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청 시인의 문학산책 <79> 시인의 감수성과 상상력으로 만난 반구대암각화 본문듣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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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234-1번지로 지번이 나와 있는 반구대암각화를 처음 찾아간 것은 1999년 11월,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늦가을 인적도 끊긴 산굽이 길을 걸어 들어가 반구대암각화 앞에 섰을 때, 가슴이 심하게 뛰고 있었다. 암각화는 100m 쯤 되는 물 건너 쪽 산벼랑 돌벽에 새겨져 있었고, 물 건너 벽면은 가을비에 가려져 구체적 형상들을 알아볼 수 없었지만 나는 그날 혼미한 정신이 되어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의 충격 속에 빠져들고 말았다. 물 건너 암각화 쪽에서 울려나오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몇 사람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나를 부르고 있었다. 환청이었겠지만, 그 목소리는 나를 부르고 있었고, 100m쯤 되는 건너편 암각화에서 울려 나오고 있었다.
여기 와서 시력을 찾는다./ 여기 와서 청력을 회복한다./ 잘 보인다. 아주 잘 들린다./ 고추잠자리까지, 풀메뚜기까지/ 다 보인다. 아주 잘 보인다./ 풍문이 아니라, 설화가 아니라 만져진다, 손끝에 닿는다. <……>이 땅의 사람들이 살아 있는 숨결로/ 온다, 와서 손을 잡는다./ 피가 도는 손으로 손을 덥석 잡는다.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말한다/ 어서 오라고, 반갑다고/ 가슴으로 끌어안는다. -「암각화를 위하여」에서
그 후로도 종종 내가 반구대암각화를 찾아가 건너편을 건너다보고 있으면 아주 심한 전율에 휩싸이곤 했었다. 그것은 6천여 년 전 바위를 갈고 쪼아 암각화를 만든 사람들과, 그 사람들이 만든 암각 도형들이 제각기 살아나서 내게 다가서곤 했었기 때문이었다. 반구대 암각화에 그려진 고래 그림을 보면 돌고래, 향고래, 솔피, 큰고래, 혹등고래, 수염고래 등이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새겨져 있다. 뿐만아니라 고래의 생태를 보여주는 그림들과 고래 사냥 모습, 그 외에도 사슴, 호랑이, 멧돼지 등 뭍짐승들과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다양한 도구들도 그려져 있다. 그 모든 것들이 까마득한 시간을 건너오면서 나를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어서오시게, 반갑네” 석기시대 사람들이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나는 그 소리에 젖어 들어가며 암각화에 귀를 기울이곤 했었다.
단군신화 이전, 울산 일원에 살았던 사람들과의 만남은 나의 시적 감수성과 상상력을 격동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나는 시간만 나면 울산으로 달려갔고, 며칠씩 머물면서 암각화 앞에 하염없이 서 있곤 했었다. 그러다 보니, 바위 면에 새겨진 각각의 도형들과도 깊은 교감을 나눌 수도 있게 되었다. 나는 열흘씩, 일주일씩 울산 강동해안 한적한 여숙에 머물면서 노트북 컴퓨터를 켜곤 했었다. 가을이 깊어지고, 눈발이 흩날리는 날, 방문객의 흔적도 찾을 수 없는 그런 날, 나는 반구대암각화 앞에 서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암각화에 관한 서적과 영상물들을 수집해 보기도 했었다.
영국의 BBC 방송이, 인류 최초의 포경인은 한국인이라고 밝힌 바 있었다. 이 방송은 "반구대암각화는 선사시대 사람들이 벌써 기원전 6000 년경부터 고래 사냥을 시작한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고 하면서, 이 암각화에는 참고래, 혹등고래, 향유고래 등 큰 고래 46마리 이상이 그려져 있으며, 선사 인류가 고래를 잡기 위해 작살과 부구와 낚싯줄을 사용한 증거가 제시되어 있다는 사실을 리포트한 바 있었다. 2004년이었다. 유럽의 근대 포경산업이 크게 번성했던 것이 200년 남짓하다. 그런데, 6000여 년 전 이 땅의 석기인들이 고래잡이 배(그러니까 포경선!)을 만들어 타고 고래잡이에 나섰다는 사실을 반구대암각화가 실증해주고 있는 것이다. 암각화의 도형들 중에는 고래잡이 배가 부구(浮具)를 사용했음을 보여주는 것도 있다.
당신들은 고래를 잡았다./ 당신들이 탄 배 보다도/ 열 배, 스무 배 큰 고래를/ 당신들이 잡았다./<……>고래를 끌고 간다./ 물에 띄워 끌고 간다./ 당신들이 만든 부구에 매달아/ 고래를 물 위에 띄우고/ 끌고 가는 구나,/ 고래를 바다에 띄운/ 저 부구를 보아라,/ 저 부구를 만든 사람들의/ 예지를 보아라,/ 과학을 보아라, -「부구」에서
부구(浮具)는 어떤 물건을 바다 위로 띄워 올리는데 사용하는 도구이다. 큰 고래를 사냥한 사람들이 고래잡이배와 고래가 부딪는 충격을 완화시키고, 고래를 물 위에 띄우기 위하여 커다란 가죽주머니에 공기를 채워 부구를 만들어 썼음을 보여주는 도형이 새겨져 있다. 지금은 사냥한 고래의 몸통에 공기를 주입시켜 고래를 물 위에 띄워 올리지만 불과 5. 60년 전까지만 해도 ‘부구’를 사용해 고래몸통을 물 위에 띄워 올렸었다. 이 땅에 살았던 석기시대 사람들이 조선술은 물론 고래잡이 창을 만들어 썼으며, 부구까지 만들어 썼음을 알 수 있다. 상당한 수준의 문명집단이 울산 일원에 살았음을 반증해주는 확실한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사진 : 반구대암각화 축제를 끝내고 왼쪽부터 박재동 만화가, 이달희 반구대포럼 상임 대표, 필자(이건청), 구광렬 울산대 교수, 정상태 반구대포럼 공동
반구대암각화를 찾아다니기 5년 쯤에 나는, 60 여 편쯤의 시를 쓰게 되었다. 이렇게 쓴 시편들이 시집 『반구대 암각화 앞에서』(동학사. 2010)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다. 이 시집에는 반구대암각화의 도형들 사진이 시와 함께 수록되었다. 울산의 사진예술가 서진길씨가 도움을 주었다. 그렇게 해서 실제 반구대암각화의 도형들이 시와 함께 실려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 시집이 국보 285호 “반구대암각화”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우리나라 최초의 작품집이 되었다. 그리고, 이 시집이 제3회 목월문학상 수상 시집으로 선정되는 기쁨을 내게 안겨주게 되기도 하였다.
근래 들어 반구대암각화 문제는 사회적 관심사로 떠올라 있다. 세계적 문화유산인 반구대암각화가 일 년 중 상당기간을 물속에 잠기기를 반복하면서 심하게 훼손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고, 암각화의 보존문제를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반구대암각화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반구대포럼」을 만들어 보존의 필요성을 널리 알리고 있다.
시인의 눈과 귀로 접한 반구대암각화는 무궁무진한 상상력으로 발견될 수 있는 위대한 자산이다. 몇 천 년 전의 사람들이 그들의 꿈을 담아 안고 현세의 우리를 부르고 있다. 손을 흔들고 있다. 우라늄 원석같은 힘을 지닌 도형들이 소통의 길이 열리기를 고대하고 있다. 감수성과 상상력을 지닌 사람들을 손짓해 부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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