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의 두 가지 모습과 잘못된 개혁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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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조인으로 살아온 지 15년째이지만 지금도 알 수 없는 것이 검찰개혁이다. 정치인들은 누구나 검찰개혁을 말한다. 하지만 정치인들은 대체로 검찰의 칼끝이 자신을 향하면 검찰개혁을 외치고, 그 칼끝이 상대방을 향하면 박수를 친다. 요새 정치권에서는 검찰이 수사 자체를 못하게 하는 것을 검찰개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민주당이든 통합당이든 마찬가지다.
하지만 검찰제도의 온전한 실체는 변호인 및 법원과의 관계에서 파악해야지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우리 형사소송 제도는 변호인과 법원이 검찰을 견제하게끔 되어 있다. 검찰이 수사를 못하게 할 것이 아니라 수사가 적법절차의 통제를 받도록 하는 것이 우리 형사소송법이 예정하고 있는 올바른 검찰 통제 방법인 것이다. 예를 들면 강제수사의 요건을 엄격하게 하고 위법수집증거배제법칙의 범위를 넓히며 변호인의 변론권을 강화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검찰이 아무리 편파적인 수사를 하면서 영장을 청구해도 법원이 영장을 기각하면 검찰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범죄혐의가 있으면 누구나 수사를 할 수 있게 함으로써 검찰의 독립성이 확보된다. 그리고 변호사와 법원이 검찰의 수사절차를 통제하고 견제함으로써 수사의 공정성이 확보된다. 너무나 기본적인 내용들이다.
검찰은 경찰과는 달리 단지 수사기관일 뿐만 아니라 인권옹호기관이기도 하다. 변호사와 법원에 의한 수사 견제를 마다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검찰은 그동안 인권옹호기관으로서의 사명은 망각한 채 스스로 피의자의 대척점에 서서, 법무부를 등에 업고 법원과 변호인에 의한 견제장치 도입을 막아왔다.
변호사가 수사과정에서 의뢰인에게 법률적 조언을 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것이 지금까지의 수사현실이었다. 범죄수사와 인권보호라는 두 가지 책무 중에서 범죄수사에만 골몰한 나머지 사법적 견제수단을 막다보니 검찰은 폭주에 폭주를 거듭하게 됐고, 결국 정치권력에 의해 분풀이 당하듯 해체되고 말았다.
변호사와 법원에 의한 통제가 유명무실하다 보니 정치인들은 검찰이 수사 자체를 못하게 해야 한다는, 잘못되었지만 불가피한 결론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공수처 도입과 검경 수사권 조정이었다.
이른바 ‘조국사태’ 과정에서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한 여론은 극단적으로 갈렸다. 겁 없이 권력의 심장부에 칼을 들이댄다고 환호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반면, 언론을 이용하여 무자비하게 수사를 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둘 다 맞는 말이다. 수사기관의 측면에서 보면 조국 전 장관에 대한 검찰수사는 칭찬받아 마땅하다. 하지만 인권옹호기관의 측면에서 보면 문제가 있는 수사방식이었던 것도 맞다. 특히 아무리 공인이라도 비공식적인 루트를 통해 수사정보가 언론에 새어나가게 해서는 안됐다.
그러한 수사방식은 적법절차에 대한 고민보다는 절대불변의 거악이 있고, 그 거악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거되어야 한다는 전근대적인 사고의 유물일 뿐이다. 물론 우리 사회의 문화도 마찬가지다. 절대악을 보면 무조건 구속해야 하고 최대한 무거운 형벌을 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한국사회는 절대진리가 있다고 믿던 중세유럽과 같은 사회일지도 모른다. 누가 영장실질심사를 받으면 기자들은 밤새 법원 앞에서 기다렸다가 그 결과를 속보로 내보낸다. 중세시대의 마녀 화형식이 떠오르기까지 한다.
그러나 절대악이 어디 있겠는가. 거악 척결을 검찰의 유일한 존재이유로 보게 되면 고문마저 정당화 될 위험에 빠진다. 실체적 진실은 적법절차를 통해서만 인식가능하다는 것이 소송법의 정신이다. 우리 헌법과 형사소송법 하에서는 단지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도 살인범에게 무죄를 선고할 수 있다.
검찰개혁은 헌법과 형사소송법의 틀 안에서 변호인과 법원의 역할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갔어야 했다. 하지만 잘못된 방향으로 이미 너무 많이 나가버렸다. 그리고 이제 검찰조직은 정치적 투쟁의 장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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