치의 재평가 또는 폐기에 있다. 자유를 보장하지 않은 문화융성은 있을 수 없다.
이래서 독립영화나 다양성영화나 실험영화가 중요하고 존중받아야 하며, 음악, 미술에서는 영 아티스트의 활동 공간과 실험성이 중요한 이유이다. 무엇 보다 예술은 실험성이 가장 중요한 가치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자유로운 실험성을 제약하고 방해하는 네거티브 예술정책은 우리에게 감동을 주지 못할 뿐 더러 문화융성에도 기여하지 못한다.
현 정부의 문화정책은 ‘국민 문화체감 확대’, ‘인문전통의 재발견’, ‘문화기반 서비스 산업 육성’, ‘문화가치 확산’ 등을 4대 전략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문화 융성은 인간의 자유를 더욱 보장하는데서 출발한다. 문화융성을 통한 국민행복을 추구하는 현 정부라면 더욱 더 그러하다. 이것이 문화정책의 기본 이념이 되어야 한다.
문화융성이 화려한 구호와 전략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슬로건 던지기’식의 정책은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어느 뇌과학자의 말에 동의한다면 말이다. <명량> 한 편을 탄생시킨 한국 영화의 저력이 문화융성의 초석이 아니겠는가. 영화 한 편으로 우리 시대의 리더십에 대한 토론과 반성이 무성하고 애국심과 충(忠)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영화의 힘이야 말로 문화융성의 토대가 아닌가한다.
구호와 정책만으로 문화의 꽃은 절대 피지 않는다. 문화 융성, 그 화려한 껍데기를 채우려면 영화 <명량>과 같은 감동적인 영화의 탄생을 지원하는 풍토가 필요하다. 그 정책의 방향은 자유로운 비판과 창조정신의 보장 아래 산업적 선순환 생태계를 조성하는 일이다. 문화융성으로 국민행복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행복은 감동적인 영화 한 편을 보고 느끼는 쾌감에서 출발한단다. <행복의 기원>이란 저서에서 “행복은 구체적인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서은국 교수의 말에 따르면 적어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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